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당시 조선에서 여자애들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 한 달에 10엔 정도 받았다고 함.
근데 일본군에서 위안부 1명의 모집을 위해 위안소 업자들에게 두당 1천엔을 선대금 조로 대부해주었다고 함. 당연히 업자들이 중간에서 일부 떼어먹었을 것인데, 딸을 파는 조선인들도 그리 순박한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고 적어도 500엔-600엔 정도는 받았을 것으로 생각됨. 이것은 식모살이해서 벌 수 있는 소득의 약 5년치에 해당함.
1941년 출간된 최명익의 '장삼이사'란 소설에 따르면 색시장사(위안소 업자)들이 부모들에 지불한 몸값은 1천엔이었다니 거의 떼먹지 못했는지도 모름.
이렇게 받은 선대금을 위안부들이 화대에서 조금씩 갚아나갔다고 함.
일본군 위안소에서의 이용 요금은 병사 1인에 1-2엔이고 병사 한달 월급은 7-10엔이었다고 함. 이용 시에는 콘돔 의무화. 수입금은 위안부와 업자가 절반 씩 반띵. 위안부는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음(미리 받은 선대금, 계약 기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임. 현대의 창녀들도 조폭 업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음)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가 29곳이나 되었는3데, 박일석이란 자가 경영한 '카페 아세아'란 이름의 위안소는 1937년 자본금 2천엔으로 시작하여 1940년 자본금 6만엔으로 번창했다고 함.
중국 한커우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여기에 경자란 이름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는데 이미 3만엔을 저축했고, 5만엔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함. 선대금을 다 갚고 계약 기간을 채운 상태에서는 위안소에서 나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음.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고, 기간이 지나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음. 이게 가능한 것이 하루에 40명을 받았다고 지면 위안부 몫이 20명. 화대가 30엔이라 치면 한달이면 900엔, 1년이면 1만엔이 넘음. 그러니 이악물고 몸관리해가면서 모으면 수만엔 모은다는 것도 가능할 듯.
물론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고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하고 술과 아편에 찌들어 빚만 늘어나는 불쌍한 여자들이 많았음(요즘의 창녀들처럼)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 돌아온 문옥주라는 위안부의 자서전을 보면 5천엔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5천엔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함.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엔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울 부탁하였음. 그 병사는 야마나시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함.
물론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1.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매춘업을 위해 부인과 아동의 매매를 금지한 1911년의 국제조약을 위배하였음. 이 조약에 의하면 본인의 동의없이는, 또는 21세 미만의 미성년의 경우는 동의가 있더라도 매춘업을 위해 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은 불법이었음. 비록 위안소 업주들의 손을 빌려서 한 것이지만, 일본군에서 선대금도 빌려주고 이러한 행위를 조장 방조한 것은 사실.
2.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거나 선대금을 갚지 못한 위안부는 사실상의 노예로 반감금 상태에 있었으므로 노예 노동이나 다름없었는데도 일본군과 정부는 이러한 행위를 방조하였음.
이 이유 때문에 일본 정부는 책임이 있음.
하지만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것처럼 일본군에서 무슨 마적패거리처럼 쳐들어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잡아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화임. 실제로는 부모들도 1천엔(식모살이해서 8년 동안 안 쓰고 모아야 벌 수 있는 거액)의 돈을 받고 자기 딸들을 인신매매한 것인데, 이 정도 거액을 받고 팔면서 무슨 수상하지 않은 일을 시킬리 없다는 것은 알았을 것임.
또한 업주의 착취 등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 만큼의 거액을 벌어 금의환향(?)한 경우도 있었으며, 계약 기간 지나고, 선대금을 모두 갚은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 전쟁이 끝난 후에 1400여명의 위안부를 상하이와 한커우에서 무사히 조선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 인간적인(?) 업주들도 있었다고 함.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들은 3000만원 상당의 위로금과 월 1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다고 함. 이 때 그전에 일본정부에서 보조한 일본 시민단체(아시아 여성기금)에서 수천만원 보상 받은 할머니들은 이 보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때문에 할머니들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고 함.
현재 정대협과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 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사과와 보상을 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일단 국가의 공식적인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 관련하여 일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임.
개인적으로는 저 정도 보상받았으면 된 것이 아닌가 싶음. 전시에 창녀들이 군대를 따라다니는 업자들에게 팔려가든 자의로 가든 가서 군인들 돈 뜯어내는 것, 그리고 국가와 군에서 이를 묵인하던 것은 유사 이래로 쭉 있어왔던 일이고, 이것이 범죄라면 범죄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로 보상을 받은 것도 역사상 초유의 일이 아닌가 싶음.
그리고 한국 근대사학자들은 좀 일본군에서 마적패처럼 쳐들어와 순결한 조선처녀들을 잡아갔다는 거짓부렁좀 교정했으면 싶음. 그 할머니들이야 뭐 자기 부모가 식모월급 8년치 받고 자기를 포주한테 팔았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어쨌든 부모의 인신매매도 자기 의사와 달리 잡혀간 것은 마찬가지긴 하니까 이해는 가지만... 적어도 학자나 공식 언론이라면 좀 이런 건 교정을 해줘야지.
위안부 관련하여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는
1. 일본군이 마적패처럼 처들어와 조선 처녀들을 잡아간 후
2. 군대에 처박아놓고 매일 백여명의 일본군의 정액받이 노예로 삼았다
이것인데... 일단 강제로 잡아간 것은 아니고 부모의 인신매매가 대부분이었을 것임.
또한 만약에 하루 백여명의 군인을 받았다면 위안부 몫이 대략 50엔 - 100엔인데 이 돈은 식모살이해서 버는 월급의 반년 - 1년치에 가까운 거액임.
일본군 150명 정도당 1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군 월급은 위안소를 4-5회 정도 찾을 수 있는 돈에 해당함. 일본군이 모두 붕가붕가에 미친 놈들은 아니었을 테니 평균적으로 2.5회 정도 위안소를 찾았다고 치고, 그럼 위안부 1명이 평균 1달에 일본군 400명 정도를 상대해야 함. 그럼 월수입은 300엔 정도로 생각됨. 물론 생필품을 업주로부터 사는 체제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돈을 다 모을 수는 없겠으나 반만 모으더라도 150엔이며, 이는 식모월급 1년치 이상에 해당함. 평균적으로 1년에 1천엔 이상은 모았을 것으로 보임.
그럼 몇만엔 이상 모은 위안부는 무엇이냐? 당연히 특정 위안소에서 잘 나가는 위안부가 있었을 것이고, 이런 위안부는 하루에 수십명을 상대했을 것이므로 돈을 잘 벌었을 것임. 아마 업주도 이렇게 인기가 많은 위안부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 당연히 인기가 없어 파리 날리고 선대금을 갚기는 커녕 매달 생필품도 못 사서 빚만 느는 위안부도 많았을 것임.
또한 전쟁 중반에 선대금 다 갚고 돈 벌어서 날아간 소수의 위안부는 괜찮으나,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는 업자들도 다 알거지 되었을 것이고, 위안부들이 애써 모은 돈도 휴지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일본 국가와 군이 전쟁에서 창녀 알선 업주들을 조장 방조한 것이 큰 문제인 것은 사실. 그런데 노예 사냥 식으로 잡아갔다는 것은 그냥 전설. 실제로는 일본인 위안부가 더 많았다는 것이 유력. 왜냐면... 군대가 애초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말이 잘 통하는 일본인 위안부를 델고 있는게 업주가 돈 벌기 더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
진상을 알고 나면 아직도 이 문제로 매년 열화와 같은 민족 감정을 불태울 일인지 좀 이해가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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