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30

"남북 관계에 '갑을관계론'은 안 통한다" 2013 이도흠

"남북 관계에 '갑을관계론'은 안 통한다":


"남북 관계에 '갑을관계론'은 안 통한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정전 60주년 맞는 한국사회의 요구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프레시안 기획위원 
2013.05.27 











인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라 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류 역사는 화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 당사자(국가 또는 민족)들이 한바탕 크게 전쟁을 치르고는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화해를 하고는 했다. 중동의 앙숙 이스라엘-이집트가 1948년부터 1973년에 걸쳐 4차례 전쟁을 치렀지만(1차 1948년, 2차 1956년, 3차 1967년, 4차 1973년), 1979년 평화협정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했었다.

올해는 6.25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3년 동안의 유혈을 끝장낸 지 6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60년이면 두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서 어른이 되고, 또 아이를 낳은 일이 두 번 되풀이되는 기간이다. 전 세계 전쟁사에서 두 세대가 지나도록 화해하지 않고 으르렁대는 사례들은 흔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한국이 대표적인 보기로 꼽힐 정도다.

이즈음 한반도 정세는 긴장감 속에 휩싸여 있다.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고 남북관계는 살얼음판이다. 금강산관광이 없어진 뒤 '남북관계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개성공단은 폐쇄 위기에 놓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은 극우파들이 망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기상도는 흐리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해법은 무엇인지를 찾아봐야 한다.

5월 24일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 특별 세미나'(불교생명윤리협회 주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주관)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세미나 주제는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세미나는 △법응스님(불교생명윤리협회 공동 대표),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민교협 상임의장),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교수(민교협 상임의장)의 인사말 
△이종석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 수석연구위원(전 통일부장관)의 기조발제에 이어 
△이철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평화협정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리고 쟁점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가 '김정은 체제의 대외전략 변화와 동아시아 질서: 평화의 출구전략' 
△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성공회대 겸임교수)가 '여성의 관점에서 본 전쟁의 참상과 한반도 평화론'을 각기 발제하였다.

회의장 분위기는 올해 정전협정 60년을 맞아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됨으로써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참석자들은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남북간 대결, 북미간 대결이 되풀이되는 갈등의 악순환 고리를 평화협정 체결로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국 당사자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세미나에서 나온 발언의 주요내용을 간추려본다.<편집자>




▲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불교계와 민교협이 함께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세미나를 열었다. 사진은 세미나 장소인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 ⓒ불교생명윤리협회

2014-09-29

위안부 문제, 일본인 위안부가 전혀 논란의 대상이되고 있지 않은지 이상한 키테 레츠

위안부 문제, 일본인 위안부가 전혀 논란의 대상이되고 있지 않은지 이상한 키테 레츠:

기사

위안부 문제, 일본인 위안부가 전혀 논란의 대상이되고 있지 않은지 이상한 키테 레츠

최근이 블로그에서 역사 학자,秦郁히코 씨의 " 위안부와 전장의 성」(신쵸選書1999 년)를 제목 만 소개했지만, 간신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440 페이지와 두꺼운 있지만, 알기 쉽고, 문헌, 자료의 인용도 실로 정중하고 포괄적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웃 나라 정치인의 망언에 일본의 좌익 운동가의 선동에 휘둘리지도 없을 것이다.참고로 진씨의 학력, 경력은 다음 wiki를 참조, 역사 학자로서 주요한 아카데미즘의 학력 검증을 갖는 편이다.http://ja.wikipedia.org/wiki/%E7%A7%A6%E9%83%81%E5%BD%A6 아직 전반 장을 읽고있는 단계이지만, 언론 플랫폼 아고라에 잘 정리되어있다 서평을 찾아 냈기 때문에 다음에 소개 해 두자. 평자는 이시이 타카아키 씨 http://agora-web.jp/archives/1486690.html 인용 (일부 생략) :








책에서는 군대와 점령지의 치안을 담당 한 헌병 (헌병 부문)의 자세한 설명이 남아있다. 일본인이 조선에서 여자를 사냥 모은라는 거짓말의 증언을 한 요시다 세이지가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인정한 전화 인터뷰도 게재되어있다. 한국 사람들은 "수십만 명의 조선인 여성이 군과 경찰에 의해 납치 또는 정신대의 명목으로 끌려 전쟁터에 끌려가 매춘부하게됐다"고 믿고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이 문제를 90 년대에서 떠드는 사람도 이러한 정보를 선전했다. 그런데이 책에 의하면, 사실은 전혀 다르다. 태평양 전쟁 중 1 만명에서 2 만명의 사람들이 위안부로 일했다. 약 반수가 일본인에서 20 % 정도가 조선인이었다. · 위안부는 이등병 (최하급 병사)의 월급이 달 10 엔 정도 (전쟁터의加俸없음)의 결과, 월 300 엔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예도있다. · 군이나 정부가 강제로 여성을 모은 증거는 없다.대리점 전선 근처에서 치안에서 보호하고 또한 성병을 피하기 위해 위생 관리 등을 한 예이다. 여성이 속았다 예는 많은 있었다. 당시는 이른바 전에 빚을 전달 상환하는 형태로 사실상의 인신 매매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부모 등 직계 가족이 딸을 파는 경우가 많지만 여성에게 다른 일이 없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되는 일이 많았다. 여성이 학교 나 직장 등의 단위로 그룹을 만들어, 공장 등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여자 정신대라는 제도가 있었다. 내지에서 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조선에서는 대규모로 실시되지 않았다. 이와 위안부의 혼동이있다. 기꺼이 매춘을 직업으로하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속아했을 경우는 매우 유감이다. 그러나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의 일본, 그리고 우리 세대가 사실과 다른 문제에 책임을진다 필요는 전혀 없다. 진 씨는 일부 활동가 사실에 반하는 주장이 아사히 신문 등의 보도, 그리고 좌파 계열의 정치 세력에 의해 문제가 확대 문제가 꼬인 것을 중립적 인 관점에서 검증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위안부 문제는) 적어도 정의 · 인도를 기조로하는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 한 것은 아닌 것 같다.おらく는 국내외 반체제 운동체가 안고 있던 정치적 과제에 관련되는 복합 한 의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던 것은, 한 사람도 자청했다 일본인의 위안부 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은 정치 캠페인을 소화 할 정도 , 지난 한 적이 없다. 부추 겨진 언론과 NGO는 열에 들뜬 것처럼 흥분했다. 그 열기에 밀려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반성을 남발했다. "
***
덧붙여서, 나도 대담이나 기고를하고있는 잡지 「공공 연구소 "올해 9 월호에서 진 씨의 「역사 인식과 역사 전쟁, 고노 담화 이후 일본과 아시아 '라는 제목의 강연록이 게재되고있다. 그 일부를 인용 해 두자. 인용 :

"위안부는 몇부터 말하자면 일본인이 제일 많습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일본인의 위안부에 관심이없는 거죠. 난 아직 위안소와 위안부의 실태를 모르는 무렵 신문사 사람에게 "너희는 지국 망이 있으니까, 찾으면 바로 일본인의 위안부가 발견된다. 그러면 여러가지 알 수있을 것이다"고 말했다.하지만 "일본인입니다 카아 ..."라는 느낌으로 신문 기자는 전혀 흥미 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의 위안부에 나선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마라 이야기 랍니다. 일본인 위안부는 일체 토론의 대상이되고 있지 않다. "
***
왜 사민당의 전 당수와 아사히 신문 등은 한국까지 위안부를 추구 가서 있는데, 발밑의 일본의 위안부에 대한 관심도 조사도하지 않았던 것일까? 만약 좌파의 윤리관이 정말 보편적 인 인권 존중의 입장에 입각하는 경우 자국의 위안부 문제야말로 가장에 관심을 조사하는 것이 자연 스러울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 엔, 진 씨도 비슷한 제안을하고 있지만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다해도, 위안부의 실태는 이웃 나라와 일본의 좌익들이 선전 한 '성 노예'라는 표현 와 꽤 괴리 것이었다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진씨의 저작권 속에서 밝혀지고있다. 이웃 나라에서 이상한 민족주의의 격앙으로 편심에 일본 정부를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의 "발견"일부 언론은 성공하고 그것을 정부 비판의 정치적 재료로 사용할 수있는 것은 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러한 위안부가 발생하지 못하고 정치적 공격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다. 정치적 공격에 사용할 수없는 커녕 스스로 넓힌 '성 노예'라는 표기와는 상당히 다른 위안부의 실태가 밝혀지고 만다. 따라서 관심도 향해 않았다.그런 것이 아닐까. 또한 위안부 제도를 갖지 않고 그 대신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의 판단력없이 침공 지역에서 강간의 한계를 다한 소련군의 문제는 추구해야한다고, 일본의 위안부의 실태 독일과 영국 미군의 장면도 비교하고 논박 할 것이다 (진씨의 저작권은 제 5 장 "외국에 보는 전장의 성이"그것을하고있다). 그런데 일본의 아사히 신문 등 좌파 매체는 그러한 당연한 것을 대부분으로하지 않고 관심도 향해 않았다. 이것도 위의 상황을 상정하면, 납득할 수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진씨의 강연록이 게재 된 잡지 「공공 연구소」9 월호, 우연히하면서 나도 "예측의 한계와 적응 전략 '이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를 게재하고있다. 잡지 동호 게재 이웃 주의자는 사사키 타케시 (도쿄 대학 명예 교수)와 우에다 타카유키 씨 (자원 에너지 청 장관) 아라라라, 상당히 훌륭한 분들과 함께 버렸다 (^ _ ^;) http : // www.koken-seminar.jp/new.htm (← 공공 연구소 사이트)

2014-09-27

[인문사회]위안부의 반쪽 진실…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 뉴스 : 동아닷컴

[인문사회]위안부의 반쪽 진실…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 뉴스 : 동아닷컴:

[인문사회]위안부의 반쪽 진실…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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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8-10 03:00:00 수정 2013-08-31 09:46:08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지음/327쪽·1만8000원/뿌리와이파리

일본군 위안소 입구에 붙은 격문. 왼쪽은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야마토 나데시코(大和撫子)의 서비스’, 오른쪽은 ‘성전에서 대승한 용사를 대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야마토 나데시코는 ‘아름다운 일본 여성’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결국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제였음을 보여주는 한편 그들에게 신체적 위안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까지 요구했음을 보여준다. 뿌리와이파리 제공
8·15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책하면 떠오를 고정관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읽다 보면 우리가 선뜻 떠올릴 통념을 무참하게 깨 버린다. 한마디로 위안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과 접근 방식이 오늘날 일본의 우경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울컥했다. ‘뭐야,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를 매춘부라고 매도하는 가해자 일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건가.’

저자가 그런 천박한 일본 우익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인권침해 범죄의 책임이 일본제국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의 복합적 산물임을 강조한다. 이 문제를 무조건 일본의 국가범죄와 배상으로 연결지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영원한 볼모로 잡아 두는 짓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이라면 ‘아니 왜 우리가 오만한 가해자를 철저히 단죄하는 데 인색해야 하지?’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작 우리 자신에게 불편한 내용은 외면하고 일본에 불리한 내용만 확대 재생산하는 기억의 조작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그래서 이해와 화해가 아니라 분노와 적대의 악순환만 초래하고 있다면?

박유하 교수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쓴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게이오대와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일문학을 전공한 세종대 일문과 교수이다. 한마디로 한국과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다.

그런 저자의 문제의식은 1990년 초 한일관계의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른 위안부 문제가 왜 2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일로로 치닫는가에서 출발한다. 한국인들은 이를 일본의 우경화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저자는 반대로 한국인들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던 문제를 키워 놨고, 이로 인해 일본 우익뿐 아니라 이 문제에 죄의식을 느끼던 일반 일본인까지 염증을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나름의 사죄와 보상을 했다. 최근 그 존재가치가 새삼스레 부각되는 고노 담화(1993년)는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라고 인정하면서 “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무라야마 내각은 한발 더 나가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조성해 위안부 1인당 200만 엔의 보상금과 총리의 사죄편지를 보내고 7억 엔 규모의 의료복지사업을 펼치겠다고 발표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직접적 강제연행까지 인정하진 않았지만 그 구조적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다. 또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자민당 의원이 세 배나 많은 국회에서 입법이 불가능해 민간참여를 앞세웠지만 사실상 정부 돈(10년간 1000억 엔)으로 기금을 마련했다. 우리말로는 보상금으로 번역된 ‘쓰구나이’란 표현은 죄를 씻는다는 속죄의 의미가 담겼다.

2003년까지 지속된 이 사업을 통해 필리핀 대만 한국의 위안부 285명이 보상금을 받았다. 한국에선 61명이 이를 수령했다(수령을 강력 거부한 위안부 할머니의 수와 비슷하다). 이 기금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전체 사업비의 90% 가까이가 일본 정부 국고에서 지출됐다.

문제는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일본의 이런 속사정은 모른 채 ‘국회입법에 의한 국가배상’만 요구하면서 상황이 크게 꼬여 버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여기에 위안부 문제를 과거 일본제국의 사과와 반성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익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삼는 일본 진보진영의 ‘냉전적 사고’가 더해지면서 일본 우익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웠다는 것이다. 즉, 국민기금 설립에 반대하지 않던 자민당과 요미우리신문이 종전의 입장을 번복한 배경에는 일본인의 피로감과 반감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진짜 민감한 대목은 위안부들의 수많은 증언 중에 담겨 있는 ‘일본군의 잔학성에 균열을 가하는’ 증언들이다. 그들을 속여 전쟁터로 끌고 가 학대와 착취를 일삼은 주체는 대부분 동포인 조선인 민간업자였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는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 위안부와 달리 특별취급을 받았다.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이 패망의 순간까지 보호하려 한 ‘군수품’이었다면 다른 나라 여성은 마음대로 강간하고 죽여도 되는 ‘전리품’이었다.

우리 기억 속의 위안부는 ‘일본군 군홧발에 짓밟히는 가녀린 열다섯 소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다. 일제가 14∼25세 여성 노동력 동원을 위해 여학생 중심으로 모집한 정신대와 혼동한 결과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런 착종된 이미지가 일본에 대한 증오를 강화시키면서 정작 동족을 팔아먹은 우리의 죄를 눈감게 만든 것은 아니냐고.

저자의 이런 도발적 주장에 수긍하기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만 매섭게 노려봐 온 우리 자신의 모습도 한번쯤 거울에 비쳐 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기자 블로그 

조선인 위안부 관련한 진실 펌 by jamanb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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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조선인 위안부 관련한 진실
 글쓴이 : jamanber (115.♡.♡.212)
 조회 : 1,127  

1939년 당시 조선에서 여자애들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 한 달에 10엔 정도 받았다고 함.
 
근데 일본군에서 위안부 1명의 모집을 위해 위안소 업자들에게 두당 1천엔을 선대금 조로 대부해주었다고 함. 당연히 업자들이 중간에서 일부 떼어먹었을 것인데, 딸을 파는 조선인들도 그리 순박한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고 적어도 500엔-600엔 정도는 받았을 것으로 생각됨. 이것은 식모살이해서 벌 수 있는 소득의 약 5년치에 해당함.
 
1941년 출간된 최명익의 '장삼이사'란 소설에 따르면 색시장사(위안소 업자)들이 부모들에 지불한 몸값은 1천엔이었다니 거의 떼먹지 못했는지도 모름.
 
이렇게 받은 선대금을 위안부들이 화대에서 조금씩 갚아나갔다고 함.
 
일본군 위안소에서의 이용 요금은 병사 1인에 1-2엔이고 병사 한달 월급은 7-10엔이었다고 함. 이용 시에는 콘돔 의무화. 수입금은 위안부와 업자가 절반 씩 반띵. 위안부는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음(미리 받은 선대금, 계약 기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임. 현대의 창녀들도 조폭 업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음)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가 29곳이나 되었는3데, 박일석이란 자가 경영한 '카페 아세아'란 이름의 위안소는 1937년 자본금 2천엔으로 시작하여 1940년 자본금 6만엔으로 번창했다고 함.
 
중국 한커우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여기에 경자란 이름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는데 이미 3만엔을 저축했고, 5만엔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함. 선대금을 다 갚고 계약 기간을 채운 상태에서는 위안소에서 나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음.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고, 기간이 지나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음. 이게 가능한 것이 하루에 40명을 받았다고 지면 위안부 몫이 20명. 화대가 30엔이라 치면 한달이면 900엔, 1년이면 1만엔이 넘음. 그러니 이악물고 몸관리해가면서 모으면 수만엔 모은다는 것도 가능할 듯.
 
물론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고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하고 술과 아편에 찌들어 빚만 늘어나는 불쌍한 여자들이 많았음(요즘의 창녀들처럼)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 돌아온 문옥주라는 위안부의 자서전을 보면 5천엔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5천엔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함.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엔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울 부탁하였음. 그 병사는 야마나시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함.
 
 
물론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1.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매춘업을 위해 부인과 아동의 매매를 금지한 1911년의 국제조약을 위배하였음. 이 조약에 의하면 본인의 동의없이는, 또는 21세 미만의 미성년의 경우는 동의가 있더라도 매춘업을 위해 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은 불법이었음. 비록 위안소 업주들의 손을 빌려서 한 것이지만, 일본군에서 선대금도 빌려주고 이러한 행위를 조장 방조한 것은 사실.
 
2.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거나 선대금을 갚지 못한 위안부는 사실상의 노예로 반감금 상태에 있었으므로 노예 노동이나 다름없었는데도 일본군과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방조하였음.
 
이 이유 때문에 일본 정부는 책임이 있음.
 
 
 
하지만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것처럼 일본군에서 무슨 마적패거리처럼 쳐들어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잡아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화임. 실제로는 부모들도 1천엔(식모살이해서 8년 동안 안 쓰고 모아야 벌 수 있는 거액)의 돈을 받고 자기 딸들을 인신매매한 것인데, 이 정도 거액을 받고 팔면서 무슨 수상하지 않은 일을 시킬리 없다는 것은 알았을 것임.
 
또한 업주의 착취 등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 만큼의 거액을 벌어 금의환향(?)한 경우도 있었으며, 계약 기간 지나고, 선대금을 모두 갚은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 전쟁이 끝난 후에 1400여명의 위안부를 상하이와 한커우에서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 인간적인(?) 업주들도 있었다고 함.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들은 3000만원 상당의 위로금과 월 1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다고 함. 이 때 그전에 일본정부에서 보조한 일본 시민단체(아시아 여성기금)에서 수천만원 보상 받은 할머니들은 이 보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때문에 할머니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고 함.
 
현재 정대협과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 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사과와 보상을 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일단 국가의 공식적인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 관련하여 일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임.
 
개인적으로는 저 정도 보상받았으면 된 것이 아닌가 싶음. 전시에 창녀들이 군대를 따라다니는 업자들에게 팔려가든 자의로 가든 가서 군인들 돈 뜯어내는 것, 그리고 국가와 군에서 이를 묵인하던 것은 유사 이래로 쭉 있어왔던 일이고, 이것이 범죄라면 범죄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로 보상을 받은 것도 역사상 초유의 일이 아닌가 싶음.
 
그리고 한국 근대사학자들은 좀 일본군에서 마적패처럼 쳐들어와 순결한 조선처녀들을 잡아갔다는 거짓부렁좀 교정했으면 싶음. 그 할머니들이야 뭐 자기 부모가 식모월급 8년치 받고 자기를 포주한테 팔았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어쨌든 부모의 인신매매도 자기 의사와 달리 잡혀간 것은 마찬가지긴 하니까 이해는 가지만... 적어도 학자나 공식 언론이라면 좀 이런 건 교정을 해줘야지.



위안부 관련하여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는

1. 일본군이 마적패처럼 처들어와 조선 처녀들을 잡아간 후
2. 군대에 처박아놓고 매일 백여명의 일본군의 정액받이 노예로 삼았다
이것인데... 일단 강제로 잡아간 것은 아니고 부모의 인신매매가 대부분이었을 것임.
또한 만약에 하루 백여명의 군인을 받았다면 위안부 몫이 대략 50엔 - 100엔인데 이 돈은 식모살이해서 버는 월급의 반년 - 1년치에 가까운 거액임.


일본군 150명 정도당 1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군 월급은 위안소를 4-5회 정도 찾을 수 있는 돈에 해당함. 일본군이 모두 붕가붕가에 미친 놈들은 아니었을 테니 평균적으로 2.5회 정도 위안소를 찾았다고 치고, 그럼 위안부 1명이 평균 1달에 일본군 400명 정도를 상대해야 함. 그럼 월수입은 300엔 정도로 생각됨. 물론 생필품을 업주로부터 사는 체제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돈을 다 모을 수는 없겠으나 반만 모으더라도 150엔이며, 이는 식모월급 1년치 이상에 해당함. 평균적으로 1년에 1천엔 이상은 모았을 것으로 보임.
그럼 몇만엔 이상 모은 위안부는 무엇이냐? 당연히 특정 위안소에서 잘 나가는 위안부가 있었을 것이고, 이런 위안부는 하루에 수십명을 상대했을 것이므로 돈을 잘 벌었을 것임. 아마 업주도 이렇게 인기가 많은 위안부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 당연히 인기가 없어 파리 날리고 선대금을 갚기는 커녕 매달 생필품도 못 사서 빚만 느는 위안부도 많았을 것임.



또한 전쟁 중반에 선대금 다 갚고 돈 벌어서 날아간 소수의 위안부는 괜찮으나,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는 업자들도 다 알거지 되었을 것이고, 위안부들이 애써 모은 돈도 휴지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일본 국가와 군이 전쟁에서 창녀 알선 업주들을 조장 방조한 것이 큰 문제인 것은 사실. 그런데 노예 사냥 식으로 잡아갔다는 것은 그냥 전설. 실제로는 일본인 위안부가 더 많았다는 것이 유력. 왜냐면... 군대가 애초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말이 잘 통하는 일본인 위안부를 델고 있는게 업주가 돈 벌기 더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


진상을 알고 나면 아직도 이 문제로 매년 열화와 같은 민족 감정을 불태울 일인지 좀 이해가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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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anber 12-01-13 12:20
 115.♡.♡.212  
자주 가는 역사 까페에 올라온 글인데 상당히 공감이 가는군요.
KYUS 12-01-13 12:34
 122.♡.♡.16  
진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 당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그 상황를 생각하고 지내왔을 것인가 라고 대입해 보면 된다.
아무리 멍청하고 모자란 놈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인격적인 인간으로써 그 정도는 충분히 생각 가능하지 않겠냐?
     
jamanber 12-01-13 12:44
 115.♡.♡.212  
뭐라는 거니?
          
시라프넬 12-01-13 12:46
 112.♡.♡.61  
진상을 알고 나면 아직도 이 문제로 매년 열화와 같은 민족 감정을 불태울 일인지 좀 이해가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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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줄이 진리라는 거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뉴또라이또님.
          
KYUS 12-01-13 12:47
 122.♡.♡.16  
이해 정말 안됨?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데....
시라프넬 12-01-13 12:45
 112.♡.♡.61  
이렇게 어느 뉴라이트 찐따가 일본 측에서 편찬한 사료를 객관적이랍시고 퍼와서 퍼뜨린 듯한 인터넷 잡설에 귀가 솔깃하기보단,

인도네시아 전선에서 10대의 어린 나이에 포로로 잡혀 일본군의 x액을 받아내야 했던 어느 네덜란드 할머니의 절규가 귀에 쟁쟁한 거 보면,

그래도 난 한국인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인생 헛살진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jamanber 12-01-13 12:53
 115.♡.♡.212  
ㅉㅉㅉ

점령지에서 일본군에게 연행된 적국의 전쟁 포로와 당시 법적 일본인이었던 조선인의 입장은 다름. 일본인 위안부도 엄청 많았음.

글을 보면 자기 머리로 이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인지 이쪽 저쪽 입장을 검토하며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독립적인 민주 시민이지, 지 맘에 안 든다고 논리도 없이 욕지거리나 하면 그냥 무뇌 좀비라고 하는 것임. 무조건 일본 나쁘다고만 하면 애국자인가? 조국이 허황된 구라에 속지 않도록 각성을 시키는 사람이 진짜 애국 시민인 것임. 광우 좀비들이 나라를 망해먹게 하려고 온갖 난동을 부릴 때 욕을 처먹고 수모를 당해가면서까지 인터넷에서 이를 교정하고 교육하기 위해 노력한 나같은 시민들이 진짜 애국자들인 것처럼.
     
시라프넬 12-01-13 13:10
 112.♡.♡.61  
진상을 알고 나면 아직도 이 문제로 매년 열화와 같은 민족 감정을 불태울 일인지 좀 이해가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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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줄이 진리라는 거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뉴또라이또님.

↑ 말귀를 못알아먹는 것 같아서 다시 동어반복해드립니다. 이런 친절은 두번 다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쥐정부 쉴드 치느라 욕 처먹은 건 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쇠고기의 문제 그 자체보다는 국민들을 대하는 이명박의 태도, 그러니까,

1. 대화와 소통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직후 명박산성 쌓기
2. 불안에 휩싸인 국민들의 뒤에 빨갱이 불순 세력이 있다는 '괴담' 퍼뜨리기
3. 절대 한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종교인데 그 쇠고기에 대한 믿음은 과학으로 포장하고 거꾸로 의심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괴담으로 몰아붙임

따위 웃기고 자빠진 ㅈㄹ 쌈싸먹기에 분노했었던 것이라고 밝혀둠.
내가 무슨 생물의학자도 아니고 변형프리온이 뭔지 알 게 뭐임? 그런데 아무리 봐도 쥐정부의 대응 스킬은 누가 봐도 뭔가 꿍꿍이를 숨기는 듯한 제 발이 저린 모양새였거든. 그래서 더더욱 의심이 가더군.

암튼 잘해보쇼.
점령지역에서 횡행해졌던 전범행위가 내선일체가 된 조선에선 없었을 거다.
또는
점령지역에서 행했던 전범행위는 어느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
따위 궤변 늘어놓을 요량이시라면 그만 접으시구요.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라구니 12-01-13 13:03
 14.♡.♡.21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107019

전쟁 당시 일본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치의
고백은 이렇다. “나는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 6천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 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개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에 보내졌다. 종군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 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
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발렌티노 12-01-13 13:12
 112.♡.♡.12  
jamanber님 굉장히 실망입니다. 그동안 수구적인 모습은 보였어도 나름 논리적으로 토론하려는 모습 때문에 합리적인 보수를 지향하시는 분인줄 알고, 성향은 다르더라도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님이 제시한건 그냥 주장이지 근거는 없어요. 물론 돈 받고 위안부 된 사람이 몇 명 있겠지만 강제 징집했다는 일본 관계자의 증언도 계속 나오고 있고, 외국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한 책들은 강제 징집이었으며 한국 여성들이 다수 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실망스럽네요.
     
jamanber 12-01-13 13:24
 115.♡.♡.212  
실망이고 뭐고, 안병직, 이영훈 교수의 실증적 연구에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 분들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다른 연구자들은 관련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돈주고 모집해가는 것이 더 편하지, 민족감정도 드센 조선에서 군대를 동원해서 두다다다 잡아가면 일본 측으로서는 그로 인한 민심 이반과 치안 불량으로 생기는 비용이 몇십배 큰 것입니다. 중국과 태평양 등지 전선에 보낼 병력도 부족한 판에 일부러 조선의 치안을 어지럽혀 주둔해야 할 군대 숫자를 늘려요? 광주학생운동이라는 것이 고작 조선인 여학생을 일본 아해들이 놀렸다고 해서 일어난 대사건입니다. 근데 아예 군대가 들이닥쳐서 수만명 - 수십만명의 조선 처녀들을 잡아간다면 조선은 그냥 아수라장 무법천지되고 폭동이 빈발해서 그 비용이 더 큰 겁니다.

조선인도 법적 일본인인데 그렇게 잡아가면 불법이기도 하구요.

내 맘에 안들더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곰탱 12-01-13 14:09
 121.♡.♡.4  
이영훈 교수=========>이거 그뉴또라이연합 이산가 고문이던가 하던 짐승아닌가요?
jamanber 12-01-13 13:19
 115.♡.♡.212  
위안부 강제연행을 증언한 사람은 일본의 요시다 세이지라는 사람 단 1명인데, 1983년에 '나의 전쟁범죄'란 책에서였지요. 1943년에 부하직원 아홉명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와 성산포와 법환리 등지에서 약 200여명의 여자들을 위안부로 강제연행했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소란이 일어 제주도 향토사학자들이 나서서 여인들이 끌려갔다는 성산포, 법환리 등지의 마을을 수년간 조사했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런 엄청난 사건은 전혀 없었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지요.

또한 일본 연구자인 하타 이쿠히코라는 사람이 요시다를 만나 당시 그가 속한 조직 간부나 함께 제주도로 건너온 대원들 9명을 취재하겠으니 이름을 물었는데 꿀먹은 벙어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시다 세이지라는 사람이 책팔아먹을라고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해 허위 증언한 것으로 해당 책에 대해서는 대개 판정이 내려진 상태라고 합니다. 육지에서 색시장사들이 1000엔 내고 여자들 사가는데, 제주도 사람들이 무슨 어수룩한 바보들도 아닌데 고작 9명 일본인이 와서 200명을 두다다다 잡아가요? 현지 주민들도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증언한다는데? 만약에 그러한 일이 있었으면 제주도 전체에 대폭동이 일어났을 것이고 저 9명은 그냥 맞아죽었을 겁니다. 제주도 섬사람들이 얼마나 거친 사람들인데.

이영훈, 안병직 교수의 관련 연구에 대해 민족감정에 의거한 비난은 쏟아지지만, 막상 이 연구들을 뒤집는 근거가 제시된 반론은 전혀 없는 상태에요.

물론 강제연행이 있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여러가지 근거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당시의 정황을 생각한다면 없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 돈주고 모집해가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적게 드니까.
KYUS 12-01-13 13:27
 122.♡.♡.16  
지식과 경험,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제대로된 사고를 하는 존경받을 만한 인간이 되는건 아니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게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직접 당한 당사자가 아니면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식의 원본조차도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그걸 해석하는 사람마다 의견의 차이를 보이게 되지.
그럼 무엇으로 판단하냐?
그 기준이 바로 제대로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판별하는건데.
이 사람은 아무리 많이 알고 경험과 연륜를 쌓아도, 한 인간적으로 제대로된 사고를 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라구니 12-01-13 13:30
 14.♡.♡.211  
'위안부' 강제연행 증언 도쿄재판 검찰조서 발견
[연합뉴스] 2007-04-15 11:23

각국 검찰관이 제출, 재판서 증거자료로 채택돼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일본군이 아시아 각국 점령지에서 부녀자를 강제 연행해 위안부로 혹사시켰음을 입증하는 도쿄(東京)재판 당시의 검찰 심문조서 등 증거자료가 발견됐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15일 보도했다.

이 자료는 도쿄재판 당시 각국 검찰관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입증하기위해 제출한 심문조서로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채택됐던 것이다. 일본의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현대사) 간토(關東)학원대 교수(현대사)가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신문에 따르면, 이 자료는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주민.포로 살해 등 구체적 만행을 입증하기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제출된 방대한 자료 가운데 하나로, 네덜란드와 프랑스, 중국 등 각국 검찰관이 제출한 조서와 진술서 등이다.

지금까지는 일본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도쿄재판 관련 자료에서 검찰관의 심문조서 일부가 확인된 바 있다.

네덜란드 검찰관이 보르네오섬에서 해군정보기관에 일했던 일본 군속을 상대로 조사해 제출한 1946년 3월13일자 심문조서에 따르면, 일본인과 친하게 지내던 한 현지 여성이 일본군에 구속돼 경비대장에게 폭행을 당하고 알몸으로 서 있게 된 상황을 취조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현지 여성이 구속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 군속은 "억류 이유는 위안소에 집어넣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경비대장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고 진술했다.

또 46년 5월16일자 심문조서에는 자바섬의 민간억류자 수용소에 있던 한 네달런드 여성이 강제적으로 위안부로 연행됐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여성은 44년 1월28일 인도네시아인 경찰관에 의해 다른 6명의 부녀자와 함게 일본군 포로수용소 사무소로 연행돼 일본군에 인계된 뒤 자동차로 작은 수용소로 이동, 며칠 뒤 의사의 건강검진을 받고서야 비로소 위안소에서 일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평일에는 일본군 장교들을 상대했으며, 일요일 오후에는 일본군 하사관, 일요일 오전에는 일반 병사들을 상대했다. 가끔 일본 민간인들도 드나 들었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프랑스가 제출한 베트남 여성의 진술서에는 "일본인이 프랑스 병사와 함께 생활하던 여성들을 위안소로 강제적으로 보냈다"고 적혀있다.

또 중국의 군사위원회행정원이 46년 5월27일 작성한 자료에는 일본군이 구이린(桂林)에서 저지른 잔학행위에 언급 "각지에서 여공을 모집한다며 위안소로 보내 짐승과 같이 살며 일본군의 쾌락을 위한 도구가 됐다"고 나와있다.

도쿄재판은 구이린 잔학행위에 대한 판결에서 "공장을 설립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여공을 모집했다. 이렇게 모집된 부녀자들을 일본군을 위한 추악한 일에 종사하도록 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야시 교수는 이 같은 자료들에 대해 "각국이 작성한 공문서로, 판결에서도 강제(연행)했음이 사실로 인정됐다"며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범재판을 수용한 이상 이러한 문서의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lhk@yna.co.kr (끝) <모바일로 보는 연합뉴스 7070 NATE/ⓝ/ez-i>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jamanber 12-01-13 13:33
 115.♡.♡.212  
점령된 적국의 영토에서는 그랬을 수가 있음.

근데 조선은 이미 일본의 합병되어, 조선인이 법적 일본인으로 된지가 이미 30년이 넘은 상태였음. 적국의 민간인과 조선인은 완전히 다른 상황.

또한 색시장수(업주)들에게 자금만 빌려주면 알아서 모집해와서 돈도 다 갚아서 군이 손해볼 것이 전혀 없는데, 뭐하러 조선에 대폭동이 일어나도록 조선 처녀들을 군이 출동해서 강제로 잡아감? 앞뒤가 맞지 않은 것임. 고작 조선인 처녀 놀렸다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는 판임.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함.
          
발렌티노 12-01-13 13:37
 112.♡.♡.12  
그럼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강제 합병은 왜 했을까요?
아.. 이것도 자발적??

그리고 점령된 적국의 영토에서는 폭동이 날 확률이 더 높으니 더욱 돈으로 모집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거임.
          
라구니 12-01-13 13:42
 14.♡.♡.211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삼

한 위안소에서 돈받고 일하는 위안부가 있고 돈 안받고 강제로 끌려온 위안부가 같이 있다는게 말이 됨?

당시 일본군 병사가 위안소의 누구한테는 돈내고 하고 누구한테는 돈 안내고 한다는게 앞뒤가 맞음?
aviation 12-01-13 13:34
 58.♡.♡.20  
jamanber 님/
군대는 다녀오셨나요? 전쟁중에 콘돔이 왠말이며, 님이라면 돈 몇푼 벌려고 폭탄밭에 자식을 팔겠습니까? 게다가 님이라면 곧 죽을지 모르는 해외에 거기다 전쟁터까지가서 몸을 팔겠습까?
왜 만주에 당시 조선족이 많은지 일본에 재일한국인이 많은지 생각해보세요.
마지막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보상도 보상이지만 일본의 *공식사죄*를 더 요구하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보상도 아니지요 당시  받지못한 ....
가생이 1년눈팅족 덕분에 가입하게 되네요 대단하십니다.
생각좀 깊게해보세요 ㅡㅡ
라구니 12-01-13 13:44
 14.♡.♡.211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 돌아온 문옥주라는 위안부의 자서전을 보면 5천엔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5천엔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함. "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해방 60주년을 맞아 오는 15일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아름다운사람들 펴냄)를 출간한다.

이 책은 지난 해 훈 할머니의 일대기에 이어 시민모임이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기획한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 시리즈 중 두 번째로 원 저자는 일본인이다.

`버마전선의...'에는 1936년 16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만주와 동남아시아 미얀마에서 일본군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하며 갖은 고초를 겪은 문옥주 할머니의 한 많은 생이 기록돼 있다.

문옥주 할머니는 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자신이 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혀 관심을 모았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 보상청구사건의 원고로도 활동했다.

그는 또 위안부 시절 군인으로부터 팁을 받아 저축해뒀지만 이후 돌려받지 못한 군사우편저금에 대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반환을 요구하는 등 일본군 피해자의 진실규명과 권익 찾기에 매진하다 9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옥주 할머니도 일본 헌병대에게 끌려간 거라는데?
시라프넬 12-01-13 13:45
 112.♡.♡.61  
오늘도 나의 선입견은 더더욱 '정설'로 굳어지는구나.

'딴나라당 지지하는 인간들은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상식 이하로 아무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나도 내 선입견이 싫은데, 아직까지 이걸 깨뜨려준 인간은 아직 한 놈도 없었음.
KYUS 12-01-13 13:48
 122.♡.♡.16  
jamanber 님/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지
당신 사고방식이라면, 당신이 남자라고 치고,
당신은 돈좀 벌기 위해 당신의 후장을 일본군 호모들 정액 변소를 자처해 4~50명에게 매일 당하면서 몇 년 이나 내놓겠다. 이거군. 그것도 내일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발렌티노 12-01-13 13:48
 112.♡.♡.12  
졸라 적절한 비유 ㅋ
     
시라프넬 12-01-13 13:55
 112.♡.♡.61  
아, 정말 다구리 모드는 나도 싫어하는데(확실히 다구리 치는 군중에 섞이는 것보단, 억압받는 소수의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이 졸라 멋있지 않음? ㅋㅋ)

지금만큼은 군중심리에 신나게 휩쓸려 다구리 치고 돌 던지고 밟아주고 싶네...정말 짜증남...

뭘 많이 알아도 꼭 저 쪽으로만 빠삭한 거 보면 정말 이 사람은 교육받은 알바가 아닌가 싶기도 함.

미리 준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따박따박 데이터 들이미는 것도 그렇고...ㅉㅉ
라구니 12-01-13 13:56
 14.♡.♡.211  
장삼이사 줄거리

기차 안은 지저분하고 혼잡하다. 한 젊은이가 내뱉은 가래침이 '나'와 마주 앉은 신사의 구두 콧등에 떨어졌다. 그 가래침을 털어 내느라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그 신사는 주위 사람에게 반감을 산다.
두꺼비 상판의 그는 옆에 젊은 여자를 감시하는 눈빛이다. 차표 검사가 시작됐을 때 여자는 '그가 가져가서 차표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변소에 갔던 것이다. 그러자 입방아가 시작된다. '당꼬바지'가 돈벌이로는 색시 장사가 최고라고 떠들자 '가죽 재킷'이 맞장구를 친다. 결국, 그 신사가 화제의 중심이 되어서 갈보 장사를 한다고 흉들을 보기 시작한다. 신사가 돌아온다.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문다.
그러나 신사는 장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옆의 여자가 제 남자와 정분이 나서 도망을 가는 바람에 다시 찾아오느라고 애를 먹었다면서,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으려고 하다가 히히히 웃고 만다. 승객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때 '당꼬바지'가 "무슨 실연이냐, 정말 사랑하다가 붙잡혀 왔으면 혀라도 깨물고 죽을 일이지 저렇게 쉽게 따라오겠느냐?"고 반문한다. 여자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S역에 도착하자 한 청년이 다가와 옥주년이 달아났다고 하자 신사는 청년의 뺨을 친다. 신사가 내리고 난 뒤 승차한 그 청년은 여자의 뺨을 몇 차례 때린다. '내' 눈과 마주친 여자의 눈은 울음을 참고 있다. 여자는 변소로 간다. '나'는 그 여자가 정말로 혀를 빼물고 자살을 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그러나 청년은 기차가 무척 빠르다고 하며 태연하다. 여자가 돌아온다. 그새 화장까지 고치고 분까지 발랐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옥주년도 잡혔어요?"하고 묻는다. '나'는 여자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반가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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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삼이사 전체 내용: http://snsj7537.co m.ne.kr/ssol/8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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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이사에 나오는 색시장사와 위안부 모집과는 상관이 없다라는 걸 알 수 있음
라구니 12-01-13 14:19
 14.♡.♡.211  
"하루에 40명을 받았다고 지면 위안부 몫이 20명. 화대가 30엔이라 치면 한달이면 900엔, 1년이면 1만엔이 넘음."

하루에 40명을 받았다고 치면 한달에 1200명, 1년에 14400명이라는 얘긴데 이게 가능하긴 함??
     
aviation 12-01-13 14:29
 58.♡.♡.20  
그러니 일본군인들 그것들이 죽일것들이지요!!!(그놈도 아깝습니다, 것입니다. 것!)
          
라구니 12-01-13 14:32
 14.♡.♡.211  
아니 난 글쓴놈의 "위안부는 돈벌러 간거다. 많은 돈을 벌수 있었다."라는 내용을 반박할려는 건데...
               
aviation 12-01-13 14:38
 58.♡.♡.20  
헉 난독증!? ㅜㅜ
오늘 열 엄청 받아서 많이 흥분했네요 ㅎㅎ;
 내가고자라… 12-01-13 14:38
 58.♡.♡.189  
ㅋㅋㅋㅋㅋㅋㅋㅋ 웃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yoee 12-01-13 14:43
 58.♡.♡.243  
간단한 반론 두어가지,

1.  위안소 업자들에게 두당 1천엔을 선대금 조로 대부해주었다고 함.
= 부모가 돈을 받고 팔았다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2.  깜짝 놀랄 만큼의 거액을 벌어 금의환향(?)한 경우도 있었으며,
= 역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창녀질을해 돈을벌어 금의환향 누가 했다는건지?

3. 문옥주라는 위안부의 자서전을 보면 2만5천엔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함.
= 그 모은돈의 지급을 일본정부가 거부했다는겁니다만? 문옥주 할머니또한 사기 인신매매를 당했습니다.
위안부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정부를 반박하기위해, 재판에서 관련자료를 공개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 지속적으로 지적되는것은 "강제성" 과 "사기" 입니다.
모집업자들은 공인으로 일하게해준다 라는 사기를 쳐, 강제적인 인신매매를 한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관리책임과 통솔을 한 주체는 일본군대 였습니다. UN 인권조사에서도 지적되는 사실입니다.

즉, "자발적"이고도 "강제성"없는 창녀모집이 아니라, "강제적"이고도 "사기성"있는 인신매매라는 결론입니다.
jamanber 12-01-13 14:53
 115.♡.♡.212  
ㅉㅉ 팩트만 이야기해도 이리 흥분들 하니...

어떤 것이 더 개연성있는지 좀 본인들 머리로 생각을 해야지요. 일본군에서 뭐하러 조선 처녀들을 잡아가요? 조선에서 폭동 유발할 일이라도 있어요? 업주들한테 알선자금 빌려주면 나중에 돈도 고대로 돌아오는데.

그리고 업주들도 저게 쏠쏠한 장사인데 위안부들 인력 관리 잘 해야 돈을 버는 거지요.
     
yoee 12-01-13 14:55
 58.♡.♡.243  
?

즉, "자발적"이고도 "강제성"없는 창녀모집이 아니라, "강제적"이고도 "사기성"있는 인신매매라는 결론입니다.
          
jamanber 12-01-13 15:13
 115.♡.♡.212  
자기 딸을 팔아먹는 조선인 부모 입장에서는 자발적인 인신매매에 참여한 것이지요. 먼곳으로 식모 월급 8년치를 선불로 주고 데려간다는데, 과연 얼마나 좋은 곳이라 생각해고 보냈을지는 의문이지요.

물론 당하는 딸 입장에서는 강제적이고 사기성 있는 인신매매가 맞습니다.
               
yoee 12-01-13 15:22
 58.♡.♡.243  
다시 사실만을 확인드립니다.

1. 조선인 부모 입장에서는 자발적인 인신매매에 참여한
= 돈을받고, 창녀로 판다는것을 사전에 명확히 알고 딸을 팔았다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2. 당하는 딸 입장에서는 강제적이고 사기성 있는 인신매매가 맞습니다
= 이것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피해자는 딸. 스스로 자발적 창녀가 된게 아닙니다.
     
newtype2090 12-01-13 15:04
 121.♡.♡.205  
팩트?????
지나가던 개가 웃겠소.
집안에 90세 넘으신 어르신들 있으면 물어보시오.
왜 그 당시에 조혼이 유행했었는지...
아직 그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상이 의심스러운 몇몇 뉴또라이들이 만든 자료만 팩트라?
     
라구니 12-01-13 15:09
 14.♡.♡.211  
반증을 들이대도 팩트래 ㅡㅡ

당시에도 사창은 있었음. 다만 사창과 위안부는 전혀 다른 개념임.

니가 써놓은 글을 보면 사창과 위안부 이야기를 적절하게 혼합해 둔거임.
          
jamanber 12-01-13 15:14
 115.♡.♡.212  
ㅉㅉ

한심한 중2병 환자로구만.
               
라구니 12-01-13 15:23
 14.♡.♡.211  
관심병 있는 사람은 너님인듯

1. 소설 장삼이사에 나오는 색시장사가 위안부 모집과는 상관없었다. -> 위안부였다면 눈이맞아 도망갈 수 없었다.

2. 문옥주 씨는 일본 헌병한테 끌려가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이야긴 쏙 빼먹었음. 아예 문옥주 씨 이야길 하질 말던가.
     
aviation 12-01-13 15:15
 58.♡.♡.20  
jamanber 님/
정말이지 말이 안나옵니다.
폭동? 아니지요 독립운동과 만세운동은 일어났지요. 강제합병후에라도 잘했으면 독립운동은 점점 없어졌겠지요? 헌데 독립운동은 지속됬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업주들? 그것들은 과연 당시에 이름이 한국이름 석자였을까요?
 Assa 12-01-13 15:28
 119.♡.♡.78  
소수의 경우보고  다수라고 하고잇네 저 본문을  보면 근거보댜  추측이 상당수네요 저걸옹호하려면  차라리  환빠들을  옹호하셔요
라구니 12-01-13 15:35
 14.♡.♡.211  
종군위안부     
노라 옥자 켈러 지음 / 박은미 옮김 | 밀알 펴냄
 
오랜 침묵속에 묻혀졌던 한국의 종군위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글로 표현되면서 곧 많은 미국인들에게 신화적이면서도 영웅적인 구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 소설은 연민이나 증오에 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힘과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 작가 션윙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에 담겨진 순수한 곡조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의 강처럼 남아 당신의 몸 속에 구절구절이 흥얼거린다. - 작가 루이스 앤 야마나카

노라 옥자 켈러는 아주 우아하게 시와 유머까지 곁들여 자신의 조상과 독자들에게 이 책을 명예롭게 안겨주었다. 「종군위안부」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을 위한 치유제이다. - 작가 산드라 시스네로스

 

 

옷고름 입에 물고  남북 종군위안부 15인의 한맺힌 증언   
이토 다카시 사진,글 | 눈빛 펴냄

저자 소개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1952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했다. 일본사진가협회(JPS)회원이자 일본 디자이너 학원 나고야교 사진과 보도사진 강사로 있다.
사진전으로는 <핵을 거부하는 사람들>(1982년), <원폭기민 - 한국, 조선인 피폭자의 증언>(1987년), <사할린에 버려진 사람들 - 한국, 조선인의 증언>(1990년), <일본 할머니 - 재한 일본인 부인의 전후>(1991년)이 있으며, 저서로는 사진기록「원폭기민 - 한국인, 조선인 피폭자의 증언」(1987),「사할린에 버려진 사람들 - 한국, 조선인의 증언」(1991),「침묵을 깨뜨리고 - 종군위안부」(1993년, 풍매사) 이 있다.
책 표지 글
일본군은 장병들의 성적 욕구를 처리할 대상(군대 전용 성노예 즉 종군위안부)으로 삼기 위해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여자들을 강제로 모집해 끌고 갔다. '군위안소'는 중국,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버마등 일본군이 점령했던 나라들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 조선 그리고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그리고 사할린 등지에 설치되었다.
'군위안소'에 있던 일본 여자들은 가난 때문에 '유곽'에 몸을 판 '창부'들로서 본의는 아니였다고는 하지만 군인을 상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간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일본 이외의 나라 여자들은 자기 의사에 반해 군인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조선, 대만에서는 경찰 또는 군이 직접 여자들을 납치한 일도 있었고, 군에 드나드는 업자들을 이용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등 감언이설로 속여 끌고 간 경우가 많았다. 일본 본토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오키나와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속여 끌려가곤 했다. 일본군은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멀리 점령지역에까지 군용선을 이용해 끌고 갔다.

'군위안소'의 여자들은 엄중한 감시망 속에서 은밀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견디기 힘들어 도망치는 여성들도 있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외의 사람들은 일본이 팽망 할 때까지 구속, 감금된 상태에서 장병들을 상대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와같이 군인의 성처리 상대뿐만 아니라 당시 부족했던 일본인 종군 간호원의 보조원으로 일을 시킨 예도 있었다.
 


부끄러운 건 우리가 아니고 너희다 - 제8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
 

책소개

제8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살아온 김윤심 할머니의 수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1973년 일본에서 출판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센다 가고千田夏光 지음)라는 소설이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위안부(慰安婦,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s)라는 단어 자체가 이전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군인들 사이에서 당시 군위안부는 ‘군인 오락소’ 혹은 ‘특급호텔’로도 불렸을 정도인데, 일본 정부는 30여 년 가까이 ‘위안부의 강제 연행 사실’을 암묵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인, 1988년 2월. 한국교회 여성 연합회 윤정옥을 비롯한 세 명이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흔적을 찾아 일본과 아시아 각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그리고 2년 후 1990년 1월 4일부터 24일까지 한겨레신문에 4회에 걸쳐 ‘정신대의 원혼 서린 취재기’란 제목의 글을 연재했고,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각종 여성지원단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듬해 1991년 8월 한국 내에서 최초로 김학순 할머니(1997년 별세)에 의해 위안부의 역사적 실제와 피해상이 구체적으로 증언되었고, 92년 2월부터는 한국정부에서 피해자 신고센터를 개설하여 위안부들의 신고 접수와 피해 증언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강덕경 할머니도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고 그해 가을 ‘나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일본 군부는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1934년 만주사변 이후로 설치하기 시작한 위안소를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1937년 12월 11일 상해 파견군은 중지나 군 사령부로부터 위안소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사병들의 민간인 강간 방지와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해서 수많은 동아시아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기 시작한다. 조선, 중국을 비롯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의 수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는데, 당시 상해로 보내지기 위해 계획된 위안부 여성만 3천 명이 넘는다.

위안부로 보내진 여성들은 대부분 열악하고 빈곤한 생활을 하던 하층 계급이었고, 조선인 모집업자들은 좋은 공장이나 군병원에 간호부로 취직시켜준다고 속여 이들을 데리고 갔다. 심지어 친아버지가 딸을 파는 인신매매 형태의 동원도 있었다. 1938년 들어 중지나파견군을 비롯한 일본 군부는 전선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진위안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위안소 설치와 이용 규정에 관한 토의를 시작한다.
     
aviation 12-01-13 15:56
 58.♡.♡.20  
라구니님 좀 대단하신듯 !
          
시라프넬 12-01-13 16:23
 112.♡.♡.61  
미투... jamanber 같은 객관병자들은 우리같은 정상인의 귀차니즘(자료 찾기 짜증 나서)을 먹고 산다는 얘기가 있는데 라구니님이 계셔서 그나마 좀 나은 듯요...ㅋㅋㅋ
밀프리먼 12-01-13 16:46
 175.♡.♡.92  
헐 대박분란 . .

근데 거게 사실이다 처두., 위안부할머니들 일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된다는 명분에는 문제가 없잖아??

부모가 아무리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해도 그 딸들은 엄연한 피해자인데?

민족감정을 떠나서 보편윤리적으로도 보상요구는 당연하거임.

그리고 이거 출처가 어딤. 이게 진짜 정설임????
Kurt 12-01-13 18:44
 61.♡.♡.138  
마르크스 개론 글에서 이 사람을 조금이나마 좋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가생이의 보수 회원분들이 당연히 jamanber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이 사람만 엄청 특이한 한 명일 것이다...
('현실론자' 포함해서 두 명 되겠구나...)

처음엔 뉴라이트 교수님들은 근거가 있고 그에 반박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하더니, 근거와 자료들이 쏟아지니 이제 들고 나온 근거가 고작 "개연성", "상식"...인간이 이토록 어리석을 수도 있다니 놀라울 뿐. 논리로 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 않을까...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논리로 이길 수는 없지.
     
jamanber 12-01-14 01:30
 112.♡.♡.25  
위에 근거라고 들고 온 것들은 그냥 일방적인 진술들이에요. 이영훈, 안병직 교수 책이라도 읽어봤나요? 학계에서 이 분들 연구에 대해 제대로 근거 들어 논문으로 대적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랍니다. ㅉㅉ

당신이 날 좋게 생각하든가 말든가는 알아서 하세요. ㅎㅎ
          
Kurt 12-01-15 20:02
 125.♡.♡.141  
그분들의 논문이나 책들이 상식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고, 제가 안 읽어 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은 읽어 봤느냐고 물어보시면 '부끄럽지만 읽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보통 시민의 입장에서 안병직 교수의 책을 안 읽어본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생각되네요. 불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 보다는 그 책에서 주장하는 명제들의 근거를 풀어 주시는 걸 택하시면 경청하겠습니다.

학계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세상 어떤 이론이든 대적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들립니다. 권위에의 우상에 호소하지 마시고, 왜 안병직 교수의 말이 옳고 사회의 majority를 차지하는 이론이 틀린지 논리적으로 말씀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제가 책을 내면 누가 대적을 해 줄지 모르겠네요.
그럼 제가 낼 책도 100% 옳다고 보면 되겠군요.
제가 서울대 교수가 아니라서 과장의 표현인 것 같긴 하네요.
요점은, 누가 썼느냐 보다는 내용에 집중해서 설득해 달라는 겁니다.
님께서 그 교수님들의 책을 읽으셨다면, 위의 댓글들에서 하는 반박들에 대해서 속시원하게 답변해 주시면 되겠지요.
예를 들면, 자발적으로 딸을 팔았다는 거에 대해서 근거가 없다고 하시는 댓글들이 보이는데, 이럴 땐 시원하게 역사 기록 하나 까 주시면 되는거죠.
읽어보신 분이 좀 잘 소개해 주세요.
근거와 논리로 말이죠.
구경꾼 12-01-15 10:25
 218.♡.♡.88  
객관적으로 봐도 인간이 할 짓이 아닌 천인공노할 사건을
이미 논파된 소수이익집단의 논리로 열심히 옹호하는걸 보면
인륜도덕을 듕궉이나 닐본에서 배웠나봄.
 자갈치 12-01-20 20:16
 211.♡.♡.15  
'식민지 근대화론'
일본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야 자기들이 정당했다 이거지. 자기들은 선이라 이거야.
지금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서 인정을 안하고 교과서 왜곡하는 것도 일맥 상통하는 거야.
이사람 한국인인지 조차 의심스러울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