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산 시인의 시 '비문非文들 ' : 네이버 블로그
詩 읽는 아침(詩리뷰)
황정산 시인의 시 '비문非文들 '
시를 읽는 아침
2019. 7. 2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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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非文들 / 황정산
그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고
나는 회사원이다
새벽이 오는 모습은
별이 없다
장관의 발표는 복지 증진과 실업률이
완만히 급감했다
그녀는 꽃이 피기 전에
사랑하기도 하고 사기도 한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문설주 위에 잠들어 있다
그 교수는 그 판사를
석궁으로 죽이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안 만들어져
사라진다
말은 말이 되지 않고
말이 말이된다
황정산 외, 『딩아돌하』 2019 여름호, 2019, 88쪽
평론가의 시는 어떨까요? 과연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시를 잘 쓸까요? 황정산 시인의 시를 읽어보시며, 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황정산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평론가입니다. 현재 대전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사표를 내셨다고 했는데, 사표가 수리될 경우, 제 문장은 과거형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시를 얘기하는 것과, 시를 직접 쓰는 것 사이에는 극복 불가능한 경계가 있습니다. 시를 분석하고 얘기하는 것과 직접 쓰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평론가들이 얘기하는 시란 ‘완성된 작품’입니다. 완성된 것을 하나하나 분해하여 얘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분해한 것을 다시 재조립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시인들이 있고, 그들이 제각각 시를 쓰고 있기에, 시 쓰기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또한 결과물인 시를 읽어도,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제법 길고 어려운 시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보통의 시들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접근 가능합니다. 먼저 정말 시아닌 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 중 다수가 시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분들입니다. 물론 시에 대한 열정이야 무시할 수 없겠지만, 시의 수준이 그 열정을 따라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과거라는 구습적인 시제에 빠져 자신을 발전시키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 정도의 시는 시를 하루 이틀만 배워도 쉽게 극복 가능합니다.
두 번째, 높은 수준의 시는 쉽고 이해하기도 편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뻔한 것입니다. 이쪽에서 저쪽, 이것과 저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시란 저 별다른 것 없는 언어를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시인동네 7월호에 발표된 흥미로운 산문 하나를 읽었습니다.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글이었는데, 요지는 지금 시대의 글쓰기란 타자기(정확히는 워드프로세서)에 의한 글쓰기이에 개개인의 개성이 담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타낼 수 있는 개성이란 ‘단어의 새로움과 배치’라고 말하는데요, 저는 절반가량 긍정합니다. 의미의 새로움과 단어의 재배치를 동격으로 놓는 것 보다 '단어의 배치에 의해 의미적인 새로움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미의 탄생'이란 우리가 언어라고 정의한 매개체의 내부에서 재생산된 일종의 마법적 효과입니다. 쉽게 말하면, 단어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의미(생각하지도 못했던)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작업은 아주 쉬워 보이지만, 숙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최근에 제가 쓴 시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시의 주요한 문맥을 밝히기는 그러해서 주요한 내용을 말씀드리면, 벚꽃의 개화를 저 하늘에 큰 솥이 있어 콩을 튀기듯 꽃잎을 틔우는 것이라고 묘사를 해 봤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알겠지만, 이 시에는 그렇게 어려운 단어도 없고, 특별한 상상이 내재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별다른 것 없어도 최소한의 상상과 문장의 재배치만으로도 그런대로 읽을 만한 시를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황정산 시인의 시 얘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얘기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비문非文들’입니다. 비문은 보통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의미하기도 하고, 말이 되지 않거나 의미가 완성될 수 없는 문장을 보고도 얘기합니다.
특징적인 부분은 이 시에서 화자는 철저히 비문으로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고 / 나는 회사원이다’도 일종의 비문입니다. 왜냐하면,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의 문맥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오는 모습은 / 별이 없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맥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위의 문장을 올바로 고쳐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고 / 나도 좋아한다’, ‘새벽이 올 때 / 별이 보이지 않는다’
제목을 ‘비문’이라고 하지 않고 ‘비문非文들’이라고 한 까닭은 이처럼 비문이 중첩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비문非文들이라는 제목도 비문입니다. 비문에 ‘~들’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이 어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워낙 문법이 파괴되어 편리한대로 다양한 접미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비문이라는 명사에 ‘~들’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문이 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맨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말이 되지 않고 / 말이 말이된다’라고. 전자의 ‘말이 말이 되지 않고’의 의미는 비문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의 ‘말이 말이된다’는 말은 말이 만드는 어떤 확장된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확장된 상황이란 소문이나 또는 작은 이야기를 부풀려 크게 만드는 ‘미디어의 확장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사실 앞이나 뒤, 모두 비문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인데, 앞과 뒤가 다른 것은 말이 가진 파급 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참 말이 범람합니다. 올바른 말, 들어도 될 말의 범람이라면 괜찮겠지만, 말 같지도 않은 말이 홍수처럼 범람하여 우리 생각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의심하다가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나는 틀리고 자신이 옳다고 외치면, 흔들리게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옅어지고,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말의 양면성 중의 하나입니다. 어때요 평론가다운 시 같지 않습니까. 이 또한 약간의 직업병적인 성질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평론이라는 개념을 극복하고 완전한 서정에 푹 빠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뒷 얘기. 짧게 황정산 시인과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글이 칭찬인지 비판인이 가늠이 안간다고. 저는 칭찬도 비판도 아닌 제3의 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에 황정산 시인은 '평론가적인'이라는 말로 칭찬인지 비판인지 모를 말을 하시더군요... ㅋㅋㅋ. 지극히 평론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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