2023-08-27

정치인 박종찬 on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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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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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출생1939년 4월 19일(84세)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주촌면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서초구 방배동
대한민국 부산(前)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前)
본관밀양(密陽)
학력서울대 대학원
경력한국공인회계사협회 회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신한민주당 당무위원 겸 상임위원
신한민주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신한민주당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통일민주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통일민주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신정치개혁당 총재 겸 최고위원
신민당 최고위원 겸 원내총무
신한국당 당무위원 겸 상임고문
신한국당 전임고문 겸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국민신당 전임고문 겸 최고위원
국민신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당무위원
민주국민당 당무위원 겸 최고위원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배우자정기호
자녀1남 2녀
군복무해군 대위 전역
종교천주교(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의원 선수5
의원 대수9·10·12·13·14
정당무소속
지역구부산시 서구·동구(9·10)
부산시 중구·동구·영도구(12)
서울 서초구 갑(13·14)
웹사이트박찬종 - 대한민국헌정회

박찬종(朴燦鍾, 1939년 4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9·10·12·13·14대 국회의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號)는 우당(尤堂)이다.

생애[편집]

박찬종은 1939년 4월 19일에 경상남도 김해군 주촌면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958년에 경기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에 고등고시 사법과와 고등고시 행정과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71년에 제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자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72년 10월 17일에 10월 유신과 함께 국회가 해산되자 이듬해 1973년에 실시된 제9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중선거구제로 변경된 선거법에 따라 2위로 당선되었다. 1976년 38세에 2차 투표까지 가는 박빙의 승부 끝에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간이공판제도의 신설에 반대하고 유신정우회 의장의 아내 비서관 채용을 비판하는 등 여당 의원 내의 야당 의원으로 불렸다. 이어 제10대 총선에서도 당선되지만 10·26 사건 이후 공화당 내에서, 권력으로 치부한자, 해바라기정치인 등의 자퇴 또는 당직에서 제외를 요구하는 등 정풍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국회개헌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다 1980년 4월 7일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유신헌법하의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어 10월 제5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10대 국회가 해산되자 11월 정치규제대상 811명에 포함되었다가 곧바로 해금되었다. 1981년 3월의 11대 국회의원선거에는 출마하였다가 중도 사퇴하였다. 1983년《부끄러운 이야기》를 펴내 유신정권에 참여한 과거를 반성하였고,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이 주도한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에서 출마, 당선되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인권옹호위원장, 신한민주당의 인권옹호위원장으로서 1985년 5월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이 터지자 함운경김민석 등 점거주동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아 운동권 학생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이해 9월 '고대앞시위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기소되어 3년 6개월간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였다. 박종철군 사망사건에서도 고문치사사건 진상규명 위원장으로서 사인을 고문에 의한 것으로 밝히는데 앞장섰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분열하여 양김이 각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박찬종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서초구 갑에서 당선되었다. 1990년 6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던 통일민주당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에 입당했으나 이기택 총재 중심의 정당 활동에 반발하여 1991년 9월에 탈당했다.

박찬종은 1992년 2월에 정치 신인들과 함께 정치개혁협의회를 구성하여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했다. 신정치개혁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된 박찬종은 1992년 3월에 실시된 제14대 총선에서 서울 서초구 갑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12월에 실시된 제14대 대선에서는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4위를 기록했다. 이때 홀로 거리를 누비며 돈안드는 선거유세를 펼쳐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무균질우유" 광고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대통령선거 이후 정주영이 탈당하고 무주공산으로 남은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을 결성, 1995년 김종필이 이끌던 자유민주연합과 김동길이 이끌던 신민당과 합당하였다.

1995년에 신민당을 탈당하고 서울시장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서 선거 초반 2위를 달리고 있던 조순 후보에 20% 이상 앞서가다 김대중, 김종필의 이른바 DJP연대가 조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2위로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지역구를 떠나 전국구 2번을 배정 받았으나 이를 자진하여 반납하고 당선권 밖인 21번을 배정받아 국회에 입성하지 못한다. 선거 중에 그는 박창달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97년에 실시되는 제15대 대선 출마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각종 지지도 조사에게 부동의 1위로 앞서 갔으나, 여당인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당내 조직의 미비로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폐쇄적인 경선규칙 그리고 이회창 후보 측의 금전 선거를 비난하며 결국 경선 마지막 날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후에 이회창 후보에게 불공정경선에 대한 대국민 사과와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에 대하여 이를 포용할 것과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병역기피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조건으로 지지의사를 밝혔으나 이회창 후보가 이에 불응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하였고, 역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였다. 이후 1998년 6월 2회 지방 선거에 국민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려 했으나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와의 연대를 위해 불출마하였으며, 7월 서울 서초구 보궐 선거에 출마했다가 8.7%로 낙선한 후 돌연 일본으로 유학,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박찬종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복귀, 부산 중구·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총선 때는 부산 서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2007년에 14대 총선의 선거비용과 관련해 진 빚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된 후 "평소에 사법제도개혁을 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으나, 그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꼈다."는 소회를 밝힌 후 다시 변호사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석궁 테러사건의 수학자 김명호, BBK 사건의 김경준, 인터넷 논객 박대성박연차 등의 변론을 맡았다. 특히 미네르바 사건에서는 무죄평결을 이끌어내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1] 박찬종은 종편이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을 하고 있다. 2019년 유튜브에 '박찬종TV'를 개설한 뒤,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양비론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2020년 문재인 정부 후반기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극우 기독교 단체들과 뜻을 같이 하는 극우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경력[편집]

학력[편집]

논란[편집]

지역감정 조장 관련 발언[편집]

1996년 3월에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이었던 박찬종은 통영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2][3]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봐줬다면 전라도 데모대들과 정의로운 학생, 젊은이들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하라며 시위를 벌여 불행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나,[4] 그 당시 박찬종의 이 발언은 정치권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다.[5] 또한 1997년 대선 당시 선거 유세중에는 "김대중 후보는 74세로 나이가 많아 대통령이 되면 위험하다."는 식의 발언으로 수위를 넘는 비방을 일삼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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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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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로고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서울특별시 휘장 White

신정치개혁당 초기 로고 백색
신정치개혁당 로고 흰색



신민당(1994년) 심볼신민당(1994년) 흰색 로고...




통일민주당 심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국회휘장(9대-19대)








국회휘장(9대-19대)







국회휘장(9대-19대)





대한민국 제9·10·12-14대 국회의원
박찬종
朴燦鍾 | Park Chan-jong
Park Chan-jong
출생
경상남도 김해군 주촌면 선지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선지리)
본관
우당(尤堂)
현직
한국자산관리방송 회장
아시경제연구원 이사장
상생과 통일 포럼 상임고문
링크
X Corp 아이콘(블랙) | 유튜브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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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기
자유통일



















1. 개요2. 생애
2.1. 정계에 입문하기까지2.2. 전성기2.3. 몰락
3. 평가4박찬종계5. 안철수와의 비교6. 소속 정당7. 선거 이력8. 대중매체에서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정계에 입문하기까지[편집]

1939년 4월 19일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경남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B]에 진학하였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후 1962년 제8회 계리사시험[16]까지 합격하였다.[17]

군법무관(해군 대위)으로 병역을 마치고 1971년까지 검사로 근무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2. 전성기[편집]

1973년에 유신헌법으로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공화당이 야당할 각오로 국민 앞에 사죄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풍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이듬해 4월 공화당에서 제명당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 사퇴당했다. 이후 그는 유신 정권에 가담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며 정치적으로 전향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김민석허인회송영길 등 많은 학생운동가들을 변론하였다.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창당 작업에 창당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합동연설회장에서 "전두환은 광주에서 양민 2,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고 사자후를 토하는 결기를 보이면서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시 이 선거에서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은 중선거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 12개 의석 중 겨우 3석을 얻는 대참패를 하였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동참하여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이 분열하자, 이철조순형홍사덕장기욱허경구 등과 함께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양김씨의 통합을 촉구하는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18] 단일화가 실패하자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였으나 민주당(1991년)에 합류하지 않고 탈당하였다. 1992년 1월 김동길과 함께 새한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설립하려 했으나 이탈하였고 본인의 신당을 창당하기로 결정한다.

1992년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6.4%의 득표율로 4위를 기록하였다. 언뜻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양김과 정주영이 출마한 선거에서 그만한 조직이나 자금 없이 올린 오직 박찬종 개인의 인기에 따른 득표율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다. 대권 경쟁자가 지금과는 비교하기 마땅치 않을 정도로 강력했는데, 사실상 민주진영을 대표했던 거물 두 명과 흙수저 신화를 쓰며 성공한 대표 경제인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얻은 결과. 이때의 인기 덕분에 그는 남양유업의 신제품 브랜드 우유 '다우'의 TV광고모델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때 남양유업에서 내세운 슬로건 '무균질(無菌質) 우유'에 빗대어 '무균질 정치인'으로 자신을 홍보한 것이 꽤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찬종은 3김시대가 끝나고 나면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될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근거로 박찬종은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2.3. 몰락[편집]

1994년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신민당(1994년)을 창당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문으로 이미지에 상처만 남긴 채 탈당하였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19]초반에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지지율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20] 이 당시 신민당에서 각목 전당대회로 앙금이 쌓여있던 김동길은 오로지 박찬종을 떨어뜨리기 위해 조순 선거운동에 가담했다며 박찬종을 가리켜 "무균질 인간?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뱃속에 병균이 와글와글해요"라는 비난까지 쏟아냈다.[21]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하여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통영시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 신한국당이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의석을 18석 확보하는 데에 그쳐 21번으로 등록했던 박찬종[22]이 낙선한 것은 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김대중에 이은 2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당내 기반이 전무했던 탓에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중도 포기하고 탈당했다. 이후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인제를 지지하였다. 1998년 7월 재보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하였으나 3파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에 그쳤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에는 이회창과 화해하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도왔으나, 이회창은 낙선하였다.

2002년 부로 독도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간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또다시 구설수로 잠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유기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떠나 본업인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판사 석궁 테러 사건미네르바 사건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3년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 그리고 한국자산관리방송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8년 7월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2019년 유튜브에 '박찬종TV'를 개설하고 문재인 정부를 저격하는 영상을 올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김정은 추종세력이라고 저격하고 있다.[23]

2020년과 2021년에는 전광훈의 이른바 아스팔트 기독교 우파 무리와 어울리면서 전광훈이 창당 준비 중인 국민혁명당(가칭) 고문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3. 평가[편집]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대선후보로 나가 3김의 뒤를 잇는 정치인이라는 유망한 평가를 받으며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얻는 등 전성기를 달렸으나 1994년 김동길과의 당권 싸움으로 인한 각목 테러 사건과 이듬해인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로 점점 하락세를 겪었고 1995년 전두환 노태우 구속사건이 터지자 당시 박찬종은 유세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등 지탄을 받았다.#

그래도 대선과 1998년 재보궐 선거를 제외하면 선거비 전액 보전에 해당하는 15% 이상은 항상 넘겼으며 이는 개인의 인기에서 오는 고정 지지층은 나름대로 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박찬종계[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박찬종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5. 안철수와의 비교[편집]

"안철수 열풍의 1990년대 버전을 보여준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은 거대 양당 체제 속의 인물이 아니면서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돌풍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또 거대한 조직력이 미비하고 개인의 인기만으로 유력한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양당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치 활동과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박찬종은 33세에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고, 35세에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그 뒤로도 정계은퇴하기 전까지 줄곧 정치 활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사-대학교수-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한 뒤에 정치에 입문한 안철수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두 사람의 화법에도 차이가 있다. 박찬종은 직설적이고 돌직구 스타일의 화법으로 유명하지만, 안철수는 좋게 말하자면 조심스럽고, 나쁘게 말하자면 모호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공화당 글씨만
1971 - 1980
정계 입문
1980 - 1985
제명[24]
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1987
창당
1987 - 199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민주당 1990년 글자
1990 - 1991
창당
1991 - 199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정치개혁당 글자
1992 - 1994
창당
신민당(1994년) 흰색 로고...
1994 - 1995
합당[25]
1995 - 1996
탈당[26]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1996 - 1997
입당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
1997
합당[27]
199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
1997 - 1998
입당
1998 - 2000
탈당[28]
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
2000 - 2001
창당
2001 - 2002
탈당[29]
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
2002 - 2004
복당[30]
2004 - 2021
탈당
정계 은퇴
국민혁명당 흰색 로고타입
2021 - 2022
입당
자유통일
2022 -
당명 변경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1
부산 3[31]
민주공화당 글씨만
41,128 (34.83%)
낙선 (2위)
1973
부산 2[32]
72,999 (35.24%)
당선 (2위)
초선[33]
1978
85,439 (33.33%)
재선[34]
1981
부산 2[35]
후보 사퇴
1985
부산 1[36]
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83,463 (31.97%)
당선 (2위)
3선[37]
1988
서울 서초 갑
27,584 (30.46%)
당선 (1위)
4선
1992
신정치개혁당 글자
37,172 (38.68%)
5선[38]
1,516,047 (6.37%)
낙선 (4위)
1995
1,623,356 (33.51%)
낙선 (2위)
1996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6,783,730 (34.51%)
낙선 (21번)
1998
서울 서초 갑
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
4,600 (8.71%)
낙선 (4위)
2000
부산 중·동
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
26,881 (31.71%)
낙선 (2위)
2004
부산 
12,731 (18.76%)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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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1
박찬종 2
박찬종 3
박찬종 4
박찬종 5
박찬종 6
박찬종 7
박찬종 8
15대 전국구
빈 가로 이미지
박찬종 9
박찬종 10

8. 대중매체에서[편집]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김병세가 연기했다.

9. 둘러보기[편집]

[A] 1.1 1.2 부산 제1선거구의 제11대 국회의원 이다.[B] 3.1 3.2 3.3 3.4 부산 제2선거구의 제11대 국회의원 이다.[5] 중구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 이다.[6] 동구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 이다.[7] 영도구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 이다.[C] 8.1 8.2 서울 강남구(서초구 분구 이전) 선거구의 제12대 국회의원이다.[10]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로 인한 의원직 사퇴. 잔여 임기 1년 미만으로 인해 재보궐선거 미실시.[11]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로 인한 의원직 사퇴.[13] #[14] 2022년 2월 기준[16] 당시 명칭은 계리사였다. 계리사가 공인회계사로 개칭된 것은 1966년이다. 지금의 보험계리사와는 무관한 직업이다.[17] 장덕진의 고시 3과 합격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에 자극받아, 행시와 계리사 시험에 응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의미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당시의 계리사(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자 정원과 난이도는 실로 고시와 동급이었다. 그래서 박찬종 역시 신문에서는 고시 3과 합격자의 일원으로 다뤄졌다. 신오철과 장덕진이 사망한 현재로서는 생존 최고령 고시 3과 합격자인 셈이다.[18] 이들은 서명파라고 불렸는데 결국 노태우가 당선되자 13대 총선에는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19]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래서 해당 지역구는 1996년 6월까지 무주공산이었다.[20]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건 2위로 낙선했다는 점인데 정원식은 前 국무총리 + 여당후보였음에도 3위로 낙선하면서 정치 생명이 끝났다.[21] 사실 박찬종이 정치인 초기에 차지철과 친하게 지낸걸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긴 하다.[22] 원 지역구인 서초구 갑은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마치고 원외 인사 신분이었던 최병렬이 공천되었고, 본인은 원래 당선권인 전국구 3번으로 공천받았는데, 당선권이 애매하고 당선권을 벗어난 21번으로 옮겨 받았다.[23] 2017년 말에는 민주당계 인사가 많이 참여하는 국민TV 맘마이스에 출연한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24] 1980년 4월 제명#[25] 통일국민당과 신설 합당[26] #[27]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8] 새정치국민회의 합류 거부#[29] #[30] #[31] 서구[32] 서구, 동구[33]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34]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35] 서구[36] 중구, 동구, 영도구[37]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와 동반 당선[38] 1995. 6. 9 사퇴
(서울시장 선거 출마)
[39] 전임자 최병렬 사퇴(서울시장 선거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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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박찬종 "전두환도 김일성 만나려고 어마무시하게 노력했다"

송고시간2023-08-18 


윤근영 기자기자 페이지


"김영삼은 경상수지 용어도 몰랐지만 사람 끌어당기는데 탁월"
"김대중, 아는것 많고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김종필은 독한데 없고, 삼촌이나 작은아버지로 괜찮은 사람"

편집자 주= 박찬종 변호사의 인터뷰 기사는 두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두 번째 인터뷰 기사는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주로 다루는 내용으로 다음 주중 송고될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변호사

[촬영 이다빈]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박찬종(84) 변호사는 지난 1973년 이후 지금까지 50년 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80을 넘은 나이인데도 정치 현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ADVERTISEMENT


그는 인터뷰에서 "역대 대통령 모두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만나려 했다"면서 "전두환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면서 평양방문을 강력히 희망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대통령 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북한을 방문을 시도하는 것에는 통치 기반 구축에 유리하다는 계산과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김영삼은 경제를 잘 몰랐기에 외환위기를 맞은 측면이 있으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탁월했다"면서 "김대중은 아는 것이 많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재임 기간의 성과를 보면 박정희 이후의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것이 없다"면서 "5년 단임제로는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196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4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3년 9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10대,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권 특위 위원장, 1987년 통일민주당 정책위원장, 1996년 신한국당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 고문 등을 지냈다.

현재는 유튜브 '박찬종 TV'를 통해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출연해 정치 현안을 분석하고 있다.

2019년 대한민국 위기 극복 대토론회 참석한 박찬종 변호사(오른쪽 검은테 안경 쓴 사람)

[연합뉴스 자료사진]

--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 1939년 4월 19일 부산시 서구 남부민 2동에서 태어났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중졸 출신의 은행원이었는데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무렵에 그만뒀다. 그 이후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진주여고를 졸업한 어머니는 일본에서 초급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사가 됐다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전업 가정주부로 살았다. 어머니가 교사 생활을 한 것은 6년 정도다.

-- 집안 형편이 어려웠나.

▲ 아버지는 은행을 그만두시고 지역의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돕는 일도 하셨다. 그러니 나는 보통의 가정에서 지극히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자식 교육에서는 엄격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내 공부방에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을 정도다.

-- 고등학생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면 생활 형편이 괜찮았던 것 아닌가.

▲ 부산의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하숙도 하고 친구들 3명과 자취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하숙비를 제때 주시지 못하니 걱정이 됐던지 한 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셨다.

-- 편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 아버지가 보낸 편지 중에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 학약불성사불환(學若不成死不還) 매골대기선묘지(埋骨豈期先墓地)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라는 글이 아직도 생각난다. '남자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면, 학문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경우 죽어도 안 돌아온다. 어찌 나의 뼈를 선영에 묻을 것을 기약할까. 인간 가는 곳이 모두 청산인 것을'이라는 의미다.

1985년 2월 두건에 상복 차림으로 연설하는 국회의원 후보자

[연합뉴스 자료사진]

-- 중학교 시절에 총학생회장이었다고 하던데.

▲ 나는 직선제 2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때 4명이 입후보했는데, 내가 과반수 표를 얻었다. 당시 경쟁자 중 1명이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광일(작고)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월요일 전교생이 참여하는 조회 시간에 교장 다음으로 훈화했다.

-- 그때부터 정치에 뜻을 뒀나.

▲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국회의원 선거 합동 연설회가 있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후보자들이 연설을 잘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여당 후보는 원고를 그냥 읽었고, 야당 후보는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나이 스물여섯이 되면 총각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만 33세였고, 그때 자녀들도 3명 두고 있었다.

-- 왜 상과대학에 진학했나.

▲ 나는 원래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계획이었으나 차질이 생겼다. 법과대학 입시시험 선택과목은 독일어, 불어, 세계사였기에 나는 세계사를 공부했는데, 시험 직전에 발표된 입시요강에서 세계사가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상업경제' 과목을 선택해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변호사

[촬영 이다빈]

--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했는데, 왜 여러 시험에 도전했나.

▲ 창피한 이야기다. 지금 같으면 고시를 안 본다. 내 적성은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당시에 상경대학을 나와서 취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최고의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는데, 불과 25명을 뽑았다. 재벌기업이 몇 개 있었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국가가 주는 면허를 갖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기에 3학년 1학기 때 최연소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사시를 패스한 사람은 31명이었다. 1년 후인 4학년 때에는 행정고시에 붙었고, 공인회계사 시험은 군대에 가서 합격했다.

-- 군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나.

▲ 어느 날 육군 헌병 중위와 경찰관이 우리 집을 찾아와 부모님이 놀란 일이 있었다. 내가 어디서 사고를 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들어보니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나에게 육군 법무관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육군으로 가기 싫어서 해군 법무관에 지원했다. 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할 때 담당할 사건이 없어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의 일부 과목이 헌법, 상법 등으로 행시 과목과 겹쳤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그 자격증 덕에 나는 1976년부터 4년간 공인회계사회 회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 관료가 될 생각은 없었나.

▲ 나는 경제학과 출신이어서 법조인보다는 재무직 관료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시 동기생들이 이미 재무부(현 재정경제부)에서 서기관이 돼 있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면 나의 3년 4개월의 군 경력은 인정되지 않아 초임 사무관으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검찰로 방향을 틀었다.

-- 행시 동기들은 어떻게 됐나.

▲ 행시 동기는 모두 60명 정도 되는데 장관 16명, 총리 1명이 나왔다. 고 건 총리가 행시 동기인데, 고등학교와 대학교 2년 선배다. 나는 행정관료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승만(왼쪽)과 김구(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 어려울 때 백범일지를 자주 읽었다고 하던데.

▲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어렵게 임시정부를 유지했다. 미국 하와이에서 송금되는 돈을 한복 소맷자락에 넣은 뒤 꿰매고 다녔다. 특별할 때만 쓰기 위한 것이었다. 백범일지는 개인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줬기에 나는 자주 읽었다. 백범일지는 아들에게 주는 글의 형식인데도 솔직한 내용을 담았다.

-- 어떤 점에서 솔직하다는 것인가.

▲ 김구 선생은 중국 난징의 양쯔강 배에서 숨어 지낼 때 주애보라는 중국 여자 사공과 부부처럼 살았다. 그 여자와 헤어질 때는 서운한 마음에서 갖고 있던 돈을 줬다고 했다. 이런 여자관계는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김구 선생처럼 솔직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지독한 파벌 싸움이다.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글을 보면, 임정의 파벌이 얼마나 심각한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폭파하고 싶다고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어렵게 상하이 임정을 찾아갔더니 파벌들이 서로 끌어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한다.

--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파벌 싸움을 했나.

▲ 인간사회는 원래 그런 것이다. 지금은 안 그런가? 여야가 지금 그렇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2002년 5월 평양에서 만찬장으로 향하는 박근혜와 김정일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역대 남한 대통령들이 평양 가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한국에서는 대통령직에 도전하거나 대통령이 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북한 증후군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려 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들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평양에 가서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고, 함께 사진을 찍어 공개하면 통일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평양방문을 자기의 지지기반과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도구로 생각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 거의 모든 대통령이 평양행을 희망했나.

▲ 전두환은 어마무시하게 김일성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장세동 안기부장을 평양에 보내서 뭐든지 줄 테니 만나자고 했다. 당시 김일성은 전두환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임사를 발표할 때 나는 바로 뒤에 앉아서 들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북한이 원하는 데서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94년 8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김일성이 7월 말에 사망했다. 김영삼은 이를 상당히 아쉬워했다. 만약 김영삼이 김일성을 만났다면 노벨평화상은 그에게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명박도 남북 정상회담을 모색하다 싱가포르 회의에서 펑크났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시절 평양방문을 추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실제로 평양에 가는 데 성공한 사람은.

▲ 김대중은 거액의 달러를 김정일에게 주고 정상회담을 했고, 노무현도 평양을 방문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되기 전인 2002년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문재인의 방북은 이미 국민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1979년 1월 농촌에서 박정희(오른쪽 모자 쓴 사람)

[연합뉴스 자료사진]

--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성과를 낸 사람은 누구인가.

▲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 이 고립된 작은 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그의 공로다. 집권 말기에 부정선거가 이뤄진 것은 과오다.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의 공(功) 과(過) 비율이 9대 1이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이 가장 큰 성과를 거뒀다는 것인가.

▲ 박정희는 우리나라 산업기반을 다졌다.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건설 등이 한국의 산업 기반인데, 이는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전략 때문에 가능했다. 유신을 선포한 것은 잘못이다. 나는 박정희 공과가 역시 9대 1 정도로 생각한다.

-- 성과가 있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가려지는 것 아닌가.

▲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은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진행하면서 수천만 명을 죽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중국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모두 황폐화했다. 제자가 스승을 두들겨 패고, 아들이 아버지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이런 모택동에 대해 덩샤오핑은 7대 3으로 공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아들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난동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마오쩌둥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해준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으나 잘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평양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 사진]

-- 그 이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 그다음의 대통령들은 공과를 평가할 정도가 못 된다. 국가의 장기 발전 계획이라는 것이 없었다. 김영삼은 집권 초기에 사람들을 잡아들여 인기가 많이 올라갔지만,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식(김현철) 문제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김대중과 노무현도 김정일을 만난 것 외에는 재임 중 이뤄낸 게 없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당시에는 청계천을 남겼지만, 대통령 시절에는 내놓은 게 없다. 탄핵당한 박근혜는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은 광주 문제를 일으켰고, 노태우도 군사정권이었다.

-- 박정희의 공(功)이 가장 크다는 것인가.

▲ 역대 대통령들이 박정희가 만든 기반을 철저하게 다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박정희가 워낙 견고하게 터를 만들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그때 이후 정권이 아닌 민간이 움직이는 나라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당시 IMF의 지원을 발표하는 당시 임창렬 부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 본인이 대통령이어도 5년 임기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 내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패했을 것이다. 5년 임기 가운데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에 뭔가를 이뤄내기가 쉽지 않다. 박정희가 성과를 냈던 것은 장기 집권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박정희는 시간 외에 식견과 추진력도 갖췄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헬리콥터를 수십 번 타고 답사해 직접 노선을 그린 사람이다. 어떤 문중이 자기들 땅 앞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둘러보고는 방향을 수정하도록 했다.

-- 김영삼은 어떤 사람인가.

▲ 그는 김대중과 원내 대표 경쟁을 네 번 했는데 모두 이겼다. 사람을 끄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몰랐다는 점이다. 경상수지 같은 경제용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ECD에 가입하려면 외환의 문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이 경상수지 악화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한테 직접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이 경제를 제대로 알았다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 경제관료들은 김영삼에게 아무 말도 안 했나.

▲ 나는 김영삼과 만만한 사이다. 부산에서 동반 출마해서 당선된 적이 있고, 민추협 시절에는 그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많이 했기에 그런 관계가 됐다. 나는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였다. 관료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김영삼이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화를 내니 관료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 김영삼에게 인간적 매력은 있었나.

▲ 사람을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이 하니 사람을 끌었다. 밥을 먹으면서 상대방의 심기를 살필 줄 알았다.

민주화운동 시절의 김영삼(왼쪽)과 김대중(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 김대중은 어떠했나.

▲ 김영삼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드라이한(건조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 명이 식사하러 가면 김영삼은 다른 사람한테 돈을 줘서 계산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카운터에 걸어가서 "얼마요?" 하면서 돈을 직접 헤아려 줬다. 두 사람은 그런 차이가 있다.

-- 본인은 김대중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 총재였던 이민우 파동으로 신한민주당이 해체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김영삼이 총재, 김대중이 고문이었다. 당시 주요 당직자 인사안은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이 반반씩 나눠 가지는 내용이었는데,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당시 나는 김영삼 계열이었는데, 김대중이 김영삼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박찬종을 넣으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 덕분에 정책위 의장이 됐다.

-- 알려진 대로 김대중은 지적인 사람인가.

▲ 몇 차례 김대중과 단둘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그게 김영삼과 다른 면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둘이 마주 앉았다. 김영삼이 "니는 말이다, 쉬운 걸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노?"라고 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거시기 말이여, 자네는 너무 쉽게 생각한당께"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외환 문제로 인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보류하자는 의견을 내면 김영삼은 "씰데 없는 소리"라면서 역정을 내겠지만 김대중은 "다시 한번 이야기해봐"라고 한 뒤 들어보고는 "그것도 그럴 것 같네. 좀 생각해보자"라고 물러설 사람이다.

-- 김종필은 어떤 사람이었나.

▲ 그와는 중첩적인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가 이룬 공의 절반은 김종필의 몫이다. 그는 박 정권 탄생의 주역이었다. 5·16쿠데타의 구체적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독한 데가 없는 사람으로 유연성을 갖췄다. 그가 나의 큰 형님이나 작은아버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79년 11월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 1985년 9월 고려대 앞 시위 때문에 고생했는데.

▲ 당시 대학생 연합조직인 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가 고대에서 개헌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하니 참여하라는 문서를 민정당과 신민당에 보냈다. 내가 당시 신민당 개헌특위 간사인 데다 인권위원장이어서 당시 성북구를 지역구로 둔 조순형 의원과 함께 고대 앞으로 갔다. 당원 50명도 동행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차단돼 그곳에서 비를 맞으며 4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 장면을 대통령 전두환이 TV로 봤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나를 미워했기에 나를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됐고, 고등법원에 가서야 무죄판결을 받았다.

-- 왜 전두환으로부터 평소에 미움을 받았나.

▲ 장영자 사건으로 11개 부처 장관을 바꿀 때 전두환은 입각을 제안했다. 외무와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고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시위 학생들을 변론하러 다녔다. 고대 시위사건 전인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삼민투의 학생들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 미문화원 근방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사무실이 있었는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 나는 미문화원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에 창문을 통해 학생들과 대화했다. 그때 한 신문사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학생 선동하는 박찬종'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 학생들은 농성을 언제 풀었나.

▲ 김대중은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그는 "사흘 후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북측 대표가 내려오는데, 학생들의 점거 농성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전에 농성을 풀어야 한다"면서 그 메시지를 학생들한테 전하라고 했다. 학생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진해서 농성장을 나왔다. 나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변론을 맡았다.

1985년 5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중인 대학생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삶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 국회의원 될 무렵부터 '강한 데는 강하고, 약한 데는 약하게'라는 원칙을 갖고 있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나는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잘하는 편이다. 단점으로는 내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사소한 일로 손해 보는 일이 적지 않다.

-- 본인은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나.

▲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용기가 있고 결단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손해 볼 일도 할 일은 한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택시를 타면 나를 알아보는 운전기사가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요금을 받지 않으려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과거의 정치인을 기억해주시는 시민에게 감사한다. '박찬종 TV'를 열심히 보면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도 고맙게 생각한다.

keunyoung@yna.co.kr





[삶] 박찬종 "北에 28만 중국군 사실상 주둔…南은 간첩활동에 최적" | 연합뉴스:



[삶] 박찬종 "北에 28만 중국군 사실상 주둔…南은 간첩활동에 최적"

송고시간2023-08-25


윤근영 기자기자 페이지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방해 목적으로 시작됐다"
"모택동ㆍ스탈린ㆍ호찌민ㆍ티토 등 누구도 3대 세습 안해"
"김정은 남한 방문한다면 반대할 이유 없어…대화 해봐야"

편집자 주= 박찬종 인터뷰 기사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 기사는 지난 18일 삶 박찬종 "전두환도 김일성 만나려고 어마무시하게 노력했다"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이번 두 번째 인터뷰 기사는 북한 문제를 주로 다뤘고, 한국 정치의 문제를 담은 세 번째 인터뷰 기사는 조만간 송고됩니다.

열병식 훈련하는 중국군 여군 의장대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박찬종(84) 변호사는 남북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두만강과 압록강의 중국지역 접경에는 중국군 28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데, 이들은 북한에 돌발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걸어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군은 사실상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ADVERTISEMENT


박 변호사는 지난 9일과 21일 연합뉴스와의 두차례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사망하거나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그 자체가 남북통일의 호기가 될 수 없다"면서 "중국군이 진입해 북한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북한 전역을 장악한 뒤 괴뢰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남로당의 공작으로 시작됐다"면서 "그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됐고,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철저히 해줘야 하지만 사건의 본질 자체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북한 정권은 남한 적화통일 전략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면서 "현재 남한은 간첩이 활동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1962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박 변호사는 1964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3년 9대 국회에 입성했으며 10대, 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권 특위 위원장, 1987년 통일민주당 정책위원장, 1996년 신한국당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 고문 등으로 일했다.

현재는 유튜브 '박찬종 TV'를 통해 활발한 정치 평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촬영 이다빈]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 50대까지는 건강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60대 이후에는 조깅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날씨가 더우면 방안에서 조깅한다. 우리 아파트는 베란다가 없어서 내부를 한 바퀴 돌면 30m가량 된다. 큰 병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 술·담배는 많이 했나.

▲ 술은 70대부터 마시지 않는다. 그전에는 거의 매일 마셨다. 혼자 있을 때도 먹었다. 담배는 마흔 살 때 끊었다.

-- 골프는 하나.

▲ 10년 정도 하다 1980년 5월부터 안 했다. 그날 대학 동기들과 수원에서 골프를 치던 중에 정치인들이 신군부에 잡혀간다는 뉴스를 봤다. 나는 즉시 골프를 중단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 자녀들은 무슨 일을 하나.

▲ 2녀 1남을 뒀는데 큰딸은 작곡가, 작은딸은 의사다. 아들은 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아내는 고등학교 때 미팅에서 만났다. 경기여고 동문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강좌를 들었던 아내는 이제 학생이 아닌 강사가 돼서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다.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모습

[조선중앙통신]


--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기 전후에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고 했다. 이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가져도 남쪽을 향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북한의 핵무기는 1차로 남한, 2차로 미군을 겨냥한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가 위험해졌다.

-- 한반도에서 핵무기는 균형을 잃었다고 봐야 하나.

▲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동해안에 핵잠수함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이 장거리 탄도탄을 사이판이나 괌 근처에 떨어트리면 미군은 핵잠수함을 이용해 근거리에서 평양을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양은 석기시대로 바뀔 만큼 초토화된다.

-- 남한도 핵무기를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우리나라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돼 있으니 핵무기 개발은 불가능하다. 한미 동맹을 통해 핵무기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3년 5월 중국-라오스 합동훈련 개회식 참가한 중국 병사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남북통일은 언제 이뤄질까.

▲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만약에 북한 김정은의 건강이 악화하거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돌발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남북통일의 호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군이 북한을 장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과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어서 비상시에 개입할 명분이 있다. 중국군 28만 명은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지역에 포진해 있는데, 두만강은 갈수기의 깊이가 얕기에 걸어서 북한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겨울에는 얼음 위로 걸어서 오면 된다. 사실상 중국군은 북한에 주둔하는 것과 같다. 북한에 들어온 중국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한 뒤 자신들의 괴뢰정권을 세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통일 협상의 대상자에 중국도 들어가게 된다. 통일이 쉽지 않은 이유다.

-- 우리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나.

▲ 원론적으로는 남한이 압도적 우위의 경제력과 민주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남한의 우수한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시스템이 휴전선 넘어 북한에서도 불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북한 주민이 남한 방식의 사회를 원할 것이다. 즉 북한 주민이 중국의 괴뢰정부를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2023년 8월22일 물에 잠긴 논에 들어간 북한 김정은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 김정은이 남한을 방문한다고 하면 찬성해야 하나.

▲ 윤석열 정부가 그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없다. 김정은이 이를 수용할 리도 없다. 김정은은 폐쇄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장난감처럼 쏘아대는 것으로 내부 통제를 하고 있다. 그런 그가 남한에 올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하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신변 안전을 보장할 테니 오라고 해서 그와 대화를 나눠볼 필요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밀스럽게 북한을 접촉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행위는 국군통수권자의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이 홍수 등으로 식량난이 심해졌다고 한다. 평양 시내를 제외하고는 식량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상자료를 보면 북한 군인들은 키가 작고, 아이들은 영양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평양 시내의 노동당 간부, 군 간부에게는 외제 승용차, 고가 만년필, 외제 시계, 포도주 등을 선물로 주고 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 모순투성이다.

2013년 12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끌려 나가는 장성택

[조선중앙TV]

-- 모순의 다른 사례가 있다면.

▲ 개성공단이 열리기 직전에 현대그룹이 사전답사 차원에서 기자들을 데리고 개성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도 동행했다. 우리는 개성 시내를 둘러보고, 선죽교와 박물관에도 가봤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10㎞ 정도 달려서 박연폭포에도 갔는데, 마주 오는 차량이 전혀 없었다. 고속도로 중간중간은 망가져 있었다. 개성 시내에는 '미 제국주의 타도하자'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는데, 박물관은 선물을 팔면서 달러로 결제하도록 했다. 이것도 모순이다.

--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TV 대선 토론에서 우파 정당의 어떤 후보가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자 다른 경쟁 후보가 "북한에 가서 직접 봤냐?"라고 물었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직접 가서 확인해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은 이복형인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죽였다. 고모부 장성택을 회의장에서 끌어낸 뒤 평양 시내에서 고사포로 공개 처형했다. 형과 고모부에게 이렇게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하겠는가. 김정은의 이런 행동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방식이다.

1949년 박헌영(왼쪽)과 김일성(오른쪽) 모스크바 방문 모습, 가운데는 박헌영의 딸

[행안부 국립기록원]

-- 김일성은 어떻게 했나.

▲ 김일성은 6·25전쟁 후에 종파분자 숙청에 나섰다.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의 최창익, 남로당 출신의 박헌영, 소련파 출신의 허가이,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이강국 등이 몰살됐다. 약산 김원봉도 그때 죽었다. 김일성은 그들을 체포하자마자 바로 죽이지는 않았다.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살피다 2∼3년이 지난 후에 괜찮다고 판단되자 처형했다. 김원봉이 죽은 것은 1958년이다.

-- 왜 숙청해야 했나.

▲ 박헌영, 허가이, 김두봉 같은 사람이 볼 때 김일성은 애송이었다. 김일성은 1912년생이었고. 박헌영은 1900년생이니 나이 차이가 12살이나 됐다. 김원봉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190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로, 김일성보다 훨씬 더 철저히 항일 운동을 했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장기 집권 태세에 들어가자 그들은 노동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사전에 발각된 것이다. 북한 당국은 박헌영을 맹견이 있는 우리에 넣어서 고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3사건 당시 피신했던 주민들이 하산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제주 4·3 사건은 어떻게 진행됐나.

▲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제헌국회)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남한 내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남로당은 남한 내 200개 선거구 가운데 절반가량에서는 선거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남로당의 그 계획은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실패했다. 제주에서 폭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은 27세의 김달삼이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일본 유학을 하면서 이론적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이다. 남로당 폭동 세력은 4월3일 새벽을 기해 13개 파출소와 관공서를 공격하고 우익인사를 학살했다. 경찰서 간부를 잡아서 손발을 묶어 눕혀 놓고는 톱으로 목을 자르기도 했다. 도끼로 죽이기도 했다.

--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가 있었나.

▲ 그렇게 해야 남로당을 따를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공포도 리더십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4·3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육지의 군경이 제주에 투입되면서 양민이 피해를 봤나.

▲ 제주도 치안이 마비되자 육지에 있는 군인과 경찰이 제주도에 와서 적극적인 소탕 작전을 펼쳤다. 제주도를 그대로 두면 육지로 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폭동 세력은 군경에 쫓겨 한라산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민간에 내려와 음식을 구하기도 했는데, 정부군은 '청야전술'을 펼친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제공한 양민을 죽이기도 했다. 반복되는 이런 공격과 복수의 과정에서 양쪽이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죽였고 양민 희생자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 김달삼은 어떻게 됐나.

▲ 군경이 제주도에 도착하자 그는 북으로 달아났다. 평양에서 제주폭동 보고대회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김일성이 그를 특별히 대우하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6·25전쟁 중에 그에게 게릴라전 참여를 지시했고, 김달삼은 그 명령을 따르다 강원도에서 국군에 의해 사살됐다.

김일성이 1950년 10월1일 중국 마오쩌둥에게 보낸 출병 요청 편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 6.25 전쟁은 남한의 공격으로 시작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 1980년대까지 북한 쪽 자료를 토대로 남한의 북한 침략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그 나라가 보유한 모든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그 문서를 보면, 1949년 10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을 만났다. 그때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고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1950년 3월에 다시 스탈린을 만난 김일성은 남한 침략이 성공할 수 있으니 승인해달라고 거듭 설득했다. 북한군이 38선만 통과하면 남로당 조직이 봉기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진다고 했다. 이 말에 스탈린은 귀가 솔깃해졌고 남침을 승인했다. 탱크를 비롯한 전쟁물자도 제공했다. 스탈린은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면 힘을 소모할 가능성도 계산에 둔 것으로 보인다.

-- 6.25 전쟁 이후 북한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했나.

▲ 김일성은 경쟁자들을 숙청했고 전제 군주체제를 만들었다. 김일성 유일사상을 주입하고 세습체제를 조직했다. 스탈린, 호찌민, 마오쩌둥, 티토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김일성 일가가 70년 이상 집권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사회주의인가.

북한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식량난으로 300만 명이 죽었는데, 아직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 공포정치 때문에 가능하다.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죽였고, 고모부 장성택을 회의장에서 끌어낸 다음 평양 시내에서 고사포로 처형했다. 이런 공포정치가 통치하는 데는 가장 쉬운 방식이다.

-- 한국의 좌파는 왜 북한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아예 언급을 안 하는 것인가.

▲ 북한을 자극하면 남북 관계가 나빠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봤다면 오판이고 바보 천치 같은 생각이다. 평화는 힘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 김대중, 문재인 정부는 북한 정권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게 통일을 앞당길 것으로 판단한 것 아닌가.

▲ 그들이 남한 우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그런 정책을 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통일보다는 평화 무드를 진전시켰다는 공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고 나는 본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박찬종

[촬영 이다빈]

-- 이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되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북한이 대남 적화 전략 전술을 포기하지 않고 간첩을 보내고 있는데, 어떻게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나?

-- 남북한 국력의 차이가 매우 큰데.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북한은 아직도 생각할까.

▲ 민주노총은 광화문에서 집회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평택 미군 기지 외부에서도 '양키 고 홈'을 외치며 시위한다. 북한으로서는 이를 더욱 선동하기 위해 간첩을 보내고 있으며 그런 증거도 많다. 현재 남한은 간첩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이다.

-- 남북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가.

▲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다. 통일에 따른 혼란이 우려되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통일의 이점이 많다고 본다. 북한에는 희토류를 비롯한 부존자원이 많고, 인력도 우수하다. 남한에는 기술과 자본이 있다. 이런 남북의 생산요소들이 결합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민족사적으로 보면 남북한이 분단돼 있고, 북한이 군주체제로 운영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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