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이란 삶의 양식, 화물운전자의 경우 [세상읽기]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각자도생이란 삶의 양식, 화물운전자의 경우 [세상읽기]
등록 :2022-12-11
화물연대가 파업을 종료하고 현장 복귀를 결정한 9일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ICD)에서 조합원이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각자도생’ 키워드로 우리 사회를 묘사하는 일이 새롭진 않다. 그러나 각자도생이 개인의 유력한 ‘삶의 양식’으로 굳어져 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보통은 1997년 이후 경제위기, 국가의 책임 방기가 각자도생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중은 희생자로 묘사된다. 실상은 이보단 복잡하다. 경제위기와 국가 역할 부재가 각자도생을 부추긴 건 사실이나, 그에 대응해 개인들도 적극적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보통 이런 일은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 벌어지는데 새 질서가 자리잡히고 제도가 복잡하게 발달함에 따라 각자도생의 필요성과 함께 가능성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는데도 여전히 각자도생이 지배적이며, 이는 자본주의 발달사에 있어 특이 사례라고 할 만하다.
각자도생이 주어진 한계 속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자 전략이 된 사회는, 어떤 경제행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의 편차가 매우 크다는 특징이 있다. 어차피 고임금 직군으로 못 갈 바엔 그런 편차가 큰 고용형태가 낫지 않겠나? 경제 발달에도 불구하고 자영업이 꾸준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몇몇 분야에서 완전한 임노동제 정착이 더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여기선, 아무리 고되고 ‘기대값’이 낮은 일도 ‘내가 하기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 달라진다는 ‘신화’가 자라난다. 보험, 트럭, 배달, 다단계―어디서든 ‘성공 미담’이 넘쳐나니, 여기서 돈을 못 번다면 그건 전적으로 당사자 탓이 된다.
이렇게 각자도생이 개인의 의식과 경제·사회의 구조에 스며든 곳에선, 저 편차를 줄이려는 시도, 어떤 의미에선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화’하려는 시도는 환영받지 못한다. 일터와 노동 과정에서의 위험을 줄이고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 쪽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바로 그런 열악함이 저 ‘편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각자도생도 싫고 위험도 과로도 싫지만, 저 편차까지 사라져선 안 된다.
이와 같은 각자도생 사회의 실상을 생생히 볼 수 있는 곳이 고속도로다. 평일 낮 남해고속도로에 가보자. 이 도로를 끼고 정유, 자동차, 조선, 기계 등 주요 제조업 기업들은 물론 대규모 산업항까지 자리하고 있어서,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는 다양한 트럭들이 수도 없이 그곳을 지나다닌다. 특히 내가 사는 진주~마산 구간은 기본 4차로인데, 낮에 이 도로에 들어가 보면 트럭과 버스 등 대형 차량이 세개 차로 정도는 가볍게 채우면서 서로 경쟁하듯 달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번 화물연대의 파업을 접하며, 이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달리는데도 한달에 200만~300만원 벌기가 빠듯하다니! 그런데 여기선 내가 한가롭게 연민할 처지는 아니다. 나도 같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럭에서 떨어진 괴물체에 맞아 차가 파손된 적도 있고, 안쪽 차선을 듬성듬성 달리는 트럭들과 나란히 달리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왜 그들은 바깥 차선에서 자기들끼리 가지런히 달리지 않는가? 차로가 두개뿐인 도로에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트럭들 때문에 브레이크 패드도 많이 닳았다. 어차피 트럭 속력은 제한돼 있는데 왜 저렇게 서로 추월을 못 해 안달일까? 파업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연대의식’이 도로 위에선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니냐며 운전대 뒤에서 혼자 분통도 많이 터뜨렸다.
여기에 화물운송업의 독특함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 경제에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보통의 각자도생이 특정한 일터 안에서 남모르게 벌어지는 데 반해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각자도생은 우리와 함께 도로를 달리는 중에 벌어지고, 그들이 지는 위험이 곧 우리 모두의 위험이 된다. 그러니까 그들의 각자도생은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며, 따라서 그들이 반대하더라도 그들의 각자도생 가능성과 경제적 보상의 편차를 줄이는 일은 일종의 공공의 관심사가 된다.
이제 종료된 화물 파업에서 논의가 안전운임제에 집중된 것은 그래서 아쉽다. 안전운임제도 경제적 보상의 ‘밑바닥’을 다지자는 것이지 편차를 줄이자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논의가 보다 폭넓게 이어졌더라면 대중의 지지도 더 높지 않았을까? 물론 이 논의가 화물운송업에만 머물러선 안 될 것이다. 각자도생 사회에선, 어느 한 부문에만 각자도생 여지를 줄이라는 건 불공정한 일이 되니 말이다.
이슈화물연대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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