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박정미 | 서늘하고 애틋하고 찬란한 봄날의 [킹메이커>

(3) 박정미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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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애틋하고 찬란한 봄날의 <킹메이커>

 이렇게 재미있고 멋진 영화가 왜 안떴을까, 안타까울 정도였다.
<길복순>을 보고 변성현감독의 스타일에 꽂혔다. 뎅강데강 사람의 목을 베고 동맥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가 난무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견뎌낸 것은 화면구성이 너무 예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본 변감독의  <불한당>은 또 지긋지긋한 폭력물이어서 초반에 집어치우고, 정치물이라는 이 영화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과연 감각적이고 신선한 장면구성이 돋보였는데 거기에 예기치 못한 묵직한 감동에 얼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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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디제이의 1961년 인제재보궐선거부터 시작해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직후 유신전야인 1971년 대선까지 김대중대통령(설경구)과 그의 선거참모인 실존인물 엄창록(이선균)씨의 얽힌 인연을 보여준다. 
설경구는 완벽하게 디제이에 빙의된 사람같았다. 그 말투와 표정과 자세, 따뜻한 인품과 학식과 유머감각, 참모들이하는 말을 묵묵히 듣다가 결론을 내리는 외유내강형 리더쉽, 특히 문장의 어미를 위로 급격하게 치올리며 격렬하게 감정을 끓게하는 그의 연설스타일은 생시의 김대통령을 불러낸듯 싶었다. 
 이선균 역시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계속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의 마스크와 발성의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인 듯 했다.
 이선균은 <나의 아저씨>나 <검사내전>에서는 그렇게 잘 어울렸지만 이 영화는 아니었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야망과 디제이에 대한 숭모의 감정 사이에 찢겨져가는 내면의 고통을 담기에는 너무나 지적이고 세련된 도회적 이미지를 풍긴다. 
 설경구는 굉장히 복합적인 얼굴이라 깡패도 협잡꾼도 신사도 찌질함과 위대함도 다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선균은 소시민인텔리의 진실을 전달하는데 특화된 얼굴과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

 나보다 한바퀴 띠동갑으로 젊은 변성현감독은 어찌 그리 우리 엄마아빠 시대의 사회적분위기를 이토록 능청스럽고 맛깔스럽게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목적과 수단'이라는 고전적이다 못해 진부한 주제를 어쩌면 이렇게 진영논리로 갈갈이 찢겨져 정치가 실종된 작금의 문제의식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을까.

 승부의식에 떠밀려 정치꾼으로 전락할듯 하다가도 다시금 정치의 기본대의에 끊임없이 회귀하는 디제이와 디제이의 대의를 지지하고 숭모하면서도 끝내 그를 이기게 할 승부욕을 접지 못하고 음지의 술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엄창록의 대결이 무시무시하다.

"자네는 지랄맞게 똑똑한 사람이여. 판세 정확히 읽어내고 이기는데 탁월한 사람이지. 근디 이기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왜 이기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여."

디제이의 이 대사를 현 정치권, 특히 디제이의 후예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지금의 민주당은 디제이의 후예가 아니라 엄창록의 직계인것처럼 디제이정신의 뿌리를 잃고 이기는 기술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1971년 선거에서 엄창록이 지역감정을 선거도구로 불러내 쓰지 않았다면 우리시대의 이 망국적 분열상은 없었을까. 그리하여 만일 1971년도에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됐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는 이미 70년대라는 것이다. 옛것이 가고 난 후에 새것이 오는 거 봤는가.
 옛것 속에 태어나 온갖 구박을 다 받고 모진시련 속에 살다가 겨우 살아남아 이기는 것이 새것이다.

그때 박정희는 낡아 생명력이 다한 시대정신을 붙잡고 독재의 서슬푸른 칼날을 휘두르던 헌것이었고 김대중은 새로운 역사를 세우고자 한 새것이었다.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 '달걀도둑놈 일화'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디제이의 해결책을 듣는 수미쌍관의 기법을 쓴다. 디제이를 배신하고 떠나고서도 끝내 그의 그림자속에  살아가는 엄창록은 디제이와의 내면속 대화를 통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지들이 양심이 있다면 돌아서겄제."
"그들이 양심이 없다면요."
"글면 자네를 찾아왔겄제."
맞다. 디제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다들 모질이같다고 지탄받는 햇볕정책, 북한문제도 그래서 그랬을것이다. 

인간으로서 같은 민족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하고 그래도 안된다면 현실적인 술수의 세계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디제이는 인정했을 것이다.
어제의 봄날씨는 너무나 찬란하고 애틋한 서늘함이 감돌았는데 영화는 그 밤을 같은 정조로 물들여주었다. 세상에는 사랑하면서도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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