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2

걸출한 일본 여성 아나키스트의 삶과 죽음

걸출한 일본 여성 아나키스트의 삶과 죽음


걸출한 일본 여성 아나키스트의 삶과 죽음
입력2019.10.11. 오전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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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불살라 백치가 되어라

마을을 불살라 백치가 되어라
구리하라 야스시 지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논형·1만6000원

“여자는 가정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여자는 자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다. 70년대 일본의 ‘우먼리브’(여성해방) 운동의 주동자인 다나카 미츠는 이렇게 꼬집었다. “뭐야,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만 뒤바뀐 거 아냐?” “싫은 남자가 가슴을 만지면 화를 내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만지고 싶어하는 엉덩이는 갖고 싶은 걸.”

이쪽 계통의 선구자는 100년 전 여성 아나키스트 이토 노에(1895~1923)다. 아나키즘 연구자 구리하라 야스시가 쓴 그의 평전은 재기발랄한 필치로 이토의 짧지만 강렬한 삶을 옆에서 지켜보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토는 남들이 뭐라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을 깨버리고 좋아하는 남자와 야반도주를 했다. 맘껏 섹스하고, 애도 많이 낳고, 여성 해방과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글도 맘껏 썼다. 뭐든 궁해지면, 집안이든 어디든 도움을 구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압권은 ‘거물’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1885~1923)와의 연애와 동거였는데, 대중들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동료들까지도 ‘민폐를 끼친다’며 온갖 비난을 퍼부어댔다. 관동대지진 직후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이토와 오스기는 아무런 이유 없이 군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얼핏 ‘제멋대로’ 같은 이토의 삶과 생각 속에 아나키즘의 뼈대가 있다. “막상 닥치면 어떻게 된다”는 생활신조는, 대가 없는 도움(상호부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무정부주의적’ 실체를 보여준다. “복잡미묘한 기계일수록 ‘중심’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토의 말은, 지배 없는 연합을 위한 ‘우정’의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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