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9

川口大三郎事件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 -革マル派에 의한 린치 살인 Wikipedia 일어한역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 - Wikipedia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  川口大三郎事件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
날짜1972년 ( 쇼와 47년) 11월 8일
개요가죽 말파 일반 학생을 핵심파 심파로 오인하고 살해革マル派が一般学生を中核派シンパと誤認して殺害
공격 수단피해자를 납치하고 린치를 추가하여 살해
죽은 사람1
피해자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의 남학생・가와구치 오사부로
범인혁명적 운동가
사과없음
보상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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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 (카와구치다이 사부로 우지켄)이란, 1972년 ( 쇼와 47년) 11월 8일 에 도쿄도 의 와세다 대학 구내에서 발생한 革マル派에 의한 와세다 대학 제1 문학부 의 남학생에의 린치 살인 시체 유기 사건이다 [1] . 와세다 대학 구내 린치 살인 사건 모두 [2] .

사건 개요 편집 ]

1972년 ( 쇼와 47년) 11월 9일 이른 아침,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 전에 파자마 차림의 젊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전신 타격되어 아자 투성이로 골절 된 팔에서 뼈가 나왔다 [1] . 피해자는 당시,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의 학생인 카와구치 오사부로 (당시 20세)로, 그 후, 革マル派에 의한 린치 살인 이라고 판명되었다 [1] .

전날의 11월 8일 2시경에 가죽 말파 활동가가 가와구치를 핵심파의 심파로 간주해, 가와구치를 와세다 대학 문학부 캠퍼스의 학생 자치 회실에 납치해, 약 8시간에 걸친 린치를 더해 살해, 그 후, 가와구치의 시신을 동대구 내· 동대부속병원 앞에 유기한 것이다. 사망한 카와구치의 사인은, 「통나무나 각재로 엄청 강타되어, 몸 전체가 세포 파괴를 일으켜 쇼크 죽음」한 것으로, 「몸의 타박상의 흔적은 40개소를 넘어, 특히 등과 양팔 는 두꺼운 피하 출혈을 하고 있었다. 것이었다 [3] .

피해자의 카와구치 오사부로는, 1952년 (쇼와 27년) 시즈오카 현 이토시 출생. 삼인형 누나의 차남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사하고 이후 어머니에게 자랐다. 가와구치는 이토 시립 동초등학교, 동남 중학교 , 시즈오카 현립 이토 고등학교 를 졸업. 그리고 1971년 (쇼와 46년) 4월에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에 입학한다. 가와구치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학생 운동이나 부락 해방 운동 등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와세다의 제1 문학부 자치회 집행부를 잡는 「革マル派」에 실망해, 1972년(쇼와 47년) 무렵, 「중핵 「파」에 다가가 동파의 집회 등에 참가하게 되지만, 곧 핵심파에도 실망해, 그 감상을 급우나 어머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또, 와세다 학생 신문(카츠코 연합 계 학내 신문, 현재는 폐간) 등 우파 계 학생 단체나 와세다 정신 혼양회와도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핵심파는 「전학연 전사 ·카와구치 다이사부로 동지」등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핵심파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수사와 재판 편집 ]

이 사건으로, 1972년(쇼와 47년) 12월 11일, 우선 革マル派의 멤버 2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4] . 그 후, 1973년(쇼와 48년) 10월 21일, 22일, 가죽 말파 의 활동가 5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5] [6] . 체포된 멤버 중 5명이 기소되고(1명은 분리공판) [7] , 1976년(쇼와 51년) 3월 18일, 통일 공판의 피고 4명 전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렸다 [8] .

사건 후 편집 ]

革マル派의 성명과 그것에 대한 규탄 편집 ]

가와구치의 시신이 다음날 발견된 후, 革マル派는 가와구치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범행 성명을 발표했다. 이 革マル派의 성명에 많은 학생들은 귀를 의심하고 革マル派에 대해 반발, 분노, 비판의 목소리를 올렸다. 그리고 와세다대학에서는 전학적인 革マル派 및 革マル派와 유착하는 와세다대학 당국에 비판이 강해져 革マル派는 따라잡게 되었다. 革マル派 전학연 위원장의 바바 소명 은 책임을 지고 전학련 위원장을 사임하고 “철저히 자기 비판하고 깊이 반성한다”는 성명을 내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분노는 맞지 않고, 수백명에서 수천명 규모의 革マル派 규탄·항의 집회가 연일 계속되어, 1972년(쇼와 47년) 11월 28일, 제1 문학부 학생 대회를 시작으로 이공 학부 를 제외한 각 학부에서 학생대회가 열리고, 革マル派 자치회 집행부가 리콜 되어, 자치회 재건을 목표로 하는 임시 집행부가 선출되었다. 또 일문, 교육, 정경, 사회과학의 각 학부에서도 정식집행부가 선출되었다. 좌익내 게바 희생자는 많지만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학살 사건의 규탄에 널리 일어선 것은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이 유일하다.

임시 집행부의 혼미 편집 ]

하지만 새롭게 선출된 임시집행부는 다양한 학생들의 모임이며 성립과 동시에 내부 의견대립이 일어났다. 의견 대립은 1973년 입학식에 대한 대응(검정 헬멧을 쓰고 난입·회장 점거할지, 조용한 시위를 할 것인가) 등으로 표면화했다.

1973년(쇼와 48년) 5월, 革マル派 학생은 와세다 대학 총장의 무라이 자장 에 대한 대중단교를 행했지만, 이것은 일부의 학생이 수업중인 무라이 총장의 교실에 난입해 무라이 자장 총장을 납치한 것이었다. 무라이 자장 총장은 한 번 더 광범위한 학생과의 총장단교를 약속했지만 곧 혼란을 이유로 약속을 파기했다( 제3차 조대투쟁 ). 무라이 자장 총장은 그 후, 조대 원리 연구회 의 추천으로 「가와구치 기념 세미나 하우스」건설에 자신의 별장을 제공해, 1976년(쇼와 51년)에 준공했지만, 거기가 통일 교회 의 수련장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주간지에 고발, 통일 교회로부터 명예 기손으로 호소되어 십수년에 걸쳐 계쟁했다.

와세다대학의 타협 편집 ]

결국, 와세다대학은革マル派를 온존하는 자세를 나타내, 각 학부 재건 자치회를 공인하지 않고, 革マル派가 주도권을 잡는 사회 과학부, 상학부 자치회 집행부에의 자치 회비의 교부, 革マル派 실행 위원회에 의한 ‘ 와세다 축제 ’ 개최(이 학원 축제의 팜플렛 매출 등이 가죽 말파의 수입이 된다)을 용인했다. 이에 따라 革マル派의 K, 기동대 의 K, 당국의 T의 'KKT'라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이때 와세다대학의 이 자세 배경에는 革マル派 가 조오이치에서 쇠퇴하면 신좌익 각파 와 민청이 학내에서 뛰어오르고 대학내가 보다 혼란한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1973년(쇼와 48년) 4월 이후, 반공으로 돌아간 가죽 말파 의 테러 앞에, 각 학부의 재건 자치회는 형해화·자연 소멸해 갔다. 학살규탄·자치회 재건운동은 1973년(쇼와 48년) 11월 8일의 학살 일주년 집회가 분열된 것으로 사실상 수렴했다. 와세다대학 전학행동위원회 등은 아직 싸우는 자세를 보여 도서관 점거를 했지만, 와세다대학과 기동대에 지켜진 가죽 마루 지배를 깨지 못하고, 와세다대학과 가죽 말파의 유착, 미즈키 관계 오랫동안 계속했다.

와세다 대학과 革マル派의 관계의 종말 편집 ]

그러나, 1994년 ( 헤세이 6년), 와세다 대학 총장에 오쿠시마 타카야스가 취임하자 와세다 대학 과 革マル派의 관계는 크게 바뀌었다.

1996년 (헤세이 8년), 와세다대학의 학원제 “와세다 축제”에서 부정한 자금 유용의 의심이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문제로 와세다 대학과 가죽 마루파는 와세다 축제의 개최를 둘러싸고 대립해, 대학에 불신·반감을 가진 가죽 마루파는 1997년 (헤세이 9년), 와세다 대학의 관계자의 자택에 도청기를 걸어 와세다 대학 측의 움직임을 찾았다. 그리고 가죽 말파 관계자가 경찰에 체포됐다. ( 와세다 대학 학생부 장택 도청 사건 )

이 사건을 계기로 와세다 대학 은 가죽 마루파에 대해 엄격한 자세로 임해, 와세다 축제의 중지를 결정, 와세다 축제 실행 위원회를 활동 금지 처분, 와세다 대학 신문회를 서클 공인 취소하고, 그리고 가죽 마루파의 관계자를 대학 내에서 차례로 배제해 갔다. 가죽 말파를 배제한 뒤 신좌익 등 단체가 다시 와세다대학으로 부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학생운동이 하화가 되어 오랫동안 쪽이 훨씬 더 문제시되게 되어 있었다), 그 운동의 의미조차 모르는 많은 학생이 학생 운동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와세다대학은 학내에서 가죽 말파 의 추방에 성공했다.

그 외 섹트의 반응 편집 ]

요즘 가죽 마루파와 다른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핵심파와 사 청동 해방파 등 다른 섹트 와의 내게바 는 서로의 조직괴멸을 목적으로 한 처참한 '살인'으로 에스컬레이션해 나간다. 피로 피를 씻는 이들 내게바는 학생운동 을 약화시켜 대중이 신좌익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가와구치군 학살 규탄운동은 섹트(당파)의 폭력 반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섹트의 폭력, 내게바를 한층 격화하게 되었다.

핵심파 편집 ]

핵심파는 ' 전학연 전사 가와구치 다이사부로 동지' 등으로 말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자세였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실제로는 핵심파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1975년 (쇼와 50년) 3월 14일 가죽 말파가 핵심파의 최고 간부· 혼다 연가 를 살해했다(「중핵파서 기장내 게바 살인 사건」).

사청 동해방파 편집 ]

가죽 말파는 그것에 반발하고,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을 다룬 문예 작품 편집 ]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신시오샤 2002년) 다카마쓰 의 사설 도서관장의 사에키 씨는 20세 때 도쿄 대학에서 연인을 죽이고 있지만, 그 죽는 방법은 카와구치 오사부로 사건을 밝혀 모델 하고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건 당시 아직 조대 첫문학부에 재적중이었다)
  • 코아라시 구하치로 『봉기에 이르지 않고 신좌익 사인 열전』( 고단샤 2003년) 「제12장 얽힌 한 명의 심파의 무덤」은 가와구치 오사부로군을 다룬다.
  • 코모카미 나오시 '헬멧을 쓴 너를 만나고 싶다'( 슈에이샤 2006년) 작가가 심야 TV에서 본 1969년의 헬멧 모습의 시원한 미소녀를 찾지만, 그 소녀는 3년 후에 가와구치 오사부로 사건의 범인 의 혼자가 된다.
  • 마츠이 이마사코 『사부의 유언』( NHK 출판 2014년) 「9 정치의 계절의 종말」에, 저자가 참가한 카와구치 군학살 규탄 운동의 기술이 있다.
  • 키리노 나츠오 「안는 여자」(신쵸샤 2015년) 「제3장 1972년 11월」에, 주인공 미우라 나오코의 형으로 조대혁 마루파 간부 활동가의 와키가 조대로 사건을 일으킨 혐의로, 형사가 나오코의 집을 찾아 부모님에게 사건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지만, 사건 내용은 기본적으로 카와구치 오사부로 사건이다.
  • 쿠리모토 가오루「보쿠라의 사정」( 쇼가쿠칸『구리모토 가오루·나카지마 아즈사 걸작 전자 전집』 제3권 2018년 2월 9일 수록) 1978년에 쓰여져 미완·미간행이었던 작품. 『보쿠라의 시대』속편으로 구상되어 작중에 카와구치군 사건을 본뜬 이시카와군 사건이 등장한다.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출처 편집 ]

  1. ↑ c 다카기 마사유키 1988 , pp. 133–134.
  2. 히타다 히로시그는 와세다에서 죽었다 대학 구내 린치 살인 사건의 영원 」 왜 일어났습니까 ? "2021/11/05, 분춘 온라인
  3. ↑ 『아사히 신문 조간』, 1972년 11월 10일.
  4. ^ 타치바나 타카시 「중핵 VS가죽 마루(아래)」(고단샤 문고) 30페이지
  5. ↑ 『요미우리 신문』, 1973년 10월 22일.
  6. ↑ 『요미우리 신문』, 1973년 10월 23일.
  7. ↑ 『요미우리 신문 석간』, 1974년 7월 31일.
  8. ↑ 『요미우리 신문』, 1976년 3월 19일.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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