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에서의 이문화의 위상 ――청말 지식인의 일본 체험과 한자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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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에서의 이문화의 위상
현대 중국의 이문화 위상
――청말지식인의 일본체험과 한자문화
에나 나라 료
소개
1870년대, 청나라 중국과 메이지 일본 사이의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전후로, 낮중 지식인은 필담, 한시의 창상, 서화의 휘말 등을 통한 우호적인 상호교류를 시작했다. 즉 상호교류는 쌍방에서 '동문'의 나라로 파악해, 그 '동문'성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동문'이라고 하면 '일의대수' '동문동종'이라는 형태로 일본과 중국의 문화적 일체성을 강조하고 양국의 우호관계 구축을 호소할 때 사용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합시다. 그렇다고는 해도, 표면적인 「동문」인식이 상호의 이문화성을 이해하는 방해가 되는 우려가 표명되기도 한다. (1) 전체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동문」은 주로 언어에 관련된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같은 한자나 한어를 사용한다」라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적어도 현재는, 실제로 한시나 한문을 만드는 것까지는 함의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청일 전쟁 이전 청말 중국 지식인이 생각하는 '동문'은 그렇지 않다. 메이지 최초의 일본인과의 교류에 있어서, 「동문」이라고 말할 때, 「문」이란 고전적 문장어로서의 「한문」이며, 「한문」이 일본에 있어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규범적인 문장어 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동문」이란 유교 고전에서 유래하는 「동문 동궤」 및 그 「천자에 의한 통일」이라는 의미를 상기시키는 표현이었다. 그 점에서, 청말에 있어서의 「동문」이란, 단순히 언어에 관련된 문화 요소의 공유라고 하는 사실의 언명에 그치지 않고, 「일통을 크게 한다」왕조 지배 체제 하에서의 이문화 인식을 표명하고 있었던 것은 없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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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주된 목적은, 이 「동문 동궤」적인 발상에 뒷받침된, 「한문」으로 동일하게 하는 「동문」인식이, 청말 지식인의 사상의 영업에 있어서, 시대 상황을 파악하는 실천적인 의미를 잃은 배경에 있는 조건을 생각하기 위한 것이다. (2)이하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과의 협상을 가진 청말 중국 지식인 兪樾(1821-1906), 황준헌(1848-1) 905), 梁啓超(1873-1929) 등의 일본과의 관계를 검증하면서 이론을 진행하고 싶다.
1 문제 시야각
여기에서는 「동문 동궤」관념을 배경으로 하는 「동문」인식이라는 문제 시각을 채용하기에 이른 경위를 설명하고 싶다.
필자는 전고 「송 평자 신자의 위치를 둘러싸고――강남 지식인의 일본 취미에 대해서」에 있어서, 청말의 변법파 지식인, 송희(1862-1910)의 초고 「송 평자 신자」(1909년)의 재평가를 시도했다. (3)송창은, 젊어서 관도의 소망을 끊어 「포의」로서 평생을 보낸 인물이지만, 청말 고증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손배양(1848-1908), 및 慪樾로부터 학식을 인정받아, 자신도 「건카의 학」의 후계자를 임명하고 있었다. (4) 일찍부터 일본 한학의 수준을 높이 평가한 송희는, 「송 평자 신자」에 있어서, 전통적 음운학의 소양을 바탕으로 일본어의 오십음도를 소재로 하여 온주 방언음의 음절 총 표 작성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것을 본고에서의 관심으로부터 말하면, 송희는 「동문」인식으로부터, 일본/일본어 체험을 거쳐, 한학, 일본어, 한어 방언음을 연결시킴으로써, 한어의 본연의 자세로 재검토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 다만, 송창의 언어관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동문」인식-일본/일본어 체험-한어의 재검토라는 흐름을 그 자신의 사상적 영위 속에서 뒷받침하는 것은 곤란하다. (5)
그러나 청말중국지식인이 일본체험/일본어체험을 통해 '동문'에서 비'동문'이라는 한계에서 '이문'으로 인식을 바꾼 사례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다. 예를 들어, 황준헌을 중심으로 청국외교관의 일본어에 관련된 체험의 분석을 축으로 둔 야스타치씨의 논문과, 「동어정규」를 비롯한 일본어교과서의 내용분석을 축에 둔 남용 씨의 논문이다. (6) 야스타치 씨는 말에 대한 대응의 지연이 통역 부족을 가져오고, 공사관 내에서 학교(「동문학당」)의 설립으로 향한 것을 지적했다. 또 공사관원의 저작 등에 제시된 일본어 인식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도 황준헌 '일본 국지'에 있어서의 가명/오십음 소개를 높이 평가했다. 한편 남용씨는 닛신 전쟁 후 ‘한문의 부정·비판’이 ‘일본어 구어’의 선택을 향해 ‘항상 중국어 반성, 사고와 연동한다’고 한다. 그 주된 논점은 다음의 4점으로 정리될 것이다.
1. 서민·여성에 이르는 일본의 식자층의 계층적 확산을 가져온 가명의 사회적 역할에의 주목, 2. 「표의문자」한자보다 진화한 「표음문자」가명이라는 사회진화론을 배경으로 한 문자관의 변화, 3. 4. 일본어의 구어의 학습에 촉발된 중국어 회화에 있어서의 「표준어 지향」으로 향하는 언어관상의 반성 한문서 하하조의 「메이지 보통문」에서 언문 일치체로의 문체의 변화에 조응한 학습 대상의 변화이다.
이상으로부터, 일본을 「동문」이라고 간주하는 인식은, 일본에 있어서의 한문 이외의 문장어의 문체 및 말씀으로서의 일본어를 경시 내지는 무시하는 태도에 연결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동문」인식의 문제를 양국간의 문제라고 파악할 경우, 일본어 인식의 정치화라는 방향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것은 아닐까.
거기서 다언어적인 상황 속에서 '동문' 인식의 되찾기를 시도할 여지가 생길 것이다. 야스타치 씨는 전 논문을 포함한 저작에 있어서, 청나라의 다언어적 지배 체제 중에서, 청말 외교의 기조가 조공에서 조약으로 이행할 때의 조약의 「정문」을 어느 언어로 하는가 하는 문제 시야각을 제시했다. (7) 청나라는 만문과 만어를 '국어'로 했지만, 한편으로 이전에 명조가 통치한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한문을 사용했다. 게다가 명대의 구조 공국도 한문 사용권으로 했다. 그러나 리번원이 관할하는 번부에는 각 민족 고유의 '문자'와 '언어'의 사용을 인정한 것이다.
또 청나라를 둘러싼 대외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대해서, 모기 토시오씨는 「개별의 일대일의 관계의 무리」에 전체성을 주는 「왕조의 이야기」라고 파악하는 시점을 제기하고 있다. (8) 그러면 일본이 '동문'이라는 인식도 '왕조의 이야기'라는 것이 된다.
이상을 토대로 본고에서는 「동문 동궤」관념을 배경으로 하는 「동문」인식의 문제라는 시점을 취하고 싶다.
‘동문동궤’의 전거는 ‘예기’ 중공편 ‘지금 천하차 동궤, 서동문, 행동륜’이다. 그 전후에 「비천자, 불의례 불제도 불고문.… 예, 바퀴의 폭, 문자 또는 문장어, 사회의 도덕적 질서의 삼자를 「같게 하는」 것은, 「덕」과 「위」를 갖춘 「천자」가 실시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더욱 신주 그럼 「삼자 모두 동언 천하 일통야」
(『중조장구』 제28장)이라고 한다.
즉 「동문」이란, 유덕의 「천자」에 의한 교화, 「일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청대의 문장에서는, 예를 들면 「4고전서」의 「제요」에 「일통동문지모리 치유고 고독류」(「몽고원류」「제요」)라는 용례가 있다. (9) 이 경우의 「동문」은 「일통」과 함께 최대판도를 획득해 「4고전서」로 대표되는 문화정책상의 위업을 진행한 건류제의 「성치」를 찬양하는 상간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대외관계, 조공체제가 동요하는 시기에 일본과의 조약체결문제가 부상하여 '동문'이라는 관계가 다시 확인된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兪樾에서 '동문동궤'적인 가치의식을 볼 수 있고, 일본문화의 '동문' 상황 파악에 영향을 준 것을 2절에 걸쳐 검증하고 싶다. 게다가 일본의 「동문」상황의 체험을 통해 「동문 동궤」적인 가치 의식이 황준헌에 있어서 동요를 보이고, 양계초의 논의 중에서 새로운 가치 의식 속에서, 「동문」인식이 한정적인 것으로서 표명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싶다.
2 한자 문화권의 자각과 서양의 그림자
동치 연간의 1870 전후, 일본 지식인과의 교류를 시작하기 이전, 兪樾에는 베트남·류큐·조선·일본 등의 한자를 사용하는 주변 국가를 완만한 형태이지만, 하나의 문화권 라고 파악하는 발상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18세기말, 건류년간과 가경년간의 경계에 해당할 무렵의 조익(1727-1814)의 문장으로 볼 수 있는, 베트남·류큐·조선·일본 등 한자를 사용하는 주변국 에 대한 이미지를 비교하면서 소개하고 싶다.
조익은 '22사사기'에서 마테오 리치의 '만국 전도'에 따라 다섯 대륙을 꼽으며, 대부분 유럽 국가들은 '천주교'를 봉한다고 소개하고 그것이 중국에 전래했다. 경위를 소개한다. 그리고 네 개의 「천하대교」 즉 「공교・불교・회회교・천주교」는 모두 아시아의 대륙에 기원이 있다고 해양・섬도부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제민족에의 보급의 형태를 말했다.
공교는 약간 중국의 땅, 남쪽은 베트남, 동쪽은 류큐·일본·조선뿐이다. 즉 불교의 보급되는 범위가 가장 넓고, 천주교가 그 뒤를 이어, 공교·회회교는 더욱 그 뒤를 잇는 것이다. 공자는 모여서 대성하고, 인극을 세우고, 대략 미츠나다 고조의 길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반대로 불교·천주교의 보급되는 넓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생각에 정밀한 형태로는, 단지 나카하라의 깨끗하고 부드러운 지역으로서 시작해 행해져(원문, 「정자 유나카슈 청숙지구 시능 행습」), 조략한 형태에서는, 풍속기성이 다른 것도 모두 둘러싸일 수 있다(원문, 「조자 칙특속이성 모두득이야범범위」). 그러므로 가르치는 대상은 특히 멀리까지 닿는 것이다. (10)
조익이 '천주교'를 논제로 하면서, 최종적으로 아시아 대륙과 섬도부에서 종교의 분포로 논의를 옮겨 사실상은 건류제치세하에서 획득된 최대판도에 관련된 문제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보급 범위는 중국과 베트남·류큐·조선·일본이다. 유자로서의 조익은 유교의 교설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표명하면서도 그것이 불교·천주교보다 좁다고 인정한다. (11)
거기서 조익이 말하는 '나카슈 청숙지구'는 원래 한민족문화의 중심지역인 '나카하라'를 가리키는 시어이다. 수사라는 점에서 봐 중국을 포함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베트남·류큐·조선·일본 제국까지도 포함할지 어떨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 국가들은 유교의 나라라는 성질에서 추상화된 정량적인 넓이의 표상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서양 국가도 포함한 '해외 제번'이 조공 때 '내지인'을 용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12) 여기에서 보면 조익의 주변국가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중국과 접촉했는지에 있어서, 접촉 결과 성립된 확산에 적극적인 의의를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있다.
다음은 兪樾의 수필 '호수 필담'의 문장이다.
공자는 “길을 치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오르자”고 말하며, ‘규이’에 살기도 했다. 이처럼 성인은 그때 해외에 대해 얼마나 목련이었는가. 현황을 보면 '동양' 국가들, 예를 들어 일본·류큐·조선 등은 모두 유서를 복습해 성교에 시원하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 만나고 나서 역시 경서를 번역하고 그 땅에 전하고 있다. 게다가 수백 년 후, 분명히 「동양」제국과 같이 중화 문명의 영향(「화풍」)에 물들어, 공자의 가르침은 점점 행해지고 갈수록 퍼질 것이다. 아이코코 왈, “이런 이유로 성명은 중국으로 넘쳐, 베는 費貊에 이른다.배차가 이르는 곳, 인력이 통하는 곳, 하늘이 덮는 곳, 땅이 올리는 곳, 일월의 비추는 곳, 서리 하지만 묶는 곳, 모두 혈기 있는 사람은 존친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아, 이 말은 확실히 믿을 수 없는가? (13)
공자의 일화는 모두 『논어』 공야장 제5, 자식 제9로 보인다. 통례는 한인사회에 대한 공자의 실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兪樾은 공자가 해외나 '이랑'의 땅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兪樾은 이미 번역된 '경서'가 있기 때문에 수백년 후에는 '동양' 국가들처럼 유럽 국가들이 중화문명의 영향에 물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말한다.
兪樾이 말하는 '동양' 국가들은 일본·류큐·조선이다. 베트남이야말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유교의 보급 범위에 관해서는 조익과 같은 주지의 견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兪樾의 '화풍'에 물든 '동양' 국가라는 이미지는 조익에 비해 명료하다. '경서'란 물론 유자의 저작('유서')에 논거를 주어 성인의 교설('성교')을 전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동양' 국가에서 '유서' '성교'가 보급된 요인도 '경서'가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兪樾의 이 문장에서는 ‘번역’을 풀어 ‘경서’를 이해한다고 하면 ‘이문’ 유럽 국가의 존재가 반대로 ‘동양’ 국가의 ‘동문’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857년, 兪樾은 허난학 정재직 때 필연 사건에 휘말렸다. 그가 부과한 과거의 논제가 때의 권력자를 비판한 것이라고 하는 소언에 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兪樾은 관계에서 몸을 끌고 학자·교육자로서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교 행정에 대한 관심은 희미하지 않았다. 『황조경세문편 속집』권 오십이소수의 「문묘사전 사의」는 유교를 지금에 전한 공적에 따라 허신(五八?―147)과 정현(127―20〇) )를 모시는 의식을 해야 한다고 설한 허난학정 시대의 상주문이지만, 1882년, 兪樾은 채록에 새롭게 베푼 서서, 지금도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복하고 염려하면, 우리 아침 동문의 통치는 전대를 힘쓰고 있습니다」라고. (14)
그리고 兪樾은 1866년에 오기후이 『논어징』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 유학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또, 兪樾의 저작 「군경평의」(1867간)와 「제자평의」(1870간)는 출판 후 곧 일본에 전해져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8 70년에는 일본 상인이 욕창 아래 양서를 직접 사러 왔다고 한다. (15)
또한 낙관의 인맥에는 양무파 관료가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兪樾은 曾国藩(1811-1872)에 의한 발탁을 받고 이강장(1823-1901)과 같은 해 진사(과거 합격자)가 되었다. (16) 이러한 교우관계를 통해서 '서양' 국가의 동정에 무관심으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兪樾은 "오늘의 천하는 일대전국 시대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7)
그리고 兪樾는 '서양'의 압력에 의해 촉발된 유교에 대한 호교 의식을 저류로 한자를 사용하는 주변 국가를 막연한 형태였지만 하나의 문화권으로 파악해 갔다 이다.
3 동문의 나라의 이문화
명대의 왜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는 달리, 도쿠가와 정권은 청조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몰협상이었다. 또 청나라 지식인에게도 일본에 관한 문물이나 정보를 접할 기회가 한정되어 있었다. 청상인을 통해 수입된 공예품과 서적, 정사와 필기 소설의 기록, 서복 전설과 구양 옆 "일본도 노래"등의 일본에 소재를 취한 몇 안되는 문예 작품 등에서는 이국 정서와 사소한 문화 적 세련을 느끼게 하는 나라라는 일본상이 형성되었다.
한편, 일반적으로 에도 중기부터 메이지 중기에 걸쳐, 일본의 지식인의 한자 운용 능력, 혹은 한시문의 창작·독해 능력은 일본의 문화사상을 통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일본과의 전적교류나 '개국' 이후 에도/메이지 지식인과 청말지식인 사이에서 변한 한시의 창상과 필담 기록은 많다. 청말 중국 지식인으로부터 하면, 일본의 문장어는 중국의 한자 문화의 권내에 있는, 즉 「동문」이라고 말하게 된다.
兪樾에 의하면 다케소에이이(1842-1917)는 최초로 친교를 맺은 일본인이다. 타케소에가 慾樾에 시작하여 면회한 것은 1877년이었다. '춘재당 수필' 권칠에 있어서, 니츠루는 「일본인 타케소에 히로코, 글자는 점경은 일본에 있을 때, 내 평판을 듣고 있었다」라며, 타케소에가 면회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와 중국 기행문 『부운협우우 일기』에 대한 서문을 구한다는 내방의 목적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리고 兪樾은 그와의 필담은 일본의 '국사'에 이르렀다며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소에의 발언을 기록했다.
10년전은 봉건제였습니다(「봉건위치」). 각 번("열국")에는 모두 번교("학궁")가 있어, 각 번의 무사("제국 노사")는 모두 세습의 작위에 의해 로크를 먹고 있었습니다("세작 록자" ). 모두 어렸을 때부터 번교에 들어가 배우고, 그 학문의 성적에 의해서 직직이 정해졌습니다(「열지위」). 그 때문에 한학(「문학」)이 매우 번성했습니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나서, 다이묘는 영지를 잃고(「제후실국」), 무사도 록을 잃었습니다. 각지의 학교(「열국학궁」)도 많은 것은 「서학」을 이용해, 출세의 지름길로 하고 있습니다. '공원지도'는 거의 일소되었고 한때는 한학폐절('焚書')의 논의까지 있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차갑게 되어(「풍속성박」), 정부도 매우 후회해, 다소는 성인의 길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양국가가 차례차례 나오기 때문에, 외교의 상도로서 서양사정에 통하지 않고 있으면, 무리에 모여 버립니다. 그 때문에 성인의 학과 서양의 학을 하나로 섞어 버려, 겨우 한때의 활기를 되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
타케소에가 중국의 문화적 전통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무사는 '제국지사'이며, 과거 대신 '학궁'에서의 경쟁, 실적주의적 등용 제도가 '봉건' 일본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서호 여행에 있어서 서호 여행객은 많지만 아내를 대동한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고향 친구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한다는 다케소에에게 兪樾는 물었다.
兪樾 : 존부인도 시를 할 수 있습니까?
타케소에: 단지 본국의 가요에 불과합니다. 중국어 문자는 풀지 않습니다.
兪樾 : 귀국과 중국은 본래 '동문의 나라'인데 역시 차이가 있습니까? 타케소에: 그 밖에 속자가 있고, 「보통자」라고 합니다. 「중국」의 문자가 되면,
「독서인」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모두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19)
兪樾은 竹添 부인의 작시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은 무인의 작시가 되어 중국의 한자 문화의 전통 권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니시가타가 키시다 음향(1833-1905)과 북방 심천(185-1905)으로부터의 의뢰로 짠 일본 한시의 사화집 “히가시타시 시선”40 4권은 낙관이 일본 한시의 비중국적인 전통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蔡毅씨는 『히가시타시 시선』과 에무라 홋카이의 『일본 시선』 『일본 시사』의 편찬을 비교해 『히가시토시 시선』의 「일본적 맛의 중시」 「학문·도덕의 중시」를 올렸다. 씨는 「일본적 맛의 중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가시야시 시선』은 중국 대륙과 훨씬 다른 이유로 후지산이나 바다의 풍경을 그린 작품을 어딘지 모르게 수록하고 있지만, 그 가장 친숙한 것은 일본의 「국화」 벚꽃을 읊은 시이며, 모두 42종도 담겨 있다. 벚꽃 넉넉한 모습에 대해서는, 兪樾는 생각하는 만큼 달콤하지 않고, 스스로의 눈으로 그것을 보려고 생각해, 북방 심천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유창의 이런 잠입과 딱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강촌 홋카이 「일본 시선」안에는 벚꽃을 제목으로 하는 작품이 일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 … 「일본시선」에 담겨 있는 작품을 바라보면, 그것은 거의 중국 시가의 전통인 풍경 묘사와 서정, 및 송별 창수의 작품의 행사
소요이다. 즉, 강촌이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의 시와의 「동일」인 것에 비해, 兪樾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시와의 「상이」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 문화에 대한 낙관의 이해는 농담이 얕은 것이고, 그 흥미로운 것은 흔히 기이를 드러내는 것에 한정되며, 이국 취미의 외모와 표상에 머물러 있으며, 진정한 일본 문화의 신수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인식 부족이다. (20)
또 「학문·도덕의 중시」에 관해서, 모토 씨는 兪樾가 「마치 구도덕의 옹호자를 가지고 자임하고 있는 것 같다」에 대해, 「그런데, 강촌 북해의 「일본 시선」을 본다 라고 그것은 마치 다르다. 에무라의 선에는 위와 같은 구도덕을 옹호하는 시의 뒤가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때때로 섬뜩한 바람이 있다”고 지적했다. (21)
兪樾은 일본의 '사' 이외의 작시자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히가시타시 시선』은 「방외」(승려)의 시에 권 36부터 339까지를 맞추고, 「閨秀」(여성 시인)의 시는 44의 1권을 맞았다. 兪樾은 '閨秀'권을 단독으로 백부 정도 인쇄해 친구에게 나눴다. 동시에 편집작업 속에 사망한 차녀의 류손의 시집 '혜복루시초' 백부를 북방심천에 보내 일본에서 시명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22)
또 타루 존명중에 그 평전을 쓴 코야나기 사키타는 “사쿠마 상산, 하시모토 사토우치, 마츠모토 규도, 가와지 리라 여러 씨와 같은 정치가”의 시도 있다고 지적했다. (23) 특히 초대 경시 총감천로 리라(1834-1879)의 시가 선에 들어간 것은 일본의 한시단에 불만을 가져왔다. 兪樾이 채택한 것은 물론 비중국적인 무인시이기 때문이다. (24)
兪樾은 일본 한시문을 통해 한편으로는 이처럼 중국의 한자문화와는 다른 측면을 읽으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사로 행동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에 오카 치유키(1833-1914)에 대해 兪樾는 “문장은 편도이며, 물론 중일의 구별은 없지만, 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입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여기에 주의하지 않으면, 노력도 낭비가 되자.이전 귀국의 시를 선택했다.아직 귀국의 장점을 충분히 다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단점을 제외하길 바란다.
이대로 가면 분명 큰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25)
兪樾은 일본에서 자신의 문명이 튀는 것을 솔직하게 기뻐했다. 이노우에(진하라) 진정(1862-1900)이 1884년에 입문했을 때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동년의 과거 합격자 손금 니시타나에게는, 해외의 손님이 학문을 배우러 온 적이 있었다. 생각에 코토니시는 이전에 류큐 관학 교습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허명이 해외로 퍼지고 있어 갑신의 해, 일본 도쿄 대장성 관비 유학생 이노우에 진정, 글자는 자덕이라는 자가 왔다. (26)
孫琴西(손의언을 가리킨다)에는 류큐에서 자신에게는 일본에서 각각 문명을 당황하는 학생이 왔다고 말할 때 兪樾가 중국과 '동문'의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타카가 묻자. '춘재당 수필'의 기사는 거의 시대순으로 게재되고 있지만, 이 직전에는 조선인 송상금 '옥고집'에 대한 기사가 있다. 兪樾은 독후감을 「시문은 모두 볼 가치가 있다」라고 하면서, 이 책에서는 명조 멸망 후의 「순치」년인데도 명대의 「숭상」의 연호가 이용되고, 심지어 拔文가 '건류' 연간 나카바에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디악을 삼순시켜 '삼숭호'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27)
또 곽경씨의 지적에 의하면, 「히가시타시 시선」에 있어서 兪樾는 칸다야마(1748~1827) 「개원 코토카 니시야마 선생님 가게 제자문 부석 상기완 여득이」 의 채록에 있어서 「유고황통수무극 국무이성사세관」(유레고가 황통무극에 처진 나라에 이성없이 섬세하게 관을 세세하게 한다)라는 개소를 삭제했다. (28) 兪樾에게 있어서 비록 일본의 '천황'이라도 '황'자의 사용은 질서를 저지르는 행위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兪樾은 '동문'의 통치에 의해 초래된 한자문화권에 일본과 조선의 유자, 한학자와의 '동문' 관계를 통해 유교문화권으로서의 내실을 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주변국 이문화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도, 한편으로 주변 제국측으로부터의 청조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문화적인 질서에 대한 침범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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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樾의 소위 '왕조의 이야기'는 자신의 청왕조에 대한 충성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왕조의 이야기」의 동요와 언어의 문제
애로우호 전쟁에 의한 청영·청불 두 천진조약에서는 청조측은 혜택으로 상대국의 영문·불문만을 정문으로 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그 불평등성이 자각되면서 청조측은 상대국과의 사이에서 조약의 정문을 어느 문장으로 할지 고집하게 되었다. (29)
천진조약 이후, 예부에서 각국 총리사무 학문으로 대 '서양' 외교 관할이 옮겨간다. 청나라는 「서양」의 회화와 문장에 통한 전문가의 양성에 육박해, 「경사 동문관」(1862년 설립), 「상하이 광방언관」(1863년 설립), 「 '광동동문관'(1864 설립) 등 양무학당이 상속으로 설립됐다. (30) 다카사키 요시씨는 「동문관」이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여러 설 있다고 해도, 「커뮤니케이션에 도움이 되는 공통의 말을 가르치는 조직」이라고 하는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31)이라고 하면, 「동문」은 다른 「문」의 사이에서의 통역·번역이라는 사태를 가리키는 용법이다. 게다가 "어구"
(회화)와 「문자」(문장)를 포함해 「동문」으로 하는 것이다.
한편, 1871년, 일본과 체결한 닛신 슈호 조규 제6조에 대해 야스타치씨는 그 「반드시 한문을 붙일 것인가, 혹은 한문만을 사용할까」라는 규정에는, 「한문을 정문으로 한다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32)
메이지 일본으로부터의 국교 개시를 요구하는 요구를 받아, 청조 측에서는 우선 일본은 조공국 즉 번속국인지 아닌지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조약 체결에 맞춰 일본 측이 요구한 일본어문을 정문에 추가하는 것을 척하고 조약의 정문을 고전한문 즉 '동문'으로 하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씨의 저작에 상세하다. (33)
위의 사태는 언뜻 보면 70년대 이후 '동문'이라는 심볼 사용에 혼란이 생겼다고 생각되지만 한자문화권 안과 밖이라는 외교의 국면에 따라 유연하게 풀려났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1870년대 반, 메이지 일본의 대외 정책은, 조선에서의 강화도 사건, 류큐 귀속 문제, 대만 출병 등에 보이도록,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화이 질서에
의 도전이라는 방향을 취하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1877년 초대 일본 공사 어쩌면 璋一行의 일본 방문을 통해 개설된 일본 공사관은 많은 청나라 지식인에게 일본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준헌이나 왕상(1828-1897) 등 초기 일본 체험자는 우선 일본은 다른 주변 국가와는 다른 존재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도쿠가와 일본의 '쇄국' 정책은 이른바 화이질서에 있어서의 고립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나라 지식인에게는 그것이 고립이었다는 것조차도 의식되지 않았다. 메이지 일본과의 국교개시를 계기로, 그다지 예비지식도 없는 채 갑자기 일본사회에 접한 청조중국지식인 왕우와 황준헌은 대일관계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대해 조금 동요를 보이고 있다.
왕우는 홍콩에서 저널리스트로서 논진을 하고 있던 때에 일본인과의 교류를 시작해 1879년에 일본을 유람했다. 왕우는 『고원문록외편』「일본비중국번속판」(1883년간)에서 『우리사는 한 이래 모두 일본을 조공의 나라로 하여 번속국으로 한다. '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해, 일본의 역사서에 보는 고대사를 개괄적으로 나타내고 나서, 「이것에 의하면 일본은 스스로를 우리 아침의 번속이 아니고, 똥문왕래했을 뿐이라고 본다. 설은 어쩌면 신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마무리했다. (34) 칙명에 의해 편찬된 지리서 '대청일통지'를 전거로 하면서도 일본이 조공국이나 번속국이 아니라는 견해를 겸손하게 전한 것이다. (35)
한편 황준헌은 청국주일공사관에 서기관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 주저 '일본 국지'는 중국인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인 일본 연구서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국지' '범례' 서두는 서술에 있어서의 방침을 말한 것이다. 역사 서술에 있어서 역사가의 도덕적 평가를 반영시키는 중국의 전통을 접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역사가의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원자료의) 실제의 기록을 따라야 하는 것이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옛 사람이나 타국의 군주를 다루어 부르는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도리를 벗어나 버린다 틀림없다. 하물며 『대청회전』의 기재는 (일본을) 조공국에 더하지 않고, (닛신 수호 조규의 발효 이래) 국서가 왕래해, 이웃의 예로 대접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다. 이 편의 기술은 역사서로부터 채취해, 황이라고 하거나 황제라고 하며, 대체로 원자료대로의 부르는 방법에 따랐다. (36)
황준헌은 역사 서술이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청국의 종합법령집에 해당하는 '대청회전'에 일본을 조공국으로 하는 기재가 없다는 지적이 주목되기 때문에 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비종속적인 지위를 입론하는 점에서는 왕우와 같다. 그들의 입론의 신중함은 물론 왕조에 대한 충성스럽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37)
이렇게 먼저 일본은 다른 '동문' 국가들과의 비교에 이질적인 역사적 배경을 띤 나라로 나타난다. 게다가 모든 메이지 지식인이 높은 한자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던 것은 아닌 것은 일본을 실지에 관찰하면 알 수 있었다. 이 조건 하에서 일본어 체험은 '동문'성에서 이문화성 혹은 다른 언어 상황 파악에 대한 청나라 지식인의 관심의 추이를 촉구한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과의 교류, 일본의 학문 상황의 관찰로부터, 한자 문화의 전통의 차이를 읽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고 할 수 있다. 왕우는 '후와유키' 14에서 말한다, “일본은 문사가 많지만 경생은 적다. 실로 뛰어난 뜻으로 초연한 사람들이다”라고. (38) 혹은 「일본 국지」를 준비하고 있던 황준헌에게 있어서는, 정사에 있어서의 「지」(기록서)에 해당하는 한문사료의 부재라는 절실한 문제가 된 것이다. (39) 그들의 발견은 한문이 통용한다는 '동문' 인식에서 중국과 동형의 문화가 있다는 전망이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지의 일본어 체험을 승화해, 단기일의 체재에서도 상당한 관찰을 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예로서, 1880년경, 이치쿠에 의한 「일본 잡기」로부터 2개의 문장을 소개해 두자. 李筱圃는 40일 정도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 전체에서 인민은 3천6백여만. 나라에 학교가 심하다. 병·농·례·법·격지·산수·기예로 분류되어 마련되며, 또한 여학교도 있다. 따라서 선두·문번·차부·부인·여자는 글자를 모르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서적 및 일용의 글자는 모두 중국의 쓰는 법(「서법」)이다. 그러나 문장마다 몇 개의 가명문자와 어순의 낙도(「왜음 숫자 문의 학도」)를 잡아, 그 써 있는 것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 많고, 단지 그 의미를 「영회」하는 것 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인과 필담하거나 시문을 만드는 경우, 「왜자」를 쓰고 쓰는 것은 하지 않지만, (그것은) 단지 중국의 책을 다독해 문법(「문리」)에 통한 자가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0)
일본에서의 문장어로서 한문의 통용이 한정적인 것인 반면, 그 이외의 한자 가명 교제문은, 가명이라고 하는 협잡물과 어순의 낙도라는 비정규적인 조작이 베풀어진 문장으로 파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판단의 기준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한자문화 내 지식뿐이다.
일본의 책에 갇히는 '봉자'는 단지 47자뿐이다. 사십칠자의 소리(「사십칠음」)는 장기 체재하는 우리 중국인도 그 대략을 알 수 밖에 없다. 한자('한서')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봉자'를 이용하는 부녀는 모두 알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로하 노래와 한자를 섞어 쓴 것(「其四十七字対其夾雑漢字之書」)을 읽었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전심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면 잘 안 되는 것이다. (41)
방금 전의 협잡물로서의 가명은 이곳에서는 '쑤시자'로서 한자와의 관계로 파악되고, 게다가 '자'는 '소리'라는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기능을 가지는 것에 주목받고 있다.
가명은 한문에서 보면 협잡물이다. 그러나 어순의 낙도의 문제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상이 여기에는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식으로부터 말씀을 포함한 고유의 문법을 갖춘 언어로서의 일본어 인식에 대한 모아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면에서 더 이상 볼 수 있듯이 단기일 중에는 결국 한자를 기준으로 그 해명은 완수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황준헌도 포함해 일청전쟁 이전에 방일한 청말지식인은 한어에 관해 ‘문자’(여기서는 문장어 즉 한문)를 우위로 ‘어언’(여기에서는 말씀)을 포착했다. 한문에 의한 「동문」의 인식이 있는 경우, 문장어의 공통성은 말의 차이를 해소한다는 본국에서의 습관의 연장으로서 파악된다. 즉, 일본
「어언」은 「토어」 「방언」이다.
황준헌은 ‘일본국지’ 학술지문자 2에서 주석자 ‘외사씨’로서의 입장에서 ‘문자는 언어가 유래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42) 그리고 “내가 천하 만국을 보면서 문자(한문)와 언어(일본의 말씀. 원문 그대로)의 불일치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제일이다”로서, 가명의 역할을 양자의 매개물로서 파악해 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로마는 옛날에 라틴어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각국에서는 '어언'이 다양하게 다르기 때문에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가 프랑스 '소리'로 바꿔 영국이 영국 '소리'로 바꾼 후 프랑스 영국 제국의 학문이 활발해졌다. 기독교가 활발해진 것도 『구약』『신약』을 각국의 말로 책으로 번역하기 위해 점점 보급되었다고 한다. 생각에 「어언」과 「문자」가 떠나면, 문장에 통하는 자가 적고, 「어언」과 「문자」가 맞으면 문장에 통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기세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자 일본의 가명은 동방의 문교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43)
우선 황준헌이 서양의 모델에 의해, 비「동문」적인 성질을 가지는 「가명」을 포착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될 것이다. '라틴어-제국어'와 '한문-가나-화의 어언'이라는 도식이 대치되어 있는 것이다. 서양과 한자 문화권의 역사와 정치 상황에서 보면 '라틴어' 즉 '한문'이다. 여기서의 논의에서 언급한 문장어와 말하는 언어의 관계가 중국의 언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라는 방향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문이 여전히 일본의 문장어로 여겨지고 있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한문·한어”와 “일본·일본어”-연결 대신
한자를 공유하면서도 고유의 표음문자를 가진 주변 국가·제민족의 언어 속에서 일본어에 대한 관심은 닛신 전쟁 후에 특히 큰 것이 되었다.
관료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일본에 대한 주목이 높아져 역설적이지만, 패전 후 10년간은 중국에서의 대일 감정이 가장 양호했던 시기라고도 알려져 있다 . 동시에 닛신 전쟁은 전통적인 가치관·문명관을 동요시키는 계기가 됐다.
'베이징 동문학당'과 '광동동문학당'에 '동문학당'이 설치되어 '동문'과
'동어'라는 명칭과 구성으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7년이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등립헌변법론자는 일찍 서양화를 이룬 메이지 일본의 경험을 배우면서 청나라 중국의 서양화를 촉진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서양의 문물을 전하는 매질로서 일본을 포착하려고 한 것이 된다.
戊戌変法의 좌절 후, 일본 망명 중인 1899년, 梁啓超는 「논학 일본 문유익」에 있어서 「일본문을 배우면 며칠에 소성하고, 몇 개월로 대성한다」, 「일본 문장에는 한자가 78할 있어, 혼자서 가명을 이용해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단지 맥락사와 조사등 뿐이다.문법은 실자를 구수에 두고, 허자를 구말에 둔다.그 예 에 통하여 넘어져 읽는다.상용의 맥락사나 조사에 표를 붙여 꺼내, 익숙해져 기억해 두면, 책을 읽고 막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44) 이른바 「일본문한독법」이다. 어순의 학살에는 약간의 규칙성이 있어, 가명은 자형으로서 동정만 할 수 있으면, 본래 있어야 했던 한문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양계초는, 망명전의 1897년 「독일본 서목지서 후」에 있어서 일본의 변법 즉 메이지 유신에 배워야 하는 것을 말해, 「게다가 일본의 문자는 그냥 고가 문자와 같다. 이사카 공해의 이로나미후미를 3할 섞는 것에 불과하다”고 협잡물로서의 가명관을 표명하고 있었다. (45) 이것을 보면, 먼저 소개한 「일본 잡기」의 필자가 말하는, 「일부의 가명 문자와 어순의 학살을 잡아, 대부분은 그 책을 「해독」할 수 없다」 「해독」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 문장의 끝 부분이다. 양계초는 “일본과 우리는 입술형제의 나라”라며 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의 경쟁으로 당시 세계 정세를 포착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나 일본 양국은 합방의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언어가 통하는 것은 협회의 첫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지사는 한문 한어를 배우는 것을 제일의로 해야 하고, 시나의 지사도 마찬가지로 일본문화어를 배우는 것을 제일의로 해야 한다. (46)
결국 '시나의 지사'에게 있어서 '일본문독독법'은 단지 입구에 불과하며 그 앞에 '일본문화어' 학습이라는 과제가 제시되는 것이다. 이 ‘일어’는 앞의 황준헌의 ‘어언’ 또는 ‘언어’에 해당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황준헌은 '일본 국지'에서는 '일본훈'이라고 하지만 '일본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지사」에게 「한문 한어」의 학습이 요구될 때, 「합방」이라고까지 가지 않아도 상호 이해의 조건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가깝다고 생각되고, 그런데 문제의 없는 상투 표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성립에 일본 체험에 촉구되어 성립한 「동문」인식의 변화라는 계기의 개재를 보면, 한문을 일본의 문장으로 간주해, 말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본 「동문」 인식이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양계초가 '합방'을 상정하고 '일본의 지사'의 노력을 요구한 것은 최근 일본의 한자문화에 대한 불만의 표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앞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1899년 발표의 「도적 월남」에 있어서, 료케이초는 일본서의 서평·소개를 실시했지만, 「일류의 한학자」시게노 아야에 의한 「전용 한문」의 사서 「만 국사항목에 대한 불만도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문학박사, 대학교수, 일본한학자의 제일류이다. 이 책은 모두 한문을 사용하고, 사용되고 있는 인명지명도 『바야시 지략』등의 구서가 상용한 것에 의하고 있다. 생각에 독점적으로 중국인을 위해 쓴 것일 것이다. 그 체례는 주자의 『자치 통감 항목』이 되어, 편 연체를 이용해,…… 중국인의 사고 습관에 적합하다. 시게노씨는 한학으로 유명하지만, 신학의 학력으로는 후배에게 훨씬 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배우는 자가 일본문을 읽을 수 있다면 정력을 다할 필요는 없다. (중략) 아직 일본문에 통하지 않은 것은 이것을 입수하면, 오카모토 감스케의 『만국사기』를 이기고, 시중의 통속적인 번역본을 이기는 것이다. (47)
「중국인의 사고 습관」이란, 여기에서는 편년체 등의 역사 서술의 스타일을 말한다. 일본의 한학자가 '동문'성을 통해 '중국인의 사고습관'을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요구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후 양계초는 '신민체'라는 새로운 문체창출과 중국사학의 재검토에 나섰다.
‘일본·일본어’와 ‘한문·한어’ 사이가 등가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일중 지식인의 교류에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것을 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동문의 나라」인 일본체험이 「어언」으로서의 「한어」에 대한 눈빛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了)
(1) 예를 들어, 왕민씨 '일본과 중국-상호 오해의 구조'(중앙 공론 신사, 2008년, 9페이지)에서도 그러한 우려가 표명되고 있다.
(2) 본고는 「동문 동궤」에서 「동문 동종」으로 하는 변천을 추적하는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고에서 말하는 「동문 동궤」적인 「동문」인식이 물러나는 한편, 「 "동종"이라는 표현과 함께 "동문"이 말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변법파 지식인, 장모(1853-1926)에 의한 1901년의 문장에 「즉위 동종 동문 노편, 亦宜訳 동서」(「변법 평의」 『張謇全集』 제1권, 강소고적 출판사, 1994년, 64페이지)라고 한다. '동종'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인종' 이론이 유행한 일청전쟁 이후가 아니면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소구력을 갖지 못하는 종류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3) 「송평자 신자의 위치를 둘러싸고――강남 지식인의 일본 취미에 대해서」 타카야나기 노부오씨 편저 「중국에 있어서의 「근대지」의 생성」, 동방서점, 2007년.
(4) 손양양은 송부의 악부였다. 후출하는 손의언(1815-1894)은 손배양의 아버지이며, 이홍장(1823-1901)과 함께 兪樾의 '동년' 도광 30년( 1850년)의 과거 합격자였다. 兪樾는 宋恕의 스승이 되나,
다만, 그것은 관계가 깊은 손가와의 관계를 통해 후견인으로서 송영을 이강장에게 막료로 하도록 추천한 것이 계기였다.
(5) 송창의 사상을 일본과의 관계를 축으로 사상사적인 관점으로부터 논한 연구에, 양시개씨의 「청말변법여 일본-이송정정치 사상위 중심」(상하이 고적 출판사, 2010년)이 있다.
(6) 야스타리씨 『청말 중국의 대일 정책과 일본어 인식』, 동방서점, 2009년. 특히 제5장.
미나미 용 「근대 중국의 언어 의식과 「일본어」――중국 유학생이 편찬한 초기 일본어 교과서를 둘러싸고――」 「성성 문예」198호, 2007년. 그 외 청말 중국인의 일본어 학습의 역사라는 주제로부터의 연구도 포함될 수 있다.
(7) 야나기 씨 전 게시, 제4장을 참조.
(8) 모기 토시오씨 “중화적 세계상의 변용과 재편” “시리즈 20세기 중국사 1 중화 세계와 근대”, 도쿄 대학 출판회, 2009년, 38~47페이지.
(9) 『4고전서 총목』(그림자), 중화서국, 1964년, 467페이지.
인용 개소는 『몽고원류』에 베풀어진 「제요」의 일부이다. 『4고전서』 소수의 서적에는, 모두 그 개요를 소개하는 「제요」가 베풀어졌다. 덧붙여서 인용문을 번역하면 "일통 동문의 왕성한 통치는 실로 옛날 드물 정도의 높이에 있습니다"가 된다.
(10) 「천주교」왕수명교증『22사사기교증』아래, 중화서국, 1984년, 792페이지.
(11) 이 논점은, 히라노 사토시씨의 「청제국과 티베트 문제-다른 민족 통합의 성립과 기와해」 제2장(나고야 대학 출판회, 2004년, 109~110페이지) 에서의 설을 참고로 했다.
(12) 예를 들면 『고이사 勳記』巻三十四 「해외의 제번은 대부분은 내지인을 통역으로 한다」
(이전, 아래, 787~788) 참조.
(13) “호루 필담” “구구소 여름록”(중화서국, 2010년) 소수, 269페이지
(14) 요마타마 성편 “황조경 세문편 속집”권 55, 레마사 3, 대전하, 1882년,
『근대사 자료총간』(791, 1369페이지) 소수. 兪樾은 이 책에 스스로 서문을 전했다.
― 20
(15) 「춘재당 수필」강소 고적 출판사, 2000년, 4~7페이지 등을 참조.
(16) 兪樾의 교우관계를 논한 것으로서, 시마 역강씨 「兪樾과 李鴻章―『東瀛詩選』성립을 둘러싼―― 『오타니대학 대학원 연구기요』 제23호, 2006년 , 12월.
(17) 兪樾『王子荘「中外和戦議」서』『春在堂雑文五編』 소수.
(18) 전 게시물 「춘재당 수필」, 94페이지.
(19) 동일.
(20) 「자작과 『히가시야시 시선』」, 시마네대학 문학부 언어문화학과편 「섬대언어문화 시마네대학 문학부 기요」 제1호, 10~11페이지.
(21) 蔡毅씨, 전 게시 논문, 14페이지.
(22) 蔡毅씨, 전 게시 논문, 7페이지.
(23) 오야나기 사키타 “유곡원에 가서” “동양 사상의 연구” 모리키타 서점, 1932년, 78페이지.
(24) 『동경시선』이 일본의 한시단에서 전면적으로 지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많은 논자가 지적한다. 왕보 히라 씨는 「청대 일중 학술 교류의 연구」(濲古書院, 2005년)의 제2장 제2절(특히, 99~118페이지)에 있어서, 「히가시야시시선」의 일본 에 있어서의 평가와 그 불평의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논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쿠보 천수(1875-1934)의 발언을 「공평한 평가일지도 모른다」라고 소개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유루도 있지만, 「편리한 책」으로, 「각 사람에 관한 평론과 같이, 흔히 취해야 할 것이 있다」라고 하는 평가」이다.
(25) 오카 센세이 “관광 기유” 6, “오가타호 이코시 히로아키 둔” 제5조, 광문서국(그림자), 4821페이지. 덧붙여 이하 『오가타호 이코시 히로아키』로부터의 인용에 있어서, 페이지 번호는 광문서 국판의 것을 내건다.
(26) 전 게시물 「춘재당 수필」, 128페이지.
(27) 동상, 128페이지.
(28) 「히가시노시 선에서 볼 수 있는 유자의 수개―스가차산의 『황엽 석양 마을 시』와의 비교를 통해―」, 『중국 중세 문학 연구』51, 2007년, 110 ~일일일 페이지. 덧붙여 인용 개소의 쓰여진 문장은 郭頴씨에 의한다.
(29) 閻立씨, 전서, 서문 및 제1장 제3절 참조.
― 21 ―
(30) 설립 연도에 대해서는, 다카사키 요시씨 「만청양무학당적 외어연구」(상무원서관, 2007년) 제3장 및 제4장을 참고로 했다.
(31) 동상, 69페이지.
(32) 야나기 씨, 전 게시, 제4장, 180페이지.
(33) 야나기 씨, 전서, 제4장.
(34) 「일본 비중국 번속판」 「고엔문록외편」, 상하이서점 출판사, 2002년, 118페이지.
덧붙여서 『대청일통지』에서는 일본인 표류민이 황제에 인견된 3례를 가지고 일본의 조공으로 하고 있다.
(35) 그러나, 왕우 자신은 대일 강경론을 취해, 일본 정부가 류큐·대만을 빼앗는 것에 경종을 했다.
왕립군 씨 「중국 조기 구안 지식 분자 형성적 문화 특징」(베이징대학 출판사, 2009년)은 제4장을 「왕운적 일본관:종 “동문 동종” 도착 “교우 사유””라고 한다 , 왕우의 일본관이 방일 체험 전후에서 「동문 동종」에서 「교교로 굵은」에 대신했다는 견해를 나타내지만, 관견의 한계에서는 동서중의 왕운으로부터의 인용문에 「동문 동종」이라고 하는 표현 아니.
(36) 「일본 국지」 「범례」 「황준헌 전집」아래, 중화서국, 2005년, 820페이지.
(37) 이 인용 개소에 대해 야스씨는 전 게시서(207페이지)에 「일본을 대등국으로 간주하고 공평하게 취급하는 태도」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황이나 제의 호칭을 바꾸는 것에 의해, 일본의 신분제나 직관 제도의 호칭 전반의 재검토도 필요한 점을 고려에 넣으면, 그렇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38) 전 게시물 『오가타보나 가마치 히로아키』 제10, 8083페이지.
(39) 도쿠다 타케시씨 「근세일중문인 교류사의 연구」(연문 출판, 2004년), 11 「황준헌의 「일본 국지」와 「치재법·형법 해석」 「1」 「 국지 '집필 준비'(405
~408페이지)는 그 사이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40) 전 게시물 『오가타보나 가마치 히로아키』 제10, 8141페이지. 덧붙여 『오가타호 이코시 히로아키』에서는 『일본 잡기』의 저자를 「闕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이치쿠로로 하는 점에 대해서는 汪婉씨(『청말 중국 대일 교육 시찰 연구』 징고서원, 1998년, 48페이지)의 설을 따랐다. 덧붙여서 이 책에서의 이치카미의 소개를 이하에 인용한다.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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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은 원래 강서에서 관직에 관해 있었지만, 나중에 상하이에 은거했다. 그는 일본 체재 중 상하이의 상사 몇사와 서신의 교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계와 관련된 인물로 추측된다.
(41) 전 게시물 『오가타보나 가마치 히로아키』 제10, 8148페이지.
(42) 전 게시물 「황준헌전집」, 1419페이지.
(43) 동일.
(44) 『음빙실 문 집지4』, 팔일 페이지.
덧붙여 『일본문독독법』에 대해서는, 후루타시마 요스케 '양계초 '일본문독독법'(노모토) 간주:복문을 설한 일본어속습서'('메이세이대학 연구 기요.일본문화학부·언어 문화 학과』16, 2008년, 29~64페이지)가 편리하다.
(45) 『음빙실 문집지2』, 54페이지.
(46) 『음빙실 문 집지4』, 82페이지.
(47) 『음빙실 문 집지4』, 93~94페이지.
(부기)
본고는 학습원대학 외국어교육연구센터 2009년도 연구프로젝트 「근대중국에서의 「신학」의 수입과 「일본」적 요소의 의미」에 의한 연구성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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