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반대하면서도 ‘반미’는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분들께:
탈미 반전 <한국중립화추진 시민연대> 창립을 준비하며
저는 1980-90년대 미국에서 ‘반미주의’를 주제로 정치학석사와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대학가에서 반정부 시위 없이는 하루해가 지지 않던 때, 단 한 번도 데모에 참여해보지 않았습니다. 의식은 전혀 없고 겁만 잔뜩 품었죠. 부푼 꿈을 안고 ‘아름다운 나라’로 유학갔다 잠시 귀국해 한 대학정문에 걸린 “양키 고 홈”이란 구호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이미 준비하던 석사논문 주제를 바꿔 반미주의에 관해 공부한 이유입니다. 그게 재미있어 더 깊이 공부해보려고 박사논문도 썼고요. 미국인과 유럽인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은 흥미로운 주제라며 격려해주는데, 주위 한국인 교수와 학생들은 반미주의 논문 갖고 한국에 돌아가 밥벌어먹을 수 있겠느냐고 걱정해주더군요.
2021년 코로나가 널리 퍼질 때 <한반도평화 경제회의>라는 단체에서 월례 화상강좌를 마련했는데, 저는 “반미 없이 평화 없고, 친북 없이 통일 없다”는 제목의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홍보 포스터가 나가자 국내외에서 적지않은 분들이 은근히 반대했습니다.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 반감이 생기고 주위에 추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지요. 무시하고 그 제목을 고수했는데 꽤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유투브 조회수도 제일 많았고요. 강의를 잘해서가 아니라 자극적 제목 때문에 그랬겠지만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전쟁 없이 못 사는 미국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죠. 미국의 호전적 대외정책을 반대하지 않으면 전쟁에 휘말려 평화를 지킬 수 없잖아요..... 남한정부의 공식 통일방안 1단계는 북한과의 화해협력인데, 반북하면서 어떻게 화해하고 협력하며 통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정부 방침에 따라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하려면 친북하지 않을 수 없지요. 북한이 잘하는 게 있으면 우리도 따라하는 ‘종북’도 하면서요.”
요즘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에서 벗어나 전쟁을 반대하며 중립화로 나아가자는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나라 안팎에서 걱정.반대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반전 평화를 외치거나 진보적 통일운동을 하는 분들까지요.
첫째, 운동가들 가운데도 ‘중립’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중립은 외세들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전쟁 당사국들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지키자는 건데, “반미 자주면 충분하지 미국과 중립이라뇨” 하는 경우입니다. 수십 년 진보운동을 펼쳐온 유명한 분이 ‘중립’에 관해 전혀 모르니 “미국과 중립”이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사용하는 거잖아요.
둘째, ‘반미’ 색채가 너무 강해 ‘좌익’으로 간주돼 대중에 접근하기 어려울 거라고 우려하는 분들 역시 적지 않습니다. ‘탈미 반전’을 내세우지 않고도 주권 확립과 중립화 운동 벌일 수 있을 텐데, 반미 구호를 내려야 대중운동에 도움될 거라고 조언하면서요. 이 운동을 같이 준비하면서도 이런 생각 가진 분들이 더러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제 딴엔 “주한미군 철수”나 “양키 고 홈”이란 말을 좀 더 부드럽게 고쳐 “탈미 반전“을 앞세우자는 데도 이마저 ‘반미’라고 거부당하는 거죠.
물론 저는 같은 편 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보다 다른 편 또는 ‘중도 보수’ 쪽의 한 사람이라도 더 설득해 평화와 통일 쪽으로 끌어오는 것을 더 중요한 운동 목표로 삼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에서 벗어나 전쟁을 반대하자는 말까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비굴과 예속 아닐까요? 한국 사회에서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논의하는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기에 전쟁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조차 참 어렵네요. 그래도 뼛속까지 친미.종미.숭미라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비아냥거림과 경멸을 당하는 한국에서 ‘반미 박사’가 앞장서 ‘탈미 반전’ 내세우며 중립화운동에 힘쓰렵니다. 40여년 전 대학생 때 반미에 기겁하며 데모 한 번 해보지 못한 ‘민주화운동의 죄인’이 그 죄를 조금이나마 씻기 위해 죽을 때까지 평화/통일운동에 몸담겠다는 다짐을 되살리면서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만드는 데 동참해주시기 바라며, 감사와 사랑으로 이재봉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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