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y – Memories of a Nation]
1.
독서를 하다 보면 간혹,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좋아서 끝이 나질 않길 바랄 때가 있다. 내게는 미국 남북전쟁사를 다룬 “Battle Cry of Freedom”, 일본전후사를 다룬 “Embracing Defeat (패배를 껴안고)” 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전자의 경우 미국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8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밑줄을 열심히 쳐가며 3번 읽었을 정도로 지금까지 아끼는 책이다.
최근 읽은 “Germany – Memories of a Nation” (한국에서는 “독일사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또한 그런 경우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간되었던 해 (2014)에 사두고서는, 집 서재 한 켠에 얌전하게 모시고만 지내다가, 어느 날 저녁 무심코 집어들고선 일주일도 안되어 끝냈다. 소위 책을 읽지 않고 쌓아 두기만 한다는 일본어 표현 “積読”이 10년이었다면, 速読은 7일이었던 셈이다.
2.
영국 박물관장 출신답게 저자 Neil McGregor는 독일사를 단순히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을 지양하고, 다양한 사물을 통해 독일의 역사, 독일인의 심성을 들여다본다. 가령 그것은 칸트가 사유하고 프러시아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독일 민족의 700년 고도였으나 이차대전 후 러시아 땅이 된 칼린그라드에 남아 있는 맨홀 뚜껑일 수도 있고, 화려한 (그리고 크기가 어마어마한) 중세 맥주잔일 수도 있으며, 16세기 인도에서 리스본으로 보내졌다는 코뿔소를 상상만으로 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물들을 통해 독일인들의 근면함, 창의성, 그리고 낭만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뚜렷한 상관관계도 없이, 미래를 향한 함성과 함께 독일인들은 전쟁 속으로 뛰어들고, 마치 영화 필름이 갑자기 2배속으로 빨라지면서 화면도 같이 일그러지 듯이 경제공황, 바이마르의 종언, 나치즘의 대두, 유대인 학살, 그리고 2차대전과 동서분단으로 이어진다. 책의 후반을 장식하는 사물들을 따라서, 가난, 혐오, 학살, 그리고 폐허 뒤 재건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연속으로 등장한다.
3.
독일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치즘과 유태인 학살을 배경음악으로 두고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 음악소리는 처음에는 작게, 하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밖에 없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소위 “Sonderweg” 즉, 독일 민족의 특수성을 20세기 독일인이 보인 잔혹성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즉, 독일 민족은 극단적인 낭만과 이성의 공간을 오가는 민족이며, 낭만의 감성이 보다 더 극대화했을 때 야만으로 돌변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본질주의적인 해석은 그 자체로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인종청소의 죄과를 온전히 독일인 몫으로 돌릴 뿐,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시사점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독일인들의 경험이 시사하는 것은, 오히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가능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똑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20세기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한다면,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르지 않으며, 가해자의 눈 속에 피해자인 내 눈이 보인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저자는 책 마지막 장을 오늘날 폴란드 땅이 된 이차대전 전 독일영토에서 태어나, 전쟁을 경험하고, 전쟁 중 폭격으로 도시가 전소한 드레스덴에서 자란 Gerard Richter라는 독일 화가가 찍은 딸의 사진으로 장식한다.
사진 속 딸은 카메라를 등지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화가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 속의 그녀는 당장이라도 아빠의 그림에서 얼굴을 돌려 앞을 내다볼 기세이다. 독일 전후 세대는 그녀와 같이 지금은 아버지 세대를 바라보지만, 그리고 때때로 과거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겠지만, 머리를 돌려 미래를 보고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 언제나 기억과 망각 사이 어디쯤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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