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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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변인 출신 국민의힘 전 국회의원에 대한 내용은 민경욱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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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민경우 閔庚宇 | |
출생 | |
본관 | |
현직 |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83 / 중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 84 / 학사) |
소속 정당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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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1965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복기(閔福基)[4]와 어머니 삼척 김씨(三陟 金氏)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으나 입학 후 학생운동을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10년 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이 때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게 주로 하던 일이었는데 다른 운동권과 달리 '제도권에 발을 들이면 기득권이 되는 것'이라며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안기부에 붙잡혀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도합 4년 2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출소 후 참여정부 시절에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수많은 그룹들로 나뉘어서 서로 물어뜯던[5] NL 운동권에서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로 평가되면서 수많은 NL계 조직들이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었다.
NL 계열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합류하던 흐름을 따라서 그도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이미 자주파(NL)가 당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았지만 이때 한미 FTA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NL 운동권 바깥의 인사들을 만나고 주류언론과 학계의 서적과 보고서들을 접하면서 그동안 굳게 신봉하던 주체사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6][7]
20년간 NL 운동에 종사해 온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출판한 <진보의 재구성>에서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연 NLPDR 이념이 현 시대에 맞느냐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서문에서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고 시작하는 이 책은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으며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등 NL 운동권 전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 NLPDR론을 뿌리부터 뒤집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책은 NL 운동 전반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NL 계열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민경우의 <진보의 재구성>에 대해서 NL을 제외한 진보진영 전반의 평가는 '남들은 20년 전에 깨달은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ㅋㅋ'는 조롱이 절반, '문제 제기는 맞는데 결론이 결국은 재벌 찬양이냐'는 비판이 절반 정도였다. 실제로 민경우가 지적한 것들은 이미 90년대에 (NL을 제외한) 운동권 내부에서 다 나온 비판들로 2009년 기준으로 보면 너무 식상해서 한물 간 내용들이며 심지어 NL 내부에서도 1990년대 내내 관악자주파, 새벽 그룹 등 여러 분파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계속 NL 운동에서 이탈해 나갔다. 1998년 출간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1, 2[8]를 보면 민경우가 지적한 운동권의 모든 문제와 폐해와 악습에 대해서 훨씬 더 정교한 논리로 훨씬 더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렇게 남들이 20년 전에 문제를 제기할 때는 "미제에 투항한 배신자" 운운하던 사람이 이제와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척 하니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2008년에 대침체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경제적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현안으로 대두되면서, 진보와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다들 경제 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이야기하면서[9] 재벌 개혁 논의가 급부상하던 시점에 갑자기 삼성, LG를 비롯한 재벌 대기업 찬양으로 책의 후반부를 도배해 놨으니 엇박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술된 논란을 보면 알겠지만, 민경우는 모든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 10년, 20년씩 시대의 흐름에 계속 뒤쳐져 있다.
안철수 열풍이 불자 2012년 <대한민국은 안철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안철수를 지지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영입 제의까지 받았지만 운동가로 살아왔던 30년의 삶을 완전히 접고 2012년부터 서울 금천구와 분당 등에서 수학 학원을 운영하며 '수학 공부의 재구성' 등 여러 수학 교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러다 2019년 조국 사태가 논란이 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대 집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후 주로 자신과 같은 86세대 운동권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상 보수, 우익 성향으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주로 보수 유튜브 계열이나 보수 단체의 미팅 등을 통해 공식적 발언을 이어갔는데, 민경우의 논지를 살펴 보면 2000년대 뉴라이트 계열의 부상과 사상적 흐름이 상당히 일치한다. 이 또한 과거 NL 주사파 출신 강경파들이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대거 극우적 성향으로 변화하며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독특한 현상을, 약 20년 정도 늦게 민경우가 추종한 것이다.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한 2021년 시점에도 수학선생이란 직업을 가지고 겸임하는 것에 가까우며 본인 유튜브 채널도 수학 채널로 운영한다. 최근에는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를 맡고 있으며 시민단체 길, 성제준TV, 시사포커스 등에 출연하고 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에 비상대책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후술할 논란들로 인해 얼마 안 가 사퇴했다. # 자신이 소속된 시민단체 길의 김유진 이사는 서민 단국대 교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빨대포스트를 통해 ‘3년간 올린 유튜브 영상들까지 찾아다니며 꼬투리를 잡아 입에 재갈을 물리면 차라리 비대위원을 안하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이 들었다’라며 사퇴 이유를 밝혔다.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으나 입학 후 학생운동을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10년 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이 때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게 주로 하던 일이었는데 다른 운동권과 달리 '제도권에 발을 들이면 기득권이 되는 것'이라며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안기부에 붙잡혀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도합 4년 2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출소 후 참여정부 시절에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수많은 그룹들로 나뉘어서 서로 물어뜯던[5] NL 운동권에서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로 평가되면서 수많은 NL계 조직들이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었다.
NL 계열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합류하던 흐름을 따라서 그도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이미 자주파(NL)가 당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았지만 이때 한미 FTA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NL 운동권 바깥의 인사들을 만나고 주류언론과 학계의 서적과 보고서들을 접하면서 그동안 굳게 신봉하던 주체사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6][7]
20년간 NL 운동에 종사해 온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출판한 <진보의 재구성>에서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연 NLPDR 이념이 현 시대에 맞느냐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서문에서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고 시작하는 이 책은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으며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등 NL 운동권 전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 NLPDR론을 뿌리부터 뒤집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책은 NL 운동 전반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NL 계열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민경우의 <진보의 재구성>에 대해서 NL을 제외한 진보진영 전반의 평가는 '남들은 20년 전에 깨달은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ㅋㅋ'는 조롱이 절반, '문제 제기는 맞는데 결론이 결국은 재벌 찬양이냐'는 비판이 절반 정도였다. 실제로 민경우가 지적한 것들은 이미 90년대에 (NL을 제외한) 운동권 내부에서 다 나온 비판들로 2009년 기준으로 보면 너무 식상해서 한물 간 내용들이며 심지어 NL 내부에서도 1990년대 내내 관악자주파, 새벽 그룹 등 여러 분파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계속 NL 운동에서 이탈해 나갔다. 1998년 출간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1, 2[8]를 보면 민경우가 지적한 운동권의 모든 문제와 폐해와 악습에 대해서 훨씬 더 정교한 논리로 훨씬 더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렇게 남들이 20년 전에 문제를 제기할 때는 "미제에 투항한 배신자" 운운하던 사람이 이제와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척 하니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2008년에 대침체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경제적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현안으로 대두되면서, 진보와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다들 경제 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이야기하면서[9] 재벌 개혁 논의가 급부상하던 시점에 갑자기 삼성, LG를 비롯한 재벌 대기업 찬양으로 책의 후반부를 도배해 놨으니 엇박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술된 논란을 보면 알겠지만, 민경우는 모든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 10년, 20년씩 시대의 흐름에 계속 뒤쳐져 있다.
안철수 열풍이 불자 2012년 <대한민국은 안철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안철수를 지지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영입 제의까지 받았지만 운동가로 살아왔던 30년의 삶을 완전히 접고 2012년부터 서울 금천구와 분당 등에서 수학 학원을 운영하며 '수학 공부의 재구성' 등 여러 수학 교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러다 2019년 조국 사태가 논란이 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대 집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후 주로 자신과 같은 86세대 운동권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상 보수, 우익 성향으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주로 보수 유튜브 계열이나 보수 단체의 미팅 등을 통해 공식적 발언을 이어갔는데, 민경우의 논지를 살펴 보면 2000년대 뉴라이트 계열의 부상과 사상적 흐름이 상당히 일치한다. 이 또한 과거 NL 주사파 출신 강경파들이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대거 극우적 성향으로 변화하며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독특한 현상을, 약 20년 정도 늦게 민경우가 추종한 것이다.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한 2021년 시점에도 수학선생이란 직업을 가지고 겸임하는 것에 가까우며 본인 유튜브 채널도 수학 채널로 운영한다. 최근에는 시민단체 길 상임대표를 맡고 있으며 시민단체 길, 성제준TV, 시사포커스 등에 출연하고 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회에 비상대책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후술할 논란들로 인해 얼마 안 가 사퇴했다. # 자신이 소속된 시민단체 길의 김유진 이사는 서민 단국대 교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빨대포스트를 통해 ‘3년간 올린 유튜브 영상들까지 찾아다니며 꼬투리를 잡아 입에 재갈을 물리면 차라리 비대위원을 안하는 것만 못하다는 판단이 들었다’라며 사퇴 이유를 밝혔다.
이번엔 '이태원 유족 비하'...민경우, 與 비대위원 사퇴 / YTN |
3.1. “노인네들 빨리 돌아가셔라” 발언 논란[편집]
시작부터 막말 논란…민경우 “노인들 너무 오래 살아” | 뉴스A 라이브 |
2023년 10월 17일 한 토크콘서트에 참석해 세대 간 갈등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인간과 인간은 토론을 통해서는 (협의가) 잘 안 된다”며 “지금 가장 최대의 비극은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빨리 돌아가셔라”라며 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이어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신념이) 깊다”며 “이걸 어떻게 해결할 거냐. 아까 좀 극단적인 표현을 썼지만, 새로운 세대가 올라와서 자연스럽게 선배들을 밀어내야 된다”고 말했다.
비하 발언이 언론들에 의해 기사화되자 과거 발언에 대해 사과하였다.
대한노인회가 "한동훈 위원장은 사과하고, 민경우 소장은 즉각 사퇴하길 바란다"고 밝혔으며 김호일 대한노인회장은 이날 오후 성명서를 내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민경우 소장을 비대위원에 임명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노인 비하' 與 민경우, 이번엔 '식민지배 옹호' 발언 논란 [지금이뉴스] / YTN |
본인이 대표로 있는 대안연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이 밝혀졌다.#
2021년 8월 30일 채널에 올라온 ‘주사파식 민족주의의 끝판왕! 봉오동 전투’라는 영상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해 “우수한 일본 청년들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평가했는데[10] “우리나라의 모든 독립운동 영화에는 일본이 조선인의 민족 해방 투쟁에 감화돼서 도덕적으로 회개한다는 식으로만 묘사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한반도를 경영하려는 거대한 구상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일본 청년들도 있다”고 말했고[11] 영화 ‘봉오동 전투’에 등장하는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 장면에 대해서는 “일본인을 악마로 묘사하고 싶은 것”이라며[12]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말했으며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한 내용을 다루는 영화들은 다 사라지고 반일, 항일을 다룬 영화들만 줄창 살아남았다”며 “일본인들은 완전히 미친놈, 살인마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22년 11월 3일 업로드된 ‘한국의 역사인식’이라는 영상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의 증오 감정이 ‘대표적 여론 조작’이라고 말했으며 "우리 아버지가 1917년생, 어머니가 1931년생이신데 아버지나 어머니는 일제에 대한 나쁜 감정을 거의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며 “1970년대 이전의 어른들은 정치적인 반일감정을 안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3]
경향신문을 포함한 언론들은 대안연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이에 국민의힘 미디어법률단은 민 위원이 과거 유튜브에서 '우수한 일본 청년들이 조선 식민지 개척했다'고 말했다는 한 언론 보도에 대해서 "사실관계가 틀린 오보", "법적 조치 예정"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태원 유족 비하'까지...'與 비대위 사퇴' 민경우, 끝없는 발언 논란 [Y녹취록] / YTN |
[1] 음력 1965년 1월 13일[2] #[3] 장령공파 32세 경(庚) 항렬.[4] 민복기(閔復基) 전 대법원장과는 동명이인이다.[5] NL은 1980년대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수십여개의 분파들이 자기들끼리 개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합집산 끝에 대형화해서 대중들앞에 모습을 드러낸 게 2000년대의 인천연합 - 경기동부연합 - 울산연합의 소위 3대 정파다.[6] 언제나 제도권 정치, 제도권 언론을 외면하고 반합법, 비합법 조직에서 활동하는 NL 운동권은 자기들끼리만 만나면서 자신들의 논리만을 서로 주입하고 계속 강화하는 폐쇄성을 보인다. 사이비 종교가 흔히 보이는 집단사고의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민경우는 이런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가 처음으로 철저하게 숫자로 무장된 주류경제학의 논리를 접하자 대단히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입으로는 늘상 사회변혁을 외치면서도, 실상은 현실을 전혀 모르는 온실 속 화초였던 것이다. 반면에 제도권에서 계속 활동하는 현실 정치세력, 시민사회운동 그룹은 좌우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논쟁하면서 버릴건 버리고 취할건 취하면서 서로를 발전시켜나간다.[7] 한미 FTA 반대운동 당시에도 이미 NL(정파)이 장악한 민주노동당은 구체적 근거도, 연구결과도 없이 그저 미국이랑은 안된다는 수준이라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미FTA 체결에 따른 구체적인 피해예측 연구는 개혁 성향의 주류경제학자들이 전부 했고, 투자자국가제소제 같은 실질 내용에 대한 정교한 비판논리는 NL이 민주노동당에서 내친 PD계(평등파) 운동가들과 시민운동단체가 만들었다. 민경우를 포함한 NL계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한게 없다.[8] 당시 운동권에선 '오습복반'이란 약자로 주로 불렀다.[9] 박근혜가 2012년 대선 때 들고 나왔던 대표적인 아젠다가 바로 경제민주화와 복지제도 정책 관련 담론이었다. 보수정당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마저 경제민주화 담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대선 후에 박근혜의 승리요인 중에 가장 크게 꼽힌 것도 김종인 박사를 영입해서 경제민주화 담론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었다.[10] 히키아게샤를 보면 알겠지만 본국에서도 하층민인 경우가 많다.[11] 임진왜란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에서도 흑역사다.[12] 중요한 사실은 실제로 일본은 봉오동 전투전에 한인들이 독립군을 돕는다고 의심해서 일부러 한국인들을 사살하고 다녔다. 신효승, 석사학위논문 -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66. 오히려 없었다고 하는 게 역사 왜곡이다.[13]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대해 굳이 반박하자면 평화선을 비롯한 이승만 정부의 반일 정책 및 이승만의 반일 성향에 대한 각종 일화와 박정희 정부 초기 6.3 항쟁, 한일협정 반대투쟁 등의 사례가 있다. 1952년 평화선 선포 후 1965년 한일어업협정 체결 전까지 일본 어선이 독도 근처에 가면 무조건 나포, 억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44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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