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승 210816
·
이십년쯤 전에 서양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교수님께서 일제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가운데 3.1운동 이외에 들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3.1운동 이후에는 일제 통치에 대부분 다 복종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냐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은 그 이후에 오히려 더 활발한 독립운동, 항일운동을 펼쳤고, 아마도 전 세계 식민지 민족 가운데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고 답했다. "그럼 그 말에는 증거가 있느냐" 해서, "매년 평균 1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사람이 수백 명씩 되었다"고 답했다.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다. 요즘은 통계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니, 통계를 통해서 한 번 살펴보자. 당시 경찰당국의 통계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경찰 부분과 감옥 부분 통계를 보면, 그 숫자가 대체로 나와 있다. 경찰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이가 2만7천 명 정도이고, 검사에 송치된 이가 1만 9천명, 그리고 재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이가 약 3천2백 명, 그밖에 태형이 수천 명이 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주로 '보안법'을 적용했고, 이후의 독립운동에는 주로 3.1운동 발발 직후에 만든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령'(제령 7호)을 적용했다. 1921년 워싱턴 회의에 즈음하여 만세를 부르거나 다른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이들은 약 6천5백 명이었고, '정치범죄처벌령'으로 실형을 언도받은 이는 약 1500명이었다.
1925년에는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 운동을 단속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공포했는데, 이는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이후에는 이와 관련하여 체포되고 형을 언도받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예를 들어 1930년에는 보안법 위반자 107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자 46명, 치안유지법 위반자 256명이 실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갔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거하여 대체로 통계를 내보면, 1921년부터 1938년 사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3298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10,528명,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17,561명이었다. 이를 합하면 31,387명이 된다. 1년에 평균 1740여 명이 체포된 셈이다. 엄청난 숫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실형을 언도받은 이는 보안법 위반자가 488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자가 2071명,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3544명이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38년까지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이들은 모두 약 6100명 정도가 된다. 1년에 평균 338명이 감옥에 간 셈이다.
위의 6100여명과 3.1운동기의 수형자 약 3200명과 합하면 약 9300명이 된다. 이는 집행유예나 태형을 받은 이를 제외한 숫자이다. 이들까지 다 합하면 1만 수천 명이 될 것이다.
실형이나 집행유예를 언도받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도 감옥에 미결수로 1년 이상 갇혀 있는 이들도 많았다. 구속기간에 사실상 제한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작정 가두어 놓고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고, 거짓이라도 뭔가 말할 때까지 고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1년이 지난 뒤에 기소유예나 면소로 풀려난 경우도 있었지만,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따라서 체포된 이들의 숫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1921년부터 1938년까지 체포된 이는 3만1천여 명이었다. 여기에 3.1운동기에 체포된 2만7천여 명을 합하면 5만8천여 명이 된다. 거의 6만 명 정도가 되는 셈이다. 참고로 현재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은 이는 1만6천여 명이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결론을 지어보자. 위에서 제시한 숫자들은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에서도 수많은 항일독립운동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체포된 이들, 감옥에 간 이들은 수만 명에 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이 끈질기게 그리고 가열차게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결코 대충 산 게 아니다. 그리고 일제에 모두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산 것도 아니다.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살았던 이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다수의 민중들은 저항은 하지 못했지만, 나서서 협력하지도 않았다. 또 생각이 있는 지식인들은 은거하며 살았다. 타협하고 협력하며 살았던 이들의 후손이 "그때는 다 그랬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6 comments
Wonyoung Yoon
고맙습니다 ~~^^
Reply
2 y
Young-Suk Lee
절대 공감합니다. 소수의 저항하는 사람들 외에 다수 조선인은 침묵했겠지만 그들 대다수는 협력하지 않았지요.
Reply
2 y
최석태
불온열전을 계간 역사비평에서 접하고 너무 놀랐습니다! ㅡ단행본으로 묶어서 나온 책도!
정말 끈득지게 싸웠구나 싶더군요!
Reply
2 y
방인혜
그럼요그럼요. 맞습니다.
끊임없이 일어나 저항하는 DNA를 가지고 있잖아요.^^
Reply
2 y
황재구
이런 내용의 글, 처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
2 y
Tae-ho Kim
마지막 부분 --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결코 대충 산 게 아니다. 그리고 일제에 모두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산 것도 아니다.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살았던 이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다수의 민중들은 저항은 하지 못했지만, 나서서 협력하지도 않았다. 또 생각이 있는 지식인들은 은거하며 살았다. 타협하고 협력하며 살았던 이들의 후손이 "그때는 다 그랬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Reply
2 y
Edited
강정숙
통계로 본 일제하 운동 박찬승샘 정리 공유합니다.
Reply
2 y
Kyojin Choi
공감하며 공유합니다
Reply
2 y
공근식
힘이 솟는 그리고 자랑스런 아픔을 잊지 않게 하는 글입니다!
Reply
2 y
Jin-heon Kim
기록된 자료만 가지고 역사를 논하는 개교수들,
기록되지 않고 그 흔적과 맥을 읽어야 진정한 역사의 진실을 볼 수 있는데,
그런점에서 우리역사 바로보기는 이런 수많은 사료가 그 실체적 접근의 젓줄이죠.
Reply
2 y
이대욱
교수님~~~
서양사 전공 교수님께 소안도 방문 기회를 제공해야 되겠습니다...… See more
Reply
2 y
Inseong Choe
Reply
2 y
서민철
그 서양사 하셨다는 교수님, 공부좀 하셔야겠네.
Reply
2 y
오길영
읽고 배웁니다.
Reply
2 y
송영지
공유만 하고 댓글을 안썼네요. 정말 글 잘 읽었습니다.
Reply
2 y
Heling Liu
정말 잘 읽었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