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

“조선여성이 깨어나야 참다운 독립” Pak Chinhong (朴鎭洪, 1914-?) red femi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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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year when Korea's Independence Day comes, I recollect them. Most of them are almost nameless: their names, found only in old Japanese police records, are known, at best, to the dwindling number of South Korean historians who still work on them. Even these of them who are better known - such as Kim Tanya (1899-1938), one of Korean Communist Party's original organizers and a Comintern cadre - often do not have their monograph-length biographies in Korean, let alone English. They died in the torture chambers of colonial Korea or lived the rest of their post-imprisonment lives with the consequences of torture, like Kim Chaebong (1890-1944), the first Responsible Secretary of Korean Communist Party. They were massacred by Stalin - that was Kim Tanya's case. They were executed by the newborn South Korean government - that was the case of a brilliant literary scholar and long-term Communist activist, Kim T'aejun (1905-1949). And these of them who miraculously survived and went North, often found their premature death there. They were Korean Communists, the people who fought in the most determined way for Korea's liberation and exerted crucial influence on its liberation movement in general.
Pak Chinhong (朴鎭洪, 1914-?), famed in her days for calling her second husband, Kim T'aejun, the 'in-house person' (집사람), in a feminist reversal of the traditional Korean pattern (it was considered normal for the husband to refer to his wife in this way), is one of the 'red feminists' who did so much for both female and national/social liberation and who is remembered by so few. A schoolgirl of poor peasant background turned fearless labour organizer, she was one of the key personalities in 1930s Party rebuilding movement. Five arrests, ten prison years, lost child and many days and nights of torture did not change her determination. In 1944-45, she and Kim T'aejun undertook almost unbelievably daring attempt to escape wartime Korea and join Mao's forces in Yan'an. A sad irony - after so many close calls, they indeed reached Yan'an, but were suspected there of being 'Japanese spies'! Kim was murdered by South Korean authorities. Pak reached North Korea, became a parliamentarian there and then disappeared from the public view. Heaven only knows whether she was purged or died under American bombs during the Korean War.
These people knew that they won't enjoy the sweet fruits of victory, that most of them would have to accept unnatural death on the way. Still, they fought. They deserve not to be forgo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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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혁명전사가 된 문학소녀 박진홍
“조선여성이 깨어나야 참다운 독립”문학소녀였던 박진홍은 대표적 여류혁명가로 자리매김했다. ‘1944년 10월 9일 합계 10년의 마지막 감옥살이가 끝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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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혁명전사가 된 문학소녀 박진홍
기사입력 2009.01.15
문학소녀였던 박진홍은 대표적 여류혁명가로 자리매김했다.
‘1944년 10월 9일 합계 10년의 마지막 감옥살이가 끝나고 김태준씨와의 뜨거운 사랑이 맺어졌으나 보금자리를 구해서 옥창의 피로를 쉬일 수 있는 것은 혁명가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걸어서 연안 가는 길을 떠났고 해방이 되자 다시 걸어서 그 먼길을 돌아온 부총 서울시 위원장 박진홍 여사는 아직도 얼굴이 몹시 파리하고 끊임없이 가슴이 결린 증세가 있다고 한다. 건강 상태를 물어보았더니 “연안서 떠날 때 임신 만삭이었더랬어요. 나는 말을 타고 남편은 걸어서 오는데 열하성 란핀이라는 데서 오후 7시에 해산을 했지요. 그리고 그날 밤 1시에 담가에 매여서 숭덕까지 왔는데 그때 무리한 것이 아직도 속에 남아 있군요.”
1934년 이재유씨와 함께 지하운동을 하면서 동거생활로 들어가 옥중에서 아들 아기를 낳았으나 불행히 죽고 이번 노상에서 낳은 아드님은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가 이러고 다니느라고 가정적인 단란한 맛은 통 없어요.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이란 그리 오래되지 못했지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그래서 이따금씩 꿈을 그리다가 현실 앞에 깜짝 놀라곤 해요. 가정은 민주주의적이긴 합니다. 서로 다 혁명운동에 리해가 있지요. 그러나 집사람도 봉건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어요. 내가 무얼 쓰면 여자가 저런 걸 쓴다고 퍽 신기하게 여겨요. 호호 호호. 우리 부녀운동이 물론 봉건도덕에 얽매여버리는 극우적인 현상도 잘못이지마는 너무 가정을 경멸파괴하고 남편을 투쟁대상으로 삼는 것은 극좌적인 오류예요. 현단계에 있어서는 부부가 단결해서 혁명의 기초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남편을 ‘집사람’으로 부르다 혁명을 위한 부부애. 그건 가장 아름답게 여겨졌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15일치에 나오는 인터뷰 기사이다. ‘여류혁명가를 찾아서’라는 연재물 세 번째 꼭지로 ‘부부가 단결하여 혁명의 기초 세우자’는 제목이 달려 있다. 맹렬 혁명가인 박진홍이 하는 말 가운데 ‘집사람’이라는 표현이 놀랍다. ‘부부’라는 왜식 쓰임말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겨레는 한살되어 사는 남녀를 가리켜 ‘내외’라고 하였다. 글자 그대로 안팎을 말하니, 안사람·바깥사람인 것이다. 여성을 낮잡아 ‘안사람’ 또는 ‘집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타고난 육체적 조건 곧 생물학적 다름에 따라 맡은 구실을 말하니, 내외(內外)라는 것은 천지(天地)나 일월(日月)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박진홍은 남편을 가리켜 ‘집사람’이라고 부른다. 5000년을 넘게 내려오는 남성지배 이데올로기를 깨부수려는 여류혁명가이기 때문인가. 그때나 이제나 그렇게 말하는 여성을 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혁명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러하듯 박진홍(朴鎭洪 1914~?) 또한 돌아간 때를 알 수 없는 혁명가이다. 6·25라는 역사의 미친바람 속에 돌아간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무리 늦춰 잡아봐도 마흔 살도 못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두 차례 혼인했는데 그 남편들 또한 하나같이 하늘과 땅한테서 받은 명줄을 못 채우고 돌아갔다. 두 번 혼인했다지만 물만 한대접 떠놓고 맞절 세 꼭지씩만 올리는 이른바 작수성례(酌水成禮)였다.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서 축복받는 잔치를 벌이지 못한 것은 똥구녘이 찢어지는 찰가난 탓도 있지만, 승냥이 같고 두억시니 같은 왜경 눈 때문이다. 첫 남편이었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는 갓 마흔에 옥중고혼(獄中孤魂)이 되었고, 두 번째 남편이던 김태준(金台俊, 1905~1949)은 마흔다섯 한창 때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됐다. 함북 명천(明川)에서 태어난 박진홍이 가난을 못이겨 고향살림을 접은 부모를 좇아 서울로 온 것은 1928년이니, 15살 때였다. 천도교에서 세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입주 가정교사로 학자금을 대었다. 3학년 때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남학생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사회주의 학습을 비롯하였다. 일본인 학생에 견주어 많이 떨어지는 교육환경 개선과 교사들의 성실한 교육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목대잡다가 퇴학당한 것이 4학년 때인 1931년 6월. 한성제면, 조선제면, 대창직물, 대창고무공장 같은 곳에 직공으로 들어가 생활비를 벌면서 노동운동을 하였는데, 왜경에게 잡힌 것이 그해 끝무렵이다.
이른바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이었으니, 사회주의 학습을 하는 독서모임을 꾸려 조선독립을 위한 채비로 밑공부를 하였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다. 34년 초 이재유가 채잡던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읽히어 다시 몇 달 징역을 살았고, 이재유와 내외간 연분을 맺게 된 것은 감옥에서 나온 34년 5월쯤이었다.
공장 직공 생활하며 노동운동
박진홍의 첫남편 이재유가 남긴 글들.
“제가 하겠으니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아지트키퍼’를 구해달라는 이재유 부탁을 받았을 때 박진홍이 한 말이다.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처지라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그때까지 머물던 자취방을 간추린 박진홍이 이재유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레 뒤였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신당동에 방 한칸을 빌려 한살림을 하게 된다.
이재유와 한살되어 살던 ‘아지트키퍼’ 서너 달 동안 ‘동덕고녀 개교 이래의 재원’이던 박진홍은 ‘강철 같은 혁명가’로 질적 도약을 하게 된다. <레닌주의의 기초> <일본사회운동사> <사적유물론> <철학사전>을 읽었는데, 맑스의 <철학의 빈곤>과 <자본론>은 너무 어려웠다. 21살 처녀 박진홍 눈이 빛나는 것은 이재유가 작성한 ‘자기비판문’ ‘통일문제’ ‘공장 내의 활동기준’, 그리고 레닌·리프크네히트·로자 룩셈부르크 머릿글자를 딴 ‘3L캄파투쟁방침’ 같은 것들을 볼 때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묻고 대답하고 또 토론하는 그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었다. 어떠한 억압도 법률도 폭력도 징역도 없이 참다운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쳐나는 세상을 말해주는 이재유는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이었다. 톨스토이와 타고르를 좋아하고 이기영의 <고향>과 이태준 단편소설들을 좋아하는 꿈 많은 문학소녀 박진홍이었다. 동맹휴학 때도 요구사항을 썼고 노동자들을 각성시키는 선전선동문도 썼던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935년 1월 10일 ‘문건레포’로 나간 박진홍이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주의자 규율’에 따라 이재유는 곧바로 아지트를 옮긴다. 그리고 동덕시절 박진홍 은사인 이관술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이제 서울 노원구 창동)에서 위장농군으로 지하투쟁 1년 반만에 잡혀간다.
이재유 피를 말리게 하였던 그 시간 박진홍은 경찰서에 갇혀 있었다. 뱃속에 이재유 아이를 품고 있던 박진홍은 야만적 족대기질을 당하였지만 며칠 동안 입을 다물었으니, 동지한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는 주의자들 공통의 불문율이었다.
네 번에 걸쳐 10여 년 징역살이 박진홍이 네 번에 걸쳐 10여 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44년 10월이었다. 그리고 ‘경성콤그룹사건’으로 2년 징역을 살다가 병보석투쟁으로 나온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담당 강사 김태준과 만나 한살이 되니, 두 번째 남편이었다. 11월에 서울을 떠난 두 사람이 연안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4월이었다. 압록강 건너 연안까지 걸어서 갔다. 그들이 연안까지 갔던 것은 무정 장군이 거느리는 조선의용군을 비롯한 중국 전역 조선인 무장대오와 연계를 맺기 위함에서였다. 일제가 결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을 떠난 것이 9월이었고 서울에 다다른 것은 11월 하순이었으니 또한 걸어서 왔다.
“눈멀어 3년, 귀먹어 3년, 벙어리 3년의 시집살이 설움이 얼마나 컸던가는 세간에 흔히 도는 속담에서도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부인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다면 그 부인은 가정에서 내쫓겼고, 마을에서 친척에게서 내쫓겼던 것이며, 부인 자신의 살 길은 복종의 길 이외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부인의 미덕으로 쳐오는 인형과 같이 온순하고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까지도 용서하지 않는 부인 자신의 도덕관념은 부인의 과거생활의 인습이 맹목적으로 이어 내려온 증거라 볼 수 있다.” 박진홍이 한 말이다. 해방 한돌 기념으로 박아낸 <민주주의 12강>에 나온다.
“가정에 있어서 부인은 부엌에서 아기를 데리고 밥짓고 빨래하기에 일생을 보내자 남편은 이 부인의 인격을 어떻게 높이 평가할 수 있었을까. 부인의 무지와 몽매와 편협한 감정과 남편에게 의뢰하려고 매달리는 근성이 그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의식하고 이것을 해결하도록 책임지는 남편을 어디서 볼 수 있었으며, 가령 그러한 남편이 있다 하여도 부인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하여 그에게 시간의 여유와 배움의 자유, 살림의 여유를 줄 물질적인 힘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농촌에 있어서 부인의 생활이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강제혼, 매매혼, 조혼의 폐습은 일제가 조선인민의 토지를 빼앗고 남부여대하여 해외로 유랑하게 할 때 더욱더 보급되어 인습의 폐해를 알면서도 굶주림에 자기 딸을 팔아먹은 예가 얼마나 많았던가. 생활난에서 오는 조혼이 얼마나 많았던가. 민며느리를 데려다 부려먹겠다는 관념은 농촌이 피폐하면서 더욱 조장되었으며 남편의 억압에서 혹은 이혼을 원하면서도 애정 없는 부부생활이 의무적으로 계속되다가 참지 못하여 지은 살인, 방화의 부인범죄인이 얼마나 많았던가. 학교 갈 나이의 아이들을 가지고 학교에 보낼 수 없고, 할머니의 고통은 어머니가 이어가고 어머니의 고통을 딸이 이어가면서 북데기 속에서 살아온 것이 농촌 부인의 생활이었다.”
여성이 당당한 인격체로 우뚝 설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박진홍이다.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서 가져야 될 것이 날카로운 정치의식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여성이 깨어나야 참다운 독립과 해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하며 박진홍은 두 팔을 번쩍 치켜올린다.
“민족통일을 거부하고 팟쇼정권을 세우려는 일체 반동정치를 반대하자.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부인은 강력히 지지하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부녀부 간부로 활동하던 박진홍은 조선부녀총동맹에 들어가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이 되었고, 48년 8월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어디에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때까지 결사옹위하던 ‘조선의 레닌’에게 침을 뱉은 몇 사람을 뺀 남로당 출신 모두가 그렇듯이, 남로당 숙청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성동>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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