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6

정영환부교수의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서평정리 - 東アジアの永遠平和のために

정영환부교수의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서평정리 - 東アジアの永遠平和のために:

정영환부교수의 박유하『제국의 위안부』서평정리

메이지가쿠인 대학 정영환 부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서평의 각 기사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습니다.

자료를 짜깁기하고 그 짜깁기한 자료군에서조차 이끌어 낼 수가 없는 근거없는 해석

식민지 지배를 ‘부정의’로 비판하는 입장을 포기하도록 요구, ‘제국’ 측으로부터 연민을 재촉

'위안부'제도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군의 책임 범위를 극단적으로 한정

헌법 재판소 "결정"의 왜곡에 의한 피해자들의 권리의 소멸화

한일 협정에 관한 문헌의 그릇된 이해가 빚은 기묘한 주장

자의적인 논법에 의한 일본군의 책임 극소화, 천황을 비판하는 피해자에 대한 최대한의 저주

박유하의 일본정부에 대한 기대는 불분명, 요구하지 않아야 할 것은 명확하지만 그 근거는 지리멸렬

아이타니논문의 중간 구절을 결론처럼 쓰고 논문의 취지를 정반대로 왜곡하고 이용

■각 기사 정리 부분 발췌


증언과 자료를 짜깁기하고 그 짜깁기한 자료군에서조차 이끌어 낼 수가 없는 근거없는 해석--그것도 전 '위안부'들이 일본군에게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중대한 해석--을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폭력'이 아닌가. 


본서에서 필자는 명확히 식민지 지배를 ‘부정의’로 인식하고 이것을 비판, 규탄하는 입장을 포기하도록 조선인 쪽에 요구하고 있다(더욱이 ‘증언자’의 말을 빌어). 그것은 일본인에 대해 ‘제국’ 측으로부터 연민과 동정을 나타낼 것을 재촉하는 듯한 서술과 대응한다. 


‘묵인’ ‘수요’ 창출이라는 그 자체로 극히 문제적이고 한정적인 일본군의 ‘책임’조차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것이 본서의 박유하의 주장이다. 이러한 ‘법적 책임’론을 이해한 후에 다시 한 번 지금까지 검토한 박유하의 주장을되돌아보면, 본서가 법적 책임을 배제한 보다 광의의 ‘책임’조차 일본군에 대해서는 극히 한정적으로밖에 인정하지않는다는 점에 다시 한 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한국정부에도 책임이 있으므로, 거기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호할 ‘구체적인 의무’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헌법재판소는 박유하처럼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일교섭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문제가 있어 여전히 청구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는 이상, 협정에 기초하여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정」을 계기로 하는 “’외교적인 해결’ 시도는 한일관계를 악화시켰을 뿐이다”(196쪽)라고 박유하는 잘라 말하지만, 왜곡과 혼동, 사실오인에 의해 멋대로 피해당사자들의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박유하 자신이 아닐까.


청구권․경제협력협정에 기초하여 지불된 ‘경제협력'은 ‘1937년 이후의 전쟁 동원'에 관련된 ‘청구권'에 기초하여 지불된 ‘배상금'이라는 이해는, 의거한 문헌의 주장을 박유하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더욱이 그 오류에 입각한 해석이 그 문헌 자신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주장(“사실상의 보상”설)과 맛보기식으로 접합되어 있다. 진묘한 ‘새로운 설'이 이 책에서 빈출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방법'의 문제가 있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문제는 "책임을 지나치게 넓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좁게 책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책은 자의적인 논법으로 일본군의 '책임'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권리를 최소화한다. 전후모순이나 자가당착도 꺼리지 않고 정작 정부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정부가 '보상', '배상'을 해왔다고 강변한다. 천황제 파시즘 비판, 전후일본 비판에는 과도하게 반발하는 한편, '책임'을 논하는 단계가 되자마자 구체성을 잃고 그 책임은 수많은 추상개념 -- '제국주의', '파시즘', '가부장제', '국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 로 전가된다. 특히 '구조'라는 개념은 '운명'이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서는 주체, 즉 일본군이나 정부(그리고 사실은 한국정부)의 책임을 해제하는 경우에만 소환된다고 할 수 있다.
"천황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때까지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위안부' 피해자 여성의 말에는 '오만과 규탄', '상대의 굴복 자체를 목표로 한 지배 욕망의 뒤틀린 형태', '굴욕적인 굴복 체험의 트라우마에 의한 또 다른 강자주의'라는 최대의 매도를 퍼붓고, 얼토당토않게 '대일본제국의 이인자로서 구미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역사'에 비유한다. 천황 비판은 포로학대와 같은 '강자주의적 욕망'이라고 폄하했다고 하더라도 '생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고  스기타는 평가하는 것일까. 한편 '내가 잘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도 내 운명. 내가 그렇게 다룬 일본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증언은 교묘히 강탈하여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것과 같은 그녀의 말은 갈등을 화해로 이끄는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있다. [중략] 갈등을 해결하는 계기가 결코 체험 자체와 사과 여부에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92-93쪽)고 칭송받는다. 이것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박유하의 주장의 대변이며, 증언의 찬탈이 아닌가.


결국 한일협정의 한계’와 관련하여 박유하는 일본정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확실히 하지 않았다.“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볼 것” “시대적 한계를 검증하고 보충할 것” “냉전체제” 하에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되물을 기회를 한일 쌍방에게 부여하지 않은 것을 인식할 것” 등의 애매한 레토릭이열거될 뿐이다.
다만, 박유하가 일본정부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만은 명확하다. 과거의 위안부’ 여성들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식민지 지배 당시에는 책임을 물을 법’은 없었으며, 한일협정에 의해 법’은 없어졌기 때문이다(모순이지만). 한일협정에 따른 분쟁 해결도 하지 않아야 한다(헌법재판소 결정 비판),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명확히 드러난 현재의 입장에서도 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한일협정 재협상 비판), “문제가 복잡해진다” “국가로서의 신뢰가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박유하에 따르면 해야 할 것은 이것들 이외의 일이다.

  
  「3 국제법에 의한 주장에 대하여」는 네 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번호가 붙어 있는데, 박유하는 그 중의 ①②③만을 소개하고 왠지 3절의 결론에 해당하는 위의 ④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결과 ③의 말미의 위법성의 근거이므로 배상에 대해서는 다른 법에 의해서 주장해야 한다는 의미의 "이 조약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한 구절이 마치 3절의 결론인 것처럼 독자에게 제시되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박유하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반복하지만, 아이타니 논문은 이러한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박유하는 논문의 취지와는 완전히 반대 주장의 근거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