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Kim 김덕영
'역사에서 원본(原本) 자료가 지니는 소중함'
때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학자와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에게는 학계의 엄격한 검증이나 학문적 책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율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자율성 아래 역사의 시공간을 상상하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그 중심에 서 있던 이승만에 관한 자료를 탐색한 지 불과 3년밖에 안 됐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과 만날 수 있었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승만'에 관한 자료들은 더 발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12년 볼티모어 미국 대선 경선장에 등장한 태극기'
개인적으로 이승만에 관한 자료를 탐색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청년기'에 해당되는 1895년부터 1912년까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좌절할 때, 이승만은 '희망을 잃지 말라'며 대중들 앞에 섰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 청년의 운명은 대한민국과 함께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청년 이승만의 존재를 탐색하던 중에 아주 우연히 미국 대선 때 등장한 태극기를 발견했다. 우드로 윌슨이 뉴저지 주지사에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정되었던 1912년 볼티모어 전당대회 때 등장한 태극기였다. 사진 속의 태극기는 만국기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1912년이면 이미 대한제국은 망하고 없어졌던 때인데, 어떻게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같은 공식적인 장소에 태극기가 사용되었을까?' 처음에는 혹시 전당대회 행정을 맡았던 담당자의 착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부터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상상력이 발동됐다. 역사학자였다면 원본 자료에 대한 검증이 우선이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럴 때 검증보다 상상을 먼저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먼저 이승만과 우드로 윌슨의 특별한 관계에 주목을 해봤다. 이승만이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우드로 윌슨은 대학 총장이었다. 단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서 이승만에게 우드로 윌슨은 객지에서 그를 따듯하게 보듬어준 가족 같은 존재였다.
생활비가 늘 부족했던 이승만에게 곳곳에 강연 자리를 알선해주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던 따듯한 존재, 뿐만 아니다.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세계사에 큰 획을 남겼다.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1912년에 등장한 태극기는 분명 단순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그때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역사학자 송재윤 교수를 만나고 있을 때였다.
처음 사진을 본 송교수는 역사학자답게 사진의 '원본성'에 대한 검증에 들어갔다. 그를 통해 사진의 출처가 미국 대통령들에 관한 유물이나 자료들을 경매에 부치는 곳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단 '가짜'일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도 '1912년 태극기'의 등장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진 속에 등장한 만국기들이 대부분 신생 독립국가의 국기라는 사실, 그리고 태극기는 영어 알파벳 순으로 배열된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Corea인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Japan인 일본보다 윗쪽에 배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국기를 전당대회 공식 홍보물 속에 넣었던 것일까? 혹시 우드로 윌슨의 뜻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청원서에 서명을 해달라는 우드로 윌슨으로부터 정중히 거절을 당했다. 그때 윌슨이 이승만에게 했던 충고는 이승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 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들지 말고,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그것이 진정 당신네 나라가 하루 빨리 독립을 할 수 있는 길입니다."
대중의 정치의식과 여론을 중시하는 그의 정치 철학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치도 결국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훗날 이 경험은 토지개혁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같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바쁜 미국 취재 일정 중 하루를 빼서 볼티모어를 찾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놀랍게도 1912년 전당대회가 열렸던 공간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만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홀의 크기는 웅장했다. 홀 중앙엔 거대한 성조기가 걸려 있어, 그곳이 미국의 역사에서도 꽤나 의미 있는 공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아주 특별한 우연과 마주쳤다. 홀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태극기 문양이었다. 때론 역사의 현장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희한한 장면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날 볼티모어 강당 역시 그랬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 강당 바닥에 대형 태극기 문양이 새겨진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1912년은 청년 이승만에서 정치가이자 교육자로서 도약하는 이승만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러 처음 도착했던 미국 땅, 미국에 느꼈던 배신감, 배고픔과 외로움을 건뎌내야 했던 가난한 학창시절, 그러나 1912년 비로소 청년 이승만은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날아 올랐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승만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연구는 미완성이다. 이번 영화 '건국전쟁' 제작 과정에서 볼티모어의 태극기를 비롯해서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이승만이 직접 쓴 영문 타이프라이트 자서전 초고, 찢겨나간 대통령의 기록필름 등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낸 것은 매우 소중한 발견이었다.
3년밖에 안 된 시간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찾아낸 것이 이 정도라면 학계나 전문 연구가들의 손을 거치면 훨씬 더 많은 사료들이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가치는 우리 역사에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들이다.
특히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승만의 흔적을 어떻게든 지우려는 사람들에 맞서 그가 세운 교회의 진정한 의미와 사료적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연구와 관심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그가 활발한 교육과 독립 활동을 했던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하와이 땅 어딘가에서 '이승만의 동상이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걸 지키려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70여 년 이승만 연구가 지니고 있었던 맹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뼈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역사의 가치를 놓고 벌이는 문화와 사상의 전쟁, 그 한가운데 '이승만'이 외롭게 서 있다. 그걸 극복하는 길은 쓰러져 가는 하와이의 이승만 동상을 지켜 세우는 일에서 시작되야 할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해낼 것입니다. 영화 제작비가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영화 '건국전쟁'에 사용될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저자와의 협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게시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출처를 밝힌 경우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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