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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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가 강력 추천하여 김상준 저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주문했는데, 열흘이 되도록 책이 안온다.
(처음으로 온라인 주문에 성공했는데)
어제 전화했더니 자기들한테 책이 없어서 출판사에 주문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절판되었으면 주문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꼭 보고 싶은데.
그 동안 아들 통해서 책을 구입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이 11일만에 드디어 왔다.
박 석 교수의 추천도 있었지만, 평소 문명에 대한 그의 거대 담론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김상준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다.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가 '중층 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을 주제로 쓴 책이라 더욱 기대가 된다.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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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읽기 시작했다.
제1부 제1장 중층 근대성: 근대성 이론의 혁신을 읽었다.
몇 문장을 발췌 소개한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면서 읽으면 된다.
“근대성이란 인류문명의 합작품이었지 특정 문명이나 지역의 특산물, 독점재(獨占財)가 아니었다. 근대성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대성의 발생과 전개라는 문제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요소의 발아 및 발전으로 축소될 수 없다.
반(反) 자본주의적 지향이든 자본주의 찬미론자든 ‘근대성=자본주의’등식은 성급하고 역사적 시야가 짧은 것이다. 반자본주의적 탈근대론이든, 친자본주의적 역사종언론이든 자본(시장)중심의 상품교환양식의 역사적 존재방식과 운명에 대해 우상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고 있다.
인류 역사가 크게 변화했던 굴곡점의 시발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성속(聖俗)의 통섭 전도라는 계기였다. 자본주의 역사는 근대성 역사 내부의 소(小)역사일 뿐이다.“
“‘통섭Ⅰ’의 시기에 경화(硬化)된 성(聖)의 지배가 저항의 대상이 되었듯,
‘통섭Ⅱ’의 시기에는 굳어가는 속(俗)의 지배가 이의 제기와 저항의 대상이 된다”
“ ‘통섭Ⅱ’의 시기가 ‘역사의 종말’일 수없다. 미래의 인류는 그 너머를 여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돌파를 반드시 거듭 이루어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다만 앞 선 역사가 그랬듯 여기서도 현존질서의 인과(因果)를 넘어서는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 차원의 스파크, 윤리적 계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다. 그러한 ‘근본적인 돌파’ 이후의 인류는 새로운 인류일 것이다”
*이 장(章)을 읽으면서 저자가 그리는 거대담론의 모습과 그 지향점을 짐작케 한다.
인류의 미래와 문명의 전환(저자는 이 장(章)에서 ‘돌파’라는 말을 사용한다)에 대해 크게 보면 내가 바라보는 지점과 비슷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이론과 사상의 전개가 더욱 궁금해진다.
거대담론은 정치경제적 현실과 만나면서 비로소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기후변화를 비롯한 위기의 징후들이 문명 자체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의 담론이 새로운 정치나 경제 질서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영감(靈感)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Namgok Lee
요즘 보고 있는 책이 김상준 저 ‘맹자의 땀, 성왕의 피’다.
김 교수는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구분하는 기준을 성속(聖俗)의 통섭 관계의 변화로 본다.
(전에 내가 페북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요즘 보고 있는 책이 김상준 저 ‘맹자의 땀, 성왕의 피’다.
김 교수는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를 구분하는 기준을 성속(聖俗)의 통섭 관계의 변화로 본다.
(전에 내가 페북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아시아 사회가 변화 발전 없이 정체(停滯)에 있었다는 편견은 충분히 기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아시아 정체(停滯)론의 뿌리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따른 사회단계론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씨족적 사회구성체를 바로 이은 단계로 규정하고 있는데 기인한다고 보고, 가라타니 고진을 소개하면서 그가 사회구성체를 단계론에서 유형론으로 전환하는 적극적 의미를 긍정하면서도 즉 마르크스 사회구성체론에 일보 전진을 이루어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기계적 단계론이나 서구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함으로써 중도반단(中道半斷)의 상태에 머문 것을 비판하고 있다.
김 교수가 가라타니 고진을 넘어서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지 여부는 학계의 엄격한 검증을 거쳐야하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이론적인 시도가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김 교수의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김 교수의 말처럼 모든 역사 인식과 역사 기술은 현재를 좀 더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361페이지)
한발 더 나아가면 결국은 누가 어떤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가와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연이지만 내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다.
무려 200회 짜리 대하드라마다.
매일 2회씩 100일을 보아야 한다.
틈틈이 빠지기도 하지만 지금 궁예로부터 왕건으로 권력이 이행하는 과정을 보고 있다.(오늘 114회째인가를 볼 예정)
내가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권력투쟁의 본질이 현재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北)은 거의 왕조 드라마와 같은 수준이고, 남(南)을 비롯한 이른바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조차 그 잔혹성은 많이 사라졌지만 권력 투쟁의 본질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시대 구분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면, 정치가 이런 권력투쟁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루어질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들도 이 권력투쟁의 벽(壁)을 넘지 못한다면 같은 시대의 그물 안에 갇히는 것이다.
이제 그 벽(壁)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아마도 그 문명 이전과 이후로 시대가 구분되지 않을까?
무엇이라고 불리울지는 모르겠지만.
단절적 변화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 치열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류의 존속 자체가 위협 받는 위기와 함께.
김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태조 왕건’이라는 대하 드라마를 동시에 보는 이 우연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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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 벽해, 桑田碧海
/-벼캐/
명사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의 비유. 벽해상전.
창상(滄桑). 창상지변(滄桑之變). 상전창해. [준말] 상벽·상해(桑海).
"∼라더니 몰라보게 달라진 고향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Namgok Lee
김상준 교수의 책,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보면서 김 교수가 그 안목이나 논리 전개에서 천재적이라는 감탄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가 비판한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가지는 정파성과 마찬가지로 김 교수 자신이 어떤 정파성을 가지고 단순화하고 있지는 않은지는 학계의 엄중한 검증 대상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를 현대의 ‘중간경제(middle economy)’와 연결시키는 논리를 발췌 소개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를 현대의 ‘중간경제(middle economy)’와 연결시키는 논리를 발췌 소개한다.
“중간 경제란 ‘국가경제와 (기업중심의) 시장경제 사이에 존재하면서 한편으로 양 경제를 보완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경제다.
중간 경제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에 친화적인 경제로서, 국가경제 시장경제와 같은 거대 경제가 고에너지 소비-노동절감적 거대 기술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친환경적 저에너지소비-고용유발적 중간기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다‘
중간경제의 이러한 특징은 앞서 정리한 ‘동아시아 유교경제’의 특징과 상당히 중첩된다.
중간경제의 근본은 정직한 소생산자의 경제다.
(중략)
발달한 소생산자의 압도적 다수는 도시에 거주한다. ‘현대소농사회’의 주요 거점은 압도적으로 도시다.
(중략)
주업이든 겸업이든 프리랜서는 모두 소생산자다.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 창조성을 생활근거로 하는 전문직 역시 소생산자다. 시민사회나 정치사회의 헌신적인 활동가들도 소생산자다.
(중략)
소농의 회귀는 발전한 자본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의외의 현상이다.
이들 ‘돌아온 소농’은 과거의 소농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많다.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도시 공동체운동, 다양한 비영리 자발조직의 출현, 대안화폐 실험, 각종 생협활동,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 귀농을 통한 마을만들기 등의 움직임도 이들 ‘돌아온 소농’과 깊이 밀착되어 있다.
이 속에서 작더라도 자신이 누구에겐가 줄 수 있는 도움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고 잇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농’이란 비유다. 그 압도적 다수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 평범한 소생산자층의 미래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소농체제 성공의 비결은 소농의 항산(恒産)을 보장해 주엇다는 점에 있다.
동아시아소농체제 성공의 비결은 소농의 항산(恒産)을 보장해 주엇다는 점에 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이 ‘소농항산(小農恒産)의 의미가 오히려 크게 새로워지는 바가 있다.
(중략)
‘현대의 소농사회’가 주는 시사점은 비단 경제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소생산자들간의 자유로운 연대 활동이 민주주의의 진화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의 활동성은 시민운동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영역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사회를 환골탈태시킬 키플레이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강조해 온 ‘질적 민주주의’의 발전은 이들 세력의 정치적 상상력 및 활동성과 큰 연관을 가지고 있다.
(중략)
삶의 질의 제고를 위한 창조성이 격려받고 보상 받는 새로운 생산의 길, 나눔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데, 과거 장구한 역사를 통해 그 지속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했던 ‘동아시아 소농체제’의 경험은 충분히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중략)
삶의 질의 제고를 위한 창조성이 격려받고 보상 받는 새로운 생산의 길, 나눔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데, 과거 장구한 역사를 통해 그 지속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했던 ‘동아시아 소농체제’의 경험은 충분히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 이 정도 글을 옮기는 것은 나와 같은 독수리 타법으로는 꽤 힘든 노동이다. 그러나 내가 기꺼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김 교수의 견해나 논리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격이 높아진 토론의 주제로 다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제로 찬반을 떠나 이런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영감(靈感)을 제시하기에 충분한 저서라고 생각해서 일독(一讀)을 강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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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상• 이념• 체제•과학이론•문명 등의 창조성(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과의 단절(斷絶)을 강조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반(反)과학적이다. 실제로는 전통의 저수지에서 새로움이 싹트고, 전통의 어깨를 딛고 창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500년 전에 공자는 이를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표현했다.
대단히 보수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런 바탕에서 공자는 ‘헌 부대에 새 술을 담는’ 방식으로 사상적 창조의 세계를 열었다.
단절(斷絶)을 강조하는 것은 혁명적 열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과 맞지 않는 관념적 단절은 사회운동의 경우 실패로 귀결되기 싑다.
20세기의 세계적 실험이었던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 생생한 경험이다.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독서가 거의 종착점에 왔다.
나는 요즘 독서 습관은 빠르게 천천히 보는 것이다.
속독이지만, 읽는 시간은 1시간을 넘기지 않는다.(체력, 시력, 집중력 때문)
그래서 먼저 읽은 내용을 잊어버려 가면서 읽는다. 틈틈이 독후감을 써서 벗들과 공유하지만, 더 크게는 나 자신의 독서 습관(속독)을 보완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章)이 ‘동학(東學)-대중 유교와 인민주권’이다.
책의 편제로 봐서 이 장(章)을 통해 저자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담길 것 같다.
동학을 끝머리에 둠으로서 동학의 창조성이나 역사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느껴진다.
그는 동학을 이렇게 말한다.
“ ‘유교를 벗어난 입장에서’ 유교를 자유자재로 변용했다기보다는, 거꾸로 유교적 맥락에서 무(巫) 도(道) 불(佛) 그리고 서학(西學)의 자원을 자유자재로 변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교의 대중화 현상은 ‘유학을 벗어난 입장’에서 외삽(外揷)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유학•유교정치•유교 사회의 내적 전개의 필연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 이렇게 보아야만, ‘요순치세’나 ‘국태민안’ ‘보국안민’과 같은 , 유교로부터 빌려온 것이 분명한 동학운동의 목표 역시, 유교적 문화 자원에 깊이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의존을 통하여 ‘사회체제적 한계를 돌파’(신분질서를 극복)하는 계기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역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동학(東學)에 대해서 연구를 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요즘 문명전환 운동을 하는 분들과의 교류가 나에게 동학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 동인이 되고 있다.
아마도 김 상준 교수와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본다.
동학의 기원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우리 공동체의 뛰어난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동학이 위기에 처한 인류적 상황과 국내외적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관심이 더 크다.
아마도 한 번 더 독후감을 쓰는 것으로 이 책의 독서는 일단 마칠 것 같다.
동학이 우리 공동체에 남긴 귀중한 유산과 교훈을 지금 여기에서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모색하는 작은 공간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기후 변화나 팬데믹 등이 인류라는 종(種)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강도를 심화시키고 있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신(新) 냉전(冷戰)으로 불릴만한 대결이 심각한 안보 위기를 낳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에서는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특히 근래 두 차례의 정권교체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이동하는 듯한 교체가 신 냉전 질서와 맞물려 대단히 복잡한 정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에서는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특히 근래 두 차례의 정권교체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이동하는 듯한 교체가 신 냉전 질서와 맞물려 대단히 복잡한 정세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한국의 변화된 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적인 편가름으로 사라져야할 과거를 다시 불러내는 듯한 상태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정치사상적 혼돈을 벗어나 한국이 동아시아와 세계문명을 선도하는 나라로 우뚝 섰을 때, 지금의 정치에 대해 긍정적 측면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차도절환(借刀切患; 남의 칼을 빌려서 자신의 환부를 수술한다)’의 시기였다고 평가하게 되기를 바란다.
김 상준의 이 책은 밝은 미래를 독창적이고 담대한 시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인용한 참고문헌을 소개한 것만 33페이지에 이를 만큼 학자로서의 최선을 다한 역작이다.
김 교수의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넘어서 일독을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김 교수와 전체적인 총론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름이 있다.
나는 이 다름을 어떤 류의 확증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점에서는 필요한 다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김 교수와 직접 나눈 바가 있다)
에필로그 맨 끝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친다.
“이제 한국이 세계 제2위의 부국이 되리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2009년 골드만 삭스가 그린 2050년 통일 한국의 모습이다.
한쪽으로는 미국을, 다른 한 쪽으로는 중국을 낀 통일 한국의 미래는 확실히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이러한 때야말로 기성의 것, 기지(旣知)의 것 너머를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익숙했던 것 안에 갇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를 환대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중략)
(중략)
이 시대에 우리는 물론 외부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으로 향하는 문 역시 열어야 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면의 열림 없는 바깥 보기는 허황하다.
이 책은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곳에서 미지의 손님을 찾았다. 그가 유교였다.
이미 알려진 유교가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교였다.
이미 알려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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