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9

Jaewon Chey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대체 광주 오월 정신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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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won's post
Jaewon Chey
1 d
  · 
한국에서 <광주비엔날레>를 하나보다. ‘박서보 예술상’이라는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난 박서보를 안 좋아한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친구들은 다른 이유를 주장한다. 대체 광주 오월 정신이 뭔데? 
광주 정신, 광주 민주화 정신이 뭔데? 난 원래 지역주의자가 아니었는데 광주 너희들이 나를 지역주의자로 만들어 줬어

국민 세금 털어 먹는건 선이고, 성공한 개인의 후원으로 젊은 차세대 작가들이 새로운 에너지와 동기부여를 얻으면 안되는 거야?
박서보 작가님 이런 부분은 참 잘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박서보가 개인의 출세를 위해 살아온게 뭐가 문젠데? 이런 찌라시 보니 386세대가 세뇌시켜 키운 아이들이 자라나 이제 이런 헛소리를 떠들기 시작하는 구나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침투한 광주 정신의 세뇌가 예술 감독의 입에서 저 누런 찌라시에서 거대한 사기극으로 흐른다.
자고로 컴플렉스 쩔은 광주에서 예술감독은 백인 외국인 아니면 적어도 런던 TATE나 뉴욕 MOMA 정도에서는 와 줘야지? 내가 보기에 그게 ‘광주 패턴‘인 거는 확실하다.




Comments
김진기
예술을 위한 예술이니 철저한 심미적 모더니즘 미술가였느니 하는 표현들만 봐도 누렇게 변색된 80년대 미학 관련 출판서적 읽는 것 같더군요.
Reply1 d
Jaewon Chey
김진기 얘들은 진짜 아직도 동학 운동 모드에요.
우리는 업데이트 안하고 위정척사 한다. <오윤상>제정하라 같은거 보면
진짜 똑같아요. 추상표현주의니 어쩌구 씨부리는 말 중에 어느 하나라도 뭘 좀 제대로 알면서 떠들면 존중이라도 하는데
무슨 심미적 모더니즘이니 개소리들을 하는지
인간들이 중세인데 예술은 모더니즘이 어떻게 오냐고 말이에요
80년대 미학 책 읽으며 딸친 분들이나 지금의 서양 미학 개먹물들이나 현실 절대 안 보고 딸만 치는건 똑같습니다.ㅋㅋㅋ
얘들은 미술사는 서양미술사요
미학은 서양 미학이요
예술감독은 서양에서 부르죠.
그래도 하나도 이상한 걸 몰라요 ㅋㅋ
그러면서도 일제시대를 왜 운운하지? 해방이 되도 스스로 조센징
나라를 잃어도 조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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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la Kim
김진기 전공을 살린 일갈 속 시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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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준
그림도 비쌀수록 좋은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Reply1 d
김진기
천영준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그림이 왜 서양미술사 대가들에 비해 푼돈 수준인 것이냐고 거품 무는 경우도 있는데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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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순
민주화로 떡칠하는 게 광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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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 Kim
지랄발광하는 걸보니 박서보는 저 패거리들을 보살피지 않나봐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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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won Chey
Ju Kim 사랑해 달라(돈)는 몸짓일수도 있어요
상금 수준이 아니라 액수 작아도 되는데… 사랑해 달라는 말을 광주 정신으로 돌려 말하는 건가?
참 알고 싶지도 않네요 더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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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 Kim
최재원 자기들 카르텔에 끼지 않은 사람이라 양아치짓하는거죠.아니 오혁하고 박서보가 비교가 되는 수준인지..사실 능력있는데 왜 진영에 낄까요..그냥 자유로운거지..미술계란 곳도 웃기지도 못하는 좌빨 모개그맨처럼 실력없는 자들이 뭉쳐서 기득권챙기는거라 보면 맞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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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 Kim
최재원 저는 강요배를 저 패거리들에게서 꺼내오고 싶어요.재능을 엉뚱한데 낭비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든요.너무 늦은 건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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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won Chey
Ju Kim 저도 강요배 작가님 선동으로 기울어진 시기 말고는 좋아해요 높이 평가합니다. 저 패거리들은 정부 곳간 털어 잠시 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거지
실체가 없는 집단입니다.
Reply1 d
Ju Kim
최재원 선동그림말고 이전에 그린 그림보면 색감이나 형태나 눈에 확들어올만큼 재능이 있던 사람이던데..그래서 제가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요.4.3으로 간뒤는 예술가로 볼수가 없더군요..인생2회차 시작할순 없는건지..참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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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won Chey
대한민국 건국은 세계적 차원으로 봐도, 그야말로 자유 민주주의의 혁명적 사건이었죠. 산업화를 통한 민주질서 확립은 박정희대통령이, 그리고 이를 정착 시킨건 전두환 대통령이었습니다.
근데 얘들은 뭔가 다르게 알고 있네요.
이미순
Reply1 d
Jaewon Chey
얘네 나름 진지하네요
광주정신이 뭐냐고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광주정신 먹칠하는 박서보賞 철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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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a Park
무릎을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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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 Chae Sim
아마 출생이 지들쪽이 아니라서 그럴겁니다.
미당 서정주를 친일파라 욕하던 시절은 지나갔죠.
서정주가 우덜이니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는 시절이죠.
가장 전체적이며 가장 인종차별적이며 자장 지역이기주의자들이 광주를 팔아먹고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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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Soo Kim
광주는 금테 둘렀나요?
Reply1 d
Jaewon Chey
Sam Soo Kim 자기들만 금테 안 둘렀다는 컴플렉스가 평생을 지배하는 자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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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Sunmoon
광주정신이라는 말이 이제는 닥치고 거르게 하는 키워드가 되었어요.
Reply1 d
Jaewon Chey
OH Sunmoon 맞아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겹고 쓴웃음 나는 표현이 되었어요
‘광주정신’ 말고 이들이 해 쳐 먹어온 그 ‘광주패턴’을 이야기 합시다
Reply1 d
Jaewon Chey
선생님 말씀이 정말로 맞는 말씀같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경상북도 예천이 고향이네요. 지들쪽이 아니라고 밀어 내는 거죠?
너그들은 듣거라, 니들 쪽에서 났으면 내 비록 좋아하지는 않는 작가지만 오늘날 박서보는 없었을 거다
니들이 붙잡고 가는 ‘광주 패턴’이란 정말로 개같은 허위에 역겨운 조작 신화가 대부분인데 거기서 작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이것을 간과하지 말자
그곳은 여전히 중세이고, 일제시대는 최소한 근대화를 시작했었다. 박서보는 중세에서 태어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Ha Chae 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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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
웃기네요. 예술가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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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won Chey
하연 얘들은 모든 예술이 정치적인 예술이다라는 걸 이해를 못해요. 광주에서 태어나고 광주를 빨아대며 국고를 털어올 수 있는 선동을 해야
그런 목소리가 예술이라고 착각하고 사는거죠
얘들의 이런 망상질은 특정 화랑 대표나 카르텔에게는 수익을 가져다 주죠.
ㅂㅅ짓을 하는 새끼들과 뒤에서 돈 세는 탈 광주 카르텔이나
하여간 먹고 먹히고 이용만 하고 버리는 헬반도 카르텔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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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h Park
얘들이 난리쳐서 박서보 작품 값이 내려가면 저는 이게 웬 떡이냐 줍줍하겠습니다^^
Reply1 d
Jaewon Chey
Sarah Park 역쉬! 우리는 항상 매수의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ㅋㅋ 근데 쟤들은 시장에 털 끝만치도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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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min Choe
"박서보"가 과연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화가"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까?
Reply1 d
David Daeil Lee
우덜은 거시기 한당께요..
Reply1 d
김인철
광주정신이 바로 남조선 신앙의 기본이 되었군요. 그런데 말씀대로 광주정신이란게 대체 무엇인가요? 그거 철저히 대한민국을 부정하라는 것 아닌가요?
Reply12 m
Jaewon Chey
김인철 종북질이나 하고, 대한민국 국고를 축내며, 대한민국 건국과 정당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반역질을 그렇게 표현하나 봅니다
광주 정신은 니미 ㅈ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쓴 웃음 나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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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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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朴栖甫, Park Seo-Bo)
Park Seo-Bo working at his studio 2019.jpg
예술가 정보
본명박재홍(朴在弘)
출생일제 강점기의 기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예천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분야회화
사조단색화 Dansaekhwa
수상금관문화훈장 수훈
주요 작품
묘법(描法, Ecriture)
영향
웹사이트기지재단 홈페이지

박서보(朴栖甫, Park Seo-Bo, 1931년 11월 15일 ~ )는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다. 본명은 박재홍(朴在弘)이다.

생애[편집]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 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고, 부친이 대서소 일을 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컸다.[1]

한국전쟁 중 부산에 전시학교를 운영했던 홍익대학교가 휴전 후 환도한 정부를 따라 서울 종로구로 이사를 왔다. 1953년 종로에 있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실에서 조각과 친구 배형식과 함께 자신이 그린 입체파 풍 자화상을 들고 포즈를 취한 23세의 박서보.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홍익대학교는 1949년 용산구 원효로의 흥국사라는 절 부근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동양화 전공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李象範, 1897~1972)과 고암 이응노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에 부친이 갑작스레 병사했으며, 박서보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피난민 행렬을 따라 홀로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 박서보가 부산으로 내려간 홍익대학 전시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동양화 교수들이 전쟁 중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를 나와 홍익대학으로 온 김환기(金煥基, 1913-1974) 교수와 이종우(李鍾禹, 1899~1981) 교수가 서양화 교수로 있어 박서보는 전공을 바꿔 1952년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환도 후 홍익대학 미술과는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YMCA 사이에 있던 장안빌딩 뒤 창고 건물로 옮겨왔다.[2]

1954년 마지막 학기에는 학교 동기들과 함께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지만, 모집 당시의 약속을 번복하고 육군이 졸업식장에서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끌고가자 동기 이원용(李元鎔, 1930~, 예명 수헌)과 함께 본인들의 졸업식에 불참하고, 친구 맹인재(孟仁在, 1930~)가 둘을 위해 지어준 호 수헌(樹軒)과 서보(栖甫)를 하나씩 나눠 가진 뒤 1955년부터 본명을 버리고 둘 다 새 이름으로 생활했다.[3] 1961년 박서보와 같은 처지의 보병학교 수료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걸어 전원 제대 통지를 받게 된 뒤에나 도망자의 삶이 끝났다.

박서보는 1956년 홍대에서 만난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란 이름의 화실을 운영했고, 이곳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그가 그룹전을 함께 한 현대미술가협회(속칭 현대전) 동료들의 아지트로 활용되기도 했다.[4] 또한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현재의 아내를 만나 1958년 12월에 결혼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시작해 1997년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박서보는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80년대에는 안성군 공도면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만 매진 했으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으로 있을 때 학생운동과 교내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학교 일에 붙들려 더 이상 안성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못했다. 서울에서만 작업하고 있는 중에 돌보지 못한 안성 작업실에는 여러 차례 도둑이 들었고, 1996년 몰래 침입한 동네 청년들에 의해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에 소장했던 많은 작품이 전소되었다. 초기 묘법 작품들의 많은 수가 거기서 사라졌다. 1997년 마포구 성산동에 새로 지은 작업실에 1994년에 설립한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옮겼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1994년 12월 64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2009년 11월 79세의 나이로 뇌경색으로 다시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업을 이어가서 2015년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맛보게 되면서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2019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89세의 나이로 생애 두 번째 회고전을 열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후진양성을 위해 기지재단을 설립하였다.

작품활동[편집]

초창기[편집]

1958년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가협회의 제3회 현대전 전시장 입구에서 협회 친구들(좌로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과 포즈를 취한 박서보. 김창열에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이 28세의 젊은 박서보이다.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에 박서보는 제2회 전시(1957)부터 제6회 전시(1960)까지 참여했고, 제5회 전시(1959)에는 불참했다.

박서보가 화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당시 미술계 유일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속칭 국전)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반목과 편가르기, 기득권 챙기기의 양상을 보여주었다.[5] 홍대를 졸업하기 전인 1954년에 박서보는 이미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졸업 직후인 1955년에도 제4회 국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하지만 터무니 없게 전쟁을 겪은 젊은 박서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1956년 반(反)국전을 선언하며 홍대 동문인 문우식(文友植, 1932~2010), 김충선(金忠善, 1925~1994), 김영환(金永煥, 1927~2011)과 함께 동방문화회관에서 독립전을 열었다. 일년 뒤인 1957년에는 김창열(金昌烈, 1929~), 하인두(河麟斗, 1930~1989), 장성순(張成旬, 1928~), 김서봉(金瑞鳳, 1930~2005), 김청관(金靑鱹, ?~?), 라병재(羅炳宰, ?~?), 조동훈(趙東薰, ?~?), 이철_(화가)/이철(李哲, 1931~) 등이 만든 현대미술가협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후 현대전이라고 불린 그들만의 그룹전을 2회부터 6회(1960년)까지 5회만 불참하고 연달아 참여하게 된다.

1958년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제3회 현대전은 한국에 앵포르멜 미술이 시작된 기점으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박서보의 <회화 No.1>의 출품 때문이다. 같은 해 열린 제4회 현대전에서는 이른바 비정형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된다.[6] 박서보와 현대전의 동료들은 "스스로 첨단을 걸으며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는 젊은 세대의 전위적 활동"에 매진하게 되고,[7] 이후 몇년 간 그들의 앵포르멜적 행보가 지속된다. 박서보와 현대전 동료들의 초창기 작품들은 전후 사회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보존되지 못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박서보의 초창기 작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는 <양지(陽地, Sunny Spot)>(1955년), <여인좌상>(1955), <닭>(1956), <회화 1-57>(1957), <No.18-59>(1959) 정도가 있다.

원형질 시기[편집]

1961년 유네스코 후원 국제조형예술협회 프랑스 위원회가 주최한 '세계 청년화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박서보가 세계 청년화가 대회 합동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 '원죄(Péché originel)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Art)의 프랑스위원회에서 파리에서 개최할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을 대표할 만 30세 이하 젊은 작가를 보내달라는 통보가 왔다. 대표작가로 프랑스에 가게 된 박서보는 회의가 연기되었다는 통지를 받지 못해 원래 한 달이었던 일정을 11개월로 늘려 파리에서 버텨야 했다. 이후 박서보는 작업에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 시기의 작업이 뿌리기와 흘러내리기에 주목하였다면, 파리에서 귀국 후 제작한 원형질이라고 부른 연작에서는 일상에서 나온 오브제를 태워 "화면 위에 형태를 쌓아 올린 후, 다시 팔레트 나이프로 깍거나 쓸어내리는 방법, 혹은 표면에 마대를 붙인 후 분출구 같은 구멍을 부분적으로 만들어 마티에르를 주는 방식"을 주로 썼다.[8] 박서보 자신이 이 시기의 작품들에 대해 “대량학살, 집단 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산물”이라고 말했다.[9] 원형질 연작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작되었다.

유전질 시기[편집]

1960년대 후반 제작된 유전질 작업은 원형질 시리즈와는 인식론적으로나 감각적 측면에서 상반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보이며 전통적인 오방색을 활용한다. 이 시기에 작가는 처음으로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이어 유전질 시리즈 내에서도 다시 변화를 보이는데, 기하학적 추상을 벗어나 인체라는 구상성을 확연히 드러내기 시작하고 에어 스프레이 기법을 활용하여 매끈한 질감의 팝아트적인 색채를 구사한다. 서구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전질 연작은 1970년 개인전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고, 미술평론가들은 “옵아트적인 밝고 강한 각종 원색과 기술적으로 수련된 선”,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허상의 이미지” 혹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잡은 현실의 일각” 등의 말로 평론했다.[10][11] 특히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 중 실제 인체에 입힌 옷을 화학약품으로 굳혀 사람 없이 빈 껍데기만 입체로 제시해서 설치 작품인 허상 작품은 조지 시걸에게서 영향 받은 일상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업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한국관을 설계하고 그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를 기획한 건축가 김수근의 요청을 받아 '허의 공간/유전인자와 공간'이란 이름으로 수십 개의 작품이 하늘을 향해 뛰는 모습으로 구현되었고, 일부는 모래와 함께 관을 설치해 묻기도 했다. 그것이 반정부적으로 읽혀 전시 중간에 박서보의 입체 작품들은 전부 철수 당한다. 허상을 포함한 유전질 시기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이다.

초기묘법 시기[편집]

1977년 합정동 집 주차장을 개조해서 쓴 작업실에서 박서보가 알루미늄 사다리를 개조해서 만든 작업대 위에 앉아 흰색 유화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연필로 선을 그으며 '묘법' 작업 중이다.

박서보는 유전질 시기 중에 둘째 아들의 국어 공책 낙서에서 착안한 반복적인 연필긋기를 하고 있었다. 1967년의 첫 작품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른 후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 긋기로 채우는 식이었다. 이후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좀 더 자유롭게 선긋기를 진행했고, 화면에는 선과 연필의 필압에 의해 밀려나간 안료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화면에는 작가의 신체호흡과 리듬감을 반영한 리드미컬하며 유연한 선이 뒤덮히게 되었다. 올오버 페인팅이 탄생했다. 이후 화면은 그리고 다시 덧바르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화면 위의 선은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며 화면 속으로 수용되었다.[12] 이 연필긋기 작품들은 1969년 일본에서 만난 이후 긴밀하게 교류해온 재일작가 이우환의 제안으로 일본 도쿄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선 보였다.[13] 박서보는 이 시리즈에 묘법이라는 제명을 붙였고,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제안을 받아 외국어 제목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0도의 글쓰기>에서 영감 받은 프랑스 단어 Ecriture를 채택했다. 이 초기 묘법 시리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진다.

후기묘법 시기[편집]

후기 묘법은 1982년 박서보가 매체로서의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서양 종이와 달리 안료를 흡수하여 일체화해 내는 한지 혹은 닥지의 특성은 자연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한지가 갖는 빛과 소리를 투과하는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이자 자연으로 이해되며 상징화되었다.[14] 작업은 초기 묘법과 동일하게 연필로 선을 긋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한지가 갖는 침투성과 흡수성으로 인해 안료는 한지 속으로 스며들고, 작가는 여기에 반복적 행위를 매개로 화면에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성이 일체화되어 화면 위 마티에르로 드러난다.[15]

1982년부터 1993년까지를 일명 '지그재그' 시기라고 부르고, 1994년부터 2004년까지를 소위 '블랙 앤 화이트' 시기라고 부른다. 블랙이 화이트 계통의 작품보다 먼저 등장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기와 겹치게 2000년부터 작품에 레드가 등장하고, 이후 2018년까지 다양한 색상이 작업에 쓰였다. 한지를 이용한 묘법으로 넘어와 다양한 색상을 찾아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박서보는 "그림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16]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2015년부터 이전과 다르게 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말하는 미술시장의 관심사에 포함되었다.[17]

미술운동[편집]

1975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에서 열린 제1회 "에꼴 드 서울" 전 출품작가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서보 (맨 앞 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바로 오른쪽 뒷 사람). "에꼴 드 서울"은 박서보가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을 때 현대미술운동의 일환으로 개인적으로 기획 및 추진한 새로운 형태의 연례전이다. 1999년에 24회로 해체되었다.

박서보는 1971년부터 한국미술협회의 국제담당 부이사장직을 맡아 자신을 비롯한 모노크롬 작가들의 여러 기획전과 해외교류전, 국제전, 개인전 등을 기획하고 국내ᆞ외에 알리는 예술행정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현대미술의 혁신이 몇몇 전위 작가들만의 각성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정착시킬 제도적 발판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앙데팡당>(1972), <현대미술제>(1975), <에콜 드 서울>(1975)의 3대 전시체제를 창설했다. 각각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역으로 확산하며, 우수한 예술적 성과를 집약하여 전시하는 대단위 연례 전시기구였다.<ref.>박서보, "현대미술과 나 II", <미술세계> 1989년 11월호, 106-108쪽.</ref> 1970년대 후반 미술운동가이자 대학교수, 화가로서 일인삼역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분주한 그의 모습을 보고 한 기자는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 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고 소개했다.[18]

평가[편집]

박서보는 '한국 단색화의 대부',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지칭되며,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한 인물이다.[19]

미네무라 도시아키는 "구미의 근대회화와는 근본정신부터가 차이가 나는 아시아 민족의 추상회화를 박서보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20]

주요 연혁[편집]

  • 1931: 경상북도 예천 출생
  • 1950: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
  • 1952: 홍익대학 전시학교 미술과 서양화 전공으로 변경
  • 1955: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 졸업
  • 1962-199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 1970-1977: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 1972: 제10주년 문화예술인대회 대통령표창 수여
  • 1977-1980: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 1979: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대통령상 수여
  • 1984: 교육헌장선포 16돌 기념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 1985-1986: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장
  • 1986-199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 1987: (사)한국소년지도자협회 창립 65주년 기념 육영공로상 수여
  • 1987: 제1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 대상 미술부문 수여
  • 1994: 옥관문화훈장(4등급) 수훈,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설립
  • 1995: 제4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미술부문 수여
  • 1999: 제1회 한국미술협회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창작부문) 수여
  • 2000: 홍익대학교 명예미술학박사 수여
  • 2008: 대한민국 미술인의 상 수여
  • 2011: 은관문화훈장(2등급) 수훈
  • 2015: 워싱턴 D.C 허쉬혼 뮤지움(Hirshhorn Museum) 40주년 기념 시각미술상 수여
  • 2018: 홍콩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 아시아 아츠 게임즈 체인저상(Asia Arts Game Changer Awards) 수여
  • 2019: 제64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 수여
  • 2020: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공헌예술가 예술공헌상 수여
  • 2021: 금관문화훈장(1등급) 수훈

전시회[편집]

개인전
그룹전

미술관 소장[편집]

해외 미술관[편집]

국내 미술관[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Overcoming the Modern Dansaikhwa: The Korean Monochrome Movement>, Alexander Gray Associates, 2014.
  •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Joan Kee,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2013.
  •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 Kate Lim, BooksActually, 2014.
  • <The Color of Nature: Monochrome Art in Korea>, Soon Chun Cho & Barbara Bloemink, Assoline, 2008.
  • <박서보: 앵포르멜에서 단색화까지>, 서성록, 도서출판 재원, 2000.
  • <Working with Nature: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 Tate Gallery Liverpool, 1992.
  •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승숙, 인물과사상, 2019.
  • <PARK SEO-BO: écriture>, Jin Joo Lee & Rosa Maria Falvo, Rizzoli New York, 2021.

각주[편집]

  1.  Kate Lim,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 2013. ISBN 9 789810 900618, pp. 16-25.
  2.  박서보, "디오니소스 미학의 힘과 역설", <32인이 만나본 고암 이응노>, 얼과알, 2001, 13-14쪽.
  3.  Kate Lim,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 2013, ISBN 9 789810 900618, p.49.
  4.  하인두, "애증의 벗, 그와 30년", <선미술> 1985년 겨울·통권27호, 27~33쪽.
  5.  김미정, "한국 앵포르멜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60년대 초반 정치적 변혁기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미술사학> 2004년 12호, ISSN 1976-6467, 301-342쪽.
  6.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채우고 다시 비워낸 회화: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2015, 73쪽.
  7.  박서보, "새해에 부치어-화단에 다시 밤이", 1959년 1월 10일자 연합신문.
  8.  김주원, "1960년대 한국미술에서 ‘구상추상 논쟁’과 ‘리얼리티’의 문제", <미술사학보> 제36집, 20쪽.
  9.  "좌담회-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형성과 전개",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격정과 표현>, 호암미술관, 2000년, 183쪽.
  10.  "기술적으로 세련된 원색의 허상", 1970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
  11.  "박서보 유전질전, 스프레이가 이루는 환각세계", 1970년 12월 16일자 서울신문 기사
  12.  오광수, "묘법의 단계 – 박서보 묘법 시리즈에 붙여", 2010년 박서보 팔순기념회 화집
  13.  박서보, "나의 현대미술 투쟁사", <Art in culture>, 2012년 6월호, 99-103쪽
  14.  Lewis Biggs, “Working with Nature”, <Working with Nature – Traditional Thought in Contemporary Art From Korea>, Exhibition Catalogue at the Tate Gallery Liverpool, 1992.
  15.  Minemura Toshiaki, “Peach Blossoms in March, Seen Flying in Crimson: Park Seo-Bo’s Scenery”, <Empty the Mind: The Art of Park Seo-Bo>, Tokyo Gallery Catalogue, 2016, pp. 81~83.
  16.  박서보 "21세기는 정신병동... 예술은 폭력아닌 치유여야", 2016년 1월 5일자 매일경제 기사.
  17.  정연심, "국제화, 담론화된 단색화 열풍", <채우고 다시 비워낸 회화: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마로니에북스, 2015, 98~133쪽.
  18.  이흥우, "화가의 하루 – 박서보", <화랑> 1977년 겨울호, 68쪽.
  19.  변종필, "박서보의 묘법세계:자리이타적 수행의 길", <채우고 다시 비워낸 회화: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마로니에북스, 2015. 138쪽.
  20.  Toshiaki Minemura, “Interruption and Concealment”, <Park, Seo-bo Recent work>, 두손 갤러리 전시회 브로셔, 1991.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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