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김훈 글]['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에 대한 반응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입력2023.08.04. 
  1,839
399

[특별기고]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김훈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들은 교육자의 ‘교권’뿐 아니라 ‘인권’과 ‘생존권’까지도 절규했다.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10여 명이 이날 집회에 참가했고, 교수 102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교사들은 교원단체나 노동조합이나 소속 학교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전국교사일동’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3만여 명의 교사는 선생 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일기에 써놓고 자결한 젊은 여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고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루고자 했던 뜻을 추모했다. 이날 낮기온은 34도였고, 아스팔트 위의 온도는 50도가 넘었다. 길바닥의 주저앉은 검은 상복의 대열은 길어서 끝이 아물거렸고,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 고통스러운 대열이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그 배후는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



지난달 30일 서울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소설가 김훈. 학교 건물과 담장에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젊은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다. 동행한 출판인 김영훈씨가 촬영했다. 사진 김영훈
==

-공교육은 죽었다.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 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도심의 거리에 모여서 교육에 가해지는 학부모 집단의 행태에 절규하고 저항하는 사태는, 아마도 세계 공교육의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이날, 검은 상복의 대열은 폭염 속에서 거듭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소설가 김훈. 학교 건물과 담장에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젊은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다. 동행한 출판인 김영훈씨가 촬영했다. 사진 김영훈
==
젊은 여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서울 서이초등학교 주변 일대는 전국의 교사와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로 도시의 한 블록이 뒤덮였다. 한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에 모이는 이 거대한 조문의 대열은 공교육이 이 사회의 저변에서 일상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갔던 사태를 증언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고 말이 들끓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이크 잡기를 좋아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조문의 대열에 조화를 보내오지 않았다. 판세에 민감한 그들은 학부모 집단과 교사 집단의 갈등이라는 이 사태의 심층구조가 얼마나 두렵고 또 난감한 것인지를 알고 있고, 진영의 입장으로 여기에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득 될 것이 없다고 정세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겠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서이초등학교의 건물과 담장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 -너도나도 당하면서 이게 우리 직업이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습니다.

  • -다들 당하는 걸 보면서 ‘난 운이 좋아서 안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선생님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제가 먼저 소리 내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29일 정부서울청사 인근 도로에서 열린 서이초 교사 추모식 및 교사 생존권을 위한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주최 측 추산 3만여 명이 참가했다. 뉴스1
==
이 슬픈 편지들의 전언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울음을 따로 우는 소리로 들렸다. 교사들은 이 편지에서도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을 직접 호출하지 않고 있다. 

나는 교사가 아니므로, 이 ‘악성 민원’의 실체를 교사들보다 덜 점잖은 언어로 말하려 한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위장 전입이 문제돼 공직 임명에서 탈락한 사람은 없다. 이런 위법행위들은 애끓는 모성애, 부성애, 또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미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과 전국 교사들의 대규모 조문 사태는 한 시대의,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로 몰락해 가는 현실을 향해 ‘반성’을 말하는 것은 무력한 관념의 신음처럼 들리지만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다면 문제를 헤쳐 나갈 추동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상처받은 교사들에게 직무 연수교육을 강화하고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주겠다는 ‘대책’은 고마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의 경험 부족, 자질 부족, 열정의 부족으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며, 민원을 퇴치하는 개인기를 길러주고 상처를 힐링해 주겠다는 것은 개선책이 아니라고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은 개별적 교사 한 명씩을 이 무겁고 또 무서운 사태 앞으로 내세우지 말고, 교육청, 교장, 교감이 교사들과 함께 사태의 전면에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지위 높은 선생님들은 사태를 빙 돌아서 형용사 ‘정당한’ 뒤로 숨어들고 있다.

29일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교직 2년 차의 젊은 교사는 이날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이초등학교 분향소에 들러 숨진 동료 여교사에게 바치는 편지를 써서 붙였다.

-오늘 4만 명이 거리에 모여서 외쳤습니다. 교육대학교 교수님들도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으니까 이제 무언가 달라지겠지요. 선생님.

편지는 ‘함께 외쳤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이 젊은 교사의 ‘희망’은 아직은 울음으로 보였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김훈=1948년 서울 출생.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뒤늦게 작가가 됐다. 장편소설 『하얼빈』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동리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소설가 김훈

================================================


===

==

==

김성민
18 h
  · 
김훈 작가가 조국 지지자들에게 수난 당하고 있다. 서이초 사건을 취재한 기고문 한 귀절을 걸고 넘어진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학부모의 악성 민원을 ‘내 새끼 지상주의’로 치환하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조국 부부를 거론한 것이 문제라고 한다. 분노를 표한 글을 10여 개 읽었는데 아리송하다. 도대체 김훈의 글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A 부분의 사실 관계가 잘못되었다. B 표현이 과격하고 무례하다. 스스로 성찰한다는 결론이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화난 이유를 밝혀야지, 무작정 버럭버럭 화만 내지르면 아기가 응애응애 우는 것처럼 바라볼 뿐이지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김훈의 글은 사실 관계도 부합하고, 표현도 적절하다. 나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에 공감했다. 

조국은 사람을 절망시키고, 또 슬프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이 나서서 북콘서트를 하고 앨범을 내고 있다. 조국 스스로 잘못을 안 했다고 확신하나? 아니래. 7월 23일 조국 부부는 다시 사과를 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부모인 저희의 불찰과 잘못이 있었음을 자성하고 있다.  법적·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사안인 만큼 자성하는 차원에서 다 버리고 원점에서 새 출발하겠다고 결정”

불찰과 잘못이 있지만,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총선 출마설, 신당 창당설 연기를 피우고 있잖아. 나는 진실로 조국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 김훈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단락을 마친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응앙응앙 울지말고, 차분하게 화난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봤으면 좋겠다. 설명할 수 있으면 조국 지지를 애초에 안 했으려나?
==
Yun Young
18 h  · 
타임라인에 김훈이 전두환 찬양한 옛 글이 나돌면서 까이던 것이 이 때문이었군요. 김훈이 전두환 찬양글을 쓰게된 뒷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
Kim Sang Soo
6 h  ·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10년 됐나? 더 되는가? 만나본 지 오래됐다. 
사방에서 떠드니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 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중앙일보에 실린 글을 찾아 읽었다.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정보의 편향, 편취인가? 사실과 동떨어진 사례를 ‘조 국’ 실명으로 들고 나왔다. 중앙일보에 ‘특별기고’하고 조선일보나 보고 살고 있는가?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라고 하니 무명을 깨트리기 위해서라도 자기 눈을 먼저 찔러야 하겠다.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정작 김훈에게 요구된다. 한편으로는 ‘잘 늙어가는 건 참으로 어렵다’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난다.
김주대
1 d
  · 
<소설가 김훈의 중앙일보 기고문을 읽고>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소설가 김훈의 중앙일보 기고문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중에서 
.
.
.
소설가 김훈은 공교육과 그(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원인을 ‘내 새끼 지상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새끼 지상주의’가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더욱 기성을 부리고 있다고도 진단한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더욱 사납고 위압적으로 실행된다는 김훈의 진단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내 새끼 지상주의가 공교육과 그(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의 하나의 원인은 맞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말대로 부(富)와 부의 천민성에 있다. 공교육과 그의 죽음의 원인은 내 새끼 지상주의이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원인은 부의 천민성이다. 부의 천민성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가 이번 사태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걸 김훈 본인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잔인한 부유층 학부모 몇 명 잡아들이고 징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학부모와 선생을 대립시켜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훈은 느닷없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소환하여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 김훈의 기고문 전체의 맥락을 다시 살펴봐도 왜 조국이 소환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갑질부모 정순신과 이동관을 소환해야지. 수구보수 언론과 무소불위 검찰의 십자포화를 맞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일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짓은 진중권이나 할 짓이다. 조국 재판을 지켜봤다는데 검찰과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가장 강력하게 물어뜯던 사모펀드 건은 무죄로 판명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검찰의 기소가 얼마나 정권야욕적이고 모순적이며 선택적인지 알고는 있는지. 

이를테면 검찰이 윤미향 의원을 10개의 죄목을 씌워 기소했지만 9개가 무죄로 판명된 건 아는지, 나머지 1개의 죄목마저 법원에서 다투고 있다는 건 아는지. 왜 김훈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국힘당이나 윤정권이 하는 짓을 따라 하는지 안타깝다. 올해 봄에 비트코인 문제로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반격도 못하고 쓰러져 겨우 숨을 쉬며 언론을 피해다니던 김남국 의원에게 한판 붙어보자고 외치던 장예찬이 생각난다. 사자에게 물려 죽어가는 토끼에게 용감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야비하고 비열한 살쾡이나 뭐가 다른가? 
김훈은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세심하게 몽매한 능력이 있어 보인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시위를 한다고 나름대로 점잖게 진단한 김훈은 큰 문제를 지엽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능력이 있다. 교사들이 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시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김훈은 자기모순에 빠진 감정 소비적 해결책을 내놓는 데는 탁월하다. 그의 해결책 혹은 그의 기고문은 전체적으로 문학적 비유, 감정적 감상적 토설로 보인다. 
시선은 옹졸하지만 정서적으로 점잖은 김훈이라는 훌륭한 작가를 소설을 쓰도록 해야지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인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김훈은 그럴 능력이 없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기회주의적으로 외면하고도 있다. 중앙일보가 김훈을 욕되게 하였다. 지난 91년 조선일보가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통해 반정부 투쟁의 불길을 잠재웠던 것처럼 중앙일보는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기고문을 통해 현실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간 정서적 모순으로 바꾸고, 교사들의 분노가 정권 혹은 자본주의 전체로 향하는 걸 막으려고 하는가? 
그럴 리 없겠지만 김훈도 중앙일보도 시선을 한국 자본주의의의 구조적 모순으로 돌려야 한다. 이를테면 10원 한 푼 남에게 손해를 보게 한 일이 없다는 대통령 장모의 구속, 대통령 부인의 주가조작 혐의와 학력조작과 사기행각, 대통령 본인의 거짓말들의 원인들 역시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니라 부의 천민성,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에 있다. 9수 10수를 해서라도 권력을 얻어야 하고, 국민 세금으로 마련된 거액의 검찰총장 특활비를 사비인양 써버리는 파렴치함과 현 정권의 신북풍몰이, 국가권력사유화, 보복정치, 검찰독재, 법사무당정치, 반평화친일친미정치, 부자를위한정치, 서민에게폭력정치, 장애인차별정치, 노동자말살정치 등등 횡포의 원인 역시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니다. 좀 더 근본적 원인을 말하라. 
김훈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다 새로 바뀌어야 하오. 그게 내가 이 성에서 깨달은 바요.” 
(김훈 선생과 친한 페친, 개인적으로 잘 아는 페친들 많은 줄로 안다. 이 글은 김훈 자신과 김훈의 문학을 위해서 김훈이 거대 언론의 정치적 야욕으로부터 1mm라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올린다.)
* 김훈 작가의 전두환 찬양기사와 내 새끼를 그리워하는 내 새끼 지상주의자 김주대의 음주 장면 함께 올린다.
노정태
4 d
  ·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N.NEWS.NAVER.COM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들은 교

===
TaeKyung Lee
1 d
  · 
측은지심조차 없는 이야기꾼 김훈  
1. 김훈이 중앙일보에 쓴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를 읽었다. 어떤 내용일지 대강 짐작은 갔지만 조국 가족까지 들먹였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읽었다. 
김훈의 비루한 글을 읽는 시간들은 무참했다. 김훈의 글은 거의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전체와 구조와 배경과 맥락에 대한 통찰과 관점이 생략돼 있다. 김훈의 글은 표피적 현상과 즉자적인 원인을 김훈 특유의 삼엄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실어나를 뿐이다.
김훈은 서이초 선생님의 자진의 근본원인을 난데 없이"한국인 특유의 내 새끼 지상주의"에서 찾으며 서이초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고간 힘 있고 돈 있는 흉수들에게 마땅히 물어야 할 책임을 전체의 책임으로 둔갑시킨다. 김훈이 돈 많고 권세 있는 자들의 패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걸 본질로 삼지도 않는다.
김훈은 학부모들의 갑질과 공교육 붕괴의 근본원인이 부정의하고 불공정하며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학벌피라미드라는 사실을, 한국사회에서의 교육은 입시의 동의어이며 입시는 학벌피라미드에서 서열을 정하는 전쟁터라는 사실을, 한국사회가 이미 신분사회이며 교육이 신분 세습의 합법적인 통로임을 말하지 않는다.
전체와 구조와 배경과 맥락을 생략한 채 표피와 원초적 정서에 기대는 김훈의 글은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는 걸 훼방한다. 어쩌면 중앙일보가 김훈에게 기대했던 것이 그것일지 모르며 그렇게 보면 중앙일보의 의도는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때로 혹은 자주 레거시 미디어들이 어떤 사건이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김훈을 호명하곤 한다. 김훈이 서이초 선생님의 자진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김훈은 그런 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레거시 미디어들은 김훈을 악용하는 걸 중단해야 하며, 김훈 역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청탁은 거절해야 옳다.   
2. 생각해 보면 김훈의 작품들은 남한산성 이후 동어반복과 중언부언 사이를 떠도는 느낌이 역력하다. 주제의식은 희미하고 얼개와 구성은 성기며 문장의 밀도도 떨어진다. 엄밀히 말해 김훈이 쓴 작품들은 모두 '칼의 노래'와 '강산무진'과 '남한산성'에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삼엄함과 비장함의 결정처럼 보이는 김훈의 문체는 기실 겨냥하는 목표가 없고 담긴 내용이 희미하기에 텅 비어 있는 기표와도 같다. 김훈은 아수라와 같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에 던져진 개별적 실존의 의지와 고투와 비애를 단문의 미학으로 표현하는데 그 끝은 대게 무의미와 허무다.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서 화려하지만 너무도 빨리 시드는 사쿠라 꽃이나 죽음을 탐미하는 듯 할복하는 사무라이가 연상되는 건 자연스럽다. 
3. 아주 오래전에 김훈이 검사들을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고 주저 없이 말한 적이 있었다. 명실상부한 검사들의 나라에서 백성으로 사는 심정이 어떤지 궁금하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아서 행복한지 묻고 싶다.
사족 : 김훈이 중앙일보에 쓴 글을 읽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문장을 발견했다. 이 문장이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아마 김훈이 조국 가족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레거시 미디어를 통한 것이 압도적일 것이다. 김훈이 조국 가족의 판결 결과 말고 변론의 전과정과 현출된 증거와 증언들을, 사건을 맡은 법관들의 유무죄 판단과 양형의 적부를 상세히 살폈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김훈이 그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조국 가족에 대해 인격살해식의 발언을 거침 없이 한 것이라면 김훈은 소설가 자격이 없는 자다.
설사 그런 노력 끝에 한 말이라고 해도 김훈이 용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있는 가족에게 저런 소리를 거침 없이 한다는 건 측은지심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맹자께서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정작 김훈 자신이다.
Groups
Border Peace School 국경선평화학교/평화의씨앗들-철원
Public · 1.4K members · 8 posts a month
(Seeds of Peace)이란? 1. 이란? 은 ‘내가 평화의 씨앗이다’는 각성을 하고,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누구든지 남북한 평화통일의 비전을 가진 사람이면 ‘평화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씨앗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남북한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실천하는 모든 활동은 운동입니다. 모임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남북한 평화통일을 일상 생활에서 잊지 않고 마음 속으로 늘 소망하고 기원하는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2. 목표 은 첫째, 남북한 평화통일을 기도합니다. 둘째, 평화통일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셋째, 평화통일과 그 이후 사회를 위해 일 할 피스메이커를 키우는 일에 동참합니다. 3. 기독교인들의 모임인가? - 모임의 성격 반드시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일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의 차이와 관계없이 평화의 영성,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회와 같이 정기적인 예배와 기도 모임을 하는 곳에서 모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조직적인 단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평화의 씨앗’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롭고 즐거운 일상 생활 속에서 쉽게 하는 평화통일 운동이 되고자 합니다. 은 남북한 평화통일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의 평화기도 운동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작은 소 모임으로 남북한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비로서 기쁘고 평화로운 남북한 통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이것이 운동의 목표입니다. 4. 어떻게 만드는가? 누군가 한 사람이 남북한 평화 통일을 잊지 않고 일상 생활의 자리에서 꾸준하게 실천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운동은 시작됩니다. 한 사람의 평화의 씨앗이 출발점입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으면 몇 배로 증가합니다. 평화 운동은 씨앗의 생명 번식 운동입니다. 그래서 운동이 됩니다. 먼저 이 비전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각성된 사람이 나와야겠지요. 주위의 사람들에게 권고하여 함께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 모임은 교회 안에 기도의 활력을 만들고, 교회가 민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4. 모임 장소와 운영 방식 모이는 사람들이 형편에 맞게 정하면 됩니다. 여기 철원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은 매일 오후 3시 소이산에 침묵으로 올라가는 침묵걷기 기도(Silent Walking Prayer)를 하고, 꼭대기에서 다함께 앉아 10분간 조용하게 평화통일을 기원합니다. 평화를 기도하며 걷는 길을 우리는 평화기도순례(Peace Prayer Pilgrim: PPP)라고 부릅니다. 을 찾아오시면 평화기도순례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맞게 남북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행동양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5. 네트웍 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널리 펼치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남북한 평화통일을 기도하는 이들은 이라는 운동 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협력합니다. 작성: 정지석(철원 평화의 씨앗)


14 friends are members
조선학교채널
Public · 1.8K members · 8 posts a month
특히 한국에 계시는 분들이 조선학교에 대한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민족끼리 교류를 깊여갑시다~
5 friends are members
기후위기비상행동 그룹
Public · 5.8K members · 4 posts a day
11 friends are members

==

김학범
8 h
  · 
다음 책은
(태극기 부대 피었습니다)? ㅎㅎㅎ 💕 💜 💏
김삼열
17 h
  · 
스스로 친 무지의 덫에
본인이 낚인 것일 뿐
그의 정체가 이렇게 들통난 것이 
다만 그나마 다행이랄 까
&
#김동규 님의 글
<김훈의 기고문에 대하여>
1.
그의 글은 항상 그렇다. 유려하게 똑똑 끊어지는 문장. 비장미를 양념처럼 듬뿍 뿌린 산문. 그러나 결연하고 단호한 ‘장엄’의 휘장을 한 겹만 들추면 드러나는 표피적인 세계 인식.
김훈이 중앙일보에 쓴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을 읽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 그리고 그것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3만명 교사들의 광화문 집회를 보고 쓴 글이다. 절반 정도는 집회 장면의 단순 묘사다. 검은 상복 입은 교사들이 거듭 외쳤다는 ‘공교육은 죽었다’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평범한 인용들. 이런 자리에 어떤 정치세력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개탄. 
2.
여기까지는 읽을 만하다. 
문제는 글의 절반을 지나면서 나온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한국인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 탓으로 돌리는 거다. 
그는 이 유전자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라고. 
뭐 별다를 건 없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숱하게 논의되고 비판되어 온) 우리 사회의 극단적 가족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 
나는 (당연히) 뒤를 이어 그 같은 천박한 사회심리적 병폐를 뿜어올린 시스템적 질곡을 그가 비판하리라 생각했다. 예의 날카롭고 단호한 문장으로. 
3.
하지만 이게 끝이다. 이런 문제를 입에 담으려면 그러한 문제적 집단심리를 만들어낸 근(近) 역사적, 구조적 뿌리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돈이 모든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되고 다시 그것이 권력화되는 금권자본주주의의 극단. “고객이 왕이다!”라는 슬로건이 초등교육 현장에까지 독안개처럼 퍼져버린 세상. 내가 낸 세금으로 내 아이를 학교 보내니, 선생도 내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그악한 교육 상품주의. 
이런 요인들이 마침내 교사의 가르칠 권리 자체를 짓밟는 괴물이 된 사회적 배경을 최소한이라도 주목하고 지적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김훈의 기고문은 일종의 무속적 DNA 학설을 넘어서지 못한 그저 피상적 내용이었다.   
4.
가장 꼴불견은 자신의 그 같은 ‘학설’을 증명하겠다고 뜬금없는 사례를 끄집어 낸다는 거다. 사회지도층 위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 사례를 들다가 (아마도 의도적으로) 갑자기 조국 이야기를 꺼낸다. 해당 문장은 이렇다.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의 부인”이라고. 
두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조국과 그의 일가족이 멸문지화의 처절한 사법적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김훈은 뉴스에서 한번이라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 이지메의 형극을 통과 중인 한 자연인을 두고 던지는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의 지위”에 올랐다는 표현은 역설적 조롱이거나 아니면 지독한 착종적 판단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정경심 교수에 대한 실형과 조국 가족 모두가 겪고 있는 법적 징벌의 배후에 깔려있는 (윤석열 정권 등극을 목표로 진행된) 뚜렷한 정치적 공격의 본질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면 새카맣게 망각하고 있거나. 
검찰개혁 흐름이 시작된 지난 5년 간 조국과 그의 가족을 둘러싸고 어떤 비극이 진행되었는가를 그는 인식 속에서 완전히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 일가에 대한 광범위하고 집요한 징벌이 과연 ‘저지른 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수사와 판결의 형평성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누가 목소리 높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5.
김훈의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가 쓰고 말한 과거의 흔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광주민주화항쟁의 피웅덩이를 딛고 전두환이 권좌에 오른 1980년 8월 24일 그가 한국일보 전면 기사로 쓴 것이다. 제목은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사진 1). 제 정신으로 썼든 억지로 썼던 역사적 부역의 글이다.  
두 번째는 2000년 9월 27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그가 떠들어댄 다음의 내용.
“(재벌이 아들한테 회사 물려주는 거) 그거 한심하지만 불가피한 거라고. 나도 내집 아들한테 물려줄 판인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개선할려면 재벌이 자본을 인간화해 리더십을 보강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재벌이 무너지면 우리가 무너져. 노동자들이 무슨 연대를 해.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서 제일 보수주의잖아. 무슨 신기술 도입하면 저항하고 구조조정에 저항하고… 노동자들이 제일 보수적이고 재벌 리더들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나는 <조선일보>를 아주 좋아해서 평생을 보는데, 가장 우수한 신문이더만. <조선일보> 사설 같은 걸 보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소름이 쪽쪽 끼친다고. 우리 기자들보고 이것 좀 보고 배우라고 하지. 근래 들어 정권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게 <조선일보> 
한 인간이 인생의 20년 단위로 이런 표현을 꾸준히 내놓는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평생을 두고 큰 변화가 없다는 한 증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서 김훈이 그그저께 중앙일보에 올린 글도 (색깔과 주장의 지점이 조금 이동하기는 했어도) 결국 수십년 간 변하지 않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얄팍하고 즉흥적인 마초주의.
HyeonGyu Choe
4 d
  · 
아침에 신문 읽다가 너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옮겨본다.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21TOS.TISTORY.COM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출처: 중앙일보(2023/08/04) [특별기고]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
Cheul Wan Park
12 h
  · 
공감!.
Jong Cheol Lee노장의 꿈 시즌 2
Jong Cheol Lee  · 
14 h
  · 
<김훈과 김민웅 둘 다 틀렸다!>
1. 중앙일보의 '내새끼 지상주의의 파탄'(https://news.koreadaily.com/.../20230803140047173.html)에 나온 김훈의 논지는 간단하다. 그는 서이초등학교의 젊은 여교사의 죽음에 절규하는 교사들의 집단 농성을 취재하면서 그것의 핵심 본질을 '내새끼 지상주의'로 규정했다. 여교사의 죽음은 학부모의 악성 민원 때문이며, 이는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 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런 태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층에서 더욱 잦고 위협적이며, 이로 인해 공동체의 가치가 완전 훼손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논지 끝에 김훈은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조국과 그의 부인을 끌어들인다. 그들이야말로 '내새끼 지상주의'로 인해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란 것이다.

2. 사실 김훈의 논지는 일단 여교사 죽음의 본질을 '내새끼 지상주의'로 본 데서 피상적일 뿐 아니라, 조국 부부를 끌어들여 그것을 완성하려 한 데서 삼천포로 빠지고 만 것이다. 자기 새끼를 잘 먹이고 일등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망은 한국 부모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오래 전 플라톤은 가족의 사적인 욕망이 공화국을 망칠 수 있다고 해서 무리하게 '가족 공유제'를 주장한 바 있다. 헤겔 역시 내 새끼나 내 가족만 우선하려는 여성들의 사적 욕망을 '여성의 영원한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문제의 본질은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아니라 그런 사적 욕망을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적 욕망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 담장을 넘도록 그것을 방치한 책임이 훨씬 크다.

3. 특히 교육열이 강한 한국의 엄마들의 욕망을 교사 개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벽이 높다. 그러한 욕망은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로 치장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막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그것은 학교 당국이나 전교조나 교원 단체, 그리고 교육부 등이 나서서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막아줘야 할 부분이다. 왜 학생들 가르치기도 쉽지 않은 일개 교사를 학부모들의 이런 이기적 욕망에 맞세우려 하는가? 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교육 현실을 개선하고 교권 보호를 외쳐왔던 전교조는 도대체 이런 문제들을 두고 무엇을 했는가? 도대체 학교 당국이나 교육부는 이런 현상이 빈발하도록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로 교육 문제를 왜곡하는 위험한 논리이다.

4. 이번 교사들의 집단 항의 농성이 정치적으로 왜곡될 것을 우려해 일체 정치인의 개입이나 정치적 발언을 차단하려한 농성위의 충정은 이해할 수 있다. 시위 현장에 정치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김훈이 그것을 정치 부재나 실종으로 보는 것도 지레 짐작이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죽음을 '공교육 의 죽음'으로 끌고 가려는 것도 위험한 논리이다. 사실 한국의 '공교육의 죽음'은 훨씬 전부터 이야기된 것이고, 그 핵심도 학부모들의 학사 행정 개입 보다는 훨씬 더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다. 그것은 과도한 입시 위주 경쟁으로 인해 교육을 사교육에 맡겨 버린 학교 현실에 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교사들에게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제쳐 놓고 은근 슬쩍 젊은 여교사의 죽음을 공교육의 죽음으로 바꿔치려려는 것은 사태의 왜곡이나 다름없고 무책임한 것이다. 참으로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서 교사들 역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며, 만약 그 과정에서 학부모 민원이 방해가 되었다고 한다면 학교가 제도적 차원에서 막는 것이 순리다.

5. 김훈이 '내새끼 지상주의'를 조국 부부로 물타기하면서 완성하려 한 것에 대해 김민웅 교수가 발끈한 것(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2)은 나름 일리가 있다. 난데 없이 조국 부부를 소환한 것도 문제지만 같은 논리로 정순신 이동관을 빼는 것은 편파적인 논리라는 것이다. 이런 볼멘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영세불망'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쓴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조국 부부가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김민웅은 공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치를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을 잘 파악했다. 하지만 김민웅이 공교육의 문제를 일관성 있게 파헤치지 못하고 엉뚱하게 김훈에 대한 인신 공격성 발언으로 몰고 간 것은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런 배경에는 평소 김훈 작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탓이 있을 것이다. 

김민웅은 엉뚱하게 논지를 비약시켜서 지식인 김훈의 파탄 운운하면서 <칼의 노래>에 나온 이순신의 감정 묘사 까지 시비를 걸고 있다. 왜적과 선조에 둘러쌓여 이순신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 것은 오로지 김훈의 해석일 뿐 그것을 제 3자가 가타부타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시비 건다고 하더라도 왜 여기서 하는 지가 설득력이 없다. 논쟁에서 인신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아주 궁박한 오류일 뿐이다. 진영 논리가 앞선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란 말은 표현 상으로는 강렬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과녁을 잘 못 맞춘 것이다. 김웅의 김훈 비판 역시 필자가 보기에 감정이 앞서다 보니 정작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지 못했다. 만약 지식인 김훈의 글을 파탄이라고 한다면, 김웅의 비판 역시 파탄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김훈과 김민웅 둘 다 틀렸다!
CONTENTS.PREMIUM.NAVER.COM
김훈과 김민웅 둘 다 틀렸다!
1. 중앙일보의 '내새끼 지상주의 파탄'(https://news.koreadaily.com/2023/08/03/society/generalsociety/20230803140047173.html) 에 나온 김훈의 논지는 간단하다. 그는 서이초등학교의 젊은 여교사의 죽음에

==
'칼의 노래' 지은 김훈, 그의 붓이 부르는 슬픈 노래
김민웅 칼럼
mindle@mindlenews.com
민들레 광장
입력 2023.08.07 20:20
=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 촛불행동 상임대표​
==
중앙일보에 실린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라는 김훈의 글은 교사들의 입장을 옹호하겠다고 쓴 칼럼으로 보인다. 그것도 ‘특별기고’라는 대접까지 받았다. 그런데 읽어 가다가 도중에 이게 뭐지? 하게 된다. 교사에 대한 갑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조국을 난데없이 끌어들이고, 논지의 타당성이 전혀 정돈되지 못한 횡설수설이었다.

이런 수준이라면 중앙일보가 고료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쓰지 말아야 했다. 자신없는 글을 쓴 셈이고. 부끄러운 매명(賣名)이 되었다. 김훈이라는 작가가 지닌 무게에 의문부호를 별로 달지 않는 한국사회인지라 이 칼럼을 사소하게 넘기기는 어렵다.

정작 파탄이 난 것은 김훈이 아닌가?

‘지 새끼만 끼고 돌기’가 교육 붕괴의 주범이라고 몰아세운 그의 눈에는 자본과 권력이 짜놓은 노예교육의 감옥은 보이지 않았고, 걸핏하면 경찰과 검찰을 사병(私兵)으로 동원해 폭력으로 정치를 하는 자들의 비열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대체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그의 글은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이 아니라 김훈이라는 지식인의 ‘파탄’을 드러냈다. 부제로 붙인 ‘공교육이 죽고 그가 죽었다’가 아니라, ‘김훈의 문학이 죽고 그가 죽었다’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은 이렇게 되기 전에 과연 온전하기는 했던가? 혹 그의 문학은 애초부터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김훈이 쓴 중앙일보 칼럼은 그 연장선의 논지는 아니었을까?

<칼의 노래>는 무엇을 노래했는가?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 저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둘 곳 없었다.” 왜적의 거침없는 공격을 막아야 하는 임무는 조정(朝廷)의 미망(迷妄)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그는 쓰라리게 고독했다. 공적(功績)을 치하하기는커녕 시기심으로 자신을 베려고 한 임금이 야속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민중을 몰살할 적을 막아낼 기운을 스스로 꺾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결전의 시각이 닥쳐온다. 하지만 막아내야 할 바다는 너무도 넓었다. 어찌 할 것인가.

<칼의 노래>에서 김훈의 그린 이순신 장군의 고뇌였다. 짧은 문장이나 그 안에 있어야 할 풍경을 담아낸 명문(名文)으로 읽힌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허망한 기교에 불과하고, 장엄한 운명 앞에 홀로 선 이순신의 내면을 도리어 황폐한 것으로 만든 셈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만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게 된 이순신의 죽음이란 “나는 몸둘 곳 없었다”라며 어차피 승전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이 예감된 자가 준비하고 자초한 자결(自決)을 향한 숨죽인 비명처럼 들리고 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독백이 김훈에게는 가능해진다.

“나는 각오되지 않은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죽음이 끝장나는 것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전쟁 중에 흉탄을 맞아 숨을 거둔 이의 최후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어쩔 도리 없다고 비관한 자의 죽음이 되고 만다. 욕되다. 그건 세상을 온통 긴장시키는 칼의 노래가 아니라, 부러진 칼의 신음이다. 대장군은 군주제의 칼과 적의 칼 사이에서 몸둘 곳이 없다고 여긴 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죽을 자리는 분명했다. 사생관(死生觀)이 확고한 명장(名將)의 혼이 김훈의 손에서 염세주의자의 탄식이 되어버렸다. <칼의 노래>가 한성(漢城)의 지가(紙價)를 올렸을 때 불안 불안했던 이유다.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문재(文才)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진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칼의 노래> 첫 대목으로 명성이 높은 문장이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치를 그려낸 듯하다.

그런데 그 안에 역사가 실종되어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역사소설에 역사의식이 먼저 소멸하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그에게 너무 멀리 있는 섬이었나보다. 가령,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첫줄 하나가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그 문재(文才)를 가지고 원래의 본문을 살려내면서 이렇게 이어냈다면 어땠을까? “섬이 버려졌다고 꽃마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어나는 꽃들은 피어나면 누군가가 이내 짓밟고 또 짓밟고. 그래도 피어나기를 멈추지 않고 어느새 숲이 되었다. 숲이 된 꽃들은 결박된 사슬을 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 깊은 바다 속에서 매일 밤 울음을 삼킨 칼이 되고 있었다. 한산의 달빛은 점점 예리해져갔다”라든가. 이순신의 칼은 정치가 녹슬게 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모르게 날을 벼리고 있었지 않은가?

김훈의 문학은 웅장한 역사를 사소하게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굴절된 진실을 잡으려고 그랬겠지만, 그러다가 정작 잡아야 할 혼을 놓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 의외로 짧다. 다양한 인간과 폭넓은 관점을 그려내야 하는 작가로서는 심각한 난관(難關)이다. 그가 쓴 칼럼도 다르지 않다. 세밀하게 보겠다고 나섰지만, 문제의 뿌리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

‘정치적 당파성의 오염’이라니?

중앙일보 기고에서 김훈은 현장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라니? 정치를 말하는 교사는 오염된 교사라는 말인가? 그가 말하는 정치적 당파성이란 뭔가? 그저 낙인 아닌가?

교사들의 집회에서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요구는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동의하기는 어렵다. 정치와 분리된 교육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정치 밖에 따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법은 없을 것이다. 권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오늘날 교육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염 운운으로 끌고 가고 있는 김훈의 논법은 누구를 지탄하고 누구를 방어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의 논리는 더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교사와 학부모는 서로 적대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며, 이 모든 사태의 핵심과 배후 또는 주범은 ‘학부모’라는 김훈의 대단히 난폭한 결론이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와 전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존엄, 권위를 실질적인 권한으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그건 비껴가고 학부모를 이 모든 사태의 배후로 설정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내 새끼 지상주의’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에게는 학부모는 ‘익명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정체는 숨기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정순신 이동관은 빠지고 조국은 들어간‘내 새끼 지상주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상대를 괴롭히는 진상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가 펼치는 논법 속에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지점에 가면 특권을 가진 세력의 갑질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비판받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검찰출신 정순신의 경우도 그렇고 언론장악에 나선 이동관의 경우는 더더욱 김훈이 쓰는 문장의 칼로 도리질 당하지 않을까 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들은 김훈의 명단에서 빠진다. 학폭과 그걸 무마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은 이 정밀한 문장을 쓰는 작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된 눈이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라고 하더니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라고 느닷없이 조국과 그의 가족을 호출하고 ‘권귀의 대표’로 낙인찍는다.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들을 멸문의 고통으로 몰아놓은 정치검찰의 악행은 이로써 내 새끼 지상주의를 단죄한 정의로운 공적이 된다. 더군다나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올랐다니? 그가 이 글을 쓴 정작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로써 드러나게 된다. 조국의 자녀들이 어떤 결단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지 그건 그가 알 바가 아닌 거다. 이건 글이 아니라 명백한 행패다. 그의 글은 그래서 교육의 현실에 대한 해법 모색의 노력이 부재중이다.

우리 함께 불러야 할 노래는 진실의 노래

그의 글은 이렇게 마친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이 시대의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이 울음을 들어야 할 자들은 정작 따로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생각도, 의지도, 이유도 없다. 그들에게는 교육이란 권력을 대잇기 하는 통로이자, 나머지 국민들을 노예로 기르는 장치일 뿐이다. 이런 현실에 무지하거나 외면한 한 지식인의 헛발질이 참으로 허무한 결론으로 마감됐다. 그래서 그의 붓은 비가(悲歌)가 되었다. 또는 김훈의 지식인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애도(哀悼)가 되었다. 껍데기만 남은,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버려진 섬일까?

지식인의 몰락과 붕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처참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어차피 그럴 현실이라면 이렇게 속히 정체를 드러내고 퇴장당하는 것이 낫다. 이게 어디 김훈에게만 한정된 문제이겠는가? 현실과 치열한 격투를 벌이지 않는 모든 지식인은 죽은 자들이다. 죽은 자들이 뱉은 말과 쏟아내는 글은 교묘하나 결국 궤변(詭辯)이다.

우리가 부를 노래는 시대와 정면승부를 서슴지 않을 때 나온다. 진실은 그렇게 자라난다. 그 안에는 궤변에는 결코 없는 뜨거운 혈관(血管)이 흐른다.

추천
154
반대
1
==

==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