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략의 논리]
이 글을 쓰기에 앞서서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달아야 할 것입니다. '설명'은 결코 '긍정'이나 '수용'을 절대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포함한 그 어떤 제국주의 침략도, 그 어떤 논리로도 '합리화'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되죠. 그런데 '합리화'와 차원이 다른 침략 주체의 내재적 논리 구조의 '이해'는 필요합니다. 그런 이해가 있어야 침략 주체의 차후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으며, 또 '평화' 모색의 가능성과 방법들을 고민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와 그 후의 러시아는 참 모순적인 사회이었습니다. 일면으로는 푸틴의 권위주의 정권 통치 하에서는 일정한 '안정'이 찾아왔습니다. 2014년 이후 경제 성장은 멈추었지만, 대도시들의 평균적 소비 수준은 예컨대 동유럽 (바르샤바나 리가, 부다페스트 등)과 이미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술은 계속 진보되었으며, 예컨대 러시아 은행들의 넷뱅킹이나 앱들의 기술적 수준이나 편리함은 이미 2010년대 후반에 북구를 추월할 정도이었습니다. 범죄율 등도 내려가 모스크바의 살인율 (10만명 당 살인 피해자의 비율)이 2.5명에 달했습니다. 참고로 뉴욕의 살인율은 3.4명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이런저런 "개선"이나 "발전"이 계속 이루어져 온 것이죠.
한데 이런 상황임에도 자국의 상태에 대해 만족해 하는 러시아인들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독재의 전횡을 문제 삼는 자유주의자나, 이민 노동 착취, 미국과 거의 같아진 빈부 격차 등을 문제 삼는 좌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주의자도 (비스탈린주의적) 좌파도 러시아에서는 별로 영향력 없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지배층이나 지배층에 가까운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상대적인 글러벌 위상의 '추락'에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습니다. 미국의 패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세계 금융과 첨단 정보 기술의 중심이자 최강의 군사 대국은 미국이었습니다. 금융이나 기술, 혹은 투자 자본의 보유 차원에서는 러시아는 미국이나 유럽과 "힘겨루기"에 턱없이 역부족했습니다. 법치 질서나 생활 편리함의 면에 있어서는 서유럽과 여전히 비교가 불가능했습니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는 중국처럼 급성장하는 제조업 대국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부유해진 러시아의 주민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나 휴대폰, 그리고 냉장고 등의 가전은 거의 전부 한국이나 중국산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차나 러시아에서 조립되는 외국 브랜드들이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는가 하면, 소련 때에 비행기 제조로 유명했던 러시아에서 95%의 항공사 승객들은 이제 보잉이나 애어버스를 타고 다니게 됐습니다. 사실 부유해졌지만, 러시아는 가면 갈수록 유럽과 중국의 "원자재 제공국" 수준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이 부분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지만, 많은 일반인들이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제가 초래한 가공할 만한 부정부패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2011-12년에 모스크바 등지에서 일어난 데모 등이 기층민 불만의 수준이 상당히 높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불만에 모종의 "출구"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전쟁은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출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론적으로 푸틴은 부분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복구하는 등 정치적 '참여' 가능성들을 넓혀줌으로써 민심을 수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석유와 천연가스로 벌어 들이는 자금의 일부라도 재공업화, 첨단 기술 제품의 국산화 계획에 효율적으로 이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러시아가 소련 때부터 저력이 있는 과학기술 등의 발전에 보다 많은 투자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데 푸틴은 결국 독재의 완화나 평화적인 식산흥업/국가 보호주의 길이 아닌 전쟁과 전시 경제 건설, 그리고 전시 상황에서의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이미 2014년부터 크림 반도 병합 등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침략과 2022년부터 시작된 전면전, 수십만 명의 전사, 우크라이나 국토 상당 부분의 황폐화와 러시아에서의 극단적인 권위주의 정권의 착근을 의미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푸틴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이루는 옛 KGB 등 보안 계통의 관료와 군 장교 계층, 군수 산업 관계자, 보수적 논객 등의 영향을 물론 과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결국 푸틴 정권의 가장 중요한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푸틴의 권력 지향이 절대적이기에 제한적 민주화를 푸틴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밖에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시의 국가 보호주의/국가 주도의 재공업화도 아닌, 고립을 수반하는 전시의 수입대체 전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궁극적으로 푸틴이 자신의 관료 집단을 불신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불신에는 합리적 이유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2010년대초반부터 선포된 수입 대체는, 극히 일부의 분야 (소프트웨어 등) 이외에는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고급 관료 대부분은 서방에서 부동산을 보유했으며 그 가족들을 거기로 가서 살게끔 해주곤 했습니다. 푸틴과 그 주위의 KGB 출신들에게는, 서방에서 영주권과 부동산을 보유하는 관료들의 존재나 지속적인 수입대체 전략의 실패, 러시아 시장에서의 외국산 정밀 기계나 여객기의 지배적 위치 등은, 러시아가 '매판' 관료 집단이 이끄는 기술, 경제상의 "유사 식민지"로 돼간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시킬 만한 전쟁 이외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자주성"과 효과적인 (전시의 압박 속의) 수입 대체 재공업화를 이루어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좌파 논객들이 나토의 확장이 이번 침공을 "도발"했다고 보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전 이번 침공이 궁극적으로 푸틴 주위 집단의 일종의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비교하자면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1970년대 한국의 병영국가화와 방위 산업 발전에의 중점 등과 비교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전쟁이 '국가 개발 전략'의 일환이라면, 이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입니다. 서방이 평화 협상에 나서도, 한국 전쟁의 종전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처럼 푸틴도 협상을 질질 끌면서 그에게 득이 되는 전쟁 행위를 계속할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침공이 어떤 방식으로 끝날 것인가와 무관하게, 앞으로 수십년 동안 광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뒷받침되는 병영 국가에서 살아야 할 러시아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것인가, 싶습니다. 국가적 살인을 그 최고의, 숭고의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 살면서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군사주의, 이 병영사회와의 투쟁 과정에서 러시아에서 새로운 좌파가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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