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6·25참전 비사 첫 공개
등록 :1994-03-16
미 장성 요청으로 원산 앞바다 등 기뢰제거/1천여명 미군함 승선도… 재군비 촉진 역할
일본의 전후역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사건중에 소해정부대의 한국전쟁참전이 있다. <산케이신문>은 15일자보도에서 그동안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한국전쟁참전사실을 전하면서 참전이 일본의 재군비를 촉진한 것으로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 10월2일 초대 해상보안청장관인 오쿠보 다케오는 미 극동해군 부참모장인 알레이 버크 소장으로부터긴급히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쿠보는 "원산상륙작전을 위해북한이 원산항에 부설한 기뢰를 제거해야 하니 해상보안청의 소해부대를출동해달라"는 요청에, 혼자서는 답변할 수 없어 요청을 문서화해달라고했다.
버크가 문서로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자, 오쿠보는 당시 외상을 겸하고 있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찾아가 이를 보고했다. 요시다는존 덜레스 미 국무부 대일강화담당 고문이 와 강화조약의 교섭에 들어간 마당에 요청을 거절하면 강화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말하고, 소해작업을 하는 것이 밝혀지면 국내적으로 문제가 되므로 극비에 하라고지시했다.
당시 해상보안청에는 미군이 태평양전쟁중 투하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1백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항로계개부"란 소해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를 지휘하는 옛 일본제국 해군의 장교들은 공직추방의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오쿠보는 10월6일 밤 원산에 파견되는 21척의 소해정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해"일본이 독립하기위해서는 여러분의 활약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오늘은 일장기를 흔들며환송해주는 사람도 없지만, 30년 뒤에는 국민들이 환호의 소리로 여러분을 기릴 것"이라고 연설했다.
10월17일에는 소해작업을 하던특무정 202호가 기뢰에 충돌해 폭발, 침몰하면서 1명이 죽고 18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또한 해상보안청 소속과는 별도로 미군에고용돼 미군 함정에서 소해작업을 하던 일본인 2명도 사망했다. 당시미군 함정에 승선해 지원활동을 한 일본인은 1천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의일부는 인천, 원산, 포항상륙작전 등에 참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쿠보는 당시 사망한 해상보안청 승무원의 유족에게는 사실을 얘기했지만, 정부의 다른 부처에는 세토나이해에서 소해작업중 사망한 것으로 보고했다.버크 소장은 소해작업이 끝난 뒤 "이것으로 일본의 독립은3년 빨라졌다"며 감사장을 오쿠보에게 전했다고 한다.
소해부대의인원을 중심으로 52년 해상경비대가 발족했으며, 54년에는 현재의 해상자위대로 이어져, 소해부대의 활동은 일본의 재군비를 앞당겼다는 평가를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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