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승 칼럼] 한일관계의 미래와 역사성찰의 전제 조건
등록 2023-08-17
일본은 병합 당시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된 한국통감 관저. 남산에 있었는데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며칠 뒤면 8월22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1910년 8월22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오전 10시 궁내부 대신(민병석)과 시종원경(윤덕영)을 불러 협약의 부득이함과 향후 왕실의 대우에 대해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이에 수긍하고 돌아갔다. 12시, 고쿠분 참여관으로부터 궁중에서의 일이 모두 제안한 대로 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중략) 오후 4시 한국병합조약의 조인을 통감관저에서 마쳤다. 참석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는 29일에 이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를 통지해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하하.”
데라우치의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한국병합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득의양양하여 “하하”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물론 ‘병합’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이날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먼저 위수령을 내려 정치집회를 금지했다. 지방에 있던 일본군 기병과 보병 일부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또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빼앗아 일본군 헌병의 지휘권 아래 두었다. 그러고는 통감부·창덕궁·덕수궁 등 서울의 주요 지점을 무장한 일본군 2600명이 경비하도록 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와 같은 군사적 강압의 분위기에서 이완용 등 한국의 내각과 궁중의 주요 인물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는 강제적인 조약이었고, 게다가 한국 황제의 비준도 없었기 때문에 불법·무효라고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오늘날까지도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상수이다. 일본 쪽은 당시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지(그렇다고 이것이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내에서 이웃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한 것이 비슷한 사례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국은 16·17세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지배했고, 1801년 아일랜드를 아예 병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어 지배했지 식민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이웃 나라, 그것도 임진왜란 이후에 통신사 등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해오던 나라인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전라감영에 제출한 소장에서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년의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이들은 300년 전 임진왜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불과 7년간의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35년에 걸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일 관계에서 볼 때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일본은 병합 당시 ‘일시동인’(一視同仁·모든 사람을 하나로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이라며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우선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동화정책’이었다. 1910년대부터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다. 1930년대부터는 전국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또 ‘애국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를 했다. 나아가 일본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하도록 했다.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치욕과 분노를 느끼게 한 폭력적인 일들이었다.
한국인 아동들이 다니던 보통학교 5, 6학년에서 가르치던 ‘보통학교 국사’(1922·왼쪽)와 ‘초등국사’(1938·오른쪽)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일본사’ 교과서로, 한국사는 그 가운데 5~10% 정도 포함되어 있다. 박찬승 제공
같은 시기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는 아시아의 식민지이던 인도, 베트남, 필리핀, 자바에서 그렇게까지 무리한 동화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또 현지 주민들을 관료로 다수 채용하고, 식민지의회나 지방의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어느 정도 행정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대만에서 상·중급(칙임관·주임관)은 물론 하급(판임관) 관리, 심지어 군청 직원들까지도 다수를 일본인으로 채용하였고, 식민지의회 같은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에서 허용된 것은 1930년대의 매우 제한된 권리를 갖는 지방자치 의회뿐이었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의 원거리 식민지에 본국 인력을 보내기 어려워 현지 주민들을 교육해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근거리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에 본국 잉여인력을 대거 보내 관리·교사·경찰 등으로 만들어 직접 통치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과 대만인의 불만은 높았고, 이를 누르기 위해 총독부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극도로 통제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지배 아래 있던 한국과 대만은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합과 식민지배는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수난과 고통의 역사였다. 그런데도 일본인 상당수는(심지어 일부 한국인까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미래의 한-일 관계가 진정한 우호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성찰할 것이 있다면 성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1925년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연재박찬승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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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본 칼럼이다. 한겨레 신문이 크게 실어서 읽어 보고 경악했다. 하도 한심하여 담벼락에 몇자 적고 닫아야 할 것 같아서, 이제 껏 열어두었다.
힘의 시대에 도리를 논하며 분노하는 조선10선비가 살아있었다. 도대체 왜 일본에 병합됐는지 성찰반성이 1도 없다. 일본이 조선을 위한 산타클로스가 되어야 하는데, 안됐다고 욕하는 식이다. 그냥 조선의 힘과 조상의 지혜가 모자라서 당했다고 생각하고, 힘과 지혜를 길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받아 넘기면 될텐데, 일본을 욕할 이유를 어거지로 만든다. 그 이유가 보편이성과 상식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정말 일본을 욕하고 싶으면 관동대지진 때 수천명의 조선인 학살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반인류 범죄 아닌가?
일본은 1880년대만 하더라도 조선을 병합할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청나라의 제후국에서 떼어내어 독립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그 때는 일본이 선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국력도 모자라고, 별 실리도 없어서다. 그래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삼국간섭으로 피로 쟁취한 요동반도를 토해내는 등 1895년~1904년 러일전쟁까지 10년은 열강의 교착상태였다. 조선은 외교만 잘하면 식민지가 안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절호의 시기에 내치도 외치도 개판으로 하여, 오랜 문명국이 이웃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기적'을 만든 것이다. 사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길 실력을 짧은 시간에 기른 것도 세계사적 기적이다, 조선 망국사와 일본 제국사는 정말 배우고 생각할게 많은 역사다. 구구절절 헛소리 씹으려니 입만 아프다.
아무튼 이것을 번역하여 유럽, 미국, 일본, 중국 지식인들에게 읽히면 반응이 어떨까 궁금하다. 아마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얼마나 특이한 지, 한국인의 반일정서가 갈라파고스의 동식물처럼 기괴하게 진화했다는 것 하나는 알려주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의 역사인식은 보편 이성과 상식에서 멀어도 너무 멀다. 실은 1980년대 초중반 내가 가졌던 생각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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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지(그렇다고 이것이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내에서 이웃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이웃 나라, 그것도 임진왜란 이후에 통신사 등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해오던 나라인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일 관계에서 볼 때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일본은 병합 당시 ‘일시동인’(一視同仁·모든 사람을 하나로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이라며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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