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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일제강점기, 교회의 선택은 과연 '생존'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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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교회의 선택은 과연 '생존'이었나?

기사승인 2017.10.31 18: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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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심포지엄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 - 2


10월 30일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열린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기 심포지엄에서 한만삼 신부(수원교구)는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반성’과 관련해 발표하고, “교회는 과거의 역사적 불의에 대한 인정과 회개, 그리고 일회적 반성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와 용서를 청하는 자기고백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한 신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교회를 관할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상과 인식, 파시즘 시대의 교황청 상황,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이 이들과 만나 빚어진 한국 가톨릭 교회의 한계와 오류를 짚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정교분리 원칙의 결과

한만삼 신부는 먼저 한국 교회사 속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조선교회 교도권을 쥐고 모든 결정과 선택을 했던 이 시기를 세계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가톨릭공동체가 시작되고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뒤,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선교와 사목의 중심에서 1942년 노기남 주교가 경성교구장이 되기까지 100년을 이끌었다.

한 신부에 따르면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은 성직자 중심주의와 성사 중심주의, 직접적 선교 위주의 선교정책과 정교분리 원칙을 기반으로 했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국의 폭력적 군사독재 정치체제인 ‘보나파르티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 사상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나 갈등을 ‘국가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억압하고, 지배층의 집단 이익에 종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공동체가 곧 민족’임을 주입시켰다.

이는 국수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자연히 접목됐고, 이 영향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선교 역시 ‘프랑스의 영광’이었다.

또 하나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강했던 ‘얀세니즘’ 신학이다. 얀세니즘은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협력하는 방식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으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엄격한 윤리성을 요구하고 모든 행위에 죄스러움을 붙이게 된다.

한 신부는 이러한 제국주의와 국수주의, 성속 이원론, 정교분리라는 원칙 등은 프랑스의 영광이 교회의 영광이라는 국가주의 사상과 모국의 우월한 문화와 근대화된 문명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다시 선교사들로 하여금 교회의 선교를 제국주의 진출과 동일시하는 ‘문명화 사명’ 의식에 빠지게 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식민지 국가를 열등한 민족으로 일반화해 선교지에서 ‘차별’을 당연시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됐으며, 종교의 자유를 열망하는 애국적 선교사들은 프랑스제국의 식민지 개척 열망과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에도 휘말렸다.

한만삼 신부는 "국가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논리에 반박하며, 국가는 국민을 위해 교회는 신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
선교를 위해서라면 제국주의도 상관없다

조불조약(1886) 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자유롭게 살게 됐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의 특혜로 선교활동 보호와 지원을 받아 교세 확장에 나섰다. 프랑스의 입지 확장을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과 도움도 받았다.

한편으로 1890년에 새로 조선교구장이 된 뮈텔 주교는 민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등 조선의 주요한 사건, 러시아와 프랑스의 외교적 관계 고려, 선교사와 교회의 권익 보호와 지원 등 여러 상황과 조건 속에서 주요한 외교적 중재자이자 권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곧, 프랑스 선교사들이 불평등 조약의 특권을 치외법권적 힘과 권력으로 사용하면서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은 백성들에게 적대적 세력이 됐다. 이는 부정부패 관리와 봉건왕조, 외세가 어울리는 상황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이 무너진 뒤, 1905년에 정교분리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는 등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공식화됐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고, 모국의 외교 노선을 따른다. 이 상황에서 뮈텔 주교의 책임 아래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정부의 요구로 대한제국 정부와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했고, 뮈텔과 선교사들은 조선을 개화하지 못하고 자치와 자립 능력이 없다고 보고 “조선이 러시아보다는 서구화되고 강력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이 교회와 프랑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한편,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혁명, 조선에서의 박해 경험과 트라우마로 정치와 종교영역의 분리를 전제하는 정교분리를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국가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한 신부는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천주교 지도부의 결정은 한국교회의 결정이 되었고, 이들은 한민족의 비참한 현실보다는 선교의 가능성에 더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선교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그것이 제국주의 침탈로 이뤄진 정치적 권위라도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교분리 원칙의 의미는 중세교회처럼 권위적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려 하거나 국가가 종교단체의 활동 및 개인의 신앙행위에 부당하게 간섭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이 원칙을 교회와 국가간 ‘상호불간섭주의’로 이해하면 국가의 지배자들이 종교를 자신의 정의롭지 못한 정치체제를 존립시키는 도구와 이데올로기로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뮈텔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같은 입장에 따라 을사보호조약(1905), 한일강제병탄(1910)의 상황에서도 “상호불간섭의 정교분리 원칙”으로 자신들의 선택과 판단을 합리화하며, 한민족의 식민 지배에 대해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모국 프랑스에 대해서는 충성스런 애국심을 보이며, 한민족을 위한 애국적, 정치적 민족운동에는 극렬히 반대하는 이중적 자세를 취한다.

한만삼 신부는 “결국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은 일제의 파시즘 도구가 되어 종교지도자 스스로 정치적 무능함과 무관심을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역설적으로 일제에 정치적으로 협력하게 됐"고, “또 일제의 정교분리 정책에 협력한 결과로 특권과 우대를 받았던 교회가 종교규제라는 일제의 행정적 압박을 받게 되자 교회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사실상 정교유착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일제 강점 이후 선교사들은 교도권으로 한국인 신자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금했고, 주권이 상실되는 강탈의 상황에서도 초월적이며 내세적인 신앙만을 고취시킴으로써 교회가 사회무관심주의에 빠져 민족사에 동참하지 않는 탈민족화의 길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 교황청은 이른바 ‘좌익’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결합하자 일제는 반공을 국시로 표방했고, 교황청은 이러한 일제의 입장을 지지했다. 1930년 무렵 교황청이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의 독재국가를 인정하고 협약을 맺으며 반공의 가치를 적극 추구하자, 조선교회 또한 공동선 구현과는 상관없이 반공의 가치를 추구했다.

한 신부는 “결국 친일과 반공은 민족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제국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열매가 됐고, 이들과 협력의 길을 걸어간 프랑스인 교회지도자들은 조선교회를 강력한 교계제도의 질서로 이끌며 순종과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반공적이며 반민족적 행위를 부끄러움 없이 강행했다”고 말했다.

한만삼 신부는 “시대의 불의는 한순간에 나타나 뜻밖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며,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역사 속에 한 인간인 프랑스인 뮈텔, 그를 기르고 이끈 프랑스 제국과 전근대적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일제강점기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성속이원론을 뿌리로 정교분리 정책을 교회를 위한 생존의 길로 택했고, 종교의 자유와 포교권을 지키기 위한 이유로 뚜렷한 친일 행적의 열매를 맺었다”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변명 뒤에는 악을 처단하여 민족을 살리고 지키기를 바랐던 수많은 혁명적 운동가들의 희생과 죽음과 고난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신부는, “현재까지 이어오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는 사상은 국가주의 파시즘에 협력한 교황청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끈 교회의 과오에서 시작됐다”며, “국가주의 파시즘이라는 불의에 침묵하며 반민족, 반독립, 반공주의에 공조하고 협력했던 치명적 아픔을 벗어날 길은 과거의 역사적 불의에 대한 인정과 회개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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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 regina@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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