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3

국사학계 친북정서의 ‘숨은 神’ 김용섭 죽이기 - 미래한국 Weekly

국사학계 친북정서의 ‘숨은 神’ 김용섭 죽이기 - 미래한국 Weekly

국사학계 친북정서의 ‘숨은 神’ 김용섭 죽이기
미래한국
승인 2015.10.22

[심층추적] 역사학자들만 모르는 진실



그가 만든 ‘NL정서’는 민족 나르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는 그게 ‘젊은이들의 독극물’이란 점에서 걱정이다. 오죽했으면 4년 전 국방부가 “현행 국사 교과서로 배운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오면서 전투력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하소연했을까?
▲ 조우석 문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위원

위중한 지금 상황에서 최고통치자와 당정(黨政)이 검정제를 국정제로 바꿀 것을 결단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해(自害)의 단계를 넘어 반역적 성격이 분명한 국사 교과서가 교실에서 읽히는 아찔한 상황을 체제 수호 차원에서 대처하겠다는 절박한 인식이다.

분명한 건 국사학계 전체가 문제란 점이다. 검정 교과서들의 반(反)대한민국, 반(反)국가 성격을 바꿀 자정 기능을 저들은 이미 상실했다. 그 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대강은 이뤄졌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국사학자들에게 ‘숨은 신(神)’ 내지 ‘정신적 스승’으로 떠받들여져 온 인물 하나를 제거하는 데 쓰려 한다.

그 정신적 스승이 국사학자 그룹에서 공유하고 있는 민중사관이란 것의 몸통에 해당하는데, 그를 둘러싼 거짓 신화를 벗겨내지 않고서는 국사 교과서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국사학자들의 90% 이상이 좌편향 됐고, ‘우리민족끼리’의 NL(민족해방)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참담한 현상을 혁파하기 위해선 어쩌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비판 작업을 필자 같은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이유도 자명하다. 국사학자들의 한계를 우리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저들은 자기 갱신 능력, 질문을 던지는 기능, 그리고 시대가 요청하는 창조적 지성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없다.

실은 소수의 핵심 국사학자들을 제외하곤 ‘숨은 신’의 존재를 미처 의식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편협한 민족주의 정서에 갇혀 있는 국사학자 대부분이 ‘그 분’으로부터 지적(知的)-정서적 세례를 받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국사학계 전체가 그러하고, 1970년대를 전후해 지금까지 문학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 전체도 마찬가지다.

김용섭은 누구인가?

때문에 이 글은 그런 학문적 틀을 제공했던 ‘숨은 신(神)’, 그러나 유통시간이 끝난 그에게 학문적 사망선고를 내리는 작업인데, 요즘의 군사용어로는 지휘부에 대한 원점 타격이다.

좌편향화 된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세력, 즉 다수 국사학자들과 원로 좌파 국사학자(전 고려대 강만길,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등을 포함한 서중석 교수 등 중진학자 그룹)에 대한 응징은 물론, 보다 근본적인 외과수술을 통한 적출(摘出)요법이다.

‘숨은 신’은 전(前)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경제사학자 김용섭(1931년 생)을 지칭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식사회는 일제가 심어줬던 식민사관(한반도 정체성 이론)의 족쇄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걸 풀어낸 영웅적 해결사가 김용섭이었다.

김용섭은 기념비적 저술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에서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규명했다. 그걸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하는데, 일제가 심어준 식민사관의 독을 없애줄 위대한 해독제로 즉각 각광을 받았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발전 경로를 걷고 있었으나 이게 사악한 외세 일본의 침략을 받고 왜곡됐음을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모두가 심정적으로 믿고 싶었던 것을 김용섭이 학문의 이름으로 설명해줬으니 학계 전체가 만세 부를 경사였다. 구체적으론 이렇다. 그는 본래 연구밖에 모르는 학자로 유명했다. 1997년 연세대 정년 퇴임 이후에도 매일 아침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연희동의 연구실로 찾았을 정도로 공부벌레였다.

그럼 내재적 발전 혹은 자본주의 맹아를 어떻게 규명했단 말일까? 구체적으로 18~19세기 조선시대의 토지대장 자료를 꼼꼼하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파헤쳤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 지난 4월 연세대에서 감사패를 받은 김용섭 교수(左)

외세가 개입하기 전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이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었고, 사적(私的) 소유가 확립되는 중이었다는 우리가 믿고 싶었던 가설을 그가 여보란 듯이 입증했다. 토지 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논리를 그런 구체적 자료와 논리로 돌파한 것이다.

“외래 이론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근대 역사학에 걸맞는 실증적 연구”라는 점에서 학계가 그를 찬양했다. 학문적 엄정함에서 넘볼 수 없는 큰 봉우리라는 평가(이경식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를 누구나 한다.

하지만 김용섭 이론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도식(圖式)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지향하는 강력한 목적론이 들어 있다는 점도 대충 넘겨버렸다. 이후 민족주의 사학이 국사학계의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 말로 그게 대세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국사학을 넘어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민중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게 훗날 1980년대 운동권의 문화적 모태인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 그리고 창비 그룹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으로 발전한다).

일견 감사한 일이다. 그 이전 한국 사회에서로 만연했던 민족성에 대한 비하, 이른바 엽전의식이 극복된 것도 김용섭 그 이후다. 박정희 시대의 기적적인 경제개발 성공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좌편향 친북 교과서의 원조

어쨌거나 다산 정약용을 마치 근대의 탐정처럼 다루고, 정조를 서구의 계몽군주처럼 묘사하는 문학,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상품의 등장은 모두 그 덕이다. 조선 후기에 폼 나는, 우리만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나르시즘의 자뻑’이었다.

이제 앞뒤가 꿰어지시는가? 그 점에서 김용섭 사학(史學)은 해방 이후 반일(反日)-반(反)외세의 한국인 멘탈리티를 설명해주는 패러다임일 수도 있는데, 그건 동시에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자면, 김용섭 사학은 이후 너무 마구 달린 결과 민족주의 사학을 거쳐 1980년대 민중사학으로 가지를 쳐나갔고, 급기야 오늘날 좌편향의 친북(親北) 교과서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명제에 따라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다. 일테면 김용섭의 아류인 전(前) 고려대 교수 강만길은 1970년대부터 기존 한국사 연구가 분단체제 고착에 이바지한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전 한양대 교수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도 원조는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론>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게 따로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해금된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대거 한국 사회에 소개되면서 지금 좌편향 국사학의 모델이 고착됐다.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 북한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만나 끝내 민중사학이라는 반역의 역사학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여기에선 역사인식의 주체가 대한민국이 아니다. 국민-국가가 아닌 민족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민족 타령을 반복하다보니 ‘우리민족끼리’의 종북(從北)의식 씨앗도 뿌렸다. 그 원조 중의 원조 역시 김용섭인데, 그래서 김용섭은 두 얼굴을 가졌다. 식민사학을 극복한 영웅이자, 지금의 병든 국사학계를 만든 원조다. 그런 그의 숨겨진 면목이 우리민족끼리의 친북주의 내지 종북주의인지도 모른다. 오늘 첫 공개하는 충격적인 일화 하나가 그걸 암시해준다.

김용섭은 199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인사 차 찾아온 연세대 사학과 출신의 제자와 대화하다가 은연중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왜 김대중 대통령은 당장 38선을 열지 않는 것이야?”

자신의 제자 A(현재 M대학 교수)가 학부 시절에 가졌던 386세대 식의 운동권 마인드를 여전히 갖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런 발언을 한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게 실언일 리 없다면, 그동안 감춰져온, 국사학자들이 전혀 몰랐던 김용섭의 멘탈리티를 드러내주는 중차대한 암시일 수 있다.

나의 잠정 결론은 이렇다. 김용섭, 그 자신이야말로 ‘우리민족끼리’의 NL(민족해방)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 확신을 품었던 위인이다. “그 분이 세상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게 후학들의 증언인데, 그 또한 김용섭을 제대로 보지 못한 소리에 불과하다.

어쩌면 내재적 발전론을 첫 개진했던 학자다운 기괴하고, 뒤틀린 정치의식의 실체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가 갖고 있던 NL정서란 2015년 지금 좌파 무리가 내세우는 한미연합사 해체,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구호와 별반 차이가 없다.

▲ 조선의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여 식민사학의 극복에 기여했다는 평을 듣는 김용섭 교수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


한국 근대사를 외세 對 민족 대립구도로 파악

지금까지 성역으로 남아 있는 김용섭에 대한 나의 이런 문제 제기는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알고 있다. 9년 전 열렸던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윤해동 성균관대 교수가 약간의 학문적 비판을 가한 게 전부였다.

그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지상주의 논리에서 만들어졌기에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며 “내재적 발전론의 전통을 붙들고 있는 것은 헛된 일이며 전통은 필연적으로 붕괴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다. 이후 반향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언제까지 그런 정신적 착란-반역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관념의 사치 차원에서 허용할 것인가? 김용섭에 대한 나의 이런 판단을 거들어주는 썩 훌륭한 판단자료가 따로 있다.

국사 교과서를 관류하는 집단정서인 좌파 민족주의 혹은 NL정서를 ‘민족 나르시즘’의 타락이라고 경고했던 사람이 논객 박성현(뉴데일리 주필)인데, 그게 진실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 국사학계는 “순수하고 착한 조선민족의 고고함을 조명하는 민족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역사교과서 국정화 전쟁을 위한 출사표’).

나르시즘에 빠진 그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외세 대(對) 민족의 대립구도로 파악한다. 왜 그러한 침략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문명사적 통찰은 없이 ‘나쁜 놈’이 ‘착한 우리’를 짓밟았다는 식이다. 그런 국사학은 결국 피해망상적 정신분열증으로 타락한다.

그렇다면 김용섭이야말로 집단 나르시즘 혹은 피해망상증을 정당화시켜준 사람이다. “왜 김대중 대통령은 당장 38선을 열지 않는 것이야?”란 발언은 김용섭 스스로 민족 나르시즘에 빠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외면했고, 동시에 친북 정서를 체화했다는 증거다. 다음은 함께 경청해야 할 박성현의 발언이다.

“협소하고 뒤틀린 그런 관점을 유포시키는 자들의 속내는 평양 전체주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한편 평양 전체주의에 대한 부역질을 도덕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김용섭 식의 내재적 발전론이란 민족 나르시즘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허구에 다름 아니며, 결국은 지금 국사학자들처럼 마비된 정치의식과 친북, 반(反)대한민국의 반역 정신으로 뻗어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섭의 실체를 밝혀야

재확인하지만, 김용섭 사학은 유통기간이 끝났다. 그걸 암시해준 게 문학평론가 김윤식이다. 김윤식은 평론가 고(故) 김현과 함께 그 유명한 저술인 <한국문학사>(1973년)를 썼는데, 그게 모두 김용섭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가능했다.

김용섭이 조선후기에 자본주의의 맹아를 발견했다고 과감하게 끌어올리는 바람에 김윤식-김현은 한국 문학의 기원을 영·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문학사>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김윤식은 2006년 학계 모임에서 “식민사관과의 투쟁은 내 세대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한국에서 근대의 씨앗이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이 있었기에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을 18세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 시절의 진리일 뿐 변화된 지금 시대엔 더 이상 유통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했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한 ‘진리는 논박될 수 있을 때라야 진리이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라. 반증 가능성이 없다면 진리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진리가 진리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과 같은 반증 가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선언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김윤식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진리가 역사적 속견(俗見)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용인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역사의 종착역이 아닌 수많은 간이역일 수도 있음에 대한 암시라고 당시 한 일간지가 보도(동아일보 2006년 5년 29일자 문화면)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힘겹게 구축한 진리가 진리로 통용될 수 있었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도 가능했다. 이제 당신들 차례다. (우리 세대의 진리를 넘어서) 못해도 국민소득 3만7000달러 시대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나?”

실로 의미심장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그 발언은 김용섭과 자신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이 벽에 부딪쳤다면, 2015년을 사는 우리가 새로운 길을 뚫으라는 조언으로 들린다. 그게 진리를 구하는 자세이리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감히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을 말한다.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그게 맞다.


내재적 발전론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복고적 민족주의 정서로 발전하고, 국가 대신 민족을 들먹이는 기이한 우리민족끼리 신조로 변질된 것이 지금 검정 교과서들의 뒤틀린 정신세계다. 끝내 통일지상주의의 환상에 빠져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지적-정치적 파산(破産)으로 변질됐다는 점도 기회에 재확인하는 바이다. 그걸 새삼 드러내기 위해서 김용섭의 실체를 밝혀야 했다. 결론은 자명하다.

국사학자들의 정신적 스승 김용섭부터 친북-반(反)대한민국의 뒤틀린 정치의식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건 민족 나르시즘의 가짜 신화를 뻥튀기하는 순간(‘내재적 발전론’을 부풀리는 순간) 이미 배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국사학계가 김용섭을 죽여야 하며, 그래야 새로운 시야 속에 진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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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조우석 선배랑 열 번도 넘게 만났는데, 이 글은 어저께(2023.8.11) 비로소 발견하고, 감탄하면서 읽었다. (카톡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이씨 조선 정치든 대한민국 정치든 김씨 조선 정치든, 이해하려면 "숨은 신" 개념이 필수적인데, 이 글만큼 그것을 쉽게 풀어준 글을 본 적이 없다. "숨은 신"은 인격(정신적, 학문적, 이념적 스승 내지 지주)이기도 하고, 학문적 틀이기도 하고, 이념이기도 하고, 한 사회가 합의한 가치정책적 컨센서스이기도 하다. 실용과 성과(국리민복)보다는 정통, 순수, 지조, 의리, 명분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강한 정치공동체에서는 '숨은 신"(조선에서는 문묘 종사자)을 보아야 정치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각설하고 조우석이 '숨은 신'으로 지칭하는 김용섭의 학문적 업적과 영향력에 대해 쓴 글의 요지만 보자.
‘숨은 신’은 전(前)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경제사학자 김용섭(1931년 생)을 지칭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식사회는 일제가 심어줬던 식민사관(한반도 정체성 이론)의 족쇄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걸 풀어낸 영웅적 해결사가 김용섭이었다. 김용섭은 기념비적 저술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에서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규명했다. 그걸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하는데, 일제가 심어준 식민사관의 독을 없애줄 위대한 해독제로 즉각 각광을 받았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발전 경로를 걷고 있었으나 이게 사악한 외세 일본의 침략을 받고 왜곡됐음을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모두가 심정적으로 믿고 싶었던 것을 김용섭이 학문의 이름으로 설명해줬으니 학계 전체가 만세 부를 경사였다. (중략) 외세가 개입하기 전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이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었고, 사적(私的) 소유가 확립되는 중이었다는 우리가 믿고 싶었던 가설을 그가 여보란 듯이 입증했다. 토지 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논리를 그런 구체적 자료와 논리로 돌파한 것이다. (중략) 내재적 발전론은 국사학을 넘어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민중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게 훗날 1980년대 운동권의 문화적 모태인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 그리고 창비 그룹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으로 발전한다) (중략) 전 한양대 교수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도 원조는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론>이다.
김용섭의 담론은 구겨진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더 강하고 설득력있게 질타할 근거를 찾는 한민족에게 채찍 하나를 쥐어 줬기에, 아마 남북한을 초월할 거족적 환호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30년 간 조선/한국-일본-중국-유럽-미국의 근현대 경제사, 정치사, 사상사, 제도사, 기술사, 자연환경사 등을 주마간산한 대한민국의 웬만한 지식인은 김용섭의 주장을 (한 측면을 침소봉대한) 국뽕사관이요, 비겁하고 비루한 남탓사관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가장 큰 패악은 문명사에 눈을 감아버리면서 조선의 잔혹사, 실패사, 망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숨은 신'을 자꾸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맞딱뜨린 치명적인 위기; 즉 외교안보(중국, 북한, 북핵 문제 등), 사법, 경제, 고용, 공공, 지방, 교육, 의료, 재정 문제 혹은 저성장, 저출산, 고비용, 고갈등, 불평등, 불균형, (인구·지방·재정·연금·건보•바이탈과•주력산업 등의) 지속가능성 위기는 윤정부 1~2년이 만든 문제도 아니요, 문정부 5년이 만든 문제도 아니다. 물론 문정부는 정말로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해결을 뒤로 미루긴 했지만 아무튼 문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1987년 이후 지배적인 통념/이념/문화/컨센서스가 만든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역대 정부들은 이를 인지하고 제각기 제동을 걸거나 지양/개혁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우파는 개혁에 소극적이거나 무책임하게 방관했고, 진보/운동권은 아예 개혁에 정면 반하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 정점이 문재인 정부와 현 이재명과 개딸과 조국수호대와 화석좀비 586의 민주당이다.
운동권은 청년대학생 시절에 역사, 정의, 민주, 진보, 개혁, 노동, 민중, 민족, 환경, 여성 등의 얼굴을 한 '신'을 먼저 영접하고, 그 사제내지 전도사 역할을 잠깐 이나마 해 본 사람들이라서 수많은 모순부조리(현상)의 배후에 '숨은 신'의 임재를 안다. 그 중에는 주자성리학이라는 신도 있고(뒤늦게 발견), 주체사상이라는 신도 있고, 맑스레닌주의(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종속이론, (유럽 68혁명을 낳은) 신좌파사상, 페미니즘 등도 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동지회로 결집한 선수들은 대체로 과거에 사상이념적 향도 노릇을 조금은 해 본 사람들 많아서, 세계에 대한 관찰과 자신(의도와 결과의 괴리)에 대한 성찰과 역사에 대한 통찰을 별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금은 일찍 이 '숨은 신'들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신 내니 죽어 마땅한 신이 서 있던 자리에 보편/비판 이성(과학)과 기독교의 합리적 핵심과 직업윤리 등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참 조우석 선배가 내 책 <7공화국이 온다>를 극찬한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신 분이 내 책을 극찬했으니 어깨 으쓱!!
그리고 김용섭에 대해서는 김호기의 찬사(한국사학의 숨은 신 김용섭의 농업사)가 있는데, 그 내용은 완전히 정반대다.
국사학계 친북정서의 ‘숨은 神’ 김용섭 죽이기 - 미래한국 Wee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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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계 친북정서의 ‘숨은 神’ 김용섭 죽이기 - 미래한국 Weekly
그가 만든 ‘NL정서’는 민족 나르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는 그게 ‘젊은이들의 독극물’이란 점에서 걱정이다. 오죽했으면 4년 전 국방부가 “현행 국사 교과서로 배운 젊은이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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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970년대에 정초한 ‘내재적 발전론’으로 '한국 사학계의 숨은 신'으로까지 불리는 김용섭 교수지만 연구 활동과 논문 발표 이외 대외 활동은 극력 회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이렇다 할 번듯한 사진이 없다. 이 사진도 수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답사 다닐 적에 찍어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선생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사진”이라며 건넸다. 김도형 이사장 제공

지성사의 관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일제 식민 유산의 극복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도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우리나라를 식민화하려 했다. 36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광복 이후 우리 지식사회에 부여된 긴급한 과제 중 하나는 이런 정신적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었다. 이 과제에 가장 충실했던 이들은 역사학자들이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투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들로는 이기백, 김용섭, 강만길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용섭은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식사회에선 그 영향력이 실로 컸던 역사학자다. 역사학자 윤해동은 김용섭을 한국사학의 ‘숨은 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 역시 광복 이후 학문적 진지함과 탁월성에서 김용섭이 최고의 학자라고 생각해 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김용섭은 농업사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일관되고 포괄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둘째, 그의 분석이 중심을 이뤘던 ‘내재적 발전론’은 광복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이론이었다. 그는 자기 완결적 학문체계를 구축했던, 우리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던 지식인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와 구성

김용섭은 1931년 강원 통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고려대에서 석사를, 연세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서울대 사범대에서, 1967년에서 1975년까지 서울대 문리대에서,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연세대 문과대학에서 가르쳤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지식사회 안에서 김용섭은 칼럼ㆍ에세이 등의 ‘잡문’을 쓰지 않는 학자로 유명하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자신의 회고록을 발표해 작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해방세대 학자의 역사연구 역사강의’가 그것이다. 회고록이란 형식을 통해 그는 더없이 치열했던 평생의 연구와 강의를 결산했다.

김용섭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 연구는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ㆍ2’다. 1970년과 1971년 두 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1995년 제1권 증보판이 나왔고, 2007년에는 제2권 신정증보판을 내놓았다. 그리고 1988년 조선시대의 농서와 농학을 다룬 ‘조선후기농학사연구’가 나왔고, 2009년 그 신정증보판이 출간됐다. 김용섭의 문제의식은 제1권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1970년 간행된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권. 이후 김용섭 교수는 농업사에 대한 묵직한 저작을 잇달아 내놓는다.

“우선 필자의 관심거리가 된 것은,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을 농업ㆍ농촌ㆍ농민에 관해서 그 내적 발전과정의 입장에서 해명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였다. (...) 필자가 생각한 대로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이 밝혀진다면,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였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를 꿰뚫고 있는 역사틀이, 김용섭 자신이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제 강점기 백남운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잇닿아 있다. 그 논리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성장과 지주전호제의 성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일궈냈다. 둘째, 중세사회를 해체하고 근대사회를 열고자 했던 자생적 자본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농민 저항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식민지 수탈 체제가 확립됐다.

내재적 발전의 사례로 김용섭이 제시한 것이 ‘경영형 부농’이었다. 경영형 부농이란 차경지 경영을 통해 부농이 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볼 수 있는 ‘자본가적 차지농(借地農)’에 가까운 존재였다. 토지대장인 양안과 호적대장을 주요 분석 자료로 활용한 이러한 내재적 발전론이 준 충격은 지대했다. 우리 근대사의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경험적 비판 및 극복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 근대성의 기점을 조선 후기로 이끌어 올리게 했다.

김용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후 ‘한국근대농업사연구’(1975)를 바탕으로 ‘한국근대농업사연구 1’(1984), ‘한국근대농업사연구 2’(1984), ‘한국근대농업사연구 3’(2001)을 출간했고, 여기에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1992), ‘한국중세농업사연구’(2000)를 더했다. 총8권으로 이뤄진 ‘김용섭 저작집’을 통해 그는 조선 후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 농업사 연구를 완성했다. 실로 경이로운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성취와 기여

김용섭 역사학의 전모를 여기서 모두 다루긴 어렵다. 나는 사회학적 시각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성취와 기여를 살펴보려 한다.

내재적 발전론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근대주의적 시각’과 ‘일국사적 시각’이다. 이 두 시각은 서로 결합돼 있다. 먼저, 내재적 발전론이 기반하는 근대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내재적 발전론은 전통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의 가능성을 추적하고자 한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심층적 실증’에 바탕해 조선 후기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주목하고, 가치판단의 관점에선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암시적으로 옹호한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화 이론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에 가까운 것이며, 근대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비판적 근대주의’로 볼 수 있다.

비판적 근대주의로서의 내재적 발전론이 갖는 의미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동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일관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분석과 논리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ㆍ경험적 무기를 제공했다.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비로소 우리 근대사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됐고, 또한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의 한국사적 특수성을 인식하게 됐다.

한편, 일국사적 시각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 탈민족주의론 등으로부터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 내재적 발전론은 이론적ㆍ경험적 수준에서 시험대 위에 올라서 있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그러나 내재적 발전론의 설명력은 여전히 높다. 무엇보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변동에서 중요한 것이 외적 충격에 대한 내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내적 변동이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은 일관된 설명을 제공한다.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어떻게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역사로 외화돼 왔는지에 대한 탐구는 김용섭이 후학들에게 던지는 과제인 셈이다.

◇지식인의 고독, 지식인의 사명

마지막으로 김용섭에 대한 기억을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모교로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연구실이 외솔관 5층에 있었는데, 김용섭의 연구실도 같은 층에 있었다. 몇 년 뒤 위당관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학자 그 자체였다.
김용섭 교수는 자신의 결벽증적인 고독에 대해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라는 책에서 “학문적 대의를 위해 보신의 지혜를 지키지 못했다”고 썼다. 연구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식민사학 극복을 향해 돌진하면서 사학계 내부 문제를 건드린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용섭은 일찍 학교에 나와 종일 쉼 없이 연구에 몰두하며, 식사도 싸온 도시락으로 대신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통찰적인 학자였는지는 그의 수제자들인 고 방기중 연세대 교수와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여러 번 듣곤 했다. 저녁 늦게 연희동 쪽으로 혼자 퇴근하는 그의 모습을 어쩌다 목격하면, 지식인의 고독과 사명을 생각하게 됐다.

김용섭의 학자적 모습은 자연 다산 정약용을 떠오르게 한다. 불우한 자신의 처지에 맞서 학문적 열정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처럼, 김용섭은 1960~80년대 군부권위주의 시대에 맞서서, 여전히 남아 있던 식민사학의 그늘에 맞서서 우리의 주체적인 역사 연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식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지식인에게 진리란 무엇이고,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ㆍ역사학ㆍ철학 등의 인문학이 진리 탐구에 주력한다면, 정치학ㆍ경제학ㆍ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은 정책 연구도 소홀히 할 순 없다.

진리 탐구와 정책 연구는 지식인에게 부여된 가장 중대한 사명일 것이다. 역사가 바뀌고 사회가 변화해도 지식인에게 부여된 이런 본래의 사명은 오랫동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임혁백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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