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 네이버 블로그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하   
2011. 2. 2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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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恒産)과 항심(恒心)     

       

어느 날 등문공이 맹자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농한기에는 집안 일을 마치고  농번기에는 농사에 열중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다시 정리하여 알려주었는데 일반 백성이 살아가는데는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생업,  즉 항산(恒産)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항상 변치 않는 믿음 '항심((恒心)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



 그래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일이 없으면 언제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생산적인 생각보다 나쁜 비생산의 생각으로 치우쳐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 게으른 자는 '숟가락도 무겁다'고 한다 -

   

제3편 滕文公 章句 上 三章

 民之爲道也, 有恒産者有恒心, 無恒産者無恒心.

 백성들이 사는 방도는,

 일정한 생업이 있으면 일정한 마음이 있고,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진실로 일정한 마음이 없으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항산(恒産)없는 사람은 항심(恒心)없다. 맹자의 말이다.



 그 뜻은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여기서 항산의 항(恒)은 상시라는 뜻이고 산(産)은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일정한 직업, 즉 일을 뜻한다. 이 말은 맹자가 주장하는 왕도정치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제일로 삼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정직한 일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직한 일자리를 가져야만 노력에 대한 교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상가 칼라일은『자기일을 찾아낸 삶은 행복하다. 그에게는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고 했고, 톨스토이도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여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모셔온 글
[출처]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작성자 곰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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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恒産)과 항심(恒心)

 청언 ・ 2017. 1. 18.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은 맹자책 梁惠王章句上에서 齊宣王과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맹자가 인덕을 베풀어 모든 사람들이 임금을 존경하여 임금의 나라로 모여드는 정치를 실시하라고 말하자, 제선왕이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맹자는 항산과 항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선비는 항산이 없더라도 항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산이 없으면 일반 백성들은 방자하고 편벽되고 사치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임금은 백성들의 재산을 잘 다스려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죽는 것을 면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뒤 그들을 독촉하여 착한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잘 따른다는 것입니다. 항산과 항심이 나오는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王曰吾惛不能進於是矣願夫子輔吾志明以敎我我雖不敏請嘗試之

曰無恒産而有恒心者惟士為能若民則無恒産因無恒心苟無恒心放辟邪侈無不為己及陷於罪然後從而刑之是罔民也焉有仁人在位罔民而可為也 是故明君制民之産必使仰足以事父母俯足以畜妻子樂歲終身飽凶年免於死亡然後驅而之善故民之從之也輕“

질문자께서 항심과 항산의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맹자집주대전이라는 책의 주를 보면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하는 것이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생업이다. 항산은 항상 생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말한다. 항심은 사람이 항상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이다.(恒常也産生業也恒産可常生之業也恒心人所常有之善心也)

그렇다면 항산은 국민들이 생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말합니다.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심은 도덕심을 말합니다.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도덕심입니다. 

모셔온 글
[출처]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작성자 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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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의 맛있는 역사]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기자명 장원섭 원장   입력 2021.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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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 경민대학교 교수. 역사학자
장원섭 경민대학교 교수. 역사학자
[뉴스더원=장원섭 원장]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를 만나 백성을 다스리는 요령을 물었다. 맹자는 “인덕(仁德)을 베풀어 모든 사람이 왕을 존경하여 왕의 나라로 모여드는 정치를 하소서.”라고 말했다. 제선왕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맹자가 말했다.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맹자가 지적한 항산과 항심은 무엇인가. 주자가 『맹자』에 주석 문을 덧붙여 저술한 『맹자집주대전(孟子集註大全)』에 보면, ‘항산은 수입을 만들어내는 생업을 말하고, 항심은 사람이 항상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恒常也 産生業也 恒産可常生之業也 恒心人所常有之善心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항산은 백성들이 생업으로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 즉 일정한 수입의 근원을 말한다. 일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맞는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심은 도덕심을 말한다.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먹고사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수입을 보장하는 항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가 민생과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백성들의 배를 채우고 그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도덕이 바로 서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백성들의 배를 채우는 것을 항산(恒産)이라 하고 백성들이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항심(恒心)이라고 맹자는 정의하고 있다. 맹자는 민생과 도덕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백성들의 배를 먼저 채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윤리와 도덕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이지만, 민생의 안정 없이 도덕과 윤리만 강조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따르지 않을 것이란 의미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현실적으로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었던가.

그래서 맹자는 덧붙인다. “백성들에게 물질적 보상이 없다면 항심(도덕심)도 없다. (則無恒産因無恒心)” 나아가 “물질적 보상 없이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그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지도자는 그물을 쳐서 백성들이 그 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최악의 지도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의 항산을 잘 다스려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한다.”라고 정의한다. 백성들이 먹고사는 것이야말로 왕도정치의 시작이며 민본정치의 요체라는 것이다. 이 문답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에 실려 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 비로소 윤리와 도덕이 생긴다. 항산, 즉 민생이 먼저이고 항심, 즉 의무와 규칙은 그 다음이라는 이야기이다. 일정한 소득이 없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인심은 각박해지고 서로 원망하게 되어 인륜은 무너지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늘 가지고 있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심, 즉 항심(恒心)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항산 없이 항심을 기대하지 마라!’ 맹자의 엄중한 경고이다.

요즈음 정치권에서는 대선 후보들 사이에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기본소득이란 정부가 재산과 노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을 의미한다. 그만큼 저잣거리에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현실적인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하지 않고도 매달 정기적으로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 주는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이 제도를 도입하려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2017년 핀란드에서 한 차례 시도했지만 지난 5월에 발간된 최종보고서에는 고용 촉진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본소득제도가 불평등 완화는 물론, 복지 사각지대 해결에도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재원을 활용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처럼 백성들의 항산(恒産)을 늘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선비 이덕무(李德懋)가 저술한 『사소절(士小節)』에는 가정에서도 항심이 없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폐단을 적시하고 있다. 

“춥고 배고픔이 심해지면 자식들이 부모를 향해 ‘왜 나를 이렇게 굶기고 춥게 하는가?’ 하며 원망한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항심이 없음을 이른다. (飢寒之至, 子弟怨父兄曰 何使我飢寒 此孟子所謂無恒心者也)” 

변이된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면서 민심은 갈수록 불안해진다. 나라 안팎으로 조여들고 갈라지는 모양새가 여간 심상치 않다. 장마철 후텁지근한 날씨에 짜증 섞인 시름도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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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보는 두 가지 관점 : 항산(恒産) vs. 항심(恒心)(한용진)
입력 2023.03.25 09:35
수정 2023.03.27 21:27
 조회수 3303

※ [편집자 주] 미래교육에 대한 담론을 풀어내는 교육신문은 교육계 전문가들의 기고문을 싣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한용진 교수님의 기고문을 담아냈습니다. 본 기사는 교육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인 항산(恒産: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직업)과 항심(恒心: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하고 바른 마음)의 비교와 교육의 궁극적 도달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용진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대학원 시절에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학위를 받게 된 선배가 지도교수에게 “교수님, 교육이 뭔가요?”라고 물었다. 교수님은 대답 대신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는데, 어쩌면 이는 부처님과 제자 가섭(迦葉) 간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박사학위를 받으며 교육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던 선배가 굳이 대답을 들으려 한 것도 아니었겠지만, 교수님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드디어 내년에 정년을 맞게 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네도 이제 드디어 교육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단계에 들어섰구나!”라고 생각하며, 제자의 성장을 반가워하셨던 것은 아닐까? 

  최근 챗GPT(ChatGPT)의 열풍으로 문장형 질문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답변을 하는 인공지능(AI)이 교육 현장을 크게 바꿀 것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을 중시하던 근대 공교육이 교수(敎授: teaching or instruction) 중심이었다면, 이제 교육학은 자기 주도적 질문과 토론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학습(學習: learning)으로 그 중심을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교육 분야에서의 변화는 ‘오래된 미래’라는 형용모순처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엄밀하게는 논박법)을 통해 2500여 년 전에도 이미 제시된 방법이다. 공자도 『논어』의 첫 문장에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학습’을 말씀하셨다. 챗GPT에게 질문하면 그럴 듯한 답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과연 인공지능이 단지 ‘미소’만으로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표현은 당나라 때에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이백(李白)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 푸른 산속에 사느냐고 내게 묻기에,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나는 웃을 뿐 대답은 않지만 마음은 한가롭네,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잎이 떠 흐르는 물 아득히 내려가니, [도화류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여기는 별천지지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한가로운 마음으로 자연 속에서 신선처럼 사는 사람에게, 보통 사람들은 오히려 왜 이런 곳에 사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 현실이다. 서는 위치가 바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바로 관점(觀點)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육을 보는 두 가지 관점도 결국 어떤 위치에 서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맹자는 「등문공(滕文公) 상편」에서 “항산(恒産: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직업)이 있어야 항심(恒心: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하고 바른 마음)이 있다[유항산자유항심(有恒産者有恒心)]”고 하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맹자는 이보다 앞에 나오는 「양혜왕(梁惠王) 상편」에서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선비뿐[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無恒産而有恒心者 唯士爲能)]”이니, “백성들은 항산이 없다면 항심도 없다[약민즉무항산 인무항심(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고 이중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즉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에 교육받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 올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항산(恒産)] 한다고 보았던 것이지만, 적어도 교육을 받은 선비들이라면 당연히 항심(恒心)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교육을 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생업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라면, 교육의 궁극적 도달점은 떳떳하고 바른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공교육 체제는 교육을 통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지향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항산(恒産)의 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이래 20세기까지 근대 교육학은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개인의 성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한 도구적 학문으로 수단화되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두 가지 교육이론은 국가주의(nationalism)와 계발주의(啓發主義: developmentalism)였다. 국가주의 이론은 공교육제도를 통해 산업화과정에서 요구되는 노동력 확보와 국가에 충성하는 애국시민을 양성하고자 의무교육을 전면에 내세웠다. 한편 계몽주의를 통해 귀족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신흥 시민세력가들 중에는 남들과 똑같은 근대 공교육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녀교육을 위한 자신들만의 특권화된 사립학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시작된 고교평준화가 해체되며, 특목고와 자사고 등 학교선택제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도 이러한 교육사적 흐름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영어유치원의 등장과 조기 유학, 기러기 가족의 등장 등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식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교육을 받으면, 사회적 성공을 이룰 것이라는 부모들의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항산(恒産)의 교육으로 교육이 끝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육은 필연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지만, 적어도 교육자라면 각자의 교육을 보는 관점이 항산(恒産)의 수준을 넘어 항심(恒心)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줄임말인 ‘경제(經濟)의 논리’에서는, 교육을 각 직업 분야에서 요구되는 기술이나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데 그 역할을 한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보편적 인간(人間)’ 양성보다 산업사회에 쓸모 있는 ‘유용한 인재(人材)’ 육성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제적 논리에서의 교육을 ‘항산(恒産)의 관점’이라 이름 붙여 보았다. 

  물론 맹자에게 항산의 관점은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논리였을 뿐, 백성을 가르치려는 교육적 논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근대 공교육은 산업화과정에서 요구되는 인재 양성을 위해 ‘항산의 관점’에 주목하였고, 선진국이 되기 위한 국가 지도자들의 욕망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지난 2022년 7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육부는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런 혁신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 발언은 이러한 관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최장수 교육부 장관을 지낸 유은혜 부총리를 비롯하여, 윤석열 정부에 들어와 임명된 박순애 장관이나 이주호 장관 역시 교육전문가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육부를 책임지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육이 항산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항심(恒心)의 관점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마음[심(心)]의 교육이다. 현대 교육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은 채, 물질적 욕망에 치우친 무한경쟁을 감히 교육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맹자는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제시하였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각각에서 우러나오는 이러한 사단(四端)의 마음, 즉 항심의 관점이 교육에서 배제되었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모르며, 남에게 사양할 줄도 모르고, 단지 법규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죄가 없다는 식의 ‘오만한 엘리트’를 진정한 인재라고 믿게 된 것은 아닐까? 인재 이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교육적 관점을, 맹자가 말한 항산과 항심이라는 두 단어를 통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한용진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 필자인 한용진은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이자 한국궁도대학연맹 회장이다. 그는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장, 평생교육원장과 사범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한국교육사학회장, 안암교육학회장, 한국일본교육학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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