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9

한락연(韓樂然) - 해방 이후 중국의 첫 조선족 출신 화가. 정치인.

한락연(韓樂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락연 (韓樂然)

해방 이후 중국의 첫 조선족 출신 화가. 정치인.
이칭이칭한광우
인물/근현대 인물1898년(고종 35)사망 연도1947년 7월 30일출생지중국 길림성 용정촌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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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중국의 첫 조선족 출신 화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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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첫 조선족 화가이다. 원래 이름은 한광우이다. 1898년에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9세에 용정 관립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용정전화국과 용정해관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1919년 가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유학을 떠났다가 다음 해 가을에 중국 상해로 건너와 상해미술전과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다음 해에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하고는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심양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이름을 한락연이라 고치고 화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전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7월 말에는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보육학교에서 가르쳤다가 1928년에 상해로 돌아 왔다.

그 뒤 당 조직이 깨지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1년에 파리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 네덜란드,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 등을 돌아다니면서 각국의 화풍을 익혔다. 1937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무한과 중경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석하였으며, 1940년 봄에는 서안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1947년에는 난주와 서안에서 20차례의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1946년 4월부터는 신강에서 고대 고창국(高昌國) 유적지와 키질(Kizil) 천불동(千佛洞) 발굴 정리 사업을 처음으로 진행하였다. 하지만 1947년 7월 30일에 비행기를 타고 적화에서 난주로 가다가 조난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2010년 9월 22일에 중국 용정시 정부에서 용정 토성포의 육도하와 해란강 합수 지점에 락연공원을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한락연」(박창욱,『조선족혁명렬사전』2,요녕민족출판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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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천재화가 한락연유작전/일제때 중국서 활약 서역묘사 탁월
김태익 위원
조산일보, 입력 1993.09.02. 00:00


암울한 일제시기 만주에서 태어나 이국 땅에서 화명을 떨치다 간 비운
의 천재화가의 유작전이 그의 사후 46년만에 모국 땅에서 마련됐다.
2일 개막, 12일까지 예술의 전당 제 4전시장에서 열리는 실크로드
에 담긴 조선족의 혼-한락연유작전 은 조국의 불운한 역사 때문에 미술
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져야 했던 한 화가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다. 한락연(1898~1947)-. 

그의 이름은 중국 근대회화
사에서 서비홍 임풍면 상서홍 등 같은 시기 프랑스 유학파 대가들 이름
과 같은 반열에 있다.한락연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49세의 짧은 생애
동안 무려 20회의 개인전을 기록했다. 특히 실크로드를 중심한 서역지
방에 관심이 깊어 돈황과 키즐의 벽화 모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또 티베트 하사크 몽골 위구르 등 중앙아시아 토착인들의 생활과 민속을
살아움직이는 듯한 화법으로 생생하게 묘사, 당시 정적인 이미지를 추
구하던 중국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북경
의 중국미술관과 한락연의 유족 소장품 중 작품성이 뛰어난 유화(37점
)와 수채화(32점) 등 69점
. 모두 호방하고 활달한 그의 인격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는 1947년 또하나의 동굴벽화 모
사를 위해 우루무치에서 난주로 군용비행기를 타고 가던 도중 악천후로
인한 비행기 추락으로 생애를 마쳤다. 유족은 동갑 본부인이던 최신애
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 인숙씨(74)가 광복후 만주 용정에서 귀국,
충남 예산에서 살고 있고 중국부인 유옥하와의 사이에 출생, 북경에서
살고있는 건행(48)-건립(49)씨 남매가 있다. 이들 남매는 이번
전시회에 참석하러 31일 내한했다. 김태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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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속의 우리유산 (32) 한락연과 키질 석굴

등록 :2005-09-07 22:07수정 :2005-09-0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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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락연이 그린 키질 석굴의 불교 벽화 모사도. 설법하는 보살상과 기악비천상을 그렸다.
조선족출신 중 혁명예술가 키질·둔황 벽화에 숨결 묻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락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 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저명 미술인 청청은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그린 쿠차 실크로드 벽화의 모사도 전시를 보고 나서 이런 평문을 남겼다. 글 속의 변방동포는 화가 한락연이 조선족임을 암시하는 구절이었을 터다.


청청의 찬사처럼 화가 한락연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국 미술계에서 근대 양화의 대가,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미술사 책마다 언급되는 대가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 본토와 유럽을 누비며 화업을 닦았으며 40년대엔 서역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연변 출신의 그가 무슨 까닭으로 정반대쪽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되었던 것일까. 조만간 <한겨레>에 연재될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 답사 특집 팀이 신장성 쿠차의 벽화 유적을 답사하던 길은 또한 20세기초 유일하게 서역을 누빈 한국인이던 한락연의 자취를 더듬는 길이기도 했다.

서역 음악의 본고장인 쿠차는 기원전후부터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고, 당나라 때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 본거지를 두었던 곳이다. 한락연의 숨결 묻은 키질 석굴은 쿠차 시가에서 70여 km 떨어진 산악 계곡 속에 있다. 쿠차 시가에서 출발해 텐산 산맥의 지맥을 보면서 협곡의 지세를 물결치듯 타넘는 이차선 가도를 가로질러 1시간 여를 가면 석굴 공원이 나타난다. 그랜드캐년 같은 웅장한 협곡과 소금 강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는 길은 서유기의 모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불경을 번역한 고승 구마라지바의 동상이 서있는 공원 들머리를 지나 석굴로 오르니 감각적 색조에 입체감 뛰어난 천불, 보살상 등의 환상적 이미지들이 눈을 때린다. 한락연의 자취는 그가 발견한 10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굴 벽에서 이목구비 뚜렷한 그의 액자 초상과 조사 때 와서 손수 남긴 글들을 볼 수 있다.

“1946년 6월 5일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거기에는 고상한 예술가치가 있고 각지의 어느 동굴에서도 없는 것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는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떼어갔다. 이것은 문화상의 커다란 손실이다… 고대 문화를 발견하고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은 특히 사랑하고 보호해주기 바란다.”

한락연의 경력은 파란만장이란 말에 걸맞다. 44년 깐수성으로 거처를 옮겨 키질과 둔황 벽화를 조사하기 전까지 그는 혁명과 예술을 병행한 지사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23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상하이, 우한 등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했으며 29년 프랑스로 유학가서 그곳의 신인상파와 다다 화풍에 영향받으며 유럽 곳곳의 미술유산을 섭렵했다. 귀국 뒤 국공합작을 도우며 선전화 등을 그리다 3년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투옥됐으며 43년 출옥 뒤 택한 길이 실크로드 유산의 연구·모사 작업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작고하는 47년 7월까지 수차례 키질과 둔황 벽화를 찾아 모사 및 발굴 연구에 매달리는데, 키질 벽화를 처음 모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실크로드 유적과의 차이점, 유산적 가치에 대한 논문도 먼저 발표한다. 헬레니즘풍의 감각적 회화로 인정받는 키질 석굴의 미술사적 가치를 처음 발견해내고 석굴 개수를 정리하고 번호표를 매기는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의 업적이다. 90년대 처음 국내에 그를 소개한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출옥 뒤 한락연이 서역을 향한 것은 예술을 필수품처럼 중시하되 소재주의·상업주의에 영합하는 것을 반대한 역사의식의 소산으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금 그의 자취 어린 키질 석굴을 찾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다. 관객 모집이 안돼 실크로드 투어에서 외면당하고, 어쩌다 와도 한락연의 자취를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다. 정수일 교수는 “추념 비석이라도 고국에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같이 벽화를 모사한 동료 창수홍의 전시 때 남긴 고인의 글이 여운으로 남는다. “…문명은 노력하지 않고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문화 전사들의 비통한 전투를 거쳐 얻은 축적이다. 이는 공유의 재산인 것이다…”

쿠차/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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