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1

[신영전 ]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한겨레 2023

[신영전 칼럼]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신영전 칼럼]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등록 2023-08-20 18:52

과학은 이미 악마 편에 선 것 같다. 과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지만 화석연료 엔진이 개발된 지 200년도 안 돼 작금의 기후, 오염, 전쟁 지옥을 만든 것도 과학이다. 더욱이 과학은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이제 이 거대과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자와 대자본뿐이다. 그 앞에서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지고 있다.

서울 한낮 기온이 35도까지 치솟으며 무더운 날씨를 이어간 지난 1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공사현장에서 한 건설노동자가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왕자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 하지만 이제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돼야 한다 . “여기가 지옥이다 .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음욕, 식탐, 탐욕,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을 저지른 이들로 가득 차 있다 . 벌레 , 폭력 , 폭염이 만연한다 . 이 지옥의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악마뿐만 아니라 착한 이들도 있다. ‘ 신곡’의 이단 지옥에선 죄가 중할수록 화염 온도도 올라가지만, 이곳에선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더 뜨거운 폭염 속에서 오래 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다.
근린공원에서 작업하던 ㄱ 씨는 35 ℃ 에 육박한 폭염에도 그늘 없는 곳에서 일하다 쓰러졌고 , 이른 아침부터 고온 작업을 하다 쓰러진 ㄴ 씨에게 주어졌던 휴식 공간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바깥보다 더 뜨거운 컨테이너였다. 한해 매출액 25조원이 넘는 한 대기업은 체감온도가 33℃ 일 때 매시간 15분 , 35℃ 일 때 20 분씩 줘야 하는 최소 휴식시간 기준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소방관 1명이 순직한 경기도 이천시 쿠팡 덕평물류센터 대형 화재 때에는 소방시설 관리 업체 직원들이 고의로 화재 비상벨 작동을 여섯 번이나 정지시킨 게 드러났다 . 허허벌판 한낮 기온이 40℃ 에 육박하고, 엄청난 습도로 찜통 같았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행사장에선 첫날에만 400명 넘는 어린 스카우트 대원들이 온열질환으로 쓰러졌다.

이 지옥에선 직원들에게 비상근무를 명령하고 자신은 골프장에서 ‘나이스 샷’ 을 외치는 이가 도지사를 하고, 국민 대부분이 반대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지지하는 이가 대통령을 한다 .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7일 유엔아동기금은 전세계의 많은 어린이가 폭염으로 고통받고 있고, 남아시아에선 어린이 4억6천만명이 연중 80일 넘게 35℃ 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다. 지난 7 월 중국 북서부 싼바오 지역은 52.2 ℃ 를 기록했고 지표 온도는 80℃ 에 달했다. 미국 서부 데스밸리 지역은 53.3 ℃ 까지 올라갔다. 세계기상기구는 올해 7 월이 역대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발표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시작됐다 ” 고 말했다.
이 지옥을 어떡할 것인가? 지난달 24 일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며 화석연료 사용 반대 시위를 하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20) 가 체포됐다 .

과학은 이미 악마 편에 선 것 같다. 과학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지만 화석연료 엔진이 개발된 지 200 년도 안 돼 작금의 기후, 오염, 전쟁 지옥을 만든 것도 과학이다. 더욱이 과학은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이제 이 거대과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자와 대자본뿐이다. 그 앞에서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라해지고 있다.

지구 전체 인구의 2 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 1 만 4 천명, 매년 약 500 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 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만3천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 위, 성장률 1 위 국가가 됐다. 무기산업이 부진하면 국가 경제가 흔들리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선 어떤 나라처럼 없는 전쟁도 만들어야 하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무기생산 기업의 주가 상승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무기를 녹여 만든 쟁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40 여년 전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의 주인공 가족도 지옥에 살았다 .

서늘한 바람이 불면, 이 폭염과 폭염 속 시원한 물 한잔, 작은 그늘 한점 가지지 못해 죽어간 이들은 쉽게 잊힐 것이다. ‘ 망각 ’ 과 ‘ 둔감 ’ 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지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연재  신영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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