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인간학>. 나는 누구인가, <참 나>에 대한 물음
존재는 생명의 강물
2020. 8. 3. 9:29
제8절 나는 누구인가, <참 나>에 대한 물음
1. 인간의 여러 차원들
< #철학적_인간학> 14
#다석 선생은 인간의 차원을 < #몸_나>, < #맘_나>, < #얼_나>로 나누었는데, 나는 앞의 <몸 나>와 <맘 나>를 합해서 < #제_나>로 보고자 한다. 여기서 <제 나>는 거짓 나이며 <얼 나>가 참 나인 것이다. 그럼 먼저 <몸 나>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몸 나>에서의 이상적 삶의 원칙은 ‘ #몸성히’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노·장자철학에서는 신(身)을 강조하고 있는데 — 신선사상, 불로장생 등 — 다석 선생은 몸이 중요하지만 몸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몸 나>의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것이 ‘빔-사이’(공간)이며, 이 <몸 나>가 쉬는 숨은 < #목숨>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맘 나>에서의 이상적 삶의 원칙은 ‘ #맘놓이’(맘을 놓아 버려라)라 할 수 있다. 맘놓이의 의미는 ‘마음으로 부터 해방되어라’이다. 여기서 다석 선생은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흔히 불교에서는 마음을 강조하는데, 이 마음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맘 나>의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것은 ‘사람-사이’(인간)이며, 여기서 쉬는 숨은 < #말숨>이 된다.
셋째, <제 나>는 <몸 나>와 <맘 나>를 묶는 차원으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을 ‘ #정신’( #넋, 슬)으로 본다면 흔히 말하는 기(氣)차원이 될 것이다. 이 <제 나>는 ‘때-사이’(시간)을 메우며 살아가면서 숨을 쉬는데 이 때의 숨은 <#글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 나>는 나한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태우면서, 바탈(뜻), 속알(성)을 태우면서 사는 나이다. 이 <얼 나>의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를 사는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이 쉬는 숨은 < #얼숨(우숨)>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석 선생의 논의에 따르자면 ‘인간은 몸성히, 맘놓이, #바탈을_태우 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석 선생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서양철학에서의 인간이해의 흐름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크게 본다면, 그래서 그 주요 화두를 말해 본다면, #실체(고·중세), #주체(근대), #매체(현대), #영체(靈體)(탈현대)라고 본다. 이중에 현대에 들어서는 이제 모든 것이 매체가 된다. 절대적인 주체도 절대적인 객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디선가 만나고 있고 사이에 있다. 그래서 다석 류영모 선생이
인간을 < #사이에_있음>으로 본 것과 비교하여,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거기에-있음>)로 본 것에 주목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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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존재가 와닿고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거기에>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또한 불교의 연기법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본다. 모든 사물은 멀든 가깝던 관계를 맺고 있는 있음인 것이다. 요즘
#데리다(J. Derrida)의 철학사상을 우리의 생활세계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가 자
신의 어떤 글에서 인용한 말 중 ‘모든 사물은 장거리 통화중이다’라는 말도 이와 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모든
사물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관계, 사이에 있는 것이다. 때-사이(시간), 빔-사이(공간), 사람-사이(인간), 하늘과 땅
사이(천지간)를 끊임없이 메우며 그 사이를 불사르다가 가는 존재인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
다시 우리의 논의로 돌아와서 다석 선생의 인간이해를 살펴보자.
다석 선생은 유교와 도교와 불교를 종합하려고 시도를 하는데, 몸, 맘, 얼을 얘기할 때는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나
타난다. 특히 몸의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비교해 설명할 때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義業)을 말한다. 먼
저 ‘신업’은 몸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살인, 음란, 도둑질의 삼악(三惡)이 있다. 다음 ‘구업’은 입으로 죄를 짓는 것
으로 거짓말, 못된 말, 거짓 맹세, 실없는 말이 있다. 마지막으로 ‘의업’은 모든 죄의 근본뿌리로서 몸과 관련된 ‘탐
냄’, 살아가는 삶과 관련된 ‘성냄’, 인간관계와 관련된 ‘음란’이 있다. 탐냄은 모든 악의 뿌리요소로서 또 이 탐냄 중
에서도 ‘식탐’이 가장 크다.
그래서 다석 선생님은 ‘ #식사는_장사(葬事)다’라고 하시며 몸소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천하셨다. 원래 ‘ #끼
니’는 ‘ #끊이’(끊었다 이었다)에서 왔다고 보고 ‘먹는 것은 끊었다가 잇는 것’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먹기만 하면
죽는다. 인간이 예전에는 한 끼만 먹고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
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먹는 것에 탐닉하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이 살기 위해 다른 많은 생명을 죽인다는 뜻이
다. 다석 선생은 인간이 먹는 것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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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음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결혼(結婚)을 한 후 나중에 해혼(解婚)을 한다.
그리고 다석 선생은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의_삶 이다’라고 하시며 철저히 하루하루를 사셨다. 그래서 나이도 년
(年) 수가 아닌 일(日) 수로 계산해서 사셨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다’라고 했지만, 다석 선생은
직접 칠성판에서 자면서 그야말로 매일매일 잠자러 들어가는 것을 곧 죽음을 맞이하시는 기분으로 살았다. 이와
같이 다석 선생은 자신의 말을 직접 실천하여 삶으로 보여준 내용이 많다.
이러한 인간에 관한 이해뿐만이 아닌 전체의 차원에서 우리가 다석 선생으로부터 배울 정신을 나는 #융복합 또는
#통합정신 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어내어
차원 높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려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현재 동서양이 제3의 만남, 문화적으로 새로운 전
기,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정신인 것이다. 예전엔 서양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계몽의 차원에서 밀어붙이는 식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서구의 남성주의적, 정복자
적 세계관이 먹혀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는 서양만이 중심이 아니며 모든 나라에게 삶의 중심성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서로 다른 삶
의 세계, 서로 다른 존재의 지평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로 들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 #다원주의 시
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이 바로 내가 보기엔 < #살림살이>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우리의 음식 중에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 #비빔밥’이 바로 우리의 삶의 문법을 그대
로 드러내주는 음식이다. 비빔밥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녹아 들어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맛이 나오게 된
다.
이제는 모든 분야 — 음악, 미술, 건축, 사상, 종교 등 — 에서 융복합(퓨전)이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은 바로 우리의 시대정신, 문화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우리의 관심과 연결 지어 얘기해 본
다면, 일찍이 우리의 사상가 중에도 이러한 사상계에서의 퓨전요리를 시도한 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동
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을 들 수 있겠다. 유교, 불교, 도교를 통합하여 서학에 대항하여 우리의 삶의 문법을 나
름대로 만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상계에서의 퓨전정신은 18-19세기 우리나라
가 서서히 근대화를 겪으면서, 즉 탈 봉건, 탈 왕권, 탈 계급의 과정 속에서 싹튼 것이다.
그 당시 소위 #양반 계층의 사람들은 체제유지와 기득권 고수에만 눈이 멀어 스스로 주체적으로 외세에 대항하려
고 하지 않고 큰 나라에만 빌붙으려고만 하였다. 그래서 외국과의 외교에서는 계속 참패만 당하고 드디어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도 집권자들은 계속 큰 나라 —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
에만 줄을 서려고 하는 태도를 벗어 던지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는 21세기 지금의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이며, 특
히나 #지식인들의_식민지적_근성 도 완전히 뿌리 뽑히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의 철학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독일
철학, 프랑스 철학, 영미철학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학계도 마찬가지이다. < #신학의_한국화>는 되지 않고 계속 서구의 신학을 반복해서 배우고만 있을 뿐이
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솔직히 말해서 서구의 신학을 배운다고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절실히 와 닿습니까? 하느
님을 인간의 말에만 쑤셔 넣으려는 로고스중심주의의 신학과 이 땅에서 고난과 외세의 침략 가운데 서러움을 당
하며 살아온 우리의 생활세계는 다른 것이다. #순_복음은_없다. 진리는 언제나 그 시대의 옷을 입는 법이다. 그
래서 ‘ #신학의_역사’는 ‘ #해석의_역사’인 것이고, ‘ #복음’은 언제나 각자의 #삶의_자리 에 따라서 #해석학적인
_작업 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나는 이런 물음을 던졌다. 20세기 한국철학사에 대해 주체적인 생
각을 절실하게 해본 학자가 있는가? 과연 20세기 한국을 대표할 철학자는 누구인가? 아니 그러한 철학자가 있기나 한가? 우리의 생활세계를 통하여 생겨나는 문제를 우리의 눈으로 읽고 사유하여 생각의 다발로 묶어놓은 철학자가 있는가?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우리의 개념으로 붙잡아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던가?
이에 대해 나는 세 사람의 사상가를 들어본다. 다석 류영모, 열암 #박종홍, #김지하. 이들 개개 사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왜 이 사람들을 들었는지를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다석 선생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 해 왔듯이 유불선에 기독교사상까지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통 큰 담론을 펼친 사상가이다. 그리고 열암 박종홍 선생은 한국적인 전통 속에서 서구의 철학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새로이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사람이다. 철학이라고는 전혀 없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철학을 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열암 선생이 처음 쓴 논문이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대한 일의문(一疑問)>과 <철학하는 것의 현실적 지반>과 같은 글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지하를 든 것에서 직업적으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김지하는 우리 시대에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를 ‘생명’으로 붙잡고 나름대로의 생명사상을 일구어 갔다.
지금까지 내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벗어나서 다른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책에 쓰여있는 내용은 여러분들이 읽어보시면 될 것이고, 나는 책에 없는 내용을 더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정도로 하고 다석 선생의 인간이해를 박현의 『나를 다시 하는 동양학』의 내용과 연관지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긔림: <민중신학>, 다석 류영모 선생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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