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5

Park Yuha - 엊그제 인용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를 진보진영일각에서 비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 Facebook

Park Yuha - 엊그제 인용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를 진보진영일각에서 비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 Facebook: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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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인용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를  진보진영일각에서 비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소설을 읽어서라기보다 전두환을 옹호한 사실 때문 아닐까 싶은데, 전두환의 공적으로 알려져 있는 ‘연좌제’ 폐지는 이병주가 열심히 권한 결과였다. 

전에도 썼지만 80년대 경제호황은 전두환이 일본에 요구해 새로 받아온 40억달러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서울지하철 2-4호선이나 부산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동참했고 훗날 ‘노재팬’을 외쳤을 이들이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심지어 이병주는 박정희시대에 2년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이다. 동시에 바로 그 체험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으니, 그런 일이 없었다면 ’한국근현대사 자체‘로 높이 평가된 그의 방대한 소설작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 복잡성을 외면하고 단순화한 목소리는 그저 ‘구호’일 뿐이다. 필요시될 때 선동도구가 되는. 
21세기도 곧 4반세기가 지나는데, 우리사회에선 여전히 대화나 이해보다 (비판 아닌) 비난과 규탄이 앞선다. 
이병주가 탄식했고 결국 비극을 겪은 1950년 전후이후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 왔을까.

45 comments

Park Yuha

“고향에 돌아오자 놀랬어. 우리 마을은 백호 남짓한데, 좌익과 우익으로 완전히 두 동강이가 나 있더만. 우리 일가친척만 해도 20호가 되는데, 이것마저 분열상탠기라. 정치적 의견이야 어떻든 인간적으로 단합해서 살 수 있을 텐데 모두들 서먹서먹해. 괜한 일을 갖고 말이다. 찬탁이다 반탁이다 하는 기 농촌 생활에 무슨 관계가 있노. 찬탁이 어떻고 반탁이 어떻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기라. 그저 한 편은 찬탁해야 한다고 설치고, 한 편은 반탁해야 한다고 우기는데, 그래갖고 서로 말도 안 하는 기라. 어느 편이 옳은진 모르지만, 앞으론 큰일이 나겠드만. 머리카락만한 차이가 날이 갈수록 커져, 피차의 적대 감정이 상승작용을 하는 것 같애. 나는 멋도 모르고 대립하고 있는 그들을 화해시키려다가 반동으로 몰려 혼났어. 시골 사람들의 말투에 흔히 그런 기 안 있나. '그놈의 자식 죽여버려야겠다. 혼을 한번 내줘야겠다‘ 등 말이다. 옛날엔 농담으로 하고 듣고 하던 이런 말을 요즘은 그렇게 듣지 않는기라. '누구 누구가 주막에 앉아 누굴 죽일 모의를 하더라. 하는 식으로 말이 퍼지고, 그렇게 되면 이편에서도 '죽여야 한다. 대항해야 한다’는 꼴로 감정이 격화되어 가거든”
(<지리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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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dy Kung
이병주 선생님의 작품을 어린시절부터 따라가며 읽어온 평생 독자로서 선생님의 포스팅이 참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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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Kandy Kung 그러시군요. 전 10대때 읽고 이후 유학등등으로 소원했는데, 나이들어 다시 읽고 새롭게 발견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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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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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dy Kung
저도 10대에 시작된 것인데 세월이 한 참 흐르고 이제 이병주 선생님 책들을 이리저리 수집하면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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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Yi San
미국을 통해 일본에서 들여온 40억불이 경제 회복에 유용한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나, 80년대 중반까지 사실상 임금이 동결되고, 생산직 노동자 실질임금이 그 즈음부터 오르기 시작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79-82년이 아이엠에프만큼 심각한 경제위기였는데 여하튼 체제의 시각으로 보자면 잘 넘긴 것도 사실인데 연구가 부족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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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Yi San 물론이죠. 돈뿐 아니라 사람을 잘 썼다거나,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고 더 연구되어야겠죠. (이 글을 전두환 옹호로 읽을 사람은 설마 없기를 바랍니다.
)
임금 얘기를 한다면 최저임금법이 전두환시대에 제정된 것도 기억되어야 할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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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Yi San
Park Yuha 전두환 옹호로 읽을 사람은 없을듯요. 김재익이 얼마나 유능하고 뛰어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재익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온전히 실행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장영자 사건 계기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려했으나 실패했고. 최저임금법은 SDR을 월드뱅크에서 들어올때, 지적받아 제정됐다고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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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Yi San 디테일은 전문영역에서 논의하면 될 일 같은데요. 김재익평가를 제가 할 능력도 없고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저임금법도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실시‘했다는 사실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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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Kim Pro
박유하 전두환 옹호하면 안되나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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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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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San
Kim Pro 옹오하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 옹호하는 글이 아니라는 의미였을겁니다. 뭘 그리도 과도하게 읽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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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Ha Insuk
교수님 저개인적 으로 이병주 선생님 을 무척 좋아한담니다
중딩인가 고딩때 지리산을 밤샘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록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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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하인숙 80년대에 나온 책을 읽으셨군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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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Seongsoo Hong
인간 수명이 고작 평균 75년 정도인데, 과거에 대한 지식과 인과 관계에 대한 인식이 허술하다면, 심지어 왜곡하고 주장한다면, 결국 본인으로 끝나지 않고 후손들의 미래는 암담하겠죠.
아마 그런 사정을 직감하여 본능적으로 결혼, 출산을 포기하기도 하는 듯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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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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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Seongsoo Hong
양쪽 다 냉정하게 바라볼 시각을 가져다 주는 게 ‘시간’일텐데, 냉전체제가 이어지고 있는 탓에 그 시간이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 게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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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Seongsoo Hong
박유하 1800년대 말부터의 나라 역사 정본이 절실합니다.
영국 중등 교육 역사 수업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아주 촘촘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명예혁명까지.
특히 1차 세계 대전 전후사를 유럽 대륙의 사정과 함께 집중적으로 다루고 수능시험 단골 메뉴더군요. 추측컨데 영국 역사 학계에서 역사 교육에서 언급해야 할 항목에 대한 모종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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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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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국
'지리산'이나 '관부연락선'뿐 아니라, '소설 알렉산드리아', '변명'같은 지식인 소설도 대단했죠. 대학 3학년 때 그의 중편소설집을 읽은 뒤 그의 소설에 푹 빠져 대학도서관에 처박혔던 한 때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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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정승국 저도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만났어요. 동시대 독자를 만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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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InChul Lee
정승국 저도 그의 첫 소설이 소설알렉산드리아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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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Dong Ho lee
전두환의 과감한 과외금지 조치로 서민 자식들도 부잣집 자식이랑 같은 선에서 출발하게 되었죠 (가난한 대학생들은 몰래이긴 하나 여전히 과외 알바로 학비를 벌었구요) 노태우의 주택 200만호 건설로 서민들도 비로소 아파트에 살아 보게 되었구요
그 이후 진보 정권이 서민 삶을 얼마나 개선시켰는지 의문이고 특히 노무현 문재인은 부동산 정책 실패로 서민 삶을 오히려 도탄에 파뜨렸음을 부인할 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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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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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이동호 네, 공과는 함께 평가되어야 공평하겠죠. 그렇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감정도 이해되어야 할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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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Dong Ho lee
박유하 그 용서 못 하겠는 감정으로 자신들의 무능과 위선을 덮는게 너무 오래가니 이젠 과연 전노가 그렇게 죽일 놈들이었는지 회의가 들고 그 시대를 다시 보게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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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이동호 ’다시 보는‘건 언제나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재평가작업이 꼭 고평가나 다른 한쪽의 폄훼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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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Andy Kim
이동호 덧붙여 제경우 1974년 대학졸업후 박정희시절 아이들에게 미술 피아노붐이 일기시작하면서 배고픔에서 해방됐으며 1980년대 전두환시절 들어 가물에 콩나듯 그림을 팔리면서 붓을 놓지않을수 있었습니다.누가뭐래도 내겐 두대통령은 과보다 공이 크다할수있습니다.뭐 좌파들은 누가 집권해도 두사람보다 잘했을거라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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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Andy Kim 개인적으로 좋았다 해도 고문과 학살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감정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공부분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제 말은 ‘과보다 공이 크다‘가 아니라 역사는 언제나 공과가 함께 있고 후대의 특권은 그 양쪽을 다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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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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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 Ho lee
박유하 물론 피해자를 배려해야 하지만 숫자적으로는 사실 극소수이고 오랜 세월이 흘르는 동안 배상도 어느 정도 이뤄졌는데 요샌 피해 당사자도 아닌 자들이 완장질을 하면서 과거사를 생업처럼 활용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피해자의 목소리에만 짓눌려서는 안되고 말씀처럼 공과를 균형있게 보아야 하는데 그조차도 아직 하기 어려운 살벌한 분위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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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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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Kim
이동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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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The comment that 김찬기 is replying to has been deleted.
김찬기
이동호 군사정부가 정치와 인권을 빼면.. 대단하죠..
반면에.. 진보정권은 인권과 정치를 빼면.. 0점이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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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The comment that Dong Ho lee is replying to has been deleted.
Dong Ho lee
김찬기 맞습니다 다만 서민생활 안정이란 면에선 진보정권이 군사정권을 욕할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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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박균우
지금과 같은 통신강국도 백색전화로 대표되던 통신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개발한 한국형 전자식 교환기인 TDX 개발 사업 결과입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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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박은하
저는 고등학교때 태백산맥을 읽기전 지리산을 읽었었습니다. 당시 (아마도 제기억으로.) 최인호 이문열의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글들이 읽힐때 이병주의 글이 잔잔하게 어느 마을길을 걷듯 읽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언젠가 페북에도 짧게 포스팅을 했었지만 살면서 툭툭 기억나는건 이규의 할아버지인가?가 지리산으로 마냥 걸어들어갔다는 구절이 한번씩 떠오르면서 그리로 나도 들어가고싶다는 생각을 한번씩 하게 되더라구요. 다른나라들도 작가에게 이렇듯 엄격한 잣대를 갖다대나요, 선생님? 미당의 얘기를 반복해했듯이 전 이해가 되지않습니다. 사실 감훈의 일로 저는 마음이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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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박은하 네, 저도 지리산 첫권의 소박하면서도 넉넉한 풍경이 마음에 들었어요. 품위가 있죠.
물론 다른나라 작가도 평가의 부침을 겪고 그건 시대변화에 따른 필연이지만(세익스피어의 인종차별등), 우리 경우 식민지/냉전 후유증이 만든 일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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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Hanki Seong
선동가들은 단면만 부각해서 타인들이 다른 면을 못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시각, 다른 생각이 그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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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Hanki Seong ‘사업’방해저지가 목적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오히려 소수이고 대부분은 편향된 정보와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어렵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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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Hanki Seong
박유하 다른 의견에 대한 대화의 여지가 있다면 소수/다수가 문제되진 않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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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InKyoung Chang
#지리산_이병주, 고마와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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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InChul Lee
이병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국 진보의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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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Jong Hean Lee
대통령의 공과는 함께 평가되어야.하거늘 지금 우리나라에선 목소리 큰 자들의 뜻대로만.되고 있습니다.
보신주의자 국힘은 이제라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공과를 확실히.구분해서 잘한 부분은 잘했다고 말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겁니다.
눈부신 산업화의 발전이 없었으면 민주화는 꿈도 못 꾸었을 것입니다.
민주화의 재평가도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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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Bremen Show
단순화한 목소리는 구호일 뿐이다...크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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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이서윤
연좌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저의 외유는 불가능했고 제 집안 사람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위에서 누군가 피해자는 극소수였다고 하셨는데 수백만의 희생자와 가족을 고려하면 그 상흔은 광범위하고 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드 무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아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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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Park Yuha
윤서이 피해자가 극소수는 아니지요. 말씀대로 가족들까지 넣어 생각해야 할 거구요.
그런데도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이 많아 정말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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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Thomas Han
역사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 모두 단선적이 아니라 입체적인 거죠...진보의 본질은 입체적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 진보는 단선적이고 흑백논리에 빠져있으면서 입체성을 부인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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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김영도
이병주 선생의 <행복어 사전>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당시 흥사단에서 이병주 선생이 강연 중에 6.29선언을 높이 평가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도 6.29 선언이 나고 얼마 안되었던 무렵이었던 듯. 제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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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h
Park Yuha
김영도 강연까지 들으셨군요. 그리고 몇년후에 작고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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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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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최근 수정 시각: 
다른 뜻 아이콘  동명의 의사 출신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병주(1912) 문서
, 연쇄살인범에 대한 내용은 서울·익산 2인조 연쇄살인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ternal/newsplu...
이름
이병주(李炳注)
나림(那林)
본관
출생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1]#
사망
1992년 4월 3일 (향년 71세)
첫 작품
내일 없는 그날 (1957~1958)
마지막 작품
별이 차가운 밤이면 (1989~1992)

1. 개요2. 일생3. 주요 작품
3.1. 장편소설3.2. 단편소설
4. 표절 시비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1965년 잡지 '세대'에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특유의 필력과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오노레 드 발자크를 닮은 왕성한 작품 생산력과 고급 취향의 럭셔리한 삶으로 유명해서 한국의 발자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책을 많이 쓰고 많이 판데다, 전성기엔 5개 신문에서 동시에 연재 소설을 쓸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많아서 수입이 좋았고, 정관계 인사들과의 친분 덕분에 이재에도 능해서 부유하게 살았다.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소설가가 거의 없던 시절에 벌써 볼보를 몰았고,[2] 고급 식당과 고급 술집을 골라 다녔으며, 여자관계도 화려해서 여러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에 능한 그는 이런저런 일 때문에 자주 출국해 해외여행을 즐겼으며 세계 지성계의 최신 흐름에도 밝았다고 한다.

현대사를 대하 장편으로 엮어낸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등을 집필하여 기록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을 받았으며 동시에 대중문학에서 큰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

일생 부유하게 산 작가의 인생항로 덕인지 방대한 집필 활동을 하면서도 가난, 굶주림 같은 소재는 일절 쓰지 않았다. 개인적으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작품속에선 작가의 관점이나 가치판단을 드러내지 않고 한국 현대사를 조망하는데 집중했다. 방대한 지식으로 사회 구석구석을 다양하게 다루며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조형에 신경을 많이 써서 캐릭터의 매력과 재기넘치는 입담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대단하지만, 구성이 약하여 전개가 두서 없이 따로 놀고, 용두사미로 끝난 작품들이 다소 있다.

2. 일생[편집]


1985년 12월 17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이병주는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3]

1927년 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후 양보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다. 1936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40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메이지대학에 신설된 전문부 문과에 별과생으로 재학했다. 1943년 9월 메이지대학 졸업 후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간부후보생으로 장교까지 해먹었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했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퇴했다고 밝혔으나 1943년 9월에 졸업하고 바로 징병되어간 이병주에겐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즉, 학력위조.[4][5]

8.15 광복 직후 귀향하였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진주농림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6년 후 경남대학교[6]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재직 기간동안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부산일보에서 연재했다. 또한 부산에서 국제신문[7]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강봉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종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과 관련된 필화사건으로 인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박정희와 친분을 쌓았던지라 2년 7개월만 복역하고 나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5년 7월, 감옥에서 구상했던 중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등단했으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시인 신동집(申瞳集)과 문학평론가 이광훈(李光勳)의 권유로 출간된 것이며, 탈전통적이고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의 소설에는 그가 경험했던 시대에 대한 의식, 남성적인 필체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설들을 출간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관부연락선지리산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과 같은 소설들을 집필했으며, '마술사', '예낭풍물지', '바람과 구름과 비', '행복어사전' 등을 발표했다. 마흔네 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등단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천여 매를 써내면서 8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출간했다. 마지막에는 건강이 나빠지자 구술을 했다고 한다. 1976년 장편 '낙엽'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1977년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창작문학상을,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92년 4월 3일 향년 7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전두환과도 친분이 상당했으며, 허문도 같은 5공 실세와도 인맥이 있었다. 그가 만년에 쓴 수필집에서는 전두환은 옹호하고 있지만 자기를 감방보낸 박정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냐는 논리인데 정작 자신이 간부후보생 출신임은 감추고 학병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 고생만 한 것처럼 위조했다.

3. 주요 작품[편집]

3.1. 장편소설[편집]

  • 관부연락선 (1968~1970)
  • 배신의 강 (1969)
  • 망향 (1970)
  • 여인의 백야 (1970)
  • 언제나 그 은하를 (1971)
  • 지리산 (1972~1977)
  • 낙엽 (1974~1975)
  • 서울 버마재비 (1975~1976)
  • 산하 (1974~1979)
  • 소설 일본제국 (1978)
  • 행복어사전 (1976~1982)
  • 황백의 문 (1979~1982)
  • 바람과 구름과 비 (1977~1980)
  • 유성의 부 (1981~1982)
  • 미완의 극 (1981~1982)
  • 강변이야기 (1982)
  • 무지개 연구 (1982~1983)
  • 비창 (1983)
  • 황혼 (1984)
  • 그해 5월 (1982~1988)
  • 소설 남로당 (1984~1987)
  • 니르바나의 꽃 (1985~1987)
  • 그들의 향연 (1986~1987)
  • 그를 버린 여인 (1988~1990)
  • 별이 차가운 밤이면 (1989~1992)

3.2. 단편소설[편집]

  • 소설 알렉산드리아 (1965)
  • 마술사 (1968)
  • 변명 (1972)
  • 예낭풍물지 (1972)
  • 겨울밤 (1974)
  • 망명의 늪 (1976)
  • 세우지 않은 비명 (1980)
  •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1983)

4. 표절 시비[편집]

이병주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지리산》이 작가 이태(이우태)의 《남부군》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물론 전권에 걸쳐서 일어난 문제는 아니고 후반부[8]에 일어난 문제.

본격적인 표절 시비는 이태의 《남부군》이 출간된 이후 붙었다. 이태는 이병주가 집필한 《지리산》을 읽어본 후 표절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병주는 정당한 인용이라고 주장했다. 이태가 문제 삼은 것은 인용의 정도였는데, 이병주가 인용 허락을 받을 당시 이태는 단순한 참고 수준이라고 생각했었다.

작가 이태에 따르면 표절 경황은 이러하다. 작가 이태는 《남부군》을 주간지에 연재하려 했으나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원고는 주간지에 의해 이병주의 손에 넘어갔으며, 수많은 반환 요구가 있었으나 묵살당했다. 1년 뒤가 되어서야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원저자 이태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원고가 복사되어 표절되었다는 것.[9] 이 주장을 들은 이병주도 곧바로 응수했는데, 원고에 관심을 가졌던 이병주는 이태가 살고 있던 봉천동에 찾아가 인용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기에 인용에 관한 정보가 언급되었다는 것.

당시 이병주는 작가로서 하면 안될 일을 했다며 대중이나 문학계의 많은 질타를 받았다. 이 하나의 사건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대중문학계를 주름잡았던 거인 이병주가 몰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재까지 이병주와 《지리산》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 중 하나.

5. 관련 문서[편집]

[1] 독립유공자 문공학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시인 김수영과 술자리를 가진 후 이 볼보로 바래다 주겠다 했는데, 김수영이 "너 같은 부르주아 차에는 안 탄다!" 라며, 취한 채 걸어서 귀가하다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3] 그래서 그의 출생지인 231번지에는 현재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근처에는 이명산이 있으며, 또한 섬진강가에도 그를 기념하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4] 김윤식, 2015, 황용주의 학병세대 이병주≠황용주[5] 인용하신 글은 이병주 학술대회에서 나온 PPT 자료잖아요. 구할 방법이 없는데 원문이 보고 싶습니다. 또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는 4385명의 학병 전원이 1944년 1월 20일에 입소하였는데 이병주 혼자만 1943년 9월 졸업 후 징병되었다는 근거도 알고 싶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조선인 대학생 징집유예 중지를 공포한게 1943년 9월 30일인데 혹시 PPT 발표자가 이것과 헷갈린게 아닌가 추정됩니다.[6] 당시에는 해인대학교였다. 해인대학교는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대학교.[7] 창간될 당시에는 산업신문이었고, 이병주가 활동할 당시에는 국제신보였다.[8] 총 7권 중 약 2권. 당시 출간되었던 소설과 현재 한길사에서 나온 개정판도 총 7권.[9] 이 원고의 복사본은 《태백산맥》을 집필 중이던 작가 조정래의 손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남부군》이 출간되면서 인용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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