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5

백승종 우리 조상은 과연 중국에서 왔을까?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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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우리 조상은 과연 중국에서 왔을까?


저희 집안에는 1850년에 작성한 <가승(家乘, 집안의 역사 기록)>이 있습니다. 첩장(帖裝)이라고 할까요, 긴 두루마리를 접고 다시 접어서 한 권의 책으로 꾸민 것입니다. 목판으로 인쇄한 <<족보(族譜)>>가 있으나, 직계 조상의 이름(諱)과 관직 그리고 특별한 업적 등을 기록한 간단한 휴대용 가계기록이지요. 이 <가승>을 편찬한 분은 저의 5대조이신 백추진(白秋鎭) 공이십니다. 

공의 부친이신 동량(東良) 공은 나라에서 정려(旌閭)을 받은 “효자(孝子)”요, “조봉대부 행 동몽교관”의 관직까지 추증된 선비였습니다. 교관 공의 장자인 5대조께서는 훗날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이은거사(梨隱居士)”라는 호를 받으셨고, 사후에는 고향인 전주 선비들의 공론에 따라 “처사(處士)”로 불리게 된 어른이십니다. 노년에는 “백씨 석양동 서당”(白氏石羊洞書堂)의 산장(山長)으로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셨습니다.

5대조이신 이은(梨隱) 공이 <가승>을 편집한 것은, 부친이신 교관 공께서 별세하신 다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아직 상중(喪中)일 적이었습니다. 옛날 분들은 부모의 상중에 조상의 문집을 편찬하거나 <행장(行狀)>을 짓거나 비문(碑文) 등을 만들었습니다. <가승>을 기록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었지요. 선업(先業,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50년에 완성된 <가승>의 첫머리는 집안의 먼 조상님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물론 5대조가 창작(創作)한 내용은 아닐 터이고, 전부터 내려오는 기록을 그대로 답습(踏襲)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특별합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황당하기조차 합니다. 아래에 저희 <가승>의 머리 부분을 대강 우리말로 번역하여 실어봅니다.

“시조 백우경: 자는 경천, 호는 송계. 당나라 소주인이시다. 참소를 피해 동쪽으로 건너오셔 계림의 자옥산 아래 사셨다. 신라에 벼슬하여 광록대부 좌복(야)와 사도를 지내셨다. 공은 옥산 아래 영월당과 만세암을 지으셨다. (그 암자는) 정혜사가 되었고, 임금께서 직접 <경춘>이란 당호를 써주시고, 네 자씩 운을 맞춰 시를 지어서 인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옛터가 있다. 묘소는 옥산 남쪽 해좌에 있는데 그곳 주민들이 지금도 백정승 묘소라고 한다.”

당나라에서 정치적 곤란을 겪던 백우경이란 분이 계림으로 이주해 신라 왕의 보살핌 속에서 여러 벼슬도 하고, 한가하고 넉넉하게 지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실제로 그런 삶을 영위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백우경이란 분이 실존하였고, <가승>에서 망한 것처럼 그렇게 사셨을까요? 역사를 공부하지만, 저로서는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은 그분의 아드님에 관한 기록입니다.

“아들 정: 벼슬은 중대광 우간의대부. 참소를 입어 대이도로 귀양을 가셨다. 그 이듬해에 봉화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2년 뒤에는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셨다. 묘소는 송계공의 묘소 아래 자좌이다.”

기록대로라면 저희 집안은 중국에서 온 이주민입니다. 아들 대에 이르러 조정에서 미움을 받고 귀양을 갔고 그런 다음에는 초야에 묻혔다는 식의 기술입니다. 개연성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사실이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럼 이제 이주자인 백우경 공의 손자는 어떻게 사셨을까요?

“아들 입승: 자는 자평. 중국에 들어가서 서주대도독을 지내셨다. 나중에 동쪽으로 돌아오셨다. 묘소는 송계공 묘소 아래 임좌이다.”

신라에서 길이 막히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큰 벼슬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년에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꿈같은 이야기도 같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역시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신라를 오가는 집안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다음 대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요.

“아들 상: 벼슬은 한(산)주 태수. 묘소는 송계공 묘소 아래.”

아, 이제 신라에서도 요직인 한산주 태수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신분이 진골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들 영: 자는 구지. 벼슬은 우잠(현 황해도 금천) 태수. 신라 헌덕왕 병오년에 우잠태수 백영에게 명령하여 한산(주) 북쪽의 여러 고을에서 1만 명의 백성을 징발하여 패강에 3백리나 되는 장성을 쌓게 하였다. 이런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부인은 배씨이니, 감찰어사 광의 따님이시다.”

정말 <<삼국사기>>에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정말입니다.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발해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3백리나 되는 긴 성을 쌓았습니다. <<삼국사기>>에 이와 똑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신기하지요. 그럼 그분의 아드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아들 연복: 자는 덕이, 벼슬은 어사대부. 중국에 들어가서 대량도독을 지내신 다음 동쪽으로 돌아오셨다. 묘소는 하양현(현 경북 경산)에 있다. 부인은 수인성덕자공주 김씨로 헌덕왕 (김)언승의 따님이시다.”

신라에 처음 들어오신 송계 공의 5대손이 연복 공입니다. 그런데 다시 중국에 가서 대량도독이란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고, 헌덕왕의 부마(駙馬,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꿈같은 이야기지요. 신라에 귀화(歸化)한 지 100년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중국을 오가며 벼슬도 하고, 왕실과 결혼할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였다니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요.

그런데 연복 공 이후에는 중국 당나라를 오가며 벼슬한 인물이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백씨 일가는 완전히 신라사람으로 정체성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천 년도 넘게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라서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요, 제 집안이 중국에서 온 것인지, 가부(可否)를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 글을 읽은 분 가운데도 누군가는 아마 조상이 고대 중국에서 건너오셨을 테지요. 그리고 아마 위의 이야기에서 보듯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100년쯤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이 땅에 온전히 정착하였을 테지요. 그런 집안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의 <묘지명(墓誌銘)>을 자세히 읽어보면 중국 송나라에서 귀화한 인물이 적어도 수십 가문은 되는 것 같습니다. 당나라 때도 그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보았자 전체 한국인 가운데서 그들 귀화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 자리 숫자를 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여러분은 귀화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35 comments
Kuk James
우리 가문도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넘어왔다고 하고, 이씨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영정조 이후에 문과에 2분이 급제한 기록이 있다네. 최근 인구선세스에서 담양국씨가 총 1만5천명으로 규모가 작은 ’귀성‘이라고 하고, DNA를 분석해서 한족의 피가 몇%나 섞였는지 불까도 해. 재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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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Kuk James 아마 100퍼센트 한국인일 것이네. 중국에서 오신 분은 한분. 그와 결혼한 다른 모든 분이 한국인들. 그러므로 자네나 내 조상이 중국서 오셨더라도 지난 1000년 동안에 100프로 한국인이 되었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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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Paik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같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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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Jong Paik 감사합니다, 종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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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호
근거 없는 심정적 추론, 사견을 밀씀드리자면
후대의 미화 보다는 당대의 “뻥~”아닐까 합니다.
한동안 가짜 미국 박사학위가 판을 쳤듯이
중국을 다녀왔든, 다녀오지 않았든
자식들에게 자신의 삶을 과장되게 밀하셨던 거죠 ~
이 할애비가 왕년에 말이다 ~
이 애비가 왕년에 말이다 ~
그러니까 너 공부 열심히해라 ~
이게 전설처럼 전해지고, 후손들은 사실로 믿는 거죠 ~
전설의 배경이 중국이라면
당시에 쫒아가서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사람도 드물테니...
이왕이면 증국을 파는 거죠 ~
그냥 ... 순전히 ... 근거없는 사견이니 ~
웃어 넘기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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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심민호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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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호
백승종 앗 ^^; 전공이 구비문학이라 .. 헛된 상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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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심민호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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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준
소주는 예나 지금이나 번영을 누리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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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박찬준 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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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마음가짐 아닐까 합니다~^^
법적 신분이야 나중에 생기는 문제니까요~^^ 울타리가 생기면서 동시에 핏줄이 법적인 신분이 되는 사람들은 몇 안 되겠지요.~^^ 옛날에는 이주인이니 귀화인이니 그런 구분이 희미하지 않았을까요? 한반도인은, 왜인은 물론이고, 다 이주민이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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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김보경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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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ong Im

어려서 저는 아버지로 부터 "우리 시조는 중국에서 돌배를 타고 전남 장흥으로 상륙 해서 뿌리를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아버지 앞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돌로 배를 짓는 것은 전설이고 시조는 지금의 중국땅에서 오셨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 해 보면 우리가 배달민족 인 것과 국통맥 중 배달국의 수도가 지금의 하얼빈 이라는 것을 볼 때 지금의 중국대륙의 상당한 강역은 우리민족 강토였을 것이기에 지금기준으로는 중국인, 그때 기준으로는 한민족 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 합니다.
공자도 자신의 조상이 동이족 이라고 밝힌적이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현대로 올수록 우리 역사가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강 이북 부터 시작하여 북한 전 지역은 과거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의 황국사관은 임나일본무설을 사실 인 것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민족은 충청도와 한강이남 정도에서 영유했던 민족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발해, 두만강 넘어 간도, 대마도, 백제의 식민지 형태 였던 일본의 야마토는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토록 역사침탈을 당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와 정부는 거의 무관심 하고 극 소수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피를 토하면서 방어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사학자들은 황국사관을 추종하거나 무관심과 외면 인 것이 참으로 답답 합니다.
정말로 큰 걱정이고 그저 시민의 한 사람일 뿐인 저는 큰 위기를 느낍니다.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9천년한민족사의 한민족사의 국통맥脈 1 환 6 조 4 5 북 고 부 여 려 열국 사국 시대 시대 국달선 달 8 9 고 조 기이하는 국 대 한 민 려 선 남북분단 시대 C恒模古 남북국 시대"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9천년한민족사의 한민족사의 국통맥脈 1 환 6 조 4 5 북 고 부 여 려 열국 사국 시대 시대 국달선 달 8 9 고 조 기이하는 국 대 한 민 려 선 남북분단 시대 C恒模古 남북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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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Jinhong Im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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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Hwa Lee
유튜브에 "책보고"라는 채널이 있습니다. 천문학과 역사 사료들을 결합해서, 재해석하고 있던데, 나름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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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이상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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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득종
교수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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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전득종 예, 제가 더 감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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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백제의 대성팔족에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과 8성 귀족이었다는데요,
왕족은 부여씨였고, 8성의 귀족 가문은 진씨 · 해씨 · 국씨 · 목씨 · 사씨 · 연씨 · 백씨 · 협씨였다고 합니다
여기 백씨하고는 연관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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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김상집 모든 것이 다 알쏭달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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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로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케냐라고 들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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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이성로 그렇습니다. 7만~10만 년쯤 전에 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 이민의 행렬이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우리 모두는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 그분들의 공동 자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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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
용 어 중국 모택동 이후 중국 이라는 용어 사용 청나라 이후 청나라는 김해 김씨 연세대 사학과 학장 교수이었던 백영서 교수 민의결집 천안문 사태 이후 1919년 5윌 4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천안문 사건 민의 결집 내용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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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준
시조부터 100여년까지는 신라가 중국 동해안에 있다가 경상도 경주로 천도했다는 전설을 추가한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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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박제준 하하하... 실제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요. 고대사는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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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
백승종 네 중국 동해안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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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kyoung Yoo
인간은 어차피 나그네. 이주민..난민..귀화인.. 탈향민.. 어디든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체의 일원, 결국 본향을 찾아가는 잠시 세상에서 떠돌이 인생들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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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Young-kyoung Yoo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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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
Young-kyoung Yoo 삼국은 한가도아닌북경 호북 호남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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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안
you can do it thumbs up GIF by Declan Mc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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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역사학자로서의 엄밀하고 공정한 학문적 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행적을 바라보시는 모습이 참으로 좋게 보이고 존경스럽습니다. 백교수님의 직계 조상에도 학문을 좋아하신 분이 계셨군요. 저의 직계 할아버지도 "처사"란 호칭이 있던데, "처사"는 아마 가르치는 사람에게 붙이는 것 같군요. 조상의 훌륭한 모습을 이어받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요즘 상황입니다. 백교수님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주시니 고맙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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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조성민 저야... 부족함밖에 없습니다. "처사"란 칭호는 함부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학문과 덕망이 있으나 정치를 멀리하는 "은사(隱士)"에 대한 향촌사회의 공적 인정이란 성격도 있는 칭호였습니다. 제 14대조이신 문경공 휴암 백인걸 선생은, 귀문(貴門)의 현조(顯祖)이신 선정신(先正臣) 정암 조광조 선생의 말제(末弟)였습니다. 평생을 스승인 정암 선생의 완전한 복권(復權)을 위해 애쓰신 것으로 정평이 있습니다. <정암문집>에도 그런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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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백승종 백인걸 선생과 정암 간에 그러한 돈독한 사제지간의 관계가 있었군군요. 백교수님으로 인해 역사공부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Reply1 dEdited


Chong Soo Cho
훌륭하신 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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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하태린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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