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8

김형석(교육자)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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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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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김형석
金亨錫|Kim Hyeong-seok
1614489713944
출생
국적
직업
수필가, 철학자
학력
창덕소학교 (졸업)
평양 숭실중학교 → 평양제3공립중학교 (졸업)
조치대학 (철학 / 학사)
소속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자녀
슬하 2남 4녀
종교

1. 개요2. 생애3. 베스트셀러 작가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최고령 수필가 및 철학자이자 연세대학교의 명예교수이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시카고 대학교 및 하버드 대학교 연구 교환 교수를 역임했고 오스틴 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920년 4월 23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어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운산금광에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해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어 이 지역 보통학교였던 신망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망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어 1931~33년에 창덕학교에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만주(용정)에서 전학 온 윤동주와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출옥 후 인근에 은거하던 도산 안창호에게 설교를 듣는 등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안창호는 오래지 않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되었으며, 고문 등으로 건강을 크게 해쳐 1938년에 사망한다.

이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숭실중학교가 강제 폐교되고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퇴를 했고 이때 역시 자퇴한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1년 뒤에 복학하여 5학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가, 일본의 명문사립대 중 하나인 조치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1944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조치대학은 예수회가 세운 사립대학으로, 일본 내에서는 와세다대학게이오기주쿠대학과 함께 '소케이조치(早慶上智)'로 불리는 3대 명문 사학의 위상을 갖고 있다. 역시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와 여러모로 비슷한 학교이다.

조치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고향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북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당시로서 매우 드문 대졸자로 참여를 권유받아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소학교(창덕학교) 선배인 김일성과도 만났다고 한다. 이 창덕학교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3]에 있던 기독교계 학교였는데,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 목사가 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었고 교장을 지낸 바도 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은 외가와 인연이 깊은 이곳 칠골의 창덕학교를 1923~25년에 다녔다.[4] 이들은 연배 차이가 있어 학창 시절에는 만나지 못했다가, 김일성이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자 친분이 있던 목사들이 열어준 환영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동네 청년 '성주'가 김일성이 되어 지도자감이 되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2021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하였다.

이후 점점 인민위원회가 공산주의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위원직을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하지만 반공 성향의 개신교 지식인이었던 만큼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체포가 임박해오자 아내와 첫 아들을 데리고 1947년 8월 20일에 황해도를 통해 월남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1947년 10월부터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6.25 전쟁 정전 후에는 해외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나, 당시는 전후 혼란기로 해외유학을 가기가 쉽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뜻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1954년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의 권유로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이후 1985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한다.[5]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100세를 넘긴 2023년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3. 베스트셀러 작가[편집]

학문적 업적을 떠나 꾸준히 다작을 하고, 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저술가로 더욱 유명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책을 펴낸 시발탄은 1960년에 출간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었다. 여러 잡지에 발표한 글을 모은 것인데, 당시 유명 잡지사 중 하나이던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였던 2만부가 팔려 화제를 모았다.

이어 1961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연구교수로 가기 전에 넘긴 원고로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수상집이 나왔는데, 이 작품도 간행 1년만에 8만부(현재까지 누계 60만부)가 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그 이전에는 1938년 박계주의 《순애보》가 1년만에 4만부가 팔린 것이 베스트셀러 기록이었는데, 약 20년만에 이 기록을 깬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연구교수에서 돌아온 이후 김형석 교수는 출판업계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엄청난 러브콜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30년 이상 매년 1권 꼴로 꾸준히 책을 냈다.

그가 집필한 수필은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배경으로 현대의 인간 조건을 추구하여 부드럽고 시적인 문장으로 엮어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고독이라는 병》(1960), 삼중당
  •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 삼중당
  • 《그대여 이날을 헛되이 보내려나》(1985), 세종출판공사
  •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1988), 자유문학사
  •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1990), 자유문학사
  • 《그래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것》(1990), 자유문학사
  •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1991), 철학과현실사
  • 《인생,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1991), 철학과현실사
  • 《망치들고 철학하는 사람들》(1995), 범우사
  • 《모든 자녀들에게는 꿈이 있다》(1998), 철학과현실사
  • 《철학의 세계》(2002), 철학과현실사
  • 《나의 인생 나의 신앙》(2012), CLC(기독교문서선교회)
  •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2016), 프런티어
  • 《어떻게 믿을 것인가》(2016), 이와우
  • 《백년을 살아보니》(2016), 댄스토리(Denstory)
  • 《행복 예습》(2018), 댄스토리(Denstory)

4. 기타[편집]

  • 1920년 4월 23일생으로 현재 102세이지만 연령에 비해 매우 건강하여 강연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100세의 연령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책을 낼 때에도 100년이라는 숫자를 쓰기도 하고(백년을 살아보니 등) 100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보조수단 없이 선명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강의를 했던 것을 보면 건강 상태가 놀라울 정도이다. 동갑인 백선엽과 한 살 아래인 신격호가 2020년에 사망했지만 굉장히 장수했다고 느껴지는데 정말 건강한 셈이다.[6] 규칙적인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절제와 노력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2021년에도 동아일보에 칼럼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외부 활동을 소화할 정도이다. 2021년 1월 14일에는 KBS 아침마당 생방송에 출연하여 담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왔는데, 휠체어는 물론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걸어나와 혼자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정정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참고로 놀라운 것은 지금은 사망한지 꽤 오래 지난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김수환 추기경, 이희호 여사보다도 연상이며 2022년 6월 8일 세상을 떠난 송해보다 7살[7], 현역 최고령 연예인 이순재보다도 14살이나 위이다. 윤봉길 의사와 12살 차이고 시인 윤동주박정희 전 대통령과 3살 차이다. 22살에 요절한 최장신 로버트 워들로보다 고작 2살 어리다. 심지어 현재까지 생존 중인 전직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 전직 일본 총리인 무라야마 도미이치보다 4살 더 많다.
  • 슬하에 2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한림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성진(1947년생, 76세)이다.# 둘째 아들과 넷째(막내) 딸도 교수라고 한다. 2021년 12월 방송을 보면 자녀들도 모두 일흔이 넘었지만 아버지를 닮았는지 다들 매우 동안에 목소리도 매우 젊다.
  • 2021년 12월 방송에서는 일상생활을 공개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생야채, 삶은 계란, 우유 등의 간소한 아침 식단을 수십 년째 유지중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팡이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간단한 산보도 즐기는 등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다.
  • 현재는 100세가 넘은 나이에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활동할 정도로 건강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건강이 너무 나빠서 부모님이 20살 전에 죽을 것 같다고 예상할 정도로 허약했다.[8] 그래서 어린 나이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게 크리스천으로서의 첫출발이 되었다. 그 후 고령의 나이에도 기독교 도서들을 집필하였고, 유튜브에 기독교 관련 영상들이 굉장히 많으며 교회에 나와서 기독교 이론 강의를 한 영상들도 있다. 이렇게 평생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으면서도, 2020년에는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내면서 개신교의 폐쇄성을 지적하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오만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등 건전한 내부 비판의식 또한 잃지 않고 있다.
  • 나이가 나이이다보니 시인 윤동주를 "윤동주 형"이라고 하면서 "그 형이 자신보다 공부는 못 했지만 꿈은 더 컸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9], 독립운동가 이범석 이야기를 그 시절이라고 하기도 했으며, 해방이 되기 거의 10년 전에 운명한 도산 안창호의 설교를 고등학생 나이에 들었다고 하는 등 2020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제법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이쯤 되면 살아있는 20세기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 2021년 이제 만나러 갑니다 474화에 출연하여 해방 직후 북한에서 겪은 일과 월남기에 관해 회고하였는데[10], 고향이 그리워 꿈에서라도 가 보면 고향 주민들은 모두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쫒겨나갔고 자신도 숨어다니느라 집에 가질 못 하며, 꿈에서 38선을 넘기 위해 애쓰다가도 이건 꿈일 것이라며 깨려고 하는 것이 일이라고 설명하였다. 출연한 북한이탈주민 패널들도 이를 듣고 자신들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덤.
  • 100세 시대의 인생의 단계에 관해 30세까지는 '나를 키워가는 단계', 65세쯤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 90세까지는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단계'라고 평했다.#

[1] 일부 지면에서 3월 5일7월 6일 등으로 소개했는데 김 작가의 책을 다수 펴내는 김영사에서 만 100세 기념 생일파티를 4월 23일에 열어 축하했다.[2] 출석 교회나 직분 등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교회에서 기독교 관련 초청 강연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3]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시 만경대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곳은 김일성의 외가인 신천 강씨 집안 집성촌이 위치한 곳이였다.[4] 이후 아버지 김형직이 체포되면서 다시 만주로 피신한다.[5] 한국의 평균 학력이 이렇게 높아진지 얼마 되지 않은만큼 당시만 하더라도 석사, 박사학위가 없어도 교수를 지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6] 그 신격호도 말년엔 몇년간 치매와 각종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떠났다. 90대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활동을 했지만 90대 후반의 신격호는 사실상 도움 없이는 생활 자체가 매우 힘겨운 정도였다.[7] 그 송해도 90세에 들어서서는 병원에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떠났지만, 신격호와는 다르게 지병 같은 걸 앓지 않았고, 게다가 휠체어 물론 지팡이도 한번도 짓은 적 없이 마지막까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여서 떠나기 며칠전까지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떠났다.[8] 공교롭게도 카를 야스퍼스(향년 86세)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향년 102세)도 일찍 병치레를 한 것이 자신들의 장수의 비결인 것 같다고 한 바 있다고 한다.[9] 윤동주는 나이가 3살 더 많은 1917년생이었지만 평양 숭실중학교에 1933년 같은 해에 입학하였고, 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요즘과는 달리 동급생이어도 나이 차이가 서너살 이상 가량으로 많이 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5공 인사인 쓰리허의 경우 허삼수가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허화평과 육사 17기 동기이고 허문도의 경우는 4살이나 어린데도 학창시절 동기로써 말을 트고 지냈다.[10] 증언에 따르면, 고향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던 중 갈수록 학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자 학교 이사장이 자신은 월남할 작정이라고 밝히면서 이대로 더 있다가는 위험해지니 월남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월남을 결심한 뒤에는 육로로 해주까지 이동하여 선박으로 월남하였다고 한다. 이때 큰딸은 부친의 권유로 고향집에 맡기고 월남하였는데, 다른 기사에서는 6.25 때 국군이 북진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 큰딸과 어머니는 모셔왔지만 아버지를 모셔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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