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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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선생님'들께서 페친 신청을 하실 때 많이 고민하게 된다. 혹여나 결이 맞지 않아 괜히 척지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태훈 선생께서 페친 신청을 하셨길래 약간 고민하다가 승인 버튼을 눌렀다. 내가 아는 이태훈이 맞다면 이분과 결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이태훈 선생이 맞다면 김도형 선생 밑에서 한국 근대 사상사를 주제로 학위를 받으셨고 최근에도 백남운 등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으셨다. 내 페친 중 어느 누군가의 지도교수였는데..
아무튼 내가 이분과 결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이유로는 이분은 내가 이해하기로 친일 문제 등을 사상사적 차원에서 독해하신다. 주된 요지랄까, 그런 걸 짚어보자면 친일 문제를 누군가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기 내재적 반성의 차원에서 독해하려고 하신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입장이다. 다만 문제는 "내재적 반성"으로만 그치지, 그에 대한 "긍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어떤 한계가 나와 결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이태훈은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을 비판하는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김윤희의 주장에 꼼꼼하게 비판을 하는 논문이었는데, 내가 김윤희의 주장에 아쉬움을 느꼈던 점은 김윤희의 저작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이완용은 김윤희의 주장처럼 목적성을 잃은 도구적 합리성만 추구하는 "합리적 인간"이 아니라 조선사회에서 "귀족정치"를 꿈꿨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밑으로는 일진회 등과 대립했고 위로는 고종을 제어하려 했다. 이완용이 지향한 '귀족정치'가 조선사회 내에서 구현되기 어려워졌을 때 이미 귀족정치가 어느정도 구현되어 있었던 일본제국으로 기우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완용과 같이 귀족정치를 지향했던, 다시 말해서 대중정치와 군주정치의 중간지대를 확보하려 했던 시도가 왜 좌절하게 되었는지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이완용과 같이 귀족정치를 지향하던 이들이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 김성우의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 내내 양반사족들이 그들의 특권에 대한 국가적 공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정도 관철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의미의 '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이런 지점에서 이완용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태훈도 그렇고 김영도 그렇고, 심지어 책을 쓴 김윤희도 그렇고 일단은 이완용을 친일파로서 부정해야 한다는 입장 자체가 강하다. 일단 부정해놓고 내재적 반성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나는 친일 긍정할 수 있다고 본다. 친북도, 친미도, 친중도 모두 긍정할 수 있다. 문제는 "왜" 긍정하는지 여부이지, 무조건적으로 배제해놓고 내재적 반성의 재료로 삼아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한다.
이분이 쓰신 다른 서평글로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이 있는데 그 서평에서 이태훈은 후지타 쇼조가 지식인에 대해 너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면서 그 배경이 되는 "구조"나 "사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의하기 어렵다.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논형)에서 이미 일본이 어떻게 "천황제 사회"로 바뀌었는지 논의해놨다. 그것을 전제로 그 '천황제 사회'로까지 발전한 '천황제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해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바꾸려 했을 때 그에 응한 "전향자"들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근대 사상사를 전공한 이태훈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반대로 한국에서의 전향이 어떠한 경로로 이뤄지는지를 후지타 쇼조초럼 "무슨 사회"인지를 전제로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천황제 사회'에 비견될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새로 쓰고 있는 유시민 등에 대한 비판글은 이 점을 전제로 하여 "전제주의 사회"라는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태훈 선생 같은 분이 먼저 1930년대 사상사의 맥락에서 '한국적 전향'의 의미를 밝혀 후학을 지도해주어야 하지 않나 한다..
아무튼 이분도 친일 연구서 하나 내시면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을 듯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1920~40년대 한국 맑시스트들 연구하시는 분들, 박종린 선생도 그렇고, 의 연구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 이해에 전연 동의할 수가 없어서 아마 내가 그 부분을 비판적으로 리뷰하지 않을까 한다. 결이 맞아야 할텐데.. 이런저런 걱정이다. 일종의 "경고문(?)"이다.
2 comments
이태훈
졸다가 갑자기 잠이 확깨네요. ㅎㅎ. 일단 저도 잊고 있었던 글들인데 읽어주신 분이 있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게 비판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제가 해왔던 작업은 많은 한계를 전제하면서도 친일은 정말 왜 문제인지를 사상적으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식으로 보자면 왜 긍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겠죠. 식민지기를 넘어 친일이란 사고와 행동이 담고 있는 사유양식에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가가 저의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형편없이 부족한 능력과 게으름 때문에 전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의 비판을 바탕으로 더 정진해서 작은 성과라도 이뤘으면 좋겠다는 소망입니다. 아 그리고 후지타 쇼조는 제가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제가 그 분의 책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그 글을 쓴 것은 전혀 압닙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너무 압도되서 서평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후지타의 주장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이런측명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감상을 쓴 것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쓴 글을 보고 흥미로워서 이런 저런 글들을 눈동냥하러 페친을 신청했는데 혹시라도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미안한 마음입니다. 인문학에 올바른 주장 같은게 어디 있겠습니까? 오가는 대화 속에 자극받고 부족한 부분을 다시 생각하고 채워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드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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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태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선생님께 불편함을 드릴까 걱정되어서 쓴 글입니다. 그렇군요. 최근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낸 일제시대 수탈사 관련 시리즈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학위 논문의 연장에서 여전히 화두를 잡고 계속해서 연구업적을 내셔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뛰어난 연구업적들을 내시고 계셔서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선생님의 주장을 오해한 지점이 있나 봅니다. 혹여라도 불편하셨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후지타 쇼조를 저 또한 매우 좋아하다보니 선생님의 친일 연구가 그것에 비견될 '한국형 전향' 연구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방기중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신 걸로 아는데 백남운에 대한 연구도 재밌게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사상사적 연구가 인정식에 대한 연구로 확장된다면 전향론과 엮어서 대작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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