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연구 제 76집 동양철학연구회 / 2013년 11월28일
동아시아 모델의 전환: 중세화론과 진경문화
— 동아시아 ‘국제공공성’ 모색을 중심으로 —
전 홍 석
(북경외국어대학 중국해외한학연구센터 방문학자)
Ⅰ. 이끄는 말
Ⅱ. 근대 세계시스템과 중세화론
1. 근대화론: 민족국가 2. 중세화론: 문명공동체
Ⅲ. 동아시아문명과 조선의 진경문화
1. 전통적 문명: 중화공공성 2. 조선중화주의: 진경문화
Ⅳ. 끝맺는 말
※ 이 논문은 2013년 11월 1일 <조선시대 공공성의 구조변동>을 주 제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움(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공공성 의구조변동연구단 주최)에서 발표한 글을 본 동양철학연구회의 투 고규정에 맞춰 줄인 것이다.
<논문 요약>
본 논고는 21세기 바람직한 ‘동아시아학’ 정립과 함께 동아시아 모델 의 전환이라는 거시구도 속에서 근대 국가주의적 세계시스템을 초극하 는 동아시아 ‘국제공공성’ 창출을 목표로 기획된 것이다. 이 논제는 최근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이 전형적인 근대국가로 자처하면서 역사, 영토 등의 문제로 반목과 충돌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상황을 감안, 새로운 ‘중 세’ 형태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인 식에 기초한다. 즉 21세기 동아시아 모델을 근대화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탈근대적 ‘중세화’로 설정하여 18세기 한반도 ‘조선성리학 ― 진경문화’ 의 재발견을 통해 ‘동아시아공동체’ 구성의 문화적 전범(和而不同)을 모색 해보고자 한 것이다. 글의 구성은 선행적으로 문명공동체 단위의 ‘중세 화론’을 민족국가 단위의 ‘근대화론’과 대비시키면서 구체화했다. 여기 에 기초하여 서구적 근대성이 문명 개념에 적층되기 이전 그 원의에 함 의된 ‘중화’가 동아시아의 중세 세계시스템과 대응되고 이러한 중세 중 화보편주의 가치관이 정치체제인 책봉, 공동문어인 한문, 보편종교인 유 교로 구현된 자기 완결적인 세계가 바로 ‘동아시아문명’임을 논구했다.
주제어: 동아시아, 근대화, 국가주의, 중세화, 문명공동체, 중화공공성, 조선성리학, 조선중화주의, 진경문화.
Ⅰ. 이끄는 말
‘동아시아’란 정치⋅경제⋅문화⋅역사적 경험공간과 그 미래의 기대지
평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지리정치적geopolitical 개념이자 지리문화적geocultural 개념이다. 초국가적 지역공동체 구성을 핵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담론’은 이들 개념군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점차 고조 되어 왔다.1) 이러한 지적 경향이 부상하게 된 데는 냉전의 해체와 사회 주의권의 몰락, 유교문명에 기초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사회경제 적 발전, 민주화의 제3물결 등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을 필두로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그에 따른 유럽연합EU, 남미공동시장MERCOSUR,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동남 아국가연합ASEAN, 아프리카통일기구OAU 등 지역주의 강화도 주요한 자 극제가 되었다. 더욱이 동아시아 지역협력은 1997년 경제위기 직후 ASEAN+3 정상회의, 1999년 동아시아협력선언, 2001년 동아시아 비전그
룹EAVG, East Asia Vision Group 보고서 등을 통해 급속히 진전되었다. 무엇보다
EAVG 보고서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유럽의 지역주의에 대한 반사적 이고 모방적인 시도를 넘어 상호 의존과 상호 연대의 새로운 지역질서 라는 지역적 공공재의 공급을 증진하기 위한 주체적 모색으로 평가된다. 이 보고서가 지역의 평화peace를 위한 정치안보협력, 공동의 번영prosperity 을 위한 경제금융협력, 인간적 진보progress를 위한 사회문화협력을 동아시 아공동체의 세 가지 근본적 목표로 제시한 점은 고무적이다.2) 이와 함께
2013년 한국정부에 의해 제안된 ‘동북아평화협력구상(서울프로세스)’ 또한
1) 최근 ‘동아시아’ 개념은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보 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룬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유교문 명권으로 명명되는 국가들에 한정하고자 한다. 이 관점에서 동아시아는 중 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며 중국의 소수민족, 타이완, 홍 콩, 싱가포르, 몽골, 일본의 일부가 된 琉球(오키나와)도 포함된다.
2) 박사명 2008, 12∼13쪽.
거시적으로는 기존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지금 동북아에는 역내 국가 간에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자 적 메커니즘이 없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담론은 그동안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은 여전히 모색단계에 머물고 있다. 심 지어 일각에서는 현재의 ‘동아시아’란 용어에 대해 그것은 과거 일본의 동양사와 아시아주의처럼 ‘기원의 망상’에 빠져 있는 오염된 개념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개념은 ‘전통’ 그 자체를 설명하 는 분석 개념이 아니라 현재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여 궁극적으 로 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내포한다는 것이 다. ) 그런가 하면 아이덴티티identity나 대안체제 등의 동아시아담론은 서 구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콤플렉스가 잠재화된 일종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적 자기예찬으로서의 ‘역 오리엔탈리즘reversed orientalism’에 지나지 않는다 는 회의적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 더욱이 아이덴티티론이 서구의 보편 적 근대의 주변부에서 실현된 지역적 근대성을 탐색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나 한편으로 대안체제론이 현실적합성이 떨어지고 그 지향해야 할 대 안적 체제의 모습을 구제화하지 못한 점 등은 현 동아시아담론의 본질 적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모순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것이 아무리 원대한 동아시아적 이상을 표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적 효용성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세계화와 탈근대를 아우르면서 도 현 담론들의 결점을 희석시키고 그 긍정성을 적극 발양시키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학’ 구성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본 논고는 21세기 바람직한 동아시아학 정립과 함께 동아시아 모델의
전환이라는 거시구도 속에서 근대 국가주의nationalism적 세계시스템을 초 극하는 동아시아 ‘국제공공성’ 창출을 목표로 기획된 것이다. 구체적으 로 보아 이 논제는 최근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이 전형적인 근대국가 로 자처하면서 역사, 영토 등의 문제로 반목과 충돌을 거듭하고 있는 현 실상황을 감안, 새로운 중세 형태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인식에 기초한다. 더불어 기왕의 동아시아담론이 환 영이나 단상으로 그치지 않고 탄탄한 학적 체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문 간 통섭과 학제 간 융합을 지향하는 현대 문명학적 공정이 요구된 다. 그 모델은 동서 문명일반론에 입각한 ‘중세화론’이 될 것이다.5) 때문 에 이 중세화론은 소기의 ‘동아시아학’ 구축 차원에서 기존 아이덴티티 론과 대안체제론의 양자를 가로질러 모색될 것이다. 그 논점은 근대가 중세를 부정하기 위해서 고대를 계승한 시대였다면 다음 시대는 근대를 부정하기 위해서 중세를 계승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6)과 맥을 같이한다. 동시에 동아시아의 신중세로의 성공적인 이행 여부가 미래 세 계시스템 향방의 관건이라는 견해7)를 반영한다. 요컨대 이 글의 전체구 성은 선행적으로 문명공동체 범주의 중세화론을 민족국가적 근대화론과 대비시키면서 구체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전통시대 동아시 아세계의 ‘국제공공성’과 관련, 동아시아문명의 보편적 규범인 ‘中華’가 특수적 소단위체인 제반 ‘민족문화(夷)로 전이되는 궤적을 추적하여 이 양자의 문명학적 조응(和而不同)과 그에 따른 역내 개별문화권의 탈주변 화 과정을 조선후기 한반도 ‘조선중화주의 ― 眞景문화’에서 재현 representation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편과 특수가 조율되는 ‘동아시아 중 세화’의 현재성을 정식화하려고 한다.
5) 근대화는 ‘modernization’의 번역어로 등장한 말이다. 근대화는 그 진원지가 서 구라는 점에서 유럽문명권에서 먼저 이루어진 논의를 그 용어와 함께 수입 한 것이다. 그런데 중세화를 뜻하는 ‘medievalization’은 영어를 비롯한 서구어 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동아시아의 용어 중세화 를 medievalization으로 번역해 사용해야 함은 물론 동아시아학계가 앞서서 ‘중 세화론’을 개척하고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조동일, 2010, 27∼28쪽.
6) 앞의 책, 29쪽.
7) 타나까 아끼히꼬 2000, 258쪽.
Ⅱ. 근대 세계시스템과 중세화론
1. 근대화론: 민족국가
근대적 ‘문명Civilization’ 개념의 형성 이면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 로 이루어진 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 다. ‘문명’은 유럽 중산층 시민계급의 형성과 자본주의적 산업문명의 발 전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사회진보의 척도와 상태, 즉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점차 보편화되 었다. 더불어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보가 진행됨에 따라 타민족과 타문명 에 대한 서구인의 우월감이 더욱 공고화되어 서구제국주의를 강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어 갔다. ) 이 서구의 팽창에는 근대성과 결부되어 단일 적 서구계몽주의의 고도의 획일화된 문명화적 기획, 즉 동양에 대한 서 구의 지배와 권력행사라는 부정적 이데올로기가 자리한다. 서구의 동아 시아 침략은 주체인 서구에 의해 객체인 동아시아가 타자로 규정되는 오리엔탈리즘적 식민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근대 서구의 시각으로 비서구 지역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묘사하고, 가르치 고, 다루는 모든 사고방식이나 관점을 말한다. ) 이것은 서구의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결부된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이념으로 대두하여 비서구를 서구라는 모범을 결여하거나 일탈한 문명 부재 지역 으로 규정하는 논리로 작동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세계란 근대 유럽이 고 거기서 배제되거나 그것에 대립된 것이 동양이다. 그야말로 동양은 서구인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설정한 타자에 불과하다. 양자의 관계는 ‘문명 대 야만’, ‘선진 대 후진’, ‘합리 대 불합리’라는 인식 틀로 규정된 것이다.10)
이와 같이 동양은 유럽의 타자로서 유럽적 자아의 필요에 따라 구성, 해체, 재구성을 거듭하는 동태적 개념이다. 더욱이 근동Near East, 중동Middle East, 극동Far East 등 동양에 관한 거의 모든 지리적 범주의 표준공간은 표 준시간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유럽적이다. ) 근대 동아시아의 지역적 정 체성 형성 역시 이 유럽적 동양으로서의 식민담론과 무연하지 않다. 원 래 ‘동양’은 중국 상인들이 인도 연안 서쪽 해역을 서양이라 부른 데 반 하여 자바 주변 해역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 19세기부터 이 동양이란 한자어는 단순한 지리개념이 아니라 지리문화적 영토권역개념으로 널리 통용되었는데 그것은 서양이 아닌 한자문화권의 문화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 그러나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 국 중심의 전통적 체제를 와해시키고 이 지역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부상 했다. 일본은 동양이란 개념의 창안을 통해 중국을 이 지역의 일원인 支那라는 하나의 국민국가로 상대화시킴으로써 동아시아지역을 일본제국 주의가 주도하는 세력권으로 재편성했다. ) 20세기 일본인들은 동양을 근대 일본이 아시아의 최선진국으로서 유럽과 대등한 나라이며 동시에 일본이 중국과 다를 뿐 아니라 문화적⋅지적⋅구조적으로 우월하다는 시 각 )을 담고 있는 패권주의적 개념으로 재창안했다. 동시에 일본은 근대 적 아시아 국가 일본에 대비시켜 과거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의미 로 중국을 지나로 격하해 호칭함 )으로써 전통적 중화체제를 해체했다. 그러니까 동양은 중화체제의 전복적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살펴보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수용, 동양에서 문명의 우두머리가 된 일본과 미개의 고루한 인접국가와 의 존재론적⋅인식론적 경계를 획책하여 주변국가와 민족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데 이용했다. 메이지明治유신을 계기로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 했다고 자부한 일본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동일한 형태의 시선으로 점차 동양을 타자화하는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나갔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항대립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서구일본동양이라는 중층구조로 진행된 것이다. ) 일본은 脫亞入歐 노선을 통해 서구(+일본)=선진, 비서구=후진의 이항대립 구도 로 바꿈으로써 대동아지역 전체를 선진 일본을 동심원으로 하는 주변부 또는 배후지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의식이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 아의 침략에 논리적으로 악용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침 략적 아시아주의, 곧 대동아주의는 결국 서구가 자신의 역사를 통해 보 여주었던 야만과 폭력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 ― 자민족중심주의, 배타 적⋅침략적 민족주의, 극단적 국수주의, 파시즘 ― 의 무비판적 모방이자 추종에 지나지 않는다. ) 더군다나 ‘동아’와 ‘대동아’는 1937년의 중일전 쟁 개시와 중국대륙 내부에로의 전쟁의 확대,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남방지역으로의 전선확대와 함께 구성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일 본근대사의 과정에서 전개된 다양한 아시아주의적인 주장이 정치적 동아 개념을 가져오게 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중국, 아시아 에서 일본의 전쟁 수행이 기성의 많은 이데올로기를 불러 모으면서 새로 운 동아, 대동아 개념을 만들어간 것이다. 새로운 ‘동아’란 동아 신질서의 이념으로서, 나아가 동아협동체 구상으로서 전개된 개념이다. )
동아시아의 근대 세계시스템은 이렇게 제국 일본을 필두로 이 지역이 서구의 문명화 질서에 편승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민화civiliser라는 문명의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민계급이 주체인 ‘민족국가’가 그 첨병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말해서 유럽에서 민족국가 의 발전은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서구열강의 해외 팽창력이 강화되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유럽의 민족국가체제가 동아시아에 도달했 을 때 사회진화론의 담론에 깊이 연관된 제국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19세기 유럽 국가들은 유럽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도 자본주의적 경쟁과 축재를 위한 조건창출에 간 여했다. 그들은 ‘진보 대 야만’이라는 문명 이분법의 연장선상에서 식민 화된 사회들은 ‘문명화된 민족국가’의 법률과 제도를 구비하지 못해서 그 체제에 편입될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논리로 서구제국주의 지배 를 정당화시켰다. ) 그리고 19세기 동아시아지역에서 근대국가의 주권 제를 하나의 기둥으로 하는 서구의 문명과 이러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 은 동아시아세계의 논리가 ‘문명의 충돌’을 일으킨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결국 서구의 논리를 동아시아세계가 수용함으로써 종결되었다. 크게 보아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영토분쟁, 중국의 타이완臺灣 분열, 한 반도의 분단 등도 이 시기에 발생한 근대 세계시스템과 동아시아세계의 이른바 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21)
엄밀히 말해서 근대 세계시스템의 역사는 서구에서 형성된 근대국가
의 조직체가 지구상에 보급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유럽의 중세와 비교할 때 ‘민족국가’의 압도적인 우위성이 확보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현 동아시아 다극화체제의 핵심인 근대국가 범주 역시 본질적으로 이 민족국가와 겹친다. 여기서 ‘민족국가’란 영토의 독점지 배,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통한 영토장악, 국가에 충성할 의무를 가진 사 람들을 국경 내에 격리하는 데 기초한다. ) 본래 ‘민족’은 특정 삶의 경 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국가state는 영토를 소유하고 통치하 며 강압적인 수단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일컫는다.23) 근대 이 전에도 민족과 국가란 말이 모두 존재했지만 근대사회가 민족국가의 특 정체제 속에서 존립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개념은 근대시기에 하나로 합 쳐진 것이다. 민족의 구성체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주권재민의 ‘시민’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민족(국민) 은 민족국가의 영역 내에서 시민권 장전과 연관을 지니며 권리의 수여 자로서 자결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초기 시민이 교육을 받고 재산을 가진 남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등 비록 그 정의가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국민과 국가가 사상 최초로 단일한 통치실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곱씹을 만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문명의 근대 서구적 개념사는 민족국가를 전 제로 하는 ‘근대화’ 범주 안에서 구술될 수 있다. 민족국가와 그것이 조 형해낸 세계체제는 근대사로의 이행적 표출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 과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의 특별한 속성이며 그것이 등장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민족과 민족주의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인 연관 성 이상의 사실을 함축한다. ) 무엇보다도 19세기 말 동아시아에 전해진 근대 민족주의는 지역성을 띠면서 역사적⋅문화적 상호 작용으로 조정 되는 지구적 유통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인식적⋅제도적으로 구성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 형성은 서양문명의 수 용과 배척, 변용의 과정이었다. 동아시아 근대 세계시스템의 형성은 기 존의 중화적 세계상이 붕괴되고 그 자리를 개별국가 간의 상호 관계, 즉 근대적 국제관계로서의 세계인식이 대신함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동아 시아의 옛 제국과 왕국은 일본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혼합해 만든 국가모델이 지속적인 효력을 발휘하면서 제국주의적 민족국가로 변모하 는 것만이 사회 진화론적 양육강식의 경쟁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고착화시켰다. ) 이 근대적 민족국가 이념은 현재에도 동아시아 국가들 간 영토문제, 역사분쟁 등에 투영되어 21세기 새로운 ‘신냉전 기류’를 조성하고 있다. 중국을 위시한 한국, 일본은 전통적 근 대국가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상호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이 지역의 안정마저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네트워크에 의한 상호 의존적이고 협력적인 사회시스템이 전 지구적으로 진전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근대적 국가모델은 더 이상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민족국가는 지리적인 속 박 때문에 테러리즘, 핵전쟁, 지구 온난화, 사이버 테러 등의 전 세계적 인 위협과 위험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도 어렵다. 존 밀뱅크John Milbank 가 ‘계몽주의적 단순 공간’을 가리켜 서로 상충되는 동시에 중복되는 현실의 복잡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은 편협한 개념26)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냉전 이후 지나치게 갈등적이고 대립적인 요소만을 부 추겨온 국가, 민족, 이데올로기 등의 굴레에서 벗어나 공분모적 복합체 인 ‘문명’에서 소기의 대안과 해법을 강구하고자 하는 노력들 역시 이 와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심지어 민족국가의 발상지인 유럽에서조차도 현재 회의와 비관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유럽연합이라는 초국가적 다중 심⋅다단계 통치체제를 통해 국민이나 영토, 국가보다는 공통된 문명적 가치에 토대하여 인류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EU가 전쟁터의 영웅적 승리 신화에서 기원을 찾는 예전의 국가 및 제 국과는 달리 패배의 잿더미 속에서 탄생한 최초의 대규모 통치체제라 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과거 세계대전 등 끊임없는 분 규와 전쟁의 역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서로 총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치단결하여 지난날의 적대감정을 뛰어넘는 정치적 메커니즘 을 만들어낸 것이다.27)
26) 제러미 리프킨 2012, 341쪽.
27) 앞의 책, 260∼261쪽.
2. 중세화론: 문명공동체
최근 일련의 ‘동아시아담론’과 맞물려 새로운 국제공공성 모델을 근대 화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탈근대적 ‘중세화’의 재발견에서 모색하고자 하 는 연구노력이 주목된다. 이 중세화론은 현 제반 동아시아지역의 반목과 충돌 현상이 본질적으로 공존의 질서를 보장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초국 가적 공공성의 부재로부터 기인한다는 문제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본래 ‘중세화론’은 상호 의존이 심화되고 세계화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의 국제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로 출현한 것이다. 이 이론은 1960
∼70년대에 아놀드 월퍼스Arnold Wolfers, 헤들리 불Hedley Bull 등에 의해 제기 된 바 있다. 특히 헤들리 불은 장래에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국제시스템 의 하나로서 ‘새로운 중세’를 제시했다. 그는 새로운 중세를 주권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우월한 국제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는 모델로 보고 다음 5 개의 기준이 충족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그 현실성을 고찰했 다. 첫째는 국가의 지역통합의 가능성, 둘째는 국가의 해체, 셋째는 사적 인 단체에 의한 국제적 폭력의 부활, 넷째는 초국가 주체의 우월성, 다섯 째는 세계의 기술적 통합이다. 이러한 경향들이 더욱 진전된다면 새로운 중세라는 모델이 현실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 중세화론은 오늘날 동 아시아 국제공공성 모색과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창출을 위한 지 침과 모델로서의 영감을 제공해준다. EU로 대변되는 유러피언 드림 European Dream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세계화시대의 교차지점에 위치하며 두 시대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가교를 제공한다” )는 시각은 바로 이 중세화적 사고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중세화론의 핵심은 세계화의 원심력과 국민국가의 구심력에
대한 균형성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오늘날 ‘보편적 세계성’과 ‘특수 적 지역성’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중세화 과정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세화의 관점은 일국적 과정의 ‘지역적 보편성’과 세계체제가 작동하는 ‘지역적 특수성’을 동시에 긍정⋅구현하는 문명생태주의에 근 접한다. 아울러 문명의 내부담론 차원에서 그것은 거시적 단위의 ‘문명 공동체’와 국지적 단위의 ‘국민국가’를 회통시키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
다. 그런 점에서 중세화론은 총제적 의미의 문명 개념을 활성화시키는 연구작업과 맥을 같이한다. 논지컨대 ‘문명’이란 복수적 의미에서 보면 특정 공동체의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소단위의 ‘문화’를 포괄하는 총화 물, 즉 시공간상 양적 대단위의 공동체, 질적 상위 수준의 문화현상 등을 총칭하는 상위개념으로 파악된다. 그에 반해 문화는 문명의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구성인자로 인식되는데 한 문명권의 진보는 문화의 발전에 의 지하고 문화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촉진시킨다는 이해방 식이 그것이다. ) 이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룩한 가치관 및 그 실 현방식 가운데 포괄적인 성격의 상위개념이 문명이고 개별적 특성을 지 닌 하위개념이 문화이다. 문명은 여러 민족이나 국가가 공유하지만 문화 는 민족이나 국가 또는 집단이나 지역에 따라 특수화되어 있다. 문명과 문화는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준다. ) 이 점에서 중국문명 식으로 국가 이름에 문명을 붙이는 것은 문명론에서나 중세문명의 본질에 배치된다. 예컨대 상위의 동아시아문명이 개별적 특성의 중국문화, 한국문화, 일본 문화 등의 소단위 문화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야 합당하다.
사실 동아시아담론은 서양 대 동양, 근대 대 전통, 세계 대 지역이라
는 첨예한 이분화적 갈등 구도, 즉 단수적 보편문명의 세계적 일체화와 복수적 개별문명의 자기정체성 강화라는 상호 대극적인 해묵은 문명론 적 논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공동체’의 모 색은 현대 문명학적 검토가 요구된다. 논구컨대 근대화가 개별적 민족국 가 단위로 진행되었다면 중세화는 총체적 문명권 단위로 포착된다. 이 때문에 중세화론이 현대 문명학의 총체적 개념범주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명의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은 문명권 내의 다원주의를 옹 호하여 독점주의를 지양하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교류와 포용을 가능케 하며 각 문화 단위체의 평등과 상호 의존관계를 긍정하는 토대가 된다. 이렇게 문명론적 맥락 속에 있는 중세화담론은 분리된 개체로서 타자와 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문명 이분법에서 벗어나 타자와 공감하고 공존하 는 생태문명의 세기적 전환이 상정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부분보다는 전체에 초점을 맞추는 체계이론systems theory적 접근법에 가깝다. 즉 개체적 효용성을 최대화하는 기존의 계몽적 사고를 무력화하고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생물권의식을 지지한다. 그 단적인 예 로 중세세계에서 공간은 영토보다는 서로 간의 관계에 기초했으며 경계 선이 분명하다기보다는 투과성이 더 강했다 )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와 접맥된 ‘신중세화’ 체제는 문명학 범주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잇는 거 시적 구도의 결합조직이자 생태학적 관계망을 긍정하는 ‘다양성 속의 조 화’를 지향한다. 아울러 중심문화의 패권이 강제하는 일방적 독단주의가 아닌 탈근대적 범주의 다양한 주체들, 주체들 간의 다원성 등을 특징으 로 하는, 곧 ‘문화다원주의를 전제로 한 문명보편주의에의 지향’이라는 상호 동시적 균형을 충족시키는 문명학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다.
이 ‘중세화’ 논의는 국내에서는 동아시아학의 노학자 조동일이 두드러 진다. 그는 중세라는 말을 세계사의 전 영역에서 공통되게 사용하고 ‘중 세화’에 대해서 비교론을 전개해 일반론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한 다. 그의 구체적 논변을 보면 “문명이 하나라고 하고 불변의 원리만 소 중하다고 한 중세의 학풍을 계승해 근대의 관점에서 재론해야 한다. 문 명은 하나이면서 여럿임을 밝히고 불변의 원리를 둘러싼 논란에서 변화 가 이루어져온 경과를 찾자. 근대학문과 중세학문을 합쳐 근대 다음 시 대의 학풍을 만드는 작업을 선도하자.” )고 역설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고대문명에서 이룩한 유산을 내용이나 지역에서 대폭 확대하여 참여자
는 누구나 대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보편주의 가치관을 이룩한 것이 중 세문명의 특징이다. 이 보편주의 가치관이 ‘공동문어’로 표현되고 ‘보편 종교’로 구현된 세계가 중세사회인 것이다. ) 또한 중세 冊封체제와 관 련, 책봉하는 쪽과 책봉 받는 쪽은 종교적 서열에서 우열관계에 있고 정치적 실권의 우열관계에 있지 않다. 책봉 받는 쪽은 문명권의 동질성 을 그 국가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구체화한 중세적인 개념의 주권국가이 다. 중세인은 책봉하는 쪽의 상징적 지배와 책봉 받는 쪽의 실질적 지 배에 이중으로 소속되는 이중국적 소유자였다. 이중국적이 단일국적으 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 이렇듯 중세문명은 가시적인 외 형보다 내면의 의식이나 가치관에서 더욱 생동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중 세가 끝난 뒤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근대가 역사의 종착 점이라고 하는 근대주의자들의 착각을 시정하고 근대를 극복하는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난 시기의 ‘중세화’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36)
일본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타나까 아끼히꼬田中明彦 역시 21세기 국
제사회를 상징하는 표제어로 ‘새로운 중세’를 제시함으로써 중세화론에 합류한다. 그는 현재의 세계시스템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등장 한 근대국가의 기능이 쇠퇴하는 반면에 초국적 자본이동이 늘고 국제기 구, 다국적기업, NGO 등의 상호 협조가 긴밀해지는 ‘새로운 중세’로의 이행기에 접어들었다고 피력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20세기 후반 상 호 의존의 진척에 따라서 근대 세계시스템의 특징이 변질을 거듭했고 따라서 오늘날 세계시스템은 이미 근대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단 계에 도달했다. …… 현재의 세계시스템은 냉전과 패권의 다음 시대로 들 어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중세로 향하고 있으며 상호 의존의 진척에 따라 이미 새로운 중세의 특징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37)는 것이
다. 이와 함께 타나까는 냉전 이후의 세계는 신중세권, 근대권, 혼돈권이 라는 ‘세 개의 권역’으로 분화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는 일본, 한국, 타이 완 등 새로운 중세로 향하는 움직임과 중국, 북한, 베트남 등 근대를 대 표하는 움직임이 전면적으로 대결하는 무대라고 주장한다. 그는 21세기 의 세계시스템이 안정적인 새로운 중세를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근대의 불안정 상태로 돌아갈 것인지는 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제관계의 동 향에 달려 있다고 전망한다. 이 지역에서 ‘근대’가 끈질기게 분투하게 되 면 세계 전체의 ‘새로운 중세’로의 움직임은 둔화될 것이며 이런 견지에 서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의 시대’라는 말은 옳다고 풀이한다.38)
또한 이 중세화론은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에게서도 목도
된다. 즉 개인의 자율성과 부의 축적이 핵심인 ‘아메리칸 드림’이 막을 내리고 이제 모두가 긴밀히 연결된 글로벌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새 로운 비전은 거시적으로 중세화론에 기초한다. 리프킨은 역사적으로 EU 와 유사한 체제를 10∼19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을 꼽는다. 즉 “그 시기 에 바티칸(교황청)은 형식적으로는 서유럽과 북유럽 대부분의 공국, 도시 국가, 왕국들에 대한 최종 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토와 관련해 교 황청이 행사하는 주권은 상징적일 뿐 실질적인 구속력이 거의 없었다.” 고 말한다. 이와 함께 리프킨은 EU로 대변되는 유럽의 정치적 변화를 ‘새로운 중세’라고 언명한 포스트모던 정치이론가들의 견해에 동조하면 서 “주권국가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으며 그 대신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 의 정부가 들어서는 게 아니라 중세 서유럽 기독교권에 존재했던 보편 적인 정치조직의 세속적인 현대판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했던 헤들 리 불의 말로 갈음한다.39) 또한 EU의 특성을 중세의 다중적 공간인식(미 로의 유럽Maze Europe)과 연관시켜 “유럽 전체를 고정된 경계선 대신 다단계
37) 타나까 아끼히꼬 2000, 185쪽.
38) 앞의 책, 258쪽.
39) 제러미 리프킨 2012, 258⋅296쪽.
의 규제시스템으로 연결되는 유동적인 경계선과 상호 작용의 지대로 파 악해야 한다”40)는 주장에 동의한다. 나아가 그는 동아시아인들의 극단적 집단주의 성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한편으로 ‘동아시아공동 체’가 새로운 중세 형태의 보편적 정치질서의 모델(EU)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역이라는 데 관심을 표한다. 동아시아는 예로부터 유儒⋅ 불佛⋅도道의 영향으로 인해 철학적⋅신학적⋅문화적 유대감이 충분하며 상호 관계, 포괄성, 합의, 조화, 맥락적 사고 등의 공통된 세계관 때문에 초국가적 정치기구를 형성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다는 것이다.41) 오늘날 동아시아인들은 ‘중세화 담론’이 표방하는 문명적 가치와 그
의미들에 귀 기울이는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는 근현대 극단적 인 국가주의와 패권주의로 인해 겪어야 했던 불행한 역사와 참상들을 기억한다. 과거 파시스트 악령의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국가를 앞세운 제국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한 의미 있는 거부와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초국가적 상호 의존성이 심화 되고 있는 세계적 조류에 부응하여 총체적 문명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 공동체’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데서 동아시아권 평화구현과 그 분쟁해소 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서구가 여타 지역화 블 록들의 여러 면에서 모델이 되고 있는 EU의 실체를 새로운 중세화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공동체 구성을 위한 ‘중세화’ 모색이 무게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EU에게서 길을 물어 보편적 인권에 접속하는 ‘동아시아 평화연대체’ 구상을 현실화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 서 조동일은 “오늘날 유럽에서 유럽통합으로 나아가면서 자기네 중세를 재인식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근대 연구에서 중세 연구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중세 동안에 여러 문명권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인류의 이상을 함께 추구하던 경험을 되살릴 수 있는 시기가 도 래했다.”42)고 피력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 문화적 다양성,
40) 앞의 책, 342쪽.
41) 462∼470쪽.
삶의 질, 지속 가능한 개발, 심오한 놀이,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다 원적 협력을 강조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문명의 중세화적 공감대 속에서 결정화된 것이다. 이제 ‘중세화’ 연구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조형과 직결된 선구적 개척분야로 적극 자리매김해야 할 때이다.
Ⅲ. 동아시아문명과 진경문화
1. 전통적 문명: 중화공공성
원래 ‘문명’은 어원상 중화 지향의 ‘전통성’과 西華(서구) 지향의 ‘근대
성’이라는 이중의 교차적 층위를 구성하는 개념이다. 동⋅서양의 문명 개념은 이상을 향한 진보 혹은 개조를 긍정하고 夷狄과 야만이라는 절 대적 타자를 상정하는 차별기제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강력한 가치영역 인 敎(유교⋅기독교)를 통해 물질⋅이익과 관련된 영역을 강력히 규제한다 거나 그 개념의 내용을 규정하는 주요 요소들, 즉 문화, 지역, 종족, 인종 이라는 범주 역시 흡사하다.43) 그런데 현재 통용되는 ‘문명’ 개념은 통상 동아시아의 고유어가 아닌 역내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채용한 서구 근대성 그 자체의 속성을 지닌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이해된다. 서구의 근대에 탄생한 이 용어는 1870년대에 일본에서 문명으로 번역⋅소개되 었고 조선에서는 1880년대 이후에 개화와 짝을 이루며 부각되었다. 이를 테면 19세기 후반 조선에 이 번역어가 도입되면서 문명은 보편문명과 서양문명을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문명 일반의 지위를 빠르게 획득해나갔다. 1890년대 이후에는 위정척사 계열의 지도자들도 문명을 보편술어로, 중화나 서양을 특수문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한 문명 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표준이 되자 종족적⋅지리적⋅문화적 성격이
42) 조동일 1998, 156쪽.
43) 이경구 2012, 16쪽.
혼재했던 중화 개념 가운데 보편문명의 의미는 축소되고 단순히 국가 개념으로서의 중국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 이와 맞물려 개화론 자들이 중국을 반개나 미개로, 그리고 서양을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함에 따라 현실문명의 기준마저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서구문명 자체가 ‘보 편문명’이라는 인식의 생성이 빠르게 진전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중세화’ 연구는 대단위 공동체가치를 중시하는 문명의 전통적 개념사와 연계해서 논의해야 그 실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볼 때 민족국가 단위의 근대화론이 문명의 서구적 개념에 기초한다면 문명공동체로서의 중세화론은 문명의 ‘동양 적 개념’ 상에서 관측되기 때문이다. 근대민족주의 형성의 모태가 되는 원형적인 민족이 전근대에도 실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세기 동아시 아공동체 구성을 위한 원형적인 동아시아는 문명의 전통적 범주인 ‘중 화’ 관념 속에 지속되어왔다. 중세는 권위와 권력의 분리, 주체의 다양 성, 이데올로기의 보편성, 지방분권과 중앙집권의 병존 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동아시아문명에 한정 해보면 서구의 근대 세계시스템이 동아시아에 침투하기 이전 이곳에 존 재했던 중세 ‘중국적 세계시스템’에서 발견된다. 유교문명권의 동아시아 는 농경사회를 토대로 평화공동체를 이루어 공존하는 ‘중화’ 문화 질서 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중세 유럽세계가 보편적 교회 개념인 가
톨릭Catholic(이 말은 본디 ‘보편적’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에 서 유래한다)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과 동일하게 동아시아세계는 유교 와 접맥된 ‘중화보편주의’ 신념체계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 중화보편주 의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인들이 근거했던 삶의 가치와 신념의 지향을 규 율하는 보편적 규범성을 띠었다. 중화적 가치를 동아시아의 국제공공 성으로 명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문화 이념으로서의 중화 는 선험적으로 중국과 결합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그것은 역사적으로 주로 ‘중국’을 통해 현현되었다. 漢代에 등장하여 唐代에 확립된 이 중 화주의는 동아시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선진국인 중국이 중화를 자처 하면서 책봉, 조공 관계를 통해 주변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 으로 관철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칭하는 ‘중국’이란 오늘날의 국가(중화인민공화국) 개 념이 아니라 동아시아대륙의 중심부 중원中原(황하 중⋅하류 지역)을 지배 하는 왕조, 즉 책봉의 권한을 가진 천자天子의 제국임에 유념해야 한다. 더욱이 그 왕조의 지배민족 역시도 역사상 漢族만이 아니었고 선비, 거 란, 여진, 몽골 등의 다른 여러 민족도 함께 포함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국가는 특정한 가문이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왕조의 형태로 존재했다. 예를 들면 漢은 곧 왕조의 명칭이며 국가의 칭 호였다. 그러나 중국은 국가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원이라는 특정한 활동 공간에서 ‘중화’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역사적 경험을 공유 한 특정 ‘역사공동체’의 명칭이었다.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 중국에서 출현하여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는 서로 긴밀한 관계 하에 있었지만 사 실은 서로 일치되는 역사적 실체는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역사공동 체를 의미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이 출현한 이후 전통 시대가 끝날 때까 지 중국에서는 국가와 역사공동체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 여하튼 19세기 말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제국 일본이 동 양이란 개념의 창안을 통해 중국을 이 지역의 일원인 지나라는 하나의 국민국가로 전락시킴으로써 이 중국 중심의 전통적 체제는 해체되고 말 았다. 이것은 중세시스템의 ‘동아시아문명’이 근대기 서구에서 발원한 민족국가체제의 침투로 인해 파산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전통시대 동아시아 중화 세계시스템의 태동과 관련, 중국 고전문
화의 창달시기 출현한 中夏, 중화, 중국 등의 명칭이 갖는 함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中’은 지리적·문화적으로 중앙의 의미를, ‘夏’는 중국 최초
의 왕조 문명이 발생한 ‘하’ 지역 내지는 ‘크다(大)’라는 뜻을, 그리고 ‘華’ 는 찬란한 문화라는 의미를 각각 내포한다. 여기에 근거해보면 중화, 중 하, 중국의 개념들은 대체로 ‘문화가 찬란한 중앙의 큰 나라’로 정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 고대 중국인들은 하⋅殷⋅周 삼대에 이룩한 찬란한 문화와 강대한 힘을 배경으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자 유일한 선진문 명임을 자처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찬란한 선진문화를 창달한 중국 고대 성인의 ‘文德이 찬연히 빛나는 상태’를 나타내는 문명의 초기 용례 와도 무관하지 않다. 주로 유교문헌에서 발견되는 ‘문명’의 초기 용례들 은 고대 聖王들의 위대한 덕을 칭송하는 형용사적 서술어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문명’의 동아시아적 어원은 중원의 문명을 개창한 유교계열의, 즉 內聖外王의 성인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고전적 ‘문명’ 개념이 도출된 堯⋅舜에서 공자孔子로 이어지는 성인의 계보는 사실 漢文문명권이라는 同文세계를 중심으로 중국 고대의 역사가 발전하는 과 정이었다. 문명은 중국역사의 실체로서 중국의 가치를 대변하기 때문에 중국=세계 중심=문명이라는 등식의 문명론적 개념이 성립한 것이다. ) 결국 전통적 문명의 핵심은 성인의 도와 연결된 중국적 세계관, 곧 ‘중 화’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전개된 동양적 문명, 즉 ‘중화’ 개념은 유교가 한대에 국학으로 채택됨에 따라 漢 국가 자체의 의미로 한정되 는 등 중국 역대 왕조의 정치이념으로 확립되었다. 특히 董仲舒에게서 문덕은 중화주의의 다른 이름이고 王化, 德化, 聖化는 그것의 확산을 가 리키는 용어였다.50)
다 알다시피 중화주의는 공자의 춘추정신을 통해 동아시아의 현실역 사에 투영되고 기능했다. 중화의 문물을 보유한 문화국가 ‘주 왕실’을 높 이고 야만인 ‘이적’을 물리친다는 공자의 춘추대의가 그것이다. 이 華夷論적 춘추사상은 크게 보아 ‘仁道정신’과 ‘義理정신’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러므로 인도정신을 발휘하여 관용과 개방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의리정신을 진작시켜 불의를 비판하고 부정에 대항 함으로써 강한 자주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 역사상 전자는 문화가 열등한 국가와 민족을 포용하여 대동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대일통의 개방적 ‘세계주의’로, 후자는 불의하고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 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주적 ‘민족주의’로 나타났다. 중화 관념은 발생적으로 민족중심주의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자국이 문화세계에 있 어 가장 우수하다는 문화적 우월성에서 미개한 주변의 이적세계를 禮적 질서 속에 편입하여 문화의 은혜를 입힌다는 이른바 개방적 세계주의 지향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이념상 국가, 민족에 의한 영역이나 국경을 초월한 ‘천하天下’만이 존재하게 되므로 華夷內外의 구별 또는 尊內卑外에 표상된 영역성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고 천자의 덕화나 교화를 통해 항상 확대되는 성격을 가진다. ) 그런가 하면 이 세계관에서 중국 이란 문화가 발생⋅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곳이며 이적이란 荒服, 즉 문화의 불모지로서 중화문화의 세례를 받아 漢化(중국화)되어야 할 곳이었다. ) 이런 견지에서 중화주의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사 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중화제국주의 이면에는 문명(中華)과 야만(夷狄)을 구분, 타민족을 타자화하여 야만시하는 차별기제가 존재한 다. 소위 ‘화이’ 이분법은 근대적 대국주의 관념으로 굴절되어 중국인에 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여하튼 이 일련의 중화보편주의 가치관이 중세 동아시아의 정치구조 였던 책봉(조공)체제와 함께 공동문어인 한문과 보편종교인 유교사상으 로 구현된 세계가 다름 아닌 ‘동아시아문명’인 것이다. 동서 문명일반론 에서 보면 세계의 문명은 일원적 보편주의 가치관을 이룩한, 즉 책봉체 제, 공동문어, 보편종교를 본질로 하는 ‘중세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형성 되었다. 현존하는 인류의 모든 문명권은 중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고대문명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중세인이 수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된다. 고대문명은 좁은 지역 특정집단의 독점물이지만 중세문명은 그 고대문명을 원천으로 삼아 보 다 넓은 지역 포괄적인 영역에서 다수의 집단이나 민족이 동참해서 이 룩한 합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마련한 유산이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고 다른 여러 민족의 동참으로 보편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발전해 동아시아문명이 이루어졌다. 중국문명이라는 말은 고대문 명을 일컬을 때 쓸 수 있지만 중세문명은 동아시아문명이라고 해야 한 다” )는 논법이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근대성으로 상징되는 전 지구 규모 의 세계가 출현하기 이전, 세계는 각 대륙(지역)으로 나뉘어 그 나름의 공 통성과 완결성을 지닌 독자적인 문명권 단위로 존재했다. 중국, 한국, 베 트남, 일본 등의 동아시아지역에도 문명권이 형성됨은 물론이다. 이를 가능케 한 접착제가 바로 ‘중세화’이다. 책봉과 공동문어는 일반적으로 보편종교의 권역인 문명권 단위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의 중세문명권 역시 중국적 정치시스템인 ‘책봉(조공)체제’와 함께 ‘한문’을 공동문어로, ‘유교’를 보편종교로 그 중화적 세계의 공동영역을 구축했다. 이렇듯 이 지역이 문화권과 정치권이 일체가 된 자기 완결적인 세계라는 점에서 ‘동아시아문명권’이라 일컫는다.
좀 더 덧붙이자면 동아시아의 중세는 중국의 천자가 천명사상과 그에 토대한 중국적 천하관에 입각하여 한국, 일본, 베트남, 琉球(오키나와) 등 여러 나라의 국왕을 책봉하던 시기였다. 책봉이란 내려주는 문서라는 뜻의 ‘冊’과 지위를 부여한다는 뜻의 ‘封’이 복합된 말이다. 상위자가 하 위자에게 문서를 내려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가 책봉인 것이다. ) 그리 고 책봉체제란 중국황제와 주변민족의 수장 사이에 관직과 작위의 수여 를 매개로 해서 맺어진 관계를 나타낸다. 이 체제는 한대에 시작해서 당대에 정해지고 明代에 완성되었다. 특히 동아시아세계가 정치적⋅문 화적으로 일체가 되어 움직인 것은 隨⋅당시대에 현저해졌다. 이 시기 에 동아시아세계는 자기완결적인 역사적 세계로 자립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이 책봉체제가 중세인에게 이중의 소속관계 를 갖도록 하여 동아시아인이면서 자국인이게 했다. 그러다가 근대로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인이라는 공동의 영역은 없어지고 각국인만 남게 된 것이다. ) 그런데 한편으로 책봉은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를 사용 하면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공동 문어를 함께 사용하는 문명권 또한 중세에 생긴 것이다. 즉 공동문어와 민족어가 양층 언어의 관계를 가진 시대가 중세이다. 공동문어가 보편 종교의 경전어 노릇을 하면서 규범화된 사고를 정착시키고 국제간의 교 류를 담당해 문명권의 동질성을 보장해주었다. ) 실제로 중국대륙을 비 롯한 한반도, 일본 열도,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지역은 한문을 공동 문어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매개로 유교, 율령, 漢譯불교와 같이 중국에 서 기원하는 문화를 공유했다.
서구적 근대성이 문명 개념에 적층되기 이전 그 원의에 함의된 ‘중화’ 의 의미구성체는 동아시아의 중세 세계시스템과 대응된다. 이 논점은 이 념상 보편적 대동사회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의 중세적 ‘중화 세계시스템’ 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앞에서 동양적 문명은 ‘성왕의 문덕’이 동심원적 으로 확산되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
다. 말하자면 전통적 문명은 중화⋅이적이라는 개념 틀을 내포하며, 또 그 용어 자체가 유교경전과 조선역사 속에서 문덕이 빛나는 통치, 世道 가 실현된 이상 사회, 중화 등으로 쓰였다. ) 공자는 “大道가 행해지면 천하는 공적인 것이 된다” )고 했다. 이념적 지향인 대동세계로서의 공 공성이 강화된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여기서의 이른바 ‘천하’는 동아시 아공동체가 성립하는 지반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공자의 이 명제는 동아시아문명사로 볼 때 公, 곧 문명공동체의 공공성 구현을 위한 강력 한 이념적⋅문화적 추동력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중국은 예악이 밝게 갖 추어짐은 물론 총명하고 두루 지혜로운 자들이 살아 성현의 가르침과 인의가 베풀어지는 문명세계로 표상된다. ) 아울러 중화공공성이 본래 민족과 지역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우수성과 진리의 근원성으 로 그 가치판단을 한다 )는 논단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중화의 ‘개방 적 세계주의’ 지향은 천자의 덕화, 곧 王道정치를 기반으로 미개한 이적 까지 중국의 문화질서에 화합시켜 천하통일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리고 이 이상적 천자의 덕화로 상징되는 ‘중화보편주의’는 역사상 동아 시아의 중세화 과정을 통해 고도로 발현되었다.
2. 조선중화주의: 진경문화
조선시대 한반도에서 형성된 전통문화는 ‘중화’라는 동아시아의 문명
보편인자와의 끊임없는 교섭 속에서 창달되었다. 조선조 사상사를 동아 시아의 ‘중세화’라는 범주 틀에서 조망해보면 세계사의 전개를 균형 있 게 총괄하여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시각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
다. 그런 점에서 ‘장기중세long Moyen Âge’ )의 구도 속에 존재하는 ‘중세에 서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관점이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각은 근 대가 시작될 때부터 중세가 끝날 때까지를 의미하며 기존의 전근대와 근대, 중세와 근대라는 획일적인 경계 긋기를 포함한 전기근대나 근세 등의 용어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 어쨌든 이 시대구분을 동아시아문명권에 대입해보면 그 중심에는 중세 스콜라철학 내지는 亞近代의 문화표현으로 이해되는 중세후기의 신유학, 즉 ‘性理學’이 자리한다. 여기서 성리학이란 南宋의 朱熹가 北宋五子의 학설과 학통을 집대성함은 물론, 중세전기의 魏⋅晉 玄學과 수⋅당 佛學 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융합하여 동아시아 ‘중세보편주의’를 완성 한 이성주의적 특징을 지닌 새로운 유교학풍을 일컫는다. 성리학은 存心養性을 실천함과 동시에 窮理, 곧 규범법칙과 자연법칙으로서의 理(性)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의리의 의미를 완전하게 실현하는 유학 중의 하나이 다. ) 이 사상체계는 중국왕조인 송⋅명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 사상 계의 주체였던 만큼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창조하고 향유한 주 류적 정신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천라이陳來의 논변대로 “성리학(理學)은 10세기 이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론적 사유가 근거하고 발전시킨 공 통의 개념체계이자 관념세계이며, 당시 동아시아인들의 이론적 사유와 정신활동의 주요한 형식이었다”.66)
동아시아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걸쳐 있는 이 朱子學적 세계
상은 고대 ‘중화’ 관념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중화사상은 宋代 성리학에서 춘추 尊王攘夷라는 도덕률과 결 합하여 중세 보편적 가치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중화공공 성은 ‘인도정신’에 입각한 포괄적이고 원심적인 ‘세계주의’보다는 ‘의리 정신’에 입각한 자주적이고 구심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두드러진다. 이 러한 특징은 당시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렸던 한족왕조의 시대적 정황과 무연하지 않다. 말하자면 송이 북방의 여진족에게 밀려 남천하는 위기상황에서 주자가 한족의 정체성을 문화민족으로 규정하면서 문화적 ⋅종족적 교조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당시 남송의 주자는 중화를 보편가치로 격상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설정하여 저항과 배척의 이데 올로기로 전화시켰고 그것은 후대에 일종의 전형이 되었다. ) 그도 그럴 것이 ‘중화’란 중하, 華夏, 諸夏라고도 하여 한족이 四圍의 夷⋅蠻⋅戎⋅ 狄에 대해 자국을 호칭한 용어이다. ) 그런즉 이 개념에는 문화적으로 우수한 한족에 대비된 문화가 저속한 변방의 이민족이 상정되어 있다. 곧 도덕적인 중화를 높이고 야만적인 이적을 물리친다는 ‘화이사상’이 그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천하=王化 문명의 세계{華=中(國)=內=人}+化外 야만의 세계{夷=外(四方)=裔(邊)=尸(死人) 또는 禽獸}라는 공식이 도출 가능 하다. 때문에 중화사상은 주변 제민족에 대한 한족의 자기주장의 정신적 원리로서 일종의 한족민족주의로 규정되기도 한다. ) 특히 송대의 유학 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역사상황에 입각하여 성리학의 우주론인 理氣論 을 화이론과 연결시켜 중국의 중세적 ‘중화민족주의’로 재구성해냈던 것 이다.
이러한 유교적 중화사상은 한반도 조선에 있어 국가건설과 국제질서 를 구성하는 데 절대적인 이념이 되었다. 조선에서 중화에 대한 보편이 나 중심으로서의 문명적 개념화는 道學사상인 송대 주자학의 전래와 함 께 본격화되었다. 주자성리학을 사회개혁과 조선통치의 기본원리로 수 용한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은 중화를 유교문명의 이상으로 설정하고 明 을 중화로 조선을 소중화로 여겨 새로운 국가건설의 모델로 삼았다. ) 이처럼 조선에서 중화적 세계질서 관념은 주자학적 세계관, 곧 화이명분 론의 문맥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미 논급한 대로 송대에 주자가 금金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취한 것은 춘추의 의리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그 것은 이적의 무도한 침략세력에 항거하는 정도 구현의 ‘민족정신’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주자의 춘추의리정신은 도학사상의 수용과 함께 조선 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과 비교하여 국가의 규모나 전통적 기 질 그리고 사회적 여건이 다른 한국은 춘추의 ‘인도정신’을 바탕으로 한 대일통세계를 지향하는 중국과는 달리 춘추의 ‘의리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민족의식이 강조되어 왔다. 철학적으로는 우주론적 이기론보다 는 주체적인 인간의 내면에 담긴 太極과 이기를 논하여 중국보다 한층 심화된 인성을 究明했으며, 역사적으로는 후덕한 군자보다는 사회의 불 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선비들을 더욱 높여 중국보다 더 강한 민 족정기를 온축했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중화’ 관념이 본래 보편적 道의 구현이라는 개방적 세계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한족중심주의적인 발상은 점차로 희석되어갔다.
그런데 조선인이 중화 자체에 자신을 강하게 투영한 시기는 17세기
명⋅淸의 교체를 겪으면서부터였다. 華族왕조 ‘명’과 夷狄왕조 ‘청’의 교 체는 명 중심의 조공체제와 책봉체제로 편제되어 있던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큰 변동을 야기했다. 仁祖 14년(1636) 여진족 후금의 침략에 직면 한 조선의 상황은 과거 금의 침략을 당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남송의 처지와 서로 겹쳤다. 이런 유사성으로 인해 난세에 태어나 춘추 의 대의를 밝혔던 공자와 화이분별을 엄격히 했던 주자는 조선민족에 게 역할 모델로 수렴되었다. ) 당시 조선인들은 존왕양이의 대외명분론 에 의거, 북방의 胡夷에 의해 동아시아의 문화질서이자 국제질서인 명 주도의 중화문화질서가 붕괴된 상황을 천하대란으로 인식했다. ) 그에 대한 대응으로 표면상 청에 대해서 정치적⋅군사적 의미를 내포하는 조 공⋅책봉 관계로서의 事大의 예를 취하면서도 문화 이념적으로는 반청 적 北伐대의론, 對明의리론, 大報壇 설치 등으로 상징되는 중화적 세계 질서 관념을 지향했다. 여기에는 한족의 정통국가인 ‘명’이 멸절된 이상 중화문화와 주자성리학의 적통을 계승한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이 ‘중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전의 소중화의식은 중화문물의 원형을 간직 한 조선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중화의 적통이자 중화국이라는 조선중화 의식으로의 인식전환을 맞게 된다. 중화란 문화적⋅지역적⋅종족적 의 미를 내포하지만 조선은 문화적 측면을 중심 가치로 삼아 尊周論에서 周室이 ‘명’이었던 것이 이제 주실이 ‘조선’이라는 사고의 틀이 성립되어 조선을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에 위치시켰다. ) 이렇게 ‘조선중화주의’ 를 시대정신으로 구축한 조선인들은 관념상 동아시아의 ‘문화국가’, ‘도 덕국가’의 위상을 점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중화주의’는 조선후기 사회재건의 강력한 이데올로기 로 작동하여 이적국가의 침략으로 상처받은 조선인의 자존심을 회복하 는 데 기여했다. 더욱이 조선은 이를 통해 명실공히 변방의식을 떨쳐버 리고 문화적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진작시켜 단절된 동아시아 중화보편 주의와 조응하는 조선풍의 고유사상과 민족문화 창달에 성공하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조선성리학’과 그 사상적 기반으로 창발된 ‘진경문화’ 다 름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초 일제는 그들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 화하기 위해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식민사관을 획책하여 조선의 망국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면서 그 망국의 책임을 조선의 통치이념이 던 유교와 주자학에 전가하는 ‘유교(주자학)망국론’을 전개했다. 기존의 실학론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성립했음은 물론이다. 상당수의 실학연구 자들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이 주자성리학을 묵수하려는 고리타분한 사상 으로서 역사발전을 저해하며 사회를 피폐하게 하고 화이론을 고수하여 사대주의를 조장했다고 매도했다.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을 그대로 복제해서 내면화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정되기 시작하여 1980 년대 말에 실학사상 연구에 대한 문제점이 전반적으로 제기되어 본격적 으로 비판⋅교정되었다. 유학은 본래 전통적 학문분류법에 의하면 義理
之學(義理性命之學), 詞章之學, 經濟之學(經世濟民之學), 名物之學(名物度數之學)을 포괄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후기 실학은 전통유학과 주자학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유학의 한 분과인 ‘경제지학’의 전개로 새 롭게 설명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전반기에 와서 문화사, 지성사, 미술 사 등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영⋅정조대 진경문화의 이념적 기반은 ‘조선 성리학’이라는 사실이 실증되었다.75)
한편 仁祖反正(1623)으로 정계와 학계를 완전히 장악한 정통 사림파 학 자들은 이후 退溪李滉, 栗谷李珥 이래의 조선성리학과 그 명분론을 조 선통치의 절대적 이념으로 삼았다. 이른바 조선성리학과 조선중화주의 는 숙종⋅영조⋅정조대 조선고유의 진경문화를 성립시킨 사상적 기조라 고 할 수 있다. 최완수에 따르면 진경시대란 숙종대(1675∼1720)에서 정조 대(1777∼1800)에 걸치는 125년간을 말하며 조선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 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했던 문화절정기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구분 명칭이다. 또한 여기서 ‘진경’이란 본래 그림 또는 시로써 진짜 있는 조선의 경치를 사생해낸다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도 묘사해내는 사진기법, 곧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다는 의미도 된다. ) 아무튼 이 진경문화는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담당했 던 율곡학파의 洛論계를 중심으로 京南계(서울지역 남인), 委巷之士 등 서울 주변 京華士族의 다양한 계층에서 이루어졌다. ) 18세기 조선은 경제면 에서 세계 최고의 생활수준을 유지했고 문화면에서도 최정점에 달해 있 었다. )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성리학적 토양 위에서 韓民族 특유의 문 화와 예술을 꽃피워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한국 ‘전통문화’의 전형을 완성해냈다. 이들은 확고한 문화자존의식 위에 유일한 중화로서 조선의 문화적 개성을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했으며 조선 고유의 문물과 자연,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예술활동을 전개 했다. ) 구체적으로는 謙齋鄭敾의 진경산수화와 檀園金弘道의 풍속화, 춘향가⋅심청가⋅흥보가 등의 판소리, 봉산탈춤⋅양주별산대 등의 탈춤, 西浦金萬重의 국문소설, 三淵金昌翕과 槎川李秉淵의 진경시, 玉洞李漵와 白下尹淳의 東國眞體 글씨 등을 비롯하여 음식, 의복, 역사, 지리,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고유색이 발현되었다.
이렇게 진경문화가 영⋅정조대에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뿌리인 ‘조선성리학’이 이 시대에 이르러 주체적 고유이념으로서 완벽하게 자리 를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성리학이 뿌리라면 그 꽃은 ‘진경문화’인 셈이
다. 조선성리학은 16세기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성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유학의 학파와 학맥을 주도하면서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자연 과 우주의 문제보다는 인간내면의 性情, 도덕적 가치, 사회윤리의 문제 를 더 중요시했다. 송대의 성리학이 天人관계를 중심으로 객관적인 우주 론의 경향을 띠는 데 반해서 조선조 퇴⋅율 성리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내적 성실성을 통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퇴계와 高峰 간, 그리고 율곡과 牛溪 간에 벌어 진 ‘四七理氣논쟁’이 가장 대표적인데 이것은 조선성리학을 고조시켜 조 선의 학계를 윤리단계에서 논리적 철학단계로 끌어올렸다. 아울러 心性 론과 이기관 측면에서도 주자학을 크게 보충⋅발전시켰다. 이 이기심성 의 변론과정에서 퇴계의 主理派와 율곡의 主氣派로 양분되어 그에 따른 嶺南학파와 畿湖학파를 형성시켜 이후 조선유학의 학파와 학맥을 주도 했다. 그리고 17세기 조선성리학은 禮學이 확립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진 입하게 된다. 이어서 18세기 초엽 율곡계에서 일어난 ‘人物性同異논쟁’ 은 중국을 능가하는 조선성리학의 발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예컨대 주자 의 理同, 율곡의 理通, 낙학洛學의 性同, 북학파의 人物均으로 이어지는 한국 ‘이기심성론’의 전개양상은 중국과 다른 한국유학의 독자성을 적시 해준다. 특히 北學派의 보편동일시적 華夷一論은 주자성리학에 내재된 화이차별주의적 문명 이분법을 탈각시켜 인류 보편적 사상으로 재구성 하는 한국사상사의 역동적인 창조성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8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동아시아의 공통담론이었던 ‘주자성리학’
은 조선에서 5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수놓으며 수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해냈다. 그리하여 조선사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었고 그 문화발전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조선후기 이른바 ‘조선성리학’은 주자학적 화이명분 론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면서 그에 따른 조선의 문화를 중화문화의 진 수로 표방했다. 그리고 ‘조선중화주의’의 등장은 16세기 이래 진행되었 던 중화의 수용이라는 지향을 결정적으로 굳힘과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수용을 넘어선 내면화와 동일시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81) 영⋅정조대의 문화 황금기 ‘진경시대’는 조선성리학이 고양시킨 문화자 존의식, 곧 조선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조선 중화주의 현양의 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조선인들은 중화보편 주의를 주체화하여 문명의 주변의식에서 탈피했고 민족문화를 제고시킬 수 있었다. 이를테면 동아시아 중화민족주의의 한 형태인 ‘조선중화주의
80) 전홍석 2011, 299∼329쪽.
81) 이경구 2012, 19쪽.
― 진경문화’는 민족문화의 특성인 ‘夷’가 중세 동아시아문명의 보편적 규범인 ‘華’를 포섭하여 성취해낸 한민족공동체의 탈주변화를 표상한다. 진경문화는 ‘중화보편주의(理一)’가 역내 제반 민족문화로 전이되어 ‘문 화다원주의(分殊)’를 이룩한 ‘동아시아 중세화(理一分殊)’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동아시아의 문명 아이덴티티 ‘중화’가 원천적으 로 국가주의로 환원될 수 없으며, 뿐더러 그 중화로 대변되는 보편적 동 아시아성은 개별적 민족문화의 형태로 성취된다는 문명의 원리를 적시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근대화의 파고 속에서 ‘화’와 ‘이’가 조응하는 전일적인 중세화 법칙(理通氣局)을 망각하고 동아시아성(理通)과 분리된 민족적 특수성(氣局)에만 집착, 문명의 공유자산을 모두 중국풍이 라 하여 파기⋅양도함으로써 문화의 빈곤을 자초했다. ) 이제라도 우리 는 진경시대 한민족이 성취한 和而不同의 문명의식을 되살려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의 주체로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Ⅳ. 끝맺는 말
21세기 현시대 동아시아인들은 영토를 초극해서 인류의 보편적 인권 에 조응하는, 국제공공성 차원의 문명공동체 모델을 안출하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근대적 ‘민족국가’ 모델을 맹목적으 로 절대시하는 독선적인 쇼비니즘에서 벗어나 좀 더 온도를 낮추고 ‘동 아시아공동체’라는 문명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데서 현금의 제반 동아시 아 분열상에 대한 해법과 그 평화협력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은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국제공공성 영역인 ‘중화적 가치’를 현대 문명학 적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연구노력과 상통한다. 중화적 세계시스템으로 서의 ‘중세화 모델’을 통해 구상된 동아시아상은 탈근대적 인류미래의 비전을 담지한 ‘대안적 공동체’임과 동시에 탈제국주의적 맥락의 ‘지정 문화적 아이덴티티’ 복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듯이 동아시아의 ‘중화’ 의미구성체는 전통문화의 현재성과 관련되며 역사상 그것은 동 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그 연대감을 추동하고 강화하는 역내 공통된 문 명소로 작동해왔다. 실상 중화문명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여러 이족지역 의 소단위 민족문화와의 교섭 속에서 창출⋅발전되었고 동아시아의 모 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향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 이 언제나 화족의 중국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중화의 핵심유형이었던 주자학과 陽明學은 모두 중국 에서 발생했지만 주자학의 중심은 조선시대에 한국으로 옮겨졌고 양명 학의 중심은 도쿠가와德川시대에 일본으로 옮겨졌다. ) 중화문명은 동아 시아인들이 각기 자민족공동체의 역사현실에 부응하여 일궈낸 창조적 활동의 결실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 ‘중세화’를 통해 공동체 적 규범인 ‘華’와 다수의 민족적 가치인 ‘夷’가 상호 교호하여 하나이면 서 여럿인 오늘날의 ‘문명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 아문명의 형성은 단수적 문화동화가 아닌 복수적 문화융합에 의한 것임 을 직시해야 한다.
본래 동아시아 보편적 국제준규인 ‘중화’ 개념은 보편성을 강조할수록 조선의 경우처럼 주변의 중심화를 가능하게 하며 따라서 새로운 중심을 정의하는 논리가 가능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18세기 동아시 아의 구성체인 청, 조선, 일본, 유구, 베트남 등은 각자 자신들의 처지에 따라 중화를 자기화하여 문명의 다주체⋅다중심을 시도하고 있었다. 동
아시아 각국들은 중세 중화보편주의 담론을 전유appropriation하여 ‘중화의 복수화’, 즉 다양한 중화민족주의로 승화시켜 문화적 자존의식과 민족의 식을 고취시켜 나갔던 것이다. 동아시아문명의 중간부에 위치한 한반도 의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중심부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동 아시아의 보편성을 민족문화의 특수성과 융합하여 ‘동아시아문명’을 이 룩하는 데 적극 공헌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성리학과 그 사상적 기반으로 성립한 ‘진경문화’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르면서 화합 하는 삶의 방식’이자 ‘다양성 속의 조화’를 지향하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의 문명철학, 즉 공자의 화이부동, 程朱의 理一分殊, 율곡의 理通氣局이 구현되어 있다. 이 ‘진경시대’는 오늘날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룩하는 데 귀중한 문화적 전범을 제공해준다. 더구나 그것은 공유적 동아시아성 영 역인 ‘중화’를 배타적 국가주의에 한정시켜 사유화할 수 없음을 훈칙한
다. 요컨대 이 ‘조선성리학 ― 진경문화’와 관련하여 동아시아문명권 내 여러 지역문화들이 평등하게 교류하고 공존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연대적 가치의 문명보편주의에 수렴되는, 혁신적인 동아시아 국제공공성 모델 로서 ‘중세화론’을 적극 공론화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이 국적보다는 동아시아인이라는 데서 더 자긍심을 찾고 동일문명의 요람 에서 편안함과 유대감을 느끼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동아시아 평화연대 체’ 구성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접수일 : 2013.10.18 / 심사개시일 : 2013.10.28 / 게재확정일 :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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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선시대 공공성의 구조변동 연구단) 국제학술심포지움, 2012,
11.
<中文摘要>
东亚模式的转换:中世化论和真景文化—以探索东亚“国际公共性”为中心/ 全洪奭(北京外國語大學中國海外漢學硏究中心訪問學者)
在建立21世纪最好的“东亚学”和东亚模型转换的宏观背景下, 以打破近代国家主义的世界格局构造, 构建“国际公共性”为本文的研究目标. 本论题的提出主要是鉴于最近东亚韩中日三国以典型的近代国家自居, 不断因历史领土等问题反目, 而引发接连冲突这一现实状况, 不禁发人深思, 我们需要从全新的角度即“中世纪”形态的东亚“和平共同体”这一角度去思考问题. 也就是说立足于21世纪东亚模型近代化的反面——脱现代化的“中世化”这一角度, 通过对18世纪朝鲜半岛“朝鲜性理学——真景文化”的再发掘, 探索“东亚共同体”和而不同典范的构成. 文章的构成主要是先将“中世化论”这一文明共同体单位与“近代化论”这一民族国家单位进行对照, 对其进行具体的说明. 并以此为基础, 在西方近代性被引入文明这一概念之前, 文明原意中所包含的“中华”这一东亚中世纪世界格局与上述理论对应. 论证中世纪中华普遍主义价值观, 即由册封这一政治体制, 汉文这一共同文字, 儒教这一共同宗教, 所构成的自我完善的“东亚文明”世界.
主题语: 东亚, 近代化, 中世化, 文明共同体, 中华公共性, 朝鲜性理学, 朝鲜中华主义, 真景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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