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7

신항식 (전 홍익대 교수) 세계사 칼럼을 시작하며... < 오피니언 새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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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칼럼을 시작하며...
신항식 (전 홍익대 교수)
기자명임학근 기자
입력 2019.03.26

▲ 신항식 전 홍익대 교수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1925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신채호의 글이다.

사대주의에 관한 한, 조선 사람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민주공화정이나 대통령제 혹은 내각제, 삼권분립, 시장경제 같은 굵직한 제도도 무작정 들여와 받들면서 살지만 녹색혁명, 산아제한, 그린벨트, 탈규제, 양성평등, 탄소배출 등과 같은 서구의 의제들도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여 그것이 마치 한국 고유의 정책인 양 받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진정, 줄기 찬 사대주의이다.



사대주의는 무엇보다도 한 나라의 주권이나 줏대 혹은 삶의 정당성의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태도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대주의는 매판, 매국노들을 양산한다. 우리는 이완용 같은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조선의 정부와 사회가 근본적으로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런 종류의 매국노가 언제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의 조선이었다. 왕인 고종마저도 외교권을 쉽게 내어 주었고, 그를 포함한 고관대작들이 일본에 붙었다, 러시아에 붙었다, 미국에 붙었다 하는 희대의 행태를 벌이지 않았는가. 작금의 대형교회나 친미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솔직히 매국이면 뭐 어떤가, 나만 좋으면 되지”라고 읽힌다. 하지만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사대주의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다음 같은 큰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사대주의는 나라의 살림살이에 정책적 혼선을 영구히 만들어 놓는다. 즉 국가로 하여금 변동하는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린벨트의 예가 있다. 1950년대 처칠의 사위 샌디스(Duncan Sandys)가 그린벨트 프로젝트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영국식 정원이나 자연 숲 보존정책과는 관계없는 부동산 투기 및 노동력 집중 정책이었다. 벨트 안팎을 기준으로 개발투기를 일으키고 노동자와 중산층의 터전을 갈라놓으며 동시에 세수확보를 위한 벨트조이기와 풀기의 정책인 것이다, 한국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도시조경에 좋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그린벨트를 통해 도시가 조경된 적이 없다. 그린벨트의 주변으로 투기와 부정부패만 남았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가상화폐를 어떻게 판단할지를 몰라 미국의 눈치나 보는 한국정부가 있다. 화폐란 교환의 도구이니 만큼 물품과 함께 유통되는지를 점검하여, 그렇다면 화폐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증권이나 투기로 인정하여 법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기본상식마저 없었다. 그 사이, 조 단위의 한국 돈이 가상화폐 명목으로 해외를 돌아다니고 수백억대의 사기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국민경제를 유린하고 있다.

둘째, 사대주의는 세계 불평등을 고착화 한다. 예를 들어, 산아제한이 그렇다. 먹을 것이 없으니 아이를 낳지 말라는 것은 영국의 유물론이다. 이를 맬더스주의라 하는데, 인간은 식충이며 육체 노동력이라는 편견이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의식은커녕 창의성 있는 노동력이기도 하다는 판단이 거기에 없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사람살이를 가만 놓아두면 먹을 것 많은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이 낮아, 후진국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쉽고 부를 분배하는 효과도 있다. 부의 분배는 경제구조를 조절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지 생명에 칼을 들이대는 정책은 틀린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산아제한 정책이 그래서 성공했는가? 그 결과를 아무도 모르는, 말 그대로 사대주의 정책이었을 뿐이다.

산아제한 정책의 산실인 영국과 미국은 어떤가. 영국은 다른 나라의 산아제한은 찬성했어도 자국의 산아제한을 실제로 한 적이 없다. 1930년대 우생학 논쟁의 한복판에서 쇼우(George Bernard Show)는 “필요 없는 인종을 대량으로 죽이는 데는 가스실이 좋을 것“이라 했다. 증거는 쇼우와 같은 살인마의 말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산아제한을 한다면서 7000명 가까운 흑인, 히스패닉 여성을 강제 불임시술 시켰다. 백인여성은 단 한명도 시술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국과 중국은 인종주의 정책인 산아제한을 무슨 대단한 정책인 양 받아들였다. 효과도 예견도 없이 국민을 못살게 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가족 스스로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이며 한국은 가족계획 이전에 이미 낳아 놓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경제를 이끌고 있다.



셋째, 사대주의는 쓸데없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사업을 하다보면 재해가 발생하여 임금이나 재료비와는 관계가 없는 비용이 나타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사대 정책을 받아들이면 쓸데없는 비용만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가 교육정책이다. 한국은 서구의 지식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비판했던 볼로냐 교육개혁(1999년-2010년)을 내용도 모른 채 무작정 받아들였다. 계획의 내용은 1) 표준화되고 상대화 된 커리큘럼 2) 학위를 통일시켜 노동시장의 평가에 맞도록 조정 3) 대학 간 경쟁을 유도 4) 학자금 융자와 장학금 확대 5) 자유전공과 연수 및 학점교환 실시로 요약된다. 이 계획에 대한 비판은 1) 창의성 없는 우민화 정책 2) 일률적인 노동력의 세계화 3) 국가와 기관의 재정적자 4) 가계부채 확대 5) 학문의 놀이화와 상업화로 고스란히 요약된다. 한국의 교육계는 이런 비판의 어느 한 항목이라도 독자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항목 모두 사회적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

사대주의가 끼치는 실용적인 폐해의 네 번째 것이라면 앞선 세 가지 폐해를 모두 합친 것이다. 사대주의는 무엇이 옳고 그른 지에 관한 생각의 토대를 없애 버린다. 사람 사는 일이 똑같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고 삶도 다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서구의 관점은 한국과 다르며 그 내용들(제도와 문화) 또한 한국의 풍토, 기질, 문화와 전통, 삶의 이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지난 400년간 세계사의 주인이었던 앵글로색슨과 유럽과 달리 세계의 주변만 맴돌았던 한국이 세계에 대한 관점과 삶의 토대를 서구와 함께 공유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 이슬람과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마저도 그런 망상을 갖지는 않는데, 이상하게도 한국만이 이런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하니 사상마저도 유행에 따라 한 때 좋아했다가 싫어하고 싫어했다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정신적 외로움과 주저함이 한국인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이래가지고서는 인생을 살 수가 없다. 눈앞의 이익만 취하고 도망쳐도 다시 회한에 빠지는 영혼 없는 삶만이 남는다. 생각이 없어서 핑계도 없는 인생. 핑계 없는 무덤. 이것이 사대주의가 끼치는 삶의 안타까움이다.

사대주의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무지 때문에 생긴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멀리 있어서 신비롭고, 잘 모르니까 따르고 싶어 하는 사춘기 아이들과 같은 심리가 사대주의다. 무지가 문제라면 알면 되는 것이다. 뭘 모르면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고집이라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 해도 당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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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글로벌 경영과 신토불이
 기자명신항식 전 홍익대교수   입력 2020.03.05 17: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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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컨슈머= 신항식] 오늘날의 초국적 기업은 산업유형이나 사업부문을 구분하지 않는다. 산업 각 분야의 기술개발, 노동관리, 마케팅, 브랜드 경영, 리스크 관리도 서로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융합한다. 이를 글로벌 경영(Total world planning; 경제, 사회, 정치, 군사)이라 한다. 산업이 융합하면 세계화가 되는 것이고 세계화는 산업을 융합한다.

예를 들면, 알루미늄 가공업체가 통조림 업체를 인수하거나 협업하고 통조림 업체가 식료품 업체를 인수하고 식료품 업체가 식약청과 협업하며 식약청이 정부와 협업하며 정부가 제약업체와 손을 잡고, 제약업체가 의료기기업체를 인수하고, 의료기기업체가 병원을 소유하고 병원이 대학을 소유하며 대학이 알루미늄 가공업체의 지원을 받는다. 이와같이 모든 산업과 사업이 수익창출과 리스크관리라는 동일한 운명에 의해 융합된다. 알루미늄 공법에 사용되는 불소 처리를 위해 이들은 살충제 회사와 만난다. 살충제 회사는 화학연구소를 소유하며 화학연구소는 독성물질을 개발하므로 당연히 화학무기를 생산하는 군산기업과도 만나게 된다. 알루미늄 생산량이 많아지니, 불소의 보편화를 위해 대학과 연구소를 이용하고 치약회사와 연결되고 국가의 보건당국과 협약하여 혹시나 수돗물에 불소를 넣으면 위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실험도 해 본다. 이를 위해 국제기구인 WHO까지 로비를 한다. 생수회사를 부각시켜 알루미늄 기업이 생수회사를 인수하기도 한다.

이처럼 글로벌 경영이란 이전에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산업과 산업의 각 분야들이 서로 관계를 깊게 가진 이후 탄생한 세계 산업의 경영법이다. 당연히 투자 할 분야가 크게 확대되어 기업, 국가, 국제기구 간 조율이 상시 그리고 더욱 긴요해진다. 글로벌 경영은 국제기구와 국가가 해 왔던 일과 무수하게 교차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와 충돌하고 협상하고 협잡하는 와중에 정경유착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의 기업종속 또한 벌어진다. 정치와 정치인은 사라져도 경제와 경제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은 노후를 위해 기업에 충성을 다한다.

글로벌 경영이 문화를 건드리지 않을 리 없다. 서구의 몇 안 되는 지성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는 1968년 이후 밀어 닥친 학생운동과 자유운동은 기업의 생산력 증진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청년들의 자발적인 사회운동이 기업의 선택이었다는 말이 놀라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모택동의 문화운동과 똑같이, 소수 기업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청년들이 그것도 모르고 자발적으로 운동에 뛰어든 것뿐이다. 사람들이 기업 밑에서 일을 해서 그렇지 글로벌 기업의 힘은 웬만한 고위직원들의 생각보다 거대하고 다르다. 여성 흡연율을 높이고자 했던 1929년 자유의 횃불운동은 광고회사가 만들어 낸 것이다. 1940년에 이미 헐리우드를 장악하여 무기, 담배, 자동차, 통조림, 음료품을 간접광고 했고 더 나아가 유럽 시장, 베트남 특수, 이라크 특수를 홍보하는 미국 비즈니스간 협약(Coordinator of Inter-American Affairs, CIAA)을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금연운동은 세계를 장악해 가던 중국정부의 담배산업에 대항하여, 담배주식을 처분한 투자금융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담배회사 대신 제약회사에 자금을 투자하고 WHO를 움직여 금연운동을 법제화했으며 전자담배 및 금연패치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미국,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의 제약 및 의료, 식품의 글로벌 기업들은 IT산업으로 묶인 유전자변형과 줄기세포, 장기이식, 인공장기, 정자은행, 인공임신과 출산산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동시에 개체의 생물학적 구분을 지우려는 특정 여성단체들을 지지하고 있다. 여러 동물의 바이러스를 하이브리드로 융합하는 신종 바이러스 연구에도 매진 중이다. 그러하니 개체의 경계를 없애고 융합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를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블록버스터, 뮤턴트, 하이브리드 문화의 천지인 헐리우드가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기업이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을 지지하겠다는데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왜 숨기면서 지원을 하느냐가 문제다. 행여 잘못 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현재 코로나19 때문에 난리다. 유전자변형 바이러스다. 그럴 줄 알았다. 개체의 경계선을 없애는 유전자변형 혹은 돌연변이 혹은 하이브리드 문화가 그토록 전 세계를 휩쓸고 소비자들을 유혹하더니 결국 이런 결과를 내려고 그랬던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만들어져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할 것인가. 이제 사회적 거리라 해서 필자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공간기호학의 논리가 사회에 먹히게 될 것이다. 가족, 친구, 직장의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보통 2-3m의 거리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거리다. 사회는 이렇게 분열해 간다. 2-3m 거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거리는 인공지능의 모든 제품이 취하는 거리이며, 인공임신의 거리이며, 드론의 거리이며, IT의 거리이며, 하이패스와 전자결제의 거리이다. 이제 현금은 사라지고 2m 정도의 거리에서 카드의 바코드를 발사하는 디지털 화페의 시절이 올 것이다. 보다 무서운 것은 개인의 경제와 삶, 하물며 기질, 성향까지 데이터화 하여 인공지능으로 시민을 통제하는 사회가 올 것이라는 점이다.

평생을 살면서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거나, 그 고통이 신체의 병으로 나타나 평생 아프다든가 혹은 인간관계에 해를 끼쳤다든가, 평소에 성질이 더럽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되먹은 것이 이래서 어쩔 수 없다거나, 삶에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는 불만 불안한 삶을 살았다고 울면서 호소하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대가 50살 초 중반이라 한다. 미국 심리학회의 의견에 따르면, 내 몸과 마음에 무슨 상처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나이대란다. 그리고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뿌리를 찾아 기억과 화해하여 새로운 마음과 몸으로 살아가기도 한단다. 우리는 글로벌 경영, 포스트모던 시대를 지난 50년 동안(1970-2020) 경험했다. 현재 경제사회적인 삶에 문제가 있다면 지난 50년 동안의 양극화, GMO, 하이브리드에 영향 받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소큼 줄여 보자. 부질없는 욕망을 줄이고, 신체의 신토불이 정체성을 찾고, 신토불이 먹거리를 찾아보자.




신항식 칼럼니스트는 1964년 서울 생.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화폐의 거짓말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파리대학에서 언어학 및 기호학 석사, 서양근현대 문명사 박사과정(DEA), 제 3세계학 박사과정(DEA) 학위를 동시에 취득했다.

 최종박사논문기획안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비판적 검토’가 
프랑스 대학당국의 검열을 받아 수학을 접었다. 

영어-프랑스어-한국어 통역사로 활동하면서 유럽 사회와 교류했다. 
한국외국어대학 통번역대학원 책임연구원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교수로 재직했으며,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 한국 십여 대학에서 기호학 전공 초빙 교수, 
한국 광고기호학회장,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7년 디지털금융연구로 내외경제 신문 주최 한국혁신인물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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