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24 02:51 기타 학술
이영훈 교수의 '군위안부' 인식의 문제점
이영훈 교수와 '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졸업 논문을 썼습니다. 일주일 전에 제출한 건데, 오늘 교수님을 찾아뵙고 논문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나눠봤죠.
발표 수업도 '군위안부'가 주제였는데, 준비가 제대로 안된 나머지 제 관점이 많이 들어갔어요. 발표를 들은 분들 가운데서는 해결 방안과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실망했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 가운데는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과 문제 해결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셔서, 저랑은 약간 생각이 달랐습니다.
어쨌든 교수님께서는 논문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봐 주셨습니다. 그러나 1차 사료가 아닌 2차 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술 논문으로서는 결함이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상대의 입장을 논박할 때, 상대의 주장이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수 있다면 그 논쟁은 이긴 거죠. 이 논문에서 그러한 점이 부족했던 것은 1차 사료에 기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해주셨어요. 물론 학부 졸업논문에서 그 정도의 엄정함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리고 글에서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도 말씀해주셨는데, 간간이 논리적인 비약이 보이기도 하며, 결론에서는 한일협정의 문제('군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한)를 설명했어야 되는데, 그 점이 없고, 위안소의 형성 시기에 대하여 사실 관계의 충돌이 있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과거 식민 체험을 한 국가에서 민족주의의 의미는 식민 종주국의 그것과 다르지만, 이 문제는 견해의 차이로 남겨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적해주신 사항과 더불어 문장이 좀 어색한 데가 몇 군데 눈에 밟히지만, 일단 올려놓습니다.
논문 제목은 몇 차례 바뀌었지만, 주제는 이영훈 교수의 '군위안부' 인식의 문제점으로 보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송구스럽게도, 글이 굉장히 긴 편입니다. 각주는 빨간 줄로 처리했고요.
서론
일제하 ‘군위안부'(‘위안부’와 ‘정신대’라는 단어는, 제도상으로는 엄연히 달랐지만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 둘의 차이를 정확히 구별할 방법은 없었으며 그들은 이들을 같은 제도로 인식했던 것 같다. 동네 구장의 경우로 “데이신타이”에 차출되었다 바로 ‘군위안부’가 되어 대만까지 끌려간 사례도 있다.(「광동,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전전하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7)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는 자발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성노예’라는 단어의 경우, 이 말을 사용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사회에 정착된 ‘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의 문제는 여러 가지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식민지 조선에 가해진 종주국 일본의 폭력과 식민지 시대 말기 민족정책을 환기시키는 민족문제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군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그러한 정책이 다른 아시아 여성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여성 문제로서의 성격도 갖추고 있으며 아울러 인신매매라고 볼 수 있는 강제 연행과 취업 사기, 여성들에게 직접 가해진 폭력 등이 당사자인 여성들의 삶에 있어 그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인권 문제로서의 성격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이 가운데서 어느 한 측면만이 ‘군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일본에서는 1990년 6월 6일 사회당의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이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사죄 및 보상을 촉구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11월 1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발족하면서 ‘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님이 생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기자 회견을 통해 당시의 경험을 밝히면서 이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양심에 기대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으며 일본 정부는 국민 기금 조성 등 책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 혹독한 체험을 한 생존자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으며 더구나 이들이 노령임을 고려할 때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군위안부’ 문제는 양국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2004년 들어 세간에 ‘군위안부’ 문제를 환기시키는 사건이 두 건 있었다. 하나는 2004년 2월, 탤런트 이승연이 ‘군위안부’를 소재로 누드를 촬영했다가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나눔의 집을 찾아 사죄한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2004년 9월 2일 방영된 MBC 100분 토론의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 편에 출연했던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가 ‘군위안부’ 문제와 성매매를 비교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다. 앞선 이승연 사건의 경우 논란이 가라앉았고 당사자가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일단락된 상황이다.
반면 이영훈 교수 사건의 경우,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숨어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일관된 소신과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훈 교수가 사람들의 공분을 샀던 이유는 ‘군위안부’ 제도가 상업적인 공창제였던 것처럼 주장했다는 데서 촉발되었지만 이 논문에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영훈 교수가 논쟁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했던, 자기 성찰적인 과거반성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짚어보고 ‘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관점의 확립을 모색하고자 한다.
본론
1) 이영훈 교수 ‘군위안부’ 관련 발언 파문의 경위
2004년 9월 2일 밤 11시 방영된 MBC 100분 토론의 주제는 과거사 진상규명 논란이었으며 찬성 측에서는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가, 반대 측에서는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과 월간조선의 우종창 편집위원, 이영훈 교수가 참석했다. 토론 중 이영훈 교수는 과거 청산을 정치권을 통한 법률로 해결한다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며 자기 고백적, 자기 성찰적인 과거사 청산을 바람직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런 가운데 이영훈 교수는 한국전쟁 때 위안소가 있었고 거기에 대한 우리의 자기 성찰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에 송영길 의원은 일제 시대 ‘정신대’의 문제와 미군부대의 문제를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한 이영훈 교수의 반박은 표현에는 찬성하지만 사실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었고, ‘정신대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진행자 손석희 아나운서의 질문에 대해 그는 “하나의 범죄 행위가 (중략)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중략)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 업소 주인들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문제의, “지금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여자를 쇼윈도우에 가둬놓고 성매매를 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라는 발언과 더불어 “정신대 문제와 (중략) 미군 위안부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중략) 대단히 유감이다.” “성노예를 관리한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민간인 문제를 따지지 말자는 건가.” 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게 된다.("정신대는 한국업소 주인들이 관리... 조선총독부 강제동원, 누가 주장하나" [MBC 100분토론] 이영훈 서울대 교수 '정신대=성매매' 발언 파문 박형숙, 이한기 기자, 2004년 9월 3일.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185568&rel_no=1
) 다음 날인 9월 3일 인터넷 뉴스 사이트인 오마이뉴스에는 “정신대는 한국업소 주인들이 관리... 조선총독부 강제동원, 누가 주장하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열린우리당 여성위원회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이영훈 교수의 교수직 사퇴를 촉구하고 이영훈 교수는 언론에 배포한 9월 5일자 해명서를 통해 ‘일본군 성노예’가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였다는 것은 자신의 발언이 아닌 악의적 해석으로 심히 유감스러우며 일본군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의 범죄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제 동원에 협조하고 위안소를 운영한 업주와 위안소를 찾은 일반 병사들에게도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9월 6일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영훈 교수는 ‘군위안부’ 피해자들과 성매매 여성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함으로써 공창 논란에 말려들었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창녀로 묘사”(한 네티즌의 표현)(위 기사에서 인용.) 했다는 일반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민족의 딸이자 순결한 여성으로 상정하며, 가부장적 억압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군위안부’ 피해자들과 동일한 성매매 여성들을 ‘더러운’ 여성으로 몰아붙이며 그들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측면을 갖고 있다. 즉 이러한 관점은 이중 기준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군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의 쟁점으로 부각되기 전 강제 동원된 피해 여성들은 성매매 여성들처럼 침묵을 지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훈 교수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다른 한편으로, 이영훈 교수의 동료들은 여론에 맞서 그를 옹호하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반대 여론에 대해 질타를 가했다.
이영훈 교수의, 문제의 발언 이전에 발표한 글이지만 같은 서울대 경제학부의 홍기현 교수는 이영훈 교수보다 훨씬 분명한 논리로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견해를 토로한다.
“말하자면 종군위안부는 군인을 대상으로 민간인 업자들이 성매매를 알선했기 때문에 생겼다. 당시 종군위안부가 지급받은 금액은 우리나라의 일반적 성매매 대가보다 훨씬 높아서, 모집책들이 서울의 사창가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을 돌면서 젊은 여성들을 모아 갔다. 상당수의 종군위안부는 몇 년 정도 일하고 돌아갔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방치된 여성들은 대가로 받은 군표를 현금화하지 못하고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제하 우리의 경제사정이 열악하여 우리 여성들이 자발적이든 주위의 강권에 의해서든 성매매 업소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핵심적 사항이며, 이러한 상태를 스스로 떨쳐내지 못했다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결국 우리가 경제성장을 하고 일본과 대등한 경쟁력을 가질 때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한일관계 다시보기」, 『영남일보』2004년 8월 16일자 시론,
http://www.yeongnam.co.kr/yeongnam/html/yeongnamdaily/column/article.shtml?id=20040816.010061131000001 )
이 말이 옳으냐 그르냐는 사실관계를 떠나, 홍기현 교수는 ‘군위안부’ 문제는 ‘사회구조적’이므로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셈인데, 좀 더 대담하게 얘기하자면 홍기현 교수의 경제성장론과 이영훈 교수의 자기반성론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서울대 경제학부가 지닌 학풍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영훈 교수와 홍기현 교수가 ‘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어느 정도 공통된 견해를 지니고 있다고 볼 때, 그것은 아마 과거청산과 ‘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에 있어 일본 정부의 책임 이상으로 우리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즉 ‘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은 일본의 사과 보다는 우리의 자기반성, 혹은 ‘국력의 성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연 완전한 과거사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
2) ‘군위안부’ 문제의 발생과 그 모집 체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는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1932년에 세워진 상해 해군위안소이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위안소 설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군위안부’로 연행된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행 시기는 대개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가 대부분이지만 1933년 혹은 1934년 경 연행된 경우도 드물지 않다.) 1940년 9월 19일 육군성 부관 川原直一이 육밀 제1955호로 관계 육군부대에 발신한 『중일전쟁의 경험에서 보는 군기진작대책』에서는 “성적 위안소에서 받는 병사의 정신적 영향은 가장 심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도 감독은 군기의 유지, 범죄 및 성병의 예방 등에 영향을 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관련 문헌자료집』, 여성부 권익기획과 발행, 2002 p.382) 라 하고 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듯 위안소는 군기를 유지하고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며 현지 주민들을 강간함으로써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고자 설치되었다. 일본 군부가 조선 여인들을 동원한 것은 현지 여인들을 동원할 경우 군사 기밀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 하다.
후술하겠지만 국내 연구가들은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군위안부’의 제도화를 가능하게 했던 여건이 일본 내에 존재했다고 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공창제도다. 일본은 1872년 유곽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근대적인 공창제도를 확립했다. 일본인들의 해외 진출에 따라 추업부(醜業婦)라 불리는 성매매 여성들도 아울러 해외에 발을 디디게 되는데(일본의 에도 시대 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주로 동남아시아 등지로 돈을 벌러 간 여성들을 카라유키상이라 부른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경제력의 일부분은 여성노동력에서 나왔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손쉽고 빠른 것이 매춘이었는데, 이 매춘의 주력이 바로 카라유키상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카라유키상은 세계 매춘 시장 곳곳에 진출했다. 우에노 치즈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내셔널리즘과 젠더』, 박종철출판사, 2000, pp.111~112) 군위안소의 원초적 형태는 1904년 러일전쟁 때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이 1930년대 침략 전쟁을 일으킬 당시 위안소 설치가 본격화되었는데, 초기에는 군이 일본의 지방 정부에 위안부 조달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부터는 일반 업자들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앞서 얘기한 대로 1937년 이후 위안소 설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 일제는 여성들을 ‘유휴노동력’으로 보고, 전시 하에서 남성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여성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방침 하에 이들의 조직과 동원을 준비했으며(“勤勞報國隊則을 강화하여 14세 이상 25세 미만의 미혼여자에게만 한정하지 말고 노동능력이 있는 부인은 계급의 귀천, 가정의 빈부를 불문하고 일정 기간 반드시 근로보국대에 참가 봉사시킴은 물론 공동작업을 실시하여 근로호애의 정신을 함양함과 함께 농번기에는 공동취사 공동탁아소 등을 설치하여 노무상 능률을 증진시킬 것.(하략)” 위의 책, p.484) 그 과정에서 천황의 군대에 복무하는 것은 당연하고 영예로운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 한 예로, 1940년 일제는 농촌과잉노동력을 해소하고 적정한 노무배치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노무 자원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12세부터 19세 사이의 미혼여성 가운데 유휴노동력은 총 232,641명이다.(위의 책, p.3) 근로정신대를 통해 ‘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의 경험이나 마을별로 할당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는 증언 등은 이러한 유휴노동력의 파악이 ‘군위안부’ 연행 등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1938년 3월 4일의 『副官이 北支方面軍 및 中支派遣軍 참모장에게 보낸 通牒案』은 “중일전쟁지에서의 위안소 설치를 위해 일본에서 종업부 등을 모집할 때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하여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또 일반민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것, 혹은 종군기자, 위문자 등으로 불통제(不統制)하게 모집하여 사회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것, 혹은 모집에 임하는 자의 인선이 적절치 않아 모집방법이 유괴와 비슷하여 경찰당국에 검거 취조를 받고 있는 것 등 주의를 요하는 것이 적지 않다. 따라서 장래 이들 모집 등에 대해서는 파견군에서 통제하여 이에 임하는 인물의 선정을 주도적절하게 하고, 그 실시에서는 관계지방 헌병 및 경찰당국과의 연계를 밀접히 하여 군의 위신 보지(保持) 및 사회문제 상 유루(遺漏)가 없도록 배려하기 바란다는 명을 통첩"(위의 책, p.165) 함을 알리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군위안부’ 모집에 있어 이때까지 경찰과 군의 협조 체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8년 이후부터 이러한 혼선은 정리되기 시작하였으며 징집 계통과 업무 분장도 대강 정해졌지만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징집 경로나 통일된 전담 부서가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내의 경우 각 파견군과 육군성이 내무성과 협력하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는데, 내무성이 각 현에 인원을 배당하면 경찰이 징집업자를 선정하고, 파견군이 이를 허가하는 형태였다. 조선의 경우 조선군사령부가 직접 징집을 담당하여 징집업자를 관리했다고 하며 조선총독부의 관련 여부를 밝혀주는 문헌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 및 관헌에 의해 연행된 여성들의 증언이나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등에 ‘위안부 모집’ 관련 기사가 실린 점 등은 조선총독부의 관여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위의 책, p.11)
1943년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전황이 불리해지고 물자와 인력의 동원이 힘들어지자 민간업자에게 위안소를 맡기고 경영하도록 하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이 시기에 들어 강제 연행이 늘어난다.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 여성 등 현지인이 징집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인데, 패전을 앞두고서는 지역별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정진성,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징집 방법은 주로 군인이나 경찰에 의한 유괴와 취업 사기 등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압도적인 것은 취업 사기이며 정식으로 위안부 모집이라는 공고를 통해 진행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 자료 역시 앞서 언급한 신문의 몇몇 광고란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징집된 여성 가운데서는 만 21세 이하 미성년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빈곤한 하층 여성들이 강제 징집의 주 대상이 된 것은, 비교적 어린 연령의, 스스로를 지키는데 취약하며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받기 힘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아래의 경우들은 강제 징집과 취업 사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이다.
“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긴 칼을 차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겐삐(헌병)라 하면 아이들이 다 무서워했다. 겐삐들은 내가 모르는 일본말로 몰아세웠고, 난 무서워서 반항도 못하고 “엄마!”만 외쳐댔다. 엄마가 겐삐의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 놓고 가라”고 하자, 겐삐는 다리로 엄마를 내리찍었다.”(진경팽 증언, 강제숙 정리)(「낯선 땅 대만의 굴 속에서 해군 위안부가 되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7, p.17)
“만 열여섯 살 되던 1937년이었다.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시집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읍에 사는 김씨가 나에게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면서 같이 갈 친구가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베짜는 일을 하는데 월급은 얼마 준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고는 김씨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별안간에 김씨가 와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그때 집에 자주 놀러왔던 옥희와 함께 따라나섰다.”(오오목 증언, 야마시다 영애 정리)(「방직공장에 간다더니」,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6, p.87)
조선총독부의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더 밝혀져야 할 사실들이 많지만, 적어도 위안소 설치와 ‘군위안부’ 징집은 어느 정도 그것을 민간업자가 담당했다 할지라도 전적으로 군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임이 명백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물론 결과 역시 철저히 폭력적이었다.
3) ‘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배경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 주관으로 1993년 12월 18일, 12월 19일 양일간 서울에서 개최한 2차 한일합동연구회에서는 ‘군위안부’ 제도가 민족 말살정책에 기인하는 것인가, 그리고 일제의 식민 정책이 민족말살정책이었나, 동화정책이었나를 두고 양국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한국 학자들이 민족말살정책론을 펼친 반면, 일본 학자들은 민족동화정책론을 펼쳤고, 결국 광범위한 실증적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으로 이 날 토론은 마무리되었다.(이효재,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전개과정」,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1997, pp.321~323)
먼저 ‘군위안부’ 문제를 학계에서 현재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정리해보자. 우선 정대협의 전(前) 공동대표였던 윤정옥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듯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일본 정부의 조선 지배정책이었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윤정옥, 「‘조선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의 일본군 ‘위안부’」, 위의 책, p.275)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이런 시점에서 다른 아시아 피해 여성들과 조선 여성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주장이 도출되는데, 이는 ‘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행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로 굳어진 민족말살정책이란, 황국신민화 정책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민족의 입장에서 동화는 곧 민족의 말살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주장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이론화시키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신용하의 논문에 따르면 황국신민화 정책은 “한국민족을 지구상에서 영구히 소멸시켜 일본인의 심부름을 하는 총체적 천민계층으로"(신용하, 「‘식민지근대화론’ 재정립 시도에 대한 비판」, 『창작과 비평』 98호, 1997, p.15) 만들려 했던 것이므로 황국신민화 정책은 민족말살정책과 동일시된다, 이 논문에 있는 “동화정책이라는 이름의 한국민족말살정책”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아주 분명히 드러낸다. 동화정책이냐, 민족말살정책이냐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여기서는 일제의 1930년 이후 조선 정책을 편의상 민족말살정책으로 규정하기로 한다.
또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본인들의 특별한 성의식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군위안부’라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은 일본에 공창제의 폐습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으며 조선의 식민지화와 더불어 공창제도가 아울러 도입되었고, 일본인들의 해이한 성 관념과 함께 ‘군위안부’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일본 군인들이 ‘군위안부’들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임을 추론한다.(김승태, 「일본군 ‘위안부’ 정책 형성의 일본측 역사적 배경」,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1997) 이 주장은 일본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이라는 민족적 편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있지만 공창제가 ‘군위안부’ 문제 발생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연구자들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항이다.
한편 전시총동원체제와 농촌의 궁핍화 현상에서 ‘군위안부’ 문제의 발생 연원을 찾기도 한다. 전시총동원체제는 전국의 조선인들을 치밀하게 조직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노동력과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휴노동력으로 분류된 여성들에 대한 조직과 파악도 치밀하게 이뤄졌다. 농촌의 궁핍화 현상은 젊은 여성들이 취업의 유혹에 약해지도록 만들었는데, 실제로 ‘군위안부’로 연행된 여성들의 상당수는 빈곤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자기 입이라도 덜어 보려는 생각에서, 혹은 돈을 벌어오려다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앞서 언급했듯 ‘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의 연행수단 가운데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취업 사기였다.(1992년 1월 14일 국내 일간 신문들은 서울 방산초등학교 학적부를 조회한 결과 12살에서 14살 사이의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1944년 정신대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이때 동원된 학생들이 근로보국대로 동원되었는지,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증언에 따르면 ‘건강하고 외모도 괜찮고 집안 살림도 넉넉한 편인 소녀들을 선발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여, ‘군위안부’ 문제가 한 측면에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 기사는 다음의 책에서 인용하였다. 양현아, 「한국인 ‘군 위안부’를 기억한다는 것: 민족주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강요된 침묵」, 『위험한 여성』, 일레인 H. 김, 최정무 엮음, 삼인, 2001) 취업 사기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증언을 살펴보았을 때나 연구에서나 동일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물론 ‘군위안부’ 문제의 발생에는 방금 말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민족말살 정책론에 중점을 두고 ‘군위안부’ 문제가 어떤 배경에서 발생한 것인지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중일전쟁 발발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과 대륙병참기지화 정책에 가속이 가해진 것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총독부 당국이 중일전쟁 발발 후 개설한 ‘시국대책조사회’의 자문 사항에서는 “(조선이) 능히 제국의 대륙경영의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다함과 동시에 나아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조국(肇國)의 대정신을 현현”할 것을 강조하며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의 가급적 빠른 보급을 꾀하여 국체명칭,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2대 교육방침을 전달해서 완전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기약"(『한국사 13, 식민지시기의 사회경제-1』, 한길사, 1994, pp.168~169)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런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이루어진 바 내선일체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황국신민의 서사와 일본어 교육,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등이 강요되었다. 주목할 것은 일제가 실시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통혼 정책인데, 정책 실시 결과 1937년부터 1942년 사이에 거의 100%의 통혼 증가율을 보였다고 한다. 소위 ‘내선일체를 강화하기 위한 시설계획’에서도 내선인의 통혼을 장려할 적당한 조치를 강구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 시설계획에는 동시에 근로보국대의 확충강화를 꾀하라는 사항이 들어가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립한 목적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의 주민을 강간함으로써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방지하고 군인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군사기밀의 누설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는 바, ‘군위안부’의 모집과 동원이 이러한 목적에서 이뤄졌다면 ‘군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배경은 민족말살정책이 아니라 일제의 대륙진출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1930년 이후 형성된 전시동원체제의 문제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이유들은 식민지 정책과의 연관성 보다는 일본군 내부의 문제와 더 큰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조선 여성이 주된 대상이 되었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식민지로 있었던, 그리고 주민들이 잘 조직된 조선에서 여성들을 동원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라는 등의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민족말살정책, 즉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군위안부’ 문제를 고찰한다면 중요한 논리적인 모순에 부딪칠 수 있는데, 즉 조선 여성들을 징집해 군의 성노예로 이용하는 것이 조선 인민의 황국신민화에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군위안부’ 정책과 일본인, 조선인의 통혼 정책은 전혀 상반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위안소 정책은 민족 분쟁 시 타민족을 말살하고자 행해지는 집단 강간과도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전시 강간은 남성 간의 모멸과 위협 수단으로서의 강간, 전술, 전의의 고양과 선전 수단으로서의 강간, 재생산 기능의 파괴와 민족 순화의 의례로서의 강간, 문화, 민족 공동체의 상징적 파괴 수단으로서의 강간 등의 의례성을 가지며 집단으로, 사람들의 면전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일제가 그것을 공개하여 조선인들 전체에게 모멸감을 주려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는 ‘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하세가와 히로코, 「의례로서의 성폭력: 전쟁 시기 강간의 의미에 대해서」,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 코모리 요우이치, 타카하시 테츠야 엮음, 삼인, 2002)
그렇게 봤을 때, ‘군위안부’ 문제는 일제가 강고하게 형성한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여성들을 전쟁 수행을 위해(소위 ‘위안’이 진정 필요했는지 필요하지 않았는지는 제쳐두더라도) 이용한 것이며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군위안부’를 고찰하기는 힘든 것 아닐까. 일제의 조선반도 대륙병참기지화와 전시동원체제,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황국신민화 정책, ‘군위안부’ 정책을 가능하게 한 당시 일본 사회의 성의식,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함께 유입된 공창제의 문제, 조선 농촌의 궁핍화 현상을 아울러 고찰해야 할 만큼 ‘군위안부’ 문제는 다면성을 갖고 있다.
4) 조선인 징집업자의 문제
다시 이영훈 교수 문제로 돌아가서 그의 발언을 확인해보면, 일단 공창제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이영훈 교수가 아니라 송영길 의원이다. 일부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이영훈 교수의 성노예를 관리한 책임이 있다는 말을 오직 그 책임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그는 “하나의 범죄행위가 이뤄지는 것은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민간인들이 가령 팸프. 한국 처녀,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다. 그 명단이 있다."(오마이뉴스 9월 3일자 같은 기사에서 인용.)라고 말하는데, 이 주장이 그의 자기고백적 과거청산론의 쟁점이 될 것이다. 요는, 그들이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청산의 길이라는 것이다.
일단 그가 오해하고 있는 점을 하나 지적하자. 그는 “예를 들어 내가 일본 도서관에서 일본 위안부에 대해 큰 일본학자들이 조사한 많은 자료집을 보았다. 거기는 말하자면 재야사학이라는 사학자들이 참여되어 있는데 2000점 이상의 자기 고백들이 있다. 일본군에 종사할 때 그 업소를 드나들었다고 하는, 자기고백과 여러 회고록들이 있다. 일본 전체가 반성하는 차원에서 전쟁 범죄를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위의 기사에서 인용.)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두 사회가 공히 오랜 동안 가부장제를 고수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한 제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사회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 즉 과거 일본이 치른 전쟁에서 일본 군인으로 복무했던 사람들이 조선인 ‘군위안부’에 대해 “자기고백”과 “회고”를 할 수 있는 까닭은, 그녀들이 다른 민족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저술에서 인용해보자. “그렇다면 왜 ‘일본인 위안부’는 자신을 밝히며 나오지 않는가? 이러한 물음을 ‘맹점’으로 지적하는 하타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떠오를 것 같지만, (중략) 하타 같은 보수파의 언설이야말로 ‘일본인 위안부’가 예전에 ‘존재했던 이유’이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침묵’의 이유이기도 하다.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문제야말로 일본 페미니즘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다."(우에노 치즈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내셔널리즘과 젠더』, 박종철출판사, 2000, p.130)
일본 사회 전체가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자기고백”에 합의한 것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일본 보수파의 인물이 “사실 자신들에게도 부끄러운 과거를 깡그리 파헤쳐서 세계에다 선전하고, 몇 억 원 정도의 돈으로 그것을 보상하라고 요구하다니... 망신살이 겹치는 것이 아니겠는가."(위의 책, p.104)라는 말을 내뱉는 것처럼, ‘군위안부’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 한낱 상대방의 위신 문제로 둔갑하는데,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우선시하는 한국 민족주의가 가진 가부장성과도 조응한다.
이영훈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팸프”인 한국인 징집업자들이 많은 조선 여성들을 감언이설 등으로 징집했으며 징집업자 가운데 몇몇은 직접 위안소를 경영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군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김덕진 할머님 같은 분은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짓을 한 조선 사람이 더 밉다."(「한국정부에도 할말이 많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6, p.57)라고 심정을 밝히고 있으며 황순이 할머님 같은 분은 “일본 남자 하나 하고 한국 남자 하나가 쪼끄만 도라쿠(트럭) 차에서 내려 곁으로 오더라"(「열세 살 어린 나이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9, p.222)며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皇軍將兵 위안부녀 渡來에 관한 편의 공여방법 의뢰의 건』이라는 문건에 따르면 “육군무관실 헌병대 합의 결과, 시설의 일단으로서 前線 각지에 군위안소를 아래 요령에 따라 설치하기로 하”였다며 일본 및 조선에서 부녀를 모집하고 있는 업자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위안부’ 관련 문헌자료집』, 여성부 권익기획과 발행, 2002 p.127) 또한 『上海派遣軍 내 육군위안소에서의 작부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문건에서는 위안부 모집 의뢰인이 상해에 있는 육군 특무기관으로 되어 있다.(위의 책, p.110) 일제가 사회적 반향을 고려하여 모집인의 선정과 작업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있음은 여러 문건을 통해 확인되는데, ‘군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징집업자들의 유형을 정리한 논문에 따르면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거의 엇비슷하지만(위의 책, p.15), 일본인의 경우 경찰 및 군인이 존재하며 특이한 것은 조선인과 짝을 이룬 일본인의 존재가 여러 차례 나타난다는 것이다. 위의 황순이 할머님 같은 경우인 바, 통역, 혹은 조선의 사정에 밝은 자에게 일본인 징집업자가 도움을 얻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군위안부’ 할머님들의 증언에서 간혹 드러나는 ‘조선말을 잘 하는 일본인’의 존재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즉 조선에서 ‘군위안부’로 동원될 여성을 징집하는데 조선의 사정에 능한 편이 일하기에 수월했으리라는 것이다. ‘군위안부’로 징집된 여성들이 대부분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징집업자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정을 추측할 수 있으며, “범죄행위”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존재는 반드시 역사적 성찰과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 역사적 배경과 체제, 즉 가부장적인 식민지 권력의 존재를 앞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군위안부’로 징집된 여성들은 앞서 언급했듯 대부분 미성년자였으며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징집업자들이 징집대상자들보다 연령이 높았으리라는 것은 ‘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선험적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위안소를 운영하는 업자의 나이가 40대라거나 업자를 오빠라고 불렀다는 ‘군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에서 그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현실적으로 ‘군위안부’ 생존자들조차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보다 더 연령이 높은 징집업자들이 얼마나 많이 생존해 있을 것인가. 현재 과거사 규명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시점에서 징집업자들의 자기반성을 진정한 청산으로 운위하면서 법적인 청산을 반대한다는 점은 이영훈 교수의 중대한 오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반성과 법적, 학문적인 과거사 청산 절차는 동시에 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약하고 가로막는 것으로 인식함은 잘못이다.
5) 이영훈 교수의 자기반성론 평가
이영훈 교수는 100분 토론 출연 이후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언론사에 해명서를 배포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저는 위와 같은 일본군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의 전쟁범죄가 그들만의 유일한 책임이 아니라 강제 동원과정에서 협조하고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한국인 출신 민간업주, 위안소를 찾은 일반 병사들에게도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들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자발적이고 성찰적인 고백이 있어야만 진상이 규명될뿐더러 진정한 역사의 청산도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고백과 반성의 범위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일부 군대에서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자행된 여성의 성 착취 문제,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상 방조된 미군기지의 성 착취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책임을 면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책임을 엄중히 물으면서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틀 내에서 자행된 여성에 대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친일 내력 의심되니 호적등본 떼어오라" [현장] 나눔의 집 방문한 이영훈 교수, 할머니들로부터 '냉대' 이한기/김태형(hanki) 기자, 2004년 9월 5일.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185858&rel_no=1 )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막상 그 자신이 가진 한일 양국의 가부장적 특성에 대한 인식은 피상적이기 때문에, 그는 일본에 존재하는 과거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회고담을 “전쟁범죄를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음은 앞서 지적한 바이다. 반면 그가 지적한 미군기지의 성 착취 문제는 상당히 신중하게 바라봐야 하는데, 실제로 기지촌 여성들은 외화 벌이에 급한 한국 정부의 묵인 아래 성 착취는 물론 상당한 강도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이 사실이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미군 기지촌에서 벌어진 일들과 일본이 만든 위안소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상당히 유사한데, 이것은 문제의 가부장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유사한 점을 몇 가지 열거해보자. 위안소 설립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성병의 예방에 있었으니만큼 ‘군위안부’ 여성들은 성병관리의 대상이었다. “성병검사는 일주일마다 정기적으로 했다. 군의관이 우리 숙소로 와서 나무판을 만들어 놓곤 했다. 606호 주사는 성병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한 달에 몇 번씩 놓아 주었다. 이 주사를 맞으면 피가 좋아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주사를 맞고 나면 코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어질어질했다.”(김복동 증언, 정진성 정리)(「광동,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전전하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1997, p.91)그러나 이러한 ‘관리’에서 군인들은 제외되었다.
기지촌의 경우 주한미군의 감군 움직임이 한창일 무렵 미군 당국이 한국 정부에게 기지촌 환경 개선을 요구하자 한국 정부는 미군 당국과 함께 ‘군기지 정화 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도 크게 작용을 했는데, 한국 정부는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소를 만들어 매주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하였다. 이상이 있는 여성의 경우 수용소에 격리하고 페니실린을 주사했는데 주사의 약성을 높이기 위해 농도를 올렸기 때문에 쇼크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당시 일본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군도 성병 ‘관리’의 대상은 아니었다.(「섹스 동맹: 기지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문화방송, 2003년 2월 9일 방영.)
우리나라 정부는 한편으로 관광 기생들에게 통행금지에 상관없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들에게 안보교육과 더불어 자신들이 국가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교육시켜 외국인들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했으며 그 교육 내용은 일제시대 정신대의 독려사와 흡사하였다고 한다.(여기서 말하는 ‘정신대’란 ‘군위안부’가 아닌 ‘근로보국대’로 보인다. 민경자, 「한국 매춘여성운동사: ‘성 사고 팔기’의 정치사, 1970~98」,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여성의전화연합 펴냄, 한울, 1999, p.244) 또한 앞서 말했듯 ‘군위안부’ 여성들과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폭력의 위험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공통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군위안부’ 정책과 한국 정부의 기지촌 정책은 다르다. 한국 정부는 일제와는 달리 체계적인 인신매매를 통해 기지촌 여성들을 모집하지는 않았으며, 자료상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정황상 문제에 깊게 개입했음이 확실해 보이는 조선총독부의 ‘군위안부’ 정책과는 달리, 1970년대 월남 파병과 주한미군 축소라는 안보 환경의 변화를 맞이할 때까지 미군 기지촌에 대해 방임하다시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기지촌여성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미군 당국의 통제는 1950, 60년대보다 70, 80년대가 더 심했다고 한다. 50, 60년대 한국 정부는 기지 내 매매춘 문제를 일차적으로 미국의 문제로 보았다. 70년대처럼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정희진,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한국 기지촌여성운동사, 1986~98」, 『한국 여성인권운동사』, 여성의전화연합 펴냄, 한울, 1999, p.307) 이영훈 교수의 문제의식은 일부 타당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여 같지 않은 대상임에도 그대로 동일시해버리고 만다.
이영훈 교수의 자기반성론은 일부 타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가부장적 국가권력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한 것 같지는 않은데, 식민지 여성들은 물론 새로 점령한 지역의 여성들에게까지 ‘위안’을 강요한 가부장적 국가권력에 대한 인식 없는 자기반성론은 공허한 수사일 수밖에 없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 정부는 일본 여성을 미 점령군의 위안부로 제공했다. 일본이 항복한 날로부터 6일 후인 1945년 8월 21일 개최된 각료 회의에서 당시의 무임소 장관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우리는 섹스에 굶주린 미군으로부터 우리의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3일 후에 시경국장은 매춘업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우리는 4천만의 꽃과 같은 일본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일시 방편으로 여러분이 미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만들기를 원한다.”고 요청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5천만 엔(현재의 환율로 대략 5백만 달러)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특수위락시설설립협회(Association for the Creation of Special Recreation Facilities, 후에 유흥오락협회[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R.A.A.]로 불린다.)의 설립을 공표하는 행사가 8월 28일 미 점령군의 첫 번째 연대가 도착하는 때에 맞춰 왕궁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곧이어 R.A.A.가 지원하는 최초의 군대 매춘업소인 고마치 가든이 도쿄의 오모리가에서 개업했다. 8월 30일 전직 매춘부였거나 “신 일본 여성 모집, 숙식, 의복 제공”이라는 광고에 속은 약 100명의 여성들이 미군에게 몸을 바쳐야 했다. 일본의 군 사창가는 문자 그대로 공습으로 불타 버린 도쿄의 폐허 더미에서 연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생겨나기 시작해서 3개월 만에 25곳으로 늘어났다. 한창때는 7만 명의 ‘위안부’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캐슬린 배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정금나, 김은정 옮김, 삼인, 2002, pp168~169)
이것이 가부장제 국가의 본질이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군위안부’ 문제를 여성에 대한 특수한 전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가 여타 전시 강간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빼면 그들의 문제의식은 의미가 있다.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자기성찰적인 과거사 청산은,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사과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몹시 이상적인 일이겠으나 현실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문제는 이영훈 교수가 ‘자기성찰적인 과거사 청산’과 ‘법적인 청산’을 대립 관계로 설정하여 자발적인 반성을 가능하게 만들 법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데 반대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영훈 교수가 ‘군위안부’라는 범죄를 가능하게 가부장적 권력의 문제를 짚어내지 못한 점은 이제껏 살펴본 바다.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과거사 청산의 문제는 개인적인 의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의제다. 객관적으로 진상을 규명하고 사회적인 인식의 공감대를 마련해야 할 부분은 지금까지 미결 과제로 남아있다.
결론: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
이 글을 쓰는 동안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아시아 태평양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이 13년 만에 기각되었다. 일본의 강제 징용과 ‘군위안부’ 문제를 인정했음에도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이영훈 교수가 이전부터 주장해왔던,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수탈론의 부정도 새로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과 논리가 오류와 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이영훈 교수의 논리를 반박하는 측에서 보여준 보수성은 이번 논란의 한계로 남는다. 과거사 문제가 언제나 단발적인 분노를 불러올 뿐, 문제의 해결이나 인식에 있어서 더 진전되지 못하는 것의 한 축에는 그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논리가 딱히 반대편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자리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는 결론을 내리는 대신, 앞서 말했던 몇 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으로 마감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공적인 자리에서 밝힐 기회가 오지는 않을 것 같으나, 최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인식을 진전시켜 나가려 한다.
‘군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나 여타 전쟁 중 벌어지는 전시 강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의 ‘군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일본의 ‘미군 위안부’가 존재하며, 한국의 기지촌 여성도 이 두 가지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면, 이 문제는 결국 여성들의 성(sexuality)을 전유하고 상품화하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지 조선의 ‘군위안부’ 문제는 다른 두 문제와는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위해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한 일제라는 권력(즉 민족문제), 그리고 빈곤이라는 계급적 문제, 근대 도입된 공창제와 그에 따라 만연한 인신매매 등 사회적 문제 등이 각기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한국이나 일본에서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이 그동안 침묵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 사회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우선 민족말살정책이라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이데올로기로 ‘군위안부’ 문제를 인식하려는 틀을 벗는 것이 한 단계 진전된 인식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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