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1

KNOU 하야시 부자의 대를 이은 인류애 정혜경

KNOU위클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하야시 부자의 대를 이은 인류애
정혜경 기사입력 2020-08-10 10:23 제58호
친구는 헤어질 수 있어도 이웃은 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이웃을 이해하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다. 양국 민중이 식민지 침략의 역사와 아시아태평양전쟁 피해의 역사를 넘어서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75주년이 되도록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역사 인
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과 무책임한 행태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역
사 왜곡에 맞서고 바로잡기 위한 일본 시민의 노력도 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엄혹한 일본 천황제 파시즘 시기에도 있었다.
아버지, 조선인 돕다 고문으로 사망
국가권력이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가운데 양심을 지키려는 시민이 거대한 국가권력과 맞서 투
쟁한 대표적 사례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알려진 폴란드 출생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Osk
ar Schindler)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75주년을 맞은 지금도 절대적인 국가권력에 맞서 개
인이 벌인 숭고한 실천으로 평가받고 있다.
쉰들러와 같은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목숨을 건 일을 했던 일본인이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 현 탄
광 지역에서 살았던 하야시 도라지(林寅治 ?∼1943)가 주인공이다. 후쿠오카지역은 일본 3대 탄전
의 하나인 지쿠호 탄전이 있던 지역인데,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10만 명이 넘는 조
선인이 강제로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인의 삶은 비참했다. 사고나 폭행으
로 숨진 시체를 산 위에 쌓아놓고 화장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던 시절이었다.[인터넷판]
1969~7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당시의 서독) 총리를 역임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
비 앞에서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Brandt Kniefall)로 알려진 이 행동은 과거사에 대한 사죄
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당시 헝가리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
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브란트는 동독과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동방 정책으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Bayerischer Rundfunkt 유튜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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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020 KNOU위클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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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집안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 온 조선인 학자 집안으로 대대로 신사의 신주(신사에서 의
식을 집전하는 역할)를 지냈다. 신주란 신사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학자였으나 일본
이 메이지 유신을 거쳐 근대 국민국가로 진입한 후 역할이 달라졌다. 신사가 일본 천황제를 지키는
구심점이 되면서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국가의 정책과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를
주관해야 했다. 그러나 하야시 도라지는 학창시절부터 가졌던 반전의식이라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194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지쿠호 각지 탄광에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가 산맥
을 넘어 탈출한 조선인을 숨겨주고 치료해주는 일을 했다.
탈출한 조선인을 돕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언어가 통해야 했기에 간단한 조선말도 익혔고, 가족이 모
두 나서야 했다. 그는 조선인들을 신사 마루 밑에 숨겼다가 밤이 되기를 기다려 1백 미터 정도 떨어
진 집으로 데려와 2층에 숨긴 후 그들에게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을 주고 다친 사람들을 소독해주
었다. 그리고 여비를 마련해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 한 번에 20명 이상 숨겨줄 때도 있었다. 심지
어[인터넷판] 조선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부관연락선(부산-시모노세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부자가 탈출시키려 했던 조선인이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다시 경찰에 잡혀
간 일도 있었다. 이 모습에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탈출자를 발견하면 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만약 탈출 조선인을 돕기라도 한다면, 비
난과 함께 처벌을 면치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 그가 탈출시킨 조선인은 3∼4백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가는 참혹했다. 1943년 가을, 신사로 찾아온 2명의 특별고등경찰(특고)에
잡혀간 도라지는 1주일 만에 간신히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48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아들, 참회의 기록을 남기다
국가권력에 대항한 대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찾아온 특고 형사는 천황의 뜻을 저버린 ‘국적(國賊)’이라며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겨우 아
홉살 소년이었던 아들, 하야시 에이다이(林榮代. 1933∼2017)에게 아버지 대신 신주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제국주의 시대, 감시와 통제는 식민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절에 신주가
정부 정책을 어기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하야시 가족에게 보내는 세상의 눈총은 어떠했겠는가.[인
터넷판]
강제동원위원회(국무총리 소속)가 진상조사를 위해 에이다이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2017년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
지 손가락에 테이프를 감아 펜을 고정한 채 한 글자 한 글자 이어가다가 9월 1일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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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일제강제동원과 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아버지와 함께 탄광을 탈출한 조선인을 도왔던 아들 에이다이는 부친의 죽음을 통해 일찍부터 일
본 국가권력에 맞서는 행위가 초래한 비극을 경험했다. ‘국적’, 나라를 배반한 자의 자식으로서 살
았으나 그는 망설임 없이 양심과 인권을 택했다. 부모가 걸었던 삶이 양심과 인권의 실천자 모습이
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두 명의 조선인이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소식을 아들 에이다이에게 전하며 10엔을 내밀기도 했다. 아버지 하야시가 자신들에게 준
돈이라고 했다. 에이다이는 평생 그 돈을 가보처럼 간직했다.[인터넷판]
하야시 에이다이는 주말에 탄광노동을 하며 와세다대에 입학했으나 1955년 중퇴한 후 고향에 돌아
와 일본 패전 후 권력에 버림받고 잊힌 이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택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지쿠호 지역에 남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였다. 그는 1970년대부터 고향인 지
쿠호 지역은 물론 일본 전역, 한국, 러시아, 중국, 타이완,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 광활한 지역을 다
니며 구술을 채록하고 자료를 모아 총 51권의 단독 저서와 4권의 자료집, 9권의 공저를 남겼다. 사
비를 털어 ‘아리랑문고’를 만들어 시민들과 함께했다.
일본 국민으로서 ‘참회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침략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실천의 길을 걸었던 하야시 에이다이. 대를 이은 양심의
길은 엄혹한 일본 천황제 파시즘 아래에서 조선인을 탈출시킨 부친
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인 쉰들러가 나치에 맞서 유대인의 목숨
을 구했다면, 하야시 도라지는 ‘쇼와 파시즘’에 맞서 조선인의 목숨
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쉰들러는 재산은 물론 자신과 가족의 생명
을 위협받았다. 도라지는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가족들은 배
신자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권력보다 인류애
적 양심을 택한 주인공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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