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말해보자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지금처럼 비판해서는 안된다 1. 오염수 방류를 막을 논리가 없다
평소에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던 이들이 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냐고 따진다. 이미 얼룩소에 생각을 정리해 올려놓았지만 아무래도 유명하지 않은 내 탓이겠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내게는 오염수의 위험성에 대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의 과학적 지식이 없다. 전문가 집단의 판단을 신뢰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이 문제에 있어 "대체로" 전문가 집단의 판단은 방류의 위험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으로 보인다. 개중에는 IAEA와 같은 국제지구를 두고 '원자력 카르텔'이니, 일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제기구로서 존속하려면 마냥 편향적일 수만 없다. 나는 대체로 그들의 판단을 신뢰하고 아마 별문제가 없을거라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논리상에서도 이미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었듯이 현실적으로 방류를 막을 수단이 없다. 문재인 정부 시기 관련 부처들은 현실적인 수단이 없기에 한일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일본을 압박해 저지하자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주권국가가 방류하겠다는 걸 제약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게 현실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얼룩소 글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의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한중일+아세안 등의 전문가 집단과 시민사회를 모아 '동아시아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문제의 '대표성'을 지니게 하여 일본 정부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 사실 그렇게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일본의 시민사회는 일본 국가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염수 방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일본국가의 '정상국가화'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때도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반대운동만 하게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보통국가화 되고 전쟁가능한 국가가 되는 걸 막을 수도 없다 생각하지만, 만약 그런 사태를 방지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그런 견제력을 꾸준히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 사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삼중수소, 과학, 방류, 경제성 등이 아니라 "책임"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민주주의"가 되겠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내셔널리즘을 타격하고 한국이, 동아시아 공론장과 일본의 민주화를 주도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접근해야 한다. 2. 왜곡된 담론장으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담론장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미 담론장 자체가 왜곡되어 '자해'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문제를 다루는 담론장의 가장 큰 문제를 하나 꼽으라면 이 사안을 "과학"의 문제로 치환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치환하여 다루면서 한편에서는 상대편을 두고 '미개한 조선인'이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자력 카르텔'부터 시작하여 과학적 사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식의 반지성주의적인 발언까지 하고 있다. 물론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과학에도 "100%"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이라는 건 본디 '확신'과 거리가 멀다. 정치적 영역에서 특히 그렇지만, 무언가에 강하게 확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부분들이 가려져 있어야 한다.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무지의 상태가 되어야만 강한 확신을 지닐 수 있다. 물론 '무지의 베일'은 무언가를 보지 않아서 쓰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았기에 쓸 수도 있다. 아무튼 합리적인 사람은 새로운 정보가 유입될 때마다 끊임없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근거는 아니겠지만 합리적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덕목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사안을 다루는 공론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흔들리는 합리성을 이용하여 '확신의 정치'가 자기정당화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 확실한 과학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래에는 지금의 판단이 부정될 수 있다는 일말의 여지를 이유로 현재의 과학적 판단을 부정하거나 배제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판단이든 부정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전문성의 영역 자체를 부정해버릴 수도 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쪽이나 반대로 그것의 부족함을 이유로 부정하는 쪽이나 궁극적으로 전문적인 영역과 과학적 문화라는 공론장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과학자가 전문성에 기초하여 발언을 한다고 했을 때 누가 그의 발언에 무게를 실어줄 것인가? 우리는 먼저 그 과학자가 어떠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는지부터 따지고 있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과 목적을 위해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면 공론장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지만, 존재할 여지조차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공론장이라는 건 어찌되었든 서로의 입장과 경험 등에 기초하여 상호작용을 하는 와중에 '보편성'을 창출하는 공간이다. 각각의 분야들과 영역들 내부에 통용되는 규칙, 자율성 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공동체가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공론장에서 공론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공론장을 매개로 하여 각자의 합리성이 치열하게 대립해야 비로소 협상의 여지가 생긴다.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양보할 수 있거나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공론장을 매개로 지지세력을 모아 힘으로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토대 자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리고 있다. 3. '책임'을 키워드로 접근해야 막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진영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고 싶다면 키워드로 삼아야 할 단어는 "책임"이다. 지금처럼 거의 반사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심지어는 과학적 문화의 토대마저 부정하는 논거까지 끌어들여 반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에 정확하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나중에 가서 정말로 지금의 오염수 방류로 인해,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알지 못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한다 치더라도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그들은 우리의 문제제기를 원래 반대했다며 '반일선동정치'라 낙인찍고 무시할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만들려면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를 넘어 동아시아 공론장에 대해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그 공론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일본을 비판할 수만은 없고, 한국과 중국의 원자력 처리수 방류 문제 등에 대해 점검해보게 될 것이다. 일종의 '반성적 사고'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북조선의 핵사용에 대해서도 공동의 플랫폼을 만들어 제어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북조선의 핵무장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그들의 핵 이용이 얼마나 안전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등을 점검하려면 그들의 우리에 대한 비판도 받아들여야 한다. 공론장이란 기본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렇게 논의를 거듭해 플랫폼을 만들면 비단 동아시아에만 적용되는데 그치겠는가. 계속해서 보편성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에서의 원자력 사용에 대한 합의, 플랫폼, 공론장, 그리고 '책임정치'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일본, 중국, 북조선, 한국 등의 주변국들이 왜 그러한 것에 의해 자신이 규제되어야 하냐며 거부할 수도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게 하려면 일방향적으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저들에 대한 비판의 기준이 나에 대한 반성적 사고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비판이라 보기는 어렵다. 비판받는 일본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국힘당 계열 측도 "반일정치" 운운해버리고 말 것이다. 공론장에서 상대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책임의 소재'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도쿄전력"이다. 도쿄전력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믿기 힘든 집단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2011년 3.11 대지진 이후에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였을 때도 도쿄전력은 노심용융, 즉 "멜트다운(meltdown)"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나중에 5년이 지난 2016년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도쿄전력과 관련된 저서로는 오시카 야스아키의 <멜트다운>(한승동 역, 양철북, 2013)을 참고하면 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왜 신뢰할 수 없는지에 대해 논픽션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정보를 은폐하여 책임소재를 줄이려고 하였던 도쿄전력의 행태는 이후로도 계속되어 후쿠시마 오염수를 처리할 필터 25개 중 무려 24개가 파손되었는데도 뒤늦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2019년에도 모두 고장났는데도 2년동안이나 관련 정보가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도쿄전력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은폐한 뒤에 몰래 필터를 교체하는 것으로 사건을 덮으려 하였다. 지금까지도 도쿄전력은 관련된 여러 비판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도쿄전력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건 그 배후에 있는 일본 국가가 시민사회의 비판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가는 시민사회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취급한다. 한국, 중국 등의 주변국들의 반발과 비판을 그저 '반일선동정치'로 매도하고 국내의 시민사회의 비판은 무시하니 이것이야말로 전제주의적인 국가 그 자체가 아닌가. 이러한 나라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 생각하는 한국 보수집단의 정신상태를 정상적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보진영이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민주화'라는 키워드를 잡고 '책임'의 소재를 명료하게 하겠다는 방향으로 내부개혁과 외부연대를 동시적으로 행해야 한다. 한국이 동아시아 공론장을 선도하며 내부의 정보의 불투명성, 비민주성 등을 제거하고 외부의 국제주의적인 연대를 이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적어도 그러한 방향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국내에서만이라도 제대로 된 공론장이 기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치가 기능하기를 바란다. 4. 동아시아 공론장이라는 꿈같은 논리를 넘어, 앞으로는?
하지만 이미 사태의 진행은 내가 바라는 방향성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동아시아 공론장'의 형성은 꿈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사태는 크게는 동아시아를, 작게는 한국을 반으로 분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출발점은 당연히 지금 여기, 분열되어 있는 한국이 되어야 한다. 이전의 얼룩소 글에서 지적했지만 윤석열의 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일본의 신뢰성의 문제를 "우리 정부의 신뢰성"의 문제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한국이 책임을 묻는 주체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는 오염수 방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겁하기 그지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입장이 없다는 이유로 침묵을 했으면 모르겠지만 국힘당 의원들까지 대규모로 나와서 반일선동정치 운운하고 있는 마당에 찬성이 아니라 강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비판하는 측의 입장은 좀더 정교하게, 더 정치하게 이뤄져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있어서 왜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는지, 그 책임은 어떻게 지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 지윤평 1편에서 말하였듯이 윤석열 정부의 성격은 "사회적 주체가 없는 정치"라 할 수 있다. 주권자가 사회적 주체와의 상호작용 없이 '결단의 정치'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제어하고 견제하며 책임을 지게 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권력행사가 가장 잘 이뤄지는 외교 영역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하면서 '사회적 주체'가 없는 정치, 다시 말해서 권력행사와 관련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사라진 정치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채널에서는 그를 위해 먼저 "공론장"이 무엇인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이후의 사태를 대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아침에 이 기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나는 굳이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갈등비용만 폭증시키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윤석열 정부를 비판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문제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일본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신뢰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 모든 의문점들을 하나로 추려내면 "일본은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인가?"가 된다. 3.11 대지진 이후의 상황을 볼 때는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게 객관적인 현실이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너무나도 많은 비합리적인 행위를 했고 믿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우리의 입장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사안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취해야 하는 태도는 일본 정부로 하여금 신뢰성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그들"의 문제이다. 윤석열 정부가 취한 실책이란 '저들'의 신뢰성의 문제를 "우리 정부의 신뢰성의 문제"로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https://alook.so/posts/vKtRrXw
일본 정부로 하여금 보다 신뢰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고 유도하며 한국이 "보편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갈 필요가 있는데 이것을 굳이 국내의 정쟁에 끌어들여서 과학에 대한 신뢰기반도 무너뜨리고 일본 정부의 신뢰 문제를 한국 정부에 대한 신뢰성 문제로 바꿔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런 비용을 감수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것이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윤석열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원전 관련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국민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해서, 한마디로 "계몽"되지 못해서 문제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아직도 광우병 시위가 괴담 때문에 생겼다고 믿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자처해서 자신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로 패러다임을 바꿨기 때문에 광우병이든 후쿠시마 오염수든 정부 여당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은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 비판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백신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우파들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나? 온갖 신박한 음모론 다 동원해서 백신에 대한 공포 조장하고 문재인 비판했다.
논점은 과학적 사실 자체보다도 과학적 사실을 수용하는 우리의 담론적 지형이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판단도 앞으로 계속 변할 것이다. 가령 지금의 기준에서는 오염수 방류를 허용할 수 있어도 나중에 더 많은 과학적 사실이 밝혀져서 오염수 방류가 잘못된 것이라는 과학적 결과가 나오면 지금 우럭 처먹어도 된다는 한국원자력회장 같은 인간들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책임을 질 생각도 없겠지만 지게 만들 수도 없다. 사형시킬건가 어쩔건가. 과학적 사실 앞에 대중들이 겸손해야 한다면, 마찬가지의 이유로 과학자들도 겸손해야 한다.
정치가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해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국가가 특정 인종, 계층, 계급, 집단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방기하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학살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역사가 증명한다. 공론장이, 의회가 중요한 건 그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준석 이전에 그 누가 감히 페미니즘에 대놓고 정신병 운운했는가. 이준석 같은 정치인이 나와서 해도 된다는 시그널을 사회에 제시하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온갖 인간들이 다 페미니즘 공격을 하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게 다 이런 식이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과학을 잘 몰라서, 계몽되지 않아서, 무식해서 등등이라기보다는 정쟁의 영역으로 넘어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컨센서스가 특정 진영 내에 공유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정치는 그걸 설정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기에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다.
권력은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특정한 목소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데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시즘이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극단적인 정치형태인 건 파시스트들의 무제한적인 용인을 전제로 대중이 스스로 사회가 설정한 한계선을 무너뜨리며 나아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 운동 속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파시즘은 가장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해방운동"의 성격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그 자체의 전개과정에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규제, 한계선 등을 파괴할 파시즘 운동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가 정말로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을 멈추게 하고 싶다면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걸 넘어 어떠한 담론적 지형을 형성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할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한다. 김민하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저쪽'이 싫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이 곧잘 펼쳐지게 된다. 세월호 음모론, 조국사태 등의 한국 사회의 온갖 논란의 근원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한계선을 긋는 걸 포기한 한국 사회의 무능함이 자리하고 있다. 아래의 (사)변화를꿈꾸는과학기술인네트워크(ESC) 김찬현 대표와 김래영 사무국장의 말을 한국 사회는 새겨넣어야 할 것이다.
"‘오염수 방류가 안전한지에 관해서는 오히려 과학이 답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찬현 대표는 “안전하다는 ‘과학적 판단’과 방류 결정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별개의 문제”라며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더라도 정부는 오염수 방류 결정을 규탄할 수 있다. 결국 최종 결정은 정치가 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과거에 환호를 받았던 과학적 판단이 현 시점에 와서 외면 받거나, 과거에 외면 받았던 과학적 판단이 현 시점에 와서 지지를 받는,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흔해요. 실제로, 수십 년 전에는 ‘화석연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과학자들이 절반 정도였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잖아요.”
"김찬현 대표는 “과학적 판단에 대한 오류로 그 피해를 감당하는 것은 사회 전체다. 결국 책임은 시민들과 사회 전체가 지는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결정하지 못하는, 또는 정치가 결정해줘야 하는 영역이 따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 김래영 사무국장은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과학을 경제파트에서 다루고 있지만, 우리 단체는 과학을 문화의 한 종류로 인식한다”며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과학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본 기사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터뷰였다. 읽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아 관련 기사들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내 감상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였다.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실, 각 부의 장관 등등이 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 혼자 그럴 수는 있는데 대통령을 보좌하는 이들 전체가 이 지경이라면 답이 없다. 일단 무언가 말들을 계속 하기는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수한 말들을 걷어내고 나면 '실천'만이 남는다. 이 실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씩 따져보자.
1. 도대체 법치란 무엇인가?
우선 첫 부분부터가 탁 막힌다.
"이 장관은 이날 인터뷰의 상당 시간을 노사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했다.
그는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고 자연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는데, 사회에는 갈등이 있기 때문에 질서가 요구된다"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사회 규범이며 그 최고 형태가 바로 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은 대선후보 시절에도 법치와 준법을 구별하지 못했다. "노사 법치주의"라는 말을 내가 법학에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석열한테서 처음 들어봤다. 보수우파들이 법치와 준법을 구별 못하는 게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SNS를 오랫동안 하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한 10여년 전에도 뉴라이트 식이기는 했지만 '청년정치'라는 게 있었더랬다. 당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윤주진이라는 '청년' 보수가 SNS에서 보수의 입장을 대변한다며 많은 발언을 했는데 거기에도 '법치주의'가 무너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떼법" 때문에 법치주의가 무너지니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와 같은 주장에 격분해 법치와 준법의 구별에 대해 한참 설명하며 비판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나의 지적이 맞다면서도 오늘날에는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보다 대중이 더 강한 권력을 지녔기에 대중이 준법을 하는 게 곧 법치주의가 된다고 말해서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뒤로도 그는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법치'라는 게 뭔가?
법치주의라는 건 기본적으로 전근대 사회에서의 군주의 자의적인 통치, "인치(人治)"에 대비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권력의 행사를 "법으로" 규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뒤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인치와 법치는 사실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사 법치주의'라니? 노동자와 기업이 국가라는 말인가? 국가는 사라져도 시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법치'가 문제가 되는가? 법치국가에서 주권의 행사는 국가 및 모든 국가 작용이 법에 "구속"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으로서의 주권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법(法)'과 관련이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법치국가"에서는 그것이 규범 및 규범의 연역으로서의 법과 상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본디 법치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자의적인 "인치(人治)"의 영역, 주권자가 법에 구속되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의 '여지'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서의 주권자는 법체계 안으로 사라져야 한다.
근대사회에서 입법부가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행정부는 아무리 물리적인 폭력수단 등의 집행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입법부가 정한 틀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입법부가 자기 멋대로 법을 제정한다면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지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최대한으로 제한하는, 로버트 달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디슨주의적 민주주의'를 구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치'는 '인치'를 끝내 배제하지 못한다는 게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가 전 생애에 걸쳐 논증하고자 했던 부분이다. '법치국가' 내에서는 "주권자"를 제거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주권과 법치의 충돌은 외재적인, 서로 다른 원리 간의 충돌이 아니라 법치의 '내재적인 한계'로 인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헌법도 '법'이자 "규범"이기 때문이다. 규범으로서의 헌법, 법으로서의 헌법을 만들어낼 결정의 계기는, 그리고 그 결정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권위의 계기는 헌법 자체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입법부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 그 근거가 헌법으로 소급되지만 "최고"규범으로서의 헌법 자체는 소급되지 않는다. 헌법 자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누구의 의지가 반영됐으며 누구의 결정에 따라 "최고"규범이 되었는가? 이것은 궁극적으로 헌법 더 나아가 근대적 법질서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대혁명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로도 무수히 논쟁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라 지적한다. 근대 사회 내에서의 우리의 삶은 법에 의해 규율되는데 그 법의 최종적 근원으로서의 헌법은 누구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이 법의 적용을 받는 나의 의지인가? 36년 전의 1987년에 만들어진 제6공화국의 헌법의 의지를 2023년의 지금의 내가 왜 따라야 하는가? '일반의지'와 '개별의지' 간의 대립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내가 동의하지 않은 법을 왜 따라야 하는가? 법을 어기는 게 왜 나쁜가? 오히려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항하는 정당한 폭력행사가 아닌가? 법의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서 최고규범으로서의 헌법은 그 자신에게 "최고", 규범들 중의 "최고" 규범의 지위를 부여할 결정권자와 권위체를 요구한다. 이른바 "헌법의 수호자"이다. '헌법의 수호자'는 대통령이 될 수도, 헌법 재판소가 될 수도, 국가원수일 수도, 의회일 수도, 사법부일 수도, 입헌군주일 수도, 심지어는 국민 자체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들 모두이면서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핵심적인 문제는 이들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기능하는 것은 헌법으로부터 그 최고 결정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법치국가에서의 헌법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자신에 의거해 해결해야 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법치국가는 이 모순을 최대한 유예하려 결정의 여지를 없애려 최대한 노력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최종적으로 헌법에 의거하는 한 헌법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결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법의 지배가 무한소급 속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할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근거가 되는 주권자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법의 자기실현에 있어서도 결정의 계기가 필요하다. (헌)법은 앞서 말했듯이 "규범"이다. 법은 사회라는 대상을 규율하기 위한 규범으로서 존재하며, 만약 그에 실패하면 법은 자신의 존립기반을 잃게 된다. 그런데 법의 규율 대상인 개별적인 사건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해서 "사회"라는 대상은 "구체적"이다. 규범으로서의 법이 지닌 추상성과 일반성과 달리 사회적 행위는 대부분 구체적이고 특수하다. 따라서 규범으로서의 법, 더 정확하게는 법조문 자체가 사회 전체를 포괄할 수는 없다. 법조문에서 아무리 연역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법의 "해석"과 그 해석으로부터 도출되는 결정의 정당성을 놓고 대립한다. 즉,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듯이 법이 규범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구체성을 부여할 "외적인 계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곧 결정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 그 자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면 법은 기능하지 않고 존재근거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것이 사회적 정의(正義)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판결을 통해 법이 '실현'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치는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결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그 결정을 수행하는 "주권자"의 폭력을 수용하며 살 수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주권자'의 의지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이유로 그것이 공화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심지어 차리즘 전제군주정이든 '부르주아 독재'라는 범주에 넣어 비판하는 것이다. 그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한 주권의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는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의 성격을 "과도기"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치'와 '법치'를 서로 대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가?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규율하는 규범이 반드시 곧바로 '법'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의에 대비되는 '규범' 혹은 '합의'에 따른 규율 중의 일부가 "법"으로 제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규범을 창출해내는 기구는 이미 근대 사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의회, 입법부이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논의했듯이 부르주아 공론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위치는 의회일 수밖에 없다. 의회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편화하며 공공성을 산출해내게 된다.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의회라는 공론장에서 논의를 하고 합의하는 형태가 반드시 법의 형태로만 나타날 필요는 없다. 근대적인 정치의 역할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정치의 역할이란 법을 통해 사회적 주체들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주체들 간의 합의를 공개성과 토론, 그리고 공공성에 입각해 주조해내는데에 있다. '노사 법치주의'라는 희한한 조어를 통해 윤석열 정부와 그 장관들은 사회적 주체와의 타협을 통해 공동체의 공공성을 확립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라 되려 사회적 주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거듭하고 있어 상당한 우려를 갖게 한다. 법치주의는 노사가 아니라 윤석열 정부 자신을 규제하는데 사용되어야 하는 조어이다. 대상이 주체 노릇을 하려는, 거꾸로 된 시대에서 이정식 장관은 춤을 추고 있다.
2. 사회적 주체가 없는 정치
이어서 계속 이정식 장관의 발언을 살펴보면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의 필요성 부분인데 이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 정부가 내건 노동 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인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그는 "요즘 뉴스에는 건설사를 협박해 돈을 뜯어낸 '조폭 같은 노조' 보도가 나온다"며 "노조의 생명은 자주성과 민주성으로, 회계를 투명하게 운영해야 스스로 당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와 건설업체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낸 "조폭 같은 노조"가 무슨 관련이 있는건가? 후자를 잡아내려면 형사법과 경찰, 검찰 등의 시스템적인 부분이 잘 갖춰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노조의 재정을 들여다볼 이유가 무엇인가? 노조를 재정을 들여다보면서 노조가 범법행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추적하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나올 수 있는 의문은 기업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내부 정보 공개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얘기는 또 안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은 계속 이어진다.
"근로기준법과 관련해서는 "1953년에 만들어졌는데, 그해에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있었다"며 "70년 전인 당시 공장과 노동조합, 노동자가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라며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70년간 유지돼 온 현재 고용·노동 체제는 시스템 안의 근로자들만 두텁게 보호해 임금, 복리후생, 고용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격차를 확대하고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초래한다는 것이 이 장관의 진단이다."
비록 노동사회학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정이환 교수의 고전적인 연구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현행 이중구조는 IMF 외환위기 이전의 1980년대 후반의 노동자 대투쟁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거기서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것은 노동자의 성과를 기업 등의 사용자들이 "평가"하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격한 반발이 현재의 정규직 보호와 비정규직 배제라는 이중구조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류석춘과 같은 뉴라이트 사회학자 또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산별노조의 도입성에 대해 주장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노동부 장관이 갑자기 70년 전의 법체계 때문에 이중구조가 발생했으니 법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의 노동자들이 무슨 거창한 혁명 이념이나 이런 걸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급진적인 정치적 지향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인간은 본래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현실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임금을 원할 뿐이다. 실적을 평가하는 권한을 기업가가 쥐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공정"할 것인지, 내가 기여하는 혹은 원하는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줄 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1980년대 후반의 노동자들은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것을 깨려고 한다면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의 가치 측정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그 객관의 기준이 무엇인지 등을 사회적으로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앞서 말한 "정치"의 역할이고 기능이다.
계속 가보자. 이정식 장관은 자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타국의 역사까지도 별다른 근거없이 왜곡시킨다.
"그는 "'유연안정성' 문제는 임금체계와도 연결된다"며 "우리나라의 연공형 임금 체계상으로는 일한 햇수만큼 임금이 올라가기 때문에 근로자가 한 기업에 종속되는데, 임금체계가 직무급제로 전환되면 다른 기업으로 옮겨도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조돈문 교수의 연구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유연안정성' 실험은 유럽의 노사관계를 가져온 것인데 이정식 장관은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체계와 "산별노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다른 기업으로 옮겨도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말이 성립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기업도 일종의 "공동체"이고 나름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직급'이라 하더라도 기업 내부에서의 가치평가는 전연 상이할 수 있다. 이 부분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및 아예 산별교섭체계로 바꾼 것인데 그런 전제조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기존의 현기차 중심의 대기업 노조 전체를 무너뜨리겠다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어떤 식으로 하겠다는건지는 말이 없다.
어디서 주워듣기는 한 것 같은데 본인이 직접 그것들이 실현가능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건들이 필요한지 고민해본 흔적이 드러나지를 않는다. 장관의 말이 주장과 그것에 기초한 실천으로 이뤄져 있는데 정작 주장의 디테일이 모두 성립하기 어려워 사실상 무용한 것이라 한다면, 남는 것은 "실천"밖에 없다. 사실상 이정식 장관을 비롯한 윤석열 정부는 기존의 현기차와 같은 대기업 노조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의도만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은 마지막 부분에서 사실로 입증된다.
"그는 노동계가 강하게 요구하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과 관련해서는 "파업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법 테두리 안에서 하면 손해배상·가압류 얘기가 안 나온다"고 일축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간접고용 노동자의 교섭권을 보장하고 쟁의행위 탄압 목적의 손해배상·가압류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와 경영계는 '노란봉투법'이 만들어지면 법적 분쟁으로 사회에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법 테두리 안에서" 하는 쟁의행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쟁위행위의 탄압을 목적으로 손해배상·가압류를 하는 걸 막겠다는 법인데 쟁위행의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완책이 없다. 애당초 손해를 안 끼쳤으면 될 것 아닌가? 라고 "노동부"의 장관이 말하고 있다. 본인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이정식 장관의 말에 따르면 노동쟁의행위는 애당초 봉쇄될 수밖에 없다. 손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파업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일 다 끝나고 남들 다 퇴근한 다음에 모여서 시위하면 되는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3. 정치가 실종된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부터 대통령실, 장관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말들만 한다. 대선후보 시절에도 그랬지만 그나마 그때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조금 숙이는 게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사라져버렸다. 이정식 장관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났지만 윤석열 정부는 입법부를 이용하지 않고 사회에 개입한다. 어떤 식으로? "저기에 불법이 있다." 노조부패라는 희한한 조어를 내세워서 노조에게 무언가 불법의 여지가 있으니 형사법적인 국가폭력이 개입해서 조정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여기에 대화, 공개성, 토론 등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정치는 실종되고 판사봉이 춤을 춘다. 앞서 말했듯이 추상적인 법조문은 결코 사회를 포괄할 수 없다. 결코 법조문이 도달할 수 없는 사회의 구체성에 도달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불법성" 여부를 판별하기로 택했다. 행정부의 수반이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 사회적 관계를 조절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이런 시대, 이런 시대란 국가의 전제적인 지배에 맞선 새로운 보편과 구체의 변증법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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