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3
‘민족’을 넘어 ‘헌법 애국주의’로 - 미래한국
‘민족’을 넘어 ‘헌법 애국주의’로 - 미래한국
‘민족’을 넘어 ‘헌법 애국주의’로[생각의 틀 깨기] 민족보다 중요한 국가배진영 월간조선 기자l승인2016.05.03l수정2016.05.03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webmaster@futurekorea.co.kr
현재의 1987년 헌법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그 헌법질서의 산물
지난 2012년 4‧11총선 후 무렵의 일이다.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자스민은 아들을 한국인으로 키우고, 박영선은 아들을 미국인으로 키운다.”
당시 새누리당은 영화를 통해 뜬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 이자스민 씨를 비례대표로 기용, 화제가 되었다. 그 즈음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박영선 씨의 아들이 미국 국적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이자스민 씨가 이후 4년 간 국회의원으로서 얼마나 다문화 가정문제에 이바지했는지, 혹은 아들이 미국 국적자라는 것이 박영선 씨의 의정활동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다만 이 짤막한 한 마디는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아무리 ‘단군의 자손’이라고 해도 더 이상 한국인으로 살기 싫다고 미국 시민권자가 된 사람을 우리는 ‘한민족(韓民族)’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자스민이 아무리 “나는 대한민국의 며느리고, 내 아이들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행동해도, 필리핀 태생인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한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1차적으로 ‘핏줄’이다. 하지만 핏줄을 기준으로 해도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어렸을 때에는 ‘단군의 자손’이라며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었다. 이제는 다문화 시대가 되면서 그런 교육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실은 단일민족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예를 들어보자.
화산(花山) 이 씨는 13세기에 고려로 망명 온 베트남 왕족 이용상의 자손이다. 우록(友鹿) 김 씨는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장(倭將) 김충선의 후예다(박정희 대통령 시절 법무‧내무장관을 지낸 김치열 씨가 우록 김 씨다). 장덕수 등을 배출한 덕수(德水) 장 씨는 고려 충렬왕 때 고려 왕실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위구르인 장순룡의 후손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본관은 광주(光州)이지만, 중국 형양 반 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형양 반 씨는 한(漢)나라 시대에 한족화(漢族化)된 흉노족의 후예라고 한다. 심지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성(大姓) 가운데 하나인 경주 김 씨가 흉노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 그밖에도 자신들의 뿌리를 당말(唐末) 혼란기에 신라로 망명한 중국인에게서 찾는 성씨(姓氏)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과 이자스민, 이참(이한우), 로버트 할리, 이다 도시 및 그들의 자녀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쪽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수백~2000년이고, 다른 한쪽은 이제 고작 10년 안팎이라는 차이밖에 없는 것인가?
민족과 관련해 또 하나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과 별개의 정치공동체를 형성해 살고 있고, 이제는 공공연히 ‘김일성 민족’임을 자처하는 북녘 땅 2300만 명의 주민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여전히 그들은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끌어안아야 할 대상인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기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주의자였다. 아니 민족주의자를 넘어서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고 가슴이 뛰었고, <환단고기>를 읽고 감동했다.
어린 마음에 강대국 사이에서 이 작은 나라가 살아남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대국으로 우뚝 선 후,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라는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무렵에는 ‘민족주의의 전도사’가 되기 위해 국사학과나 역사교육과로 진학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인식을 바꿔 놓은 책이 있다. 1990년대 후반 나온 임지현 교수(서강대)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임 교수는 “이 땅에서 태어나 근현대사의 한 세월을 살아온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한국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라고 말한다.
나 역시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읽고 난 후 ‘한국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즉 혈연을 중심으로 한 ‘우리민족끼리’의 통일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김일성 조선’의 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통일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북 공동응원단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
‘민족’에 대한 두 가지 개념
우리는 흔히 ‘민족’이라고 할 때 혈연공동체 내지 역사공동체로서의 민족을 먼저 떠올린다. 어려서부터 민족이란 그런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민족개념은 사실 절반만 옳은 것이다. 민족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종적 공동체의 영속성에 주목하면서 민족주의가 종족·조상·종교·언어·영토라는 원초적 유대에 기초해 있다’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원초론(Primordialism)’이라고 부른다. ‘원초론’은 언어, 공통의 문화유산, 종교, 관습 등과 같은 객관적 기준을 민족의 기초로서 강조하는 ‘문화민족(Kulturnation)’ 개념 내지 ‘객관주의 민족이론’과 닿아 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민족주의란 결코 영원한 실체가 아니며,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현한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도구론(Instrumentalism)’이다. 도구론은 ‘국가민족(Staatsnation)’이라는 민족개념과 연결된다. 이는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민족 성원의 주관적 의지가 민족을 만든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를 ‘주관주의 민족이론’이라고 한다.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주로 영미(英美)나 프랑스의 학자들이다. 이는 시민혁명을 경험한 이들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중세 이래 대립 갈등했던 여러 지방과 종족들이 ‘자유·평등·박애’라는 대의 아래 프랑스공화국, 프랑스 민족으로 거듭났다.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강제 편입됐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게르만계 주민들도 기꺼이 프랑스공화국의 일원으로 녹아들었다.
반면에 원초론-문화민족-객관주의적 민족개념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던 독일이나 러시아 등 중·동부 유럽국가들에서 환영받았다. 이런 개념은 시민혁명을 경험하지 않고 국가 주도의 근대화의 길을 걸었던 일본으로 전해졌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정치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를 상실하고 문화공동체·혈연공동체로서의 민족에 의지해야 했던 한국 역시 이러한 민족개념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민족개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이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두 가지 모두 각국의 역사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임지현 교수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민족주의에는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가 모두 내포되어 있으며, 단지 그 구성비가 역사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또 다양한 사회 이데올로기들과 결합되면서 민족주의는 천(千)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민족주의가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는 이데올로기’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사회 변동을 주도하는 정치운동이며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어에 어떻게 유입됐나?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에 ‘민족(民族)’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후인 1888년 간행된 잡지 <일본인>과 <일본>에서부터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민족과 함께 지금은 생소한 족민(族民)이라는 말도 쓰였다. 인종(人種)이 민족이라는 의미로 혼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일본에서도 민족이라는 말은 그리 널리 쓰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송민 전 서울대 교수에 의하면 메이지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소개한 <메이지의 말(言語)사전>이나 1889년 나온 일본 최초의 사전 <언해(言海)>에도 민족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각종 근대적 개념어들은 18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민족은 1907년경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다른 개념어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다. 이는 메이지시대에 일본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학자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독립신문>에서는 민족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고, 대한매일신보에서는 1907년 8월 27일자 신문에서 처음 보인다”고 한다. 1907년 8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 <시사평론>란을 보자.
“여보 조선 양반님들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거든 좀 생각하여 보시오. 소위 삼한갑족이니 선정자손이니 교목세신이니 하는 것이 무슨 수가 있어 미국의 토종(원주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을 말함-기자 주)과 같이 심산궁곡으로 몰려 들어갈 뿐이오, 월남국의 민족과 같이 청천백일을 보지 못할 터이니 참 불쌍하고 답답하오.”
대한매일신보와 쌍벽을 이루던 민족지 황성신문에서도 비슷한 무렵부터 민족이라는 말들이 보인다. 1907년 5월 6일자에 실린 ‘보국론(保國論)’, 5월 20일자에 실린 ‘고전국동포(告全國同胞)(續)’, 6월 20일~21일자에 실린 ‘민족주의’라는 논설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실린 기사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듬해부터 급격히 자주 보이게 된다. 1907년에는 한 건에 불과하던 것이 1908년에는 48건, 1909년에는 80건으로 급증한다. 대한제국이 망하던 1910년에는 48건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월에서 한일합병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8월 27일까지 수치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사들은 대개가 망국의 위기에 처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들이다.
1908년 7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민족과 국민의 구별’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민족’과 ‘국민’의 개념 구별을 시도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논설은 ‘민족’을 “다만 같은 조상의 자손에 매인 자며 같은 지방에 사는 자며 같은 역사를 가진 자며 같은 종교를 받드는 자”라고 규정하면서 “국민이라는 것을 이와 같이 해석하면 불가한지라”라고 지적한다. 이 논설은 ‘민족’과 ‘국민’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대저 한 조상과 역사와 거지(居地)와 종교와 언어의 같은 것이 국민의 근본은 아닌 것이 아니언마는, 다만 이것이 같다 하여 문득 국민이라 할 수 없나니, 비유하면 근골과 맥락이 진실로 동물되는 근본이라 할지나, 허다히 버려 있는 근골 맥락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이것을 생명 있는 동물이라고 억지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저 별과 같이 헤어져 있고 모래같이 모여 사는 민족이라는 것을 가리켜 국민이라 함이 어찌 가하리오.”
이 논설은 ‘국민’에 대해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국민이란 자는 그 조상과 역사와 거지(居地)와 종교와 언어가 같은 외에 또 반드시 같은 정신을 가지며 같은 이해를 취하며 같은 행동을 지어서 그 내부에 조직됨이 한 몸에 근골과 같으며 밖을 대하는 정신은 한 영문에 군대같이 하여야 이것을 국민이라 하느니라.”
‘국민’을 설명하면서 ‘같은 정신, 같은 이해, 같은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민족 구성원의 주관적 의지가 민족을 만든다’고 보는 국가민족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이 논설은 앞에서 말한 문화민족은 민족으로, 국가민족은 국민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망국(亡國)과 민족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 병탄됐다. 국가가 사라진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일본 천황이 임명한 조선총독의 통치를 받는, 그러나 일본제국이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피(被)지배자에 불과했다. 이제 그들이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준거 집단은 민족뿐이었다. 1919년 3‧1운동의 주역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자처했다.
일제시대에 민족 인식은 다분히 혈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는 1929년 편찬에 착수해 1947~1950년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에서 민족을 “인종을 말과 풍속이 다른 독특한 문화를 표준하여 가른 겨레”라고 풀이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송민 전 서울대 교수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쇼비니즘적 성향이 강하게 됐는데, ‘nation’이 ‘민족’으로 번역된 것도 그런 측면을 조장했다고 본다”고 말한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혈연·문화·역사 등에 기초한 문화민족 개념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주변부 국가들에서는 흔히 있는 현상이다. 유럽에서도 (통일국가 형성이 늦었던) 독일이나, (근대로 접어들 무렵 러시아 등에게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민족 개념은 다(多)민족의 종족적·문화적 요소를 강조하는 문화민족 개념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의 저자 탁석산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nation은 국가, 민족, 국민으로 번역되는데, 번역 자체에 문제는 없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우리의 경우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국가가 없어졌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득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나라를 잃지 않았다면, 민족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득세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 담론의 현실적 의미
민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사변적(思辨的) 차원을 넘어 여러 가지로 현실적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원초론-문화민족-객관주의적 민족개념보다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할 때, 우리는 이자스민, 이참(이한우), 로버트 할리, 이다 도시 등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겠다’는 그들의 의지이지, 그들의 출생지나 피부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초론-문화민족-객관주의적 민족개념에서 말하는 것처럼 혈연, 공통의 문화유산, 언어와 같은 요소들이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라면, (통일이 되지 않은 것만 빼면) 민족공동체의 내용물은 이미 완비되었다. 여기에 우리가 더 추가할 것은 없게 된다.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할 경우,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내용물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게 된다. 민족은 공동체에 대한 귀속의식, ‘우리’라는 의식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차별 없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민족주의는 공화주의와 만나게 된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주관주의적 민족개념의 철학적 기반인 18세기 중반의 신(新)고전주의가 이상적 공동체로서 스파르타와 로마의 ‘공민적 공화정(Civic Republic)’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할 경우, 당(唐)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행위를 ‘반(反)민족적’ 행위로 간주하면서, 여기에 주한미군을 끌어들인 대한민국을 빗대는 북한식·좌파적 역사관은 ‘역사의 원근법(遠近法)’을 무시한 코미디가 된다. 조선 후기까지도 제대로 된 민족관념 자체가 성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족과 통일
무엇보다 민족개념은 남북한의 통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준거(準據)가 된다. 혈연, 언어, 공통의 문화유산을 중시하는 원초론-문화민족-객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할 때, 통일은 군가 ‘너와 나’에 나오는 것처럼 ‘남북으로 끊어진 겨레의 핏줄’을 다시 잇는 것이 된다. ‘겨레의 핏줄’을 다시 잇는 것이기만 하다면, 이념과 사상, 체제는 그리 중요치 않다. ‘우리민족끼리’가 곧 통일이기 때문이다.
‘정치공동체로서의 민족공동체로의 귀속 의지’에 중점을 두는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을 취할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여기서는 이념과 사상, 체제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너무나 다른 정치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을 향해 ‘쥐명박’이니 ‘바뀐애’니 하고 자유롭게 욕을 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위대한 수령’이니 ‘친애하는 지도자’니 하는 극존칭 없이는 자기들의 지도자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체제, ‘최고 존엄’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꾸벅꾸벅 졸았다고 고사총으로 처형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을까?
도구론-국가민족-주관주의적 민족개념에 의할 경우,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통일은 환상이 될 수밖에 없다. 통일은 결국 이념과 사상에 기속(羈束)되는 통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이 ‘김일성 조선’의 ‘김일성 민족’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우리의 통일은 대한민국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김일성 민족’과의 통일은 가능한가?
북한은 1994년부터 ‘김일성 민족’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 16일 김일성 100일 추모회를 마친 뒤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김정일이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조선 민족은 김일성 민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는 식으로 처음 얘기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후 북한에서는 1994년 12월 10일 단군제(檀君祭)를 개최하면서 ‘김일성 민족’과 ‘사회주의 조선 시조(始祖)’를 언급했다. 1995년 1월 18일 평양방송은 “오늘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노동신문(1995년 3월 27일), 조선중앙통신(1995년 4월 14일)에서도 ‘김일성 민족’이라는 주장이 잇달아 나왔다. 이 매체들은 “민족의 원 시조는 단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단군과 김일성을 동렬(同列)에 올려놓았다.
한술 더 떠 북한은 ‘김정일 민족’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냈다. 1996년 7월 8일 평양방송은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김일성·김정일 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라고 방송했다.
바로 이날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결정서를 통해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주체 연호’를 제정하고,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태양절(太陽節)로 선포했다.
급기야 북한은 1998년 9월 5일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 서문(序文)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라고 선언했다. ‘김일성 민족’이라는 개념을 헌법에 명시한 셈이다.
북한이 ‘김일성 민족’을 들고 나온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남쪽에 사는 우리를 ‘다른 민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김일성 민족’ 운운하는 것은 북한의 순수한 창작물은 아니다. 분단 시절 동독 공산당 정권이 “독일민족은 이미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사회주의 독일민족’과 ‘자본주의 독일민족’이라는 서로 다른 민족이 되었다”고 공언했던 것의 변용에 가깝다(동독 공산정권이 제기한 이러한 개념은 ‘국가민족’개념의 소산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김일성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조선’에 살고 있는 ‘김일성 민족’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저들이 과연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좌익세력은 ‘민족공조’ ‘우리민족끼리’를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김일성 민족’과의 공조가 과연 가능할까?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자유를 포기하고 ‘김 씨 조선’의 신민(臣民)이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헌법애국주의’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혈연적 민족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거기에 ‘우리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좌익세력들이 기생(寄生)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분단 시절 서독에서 제기되었던 ‘헌법애국주의’가 한 가지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후반 서독 사회는 68운동,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동방정책의 추진, 나치 잔재 청산운동 등으로 인해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19세기 이래 독일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고,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명맥을 이어오던 민족주의는 낡은 이데올로기로 타기(唾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때 등장한 것이 헌법 애국주의였다. 헌법 애국주의는 한 마디로 1949년 ‘기본법(헌법)’ 제정 이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이룩한 성취들에 대한 자부심에서 출발한다.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낡은 프로이센 융커계급의 전근대적 통치를 감수해야 했던 독일제국(제2제국),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민주헌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갈등과 혼란 속에서 자멸해 버린 바이마르 공화국, 한때 질서와 번영으로 향하는 듯하다가 독일인들은 물론 세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끝에 폐허와 분단을 유산으로 남기고 무너져 버린 나치독일(제3제국), 여전히 압제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비교할 때 서독은 분명 당대 서독인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국가였다.
물론 권위주의적 전통의 미청산, 급속한 경제 발전의 와중에서 발생한 소외계층, 그리고 무엇보다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독일 시절을 겪으면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세대와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당신은 나치 시대에 무엇을 했느냐?”고 대드는 젊은 세대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인들이 일찍이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해주는 사회였다.
이런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애국심이 형성됐다. 종래의 애국심이 혈연-문화-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중심에 놓는 것이었다면, 이 애국심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룩한 성취와 기본법(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긍지를 중심에 놓는 것이었다. 이를 ‘연방공화국 애국주의’ 내지 ‘헌법 애국주의’라고 한다.
1974년 서독에서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125주년, 바이마르 헌법 제정 55주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정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도처에서 열렸다.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서독인들은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체화(體化)해 나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헌법 애국주의’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그들로서는 동방정책으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헌법 애국주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정치적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독의 사회 모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도 서독의 기본법과 기본법이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인정하고 그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헌법 애국주의’의 깃발을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
서독 좌파세력의 이러한 입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종북 좌파들의 입장과 비교된다.
‘헌법 애국주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너무 합리적이고 차갑고 오직 이성에 기초한 주장”이라거나,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정상적인 민족의식을 위로하는 대체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민족의식은 매우 약한 반면, 헌법과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일체감은 매우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헌법 애국주의’가 독일인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도 있다.
1990년 독일이 독일연방공화국의 국호와 기본법 아래 통일된 것은 이 헌법 애국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건국 이래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할 때 결코 부족하지 않다. 아직 통일을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독일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시작해, 전쟁을 겪으면서도 여기에 이르렀다.
1948년 이래 대한민국헌법은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통일된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노력해 온 모든 이들의 노력의 산물이었으며, 특히 현재의 1987년 헌법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은 바로 그 헌법질서의 산물이다.
이만하면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이 토양 위에서 한국판 ‘헌법 애국주의’가 싹터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아직은 ‘헌법’이라는 말의 울림이 ‘민족’이라는 말보다 작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민족’이라는 오랜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리고 ‘헌법 애국주의’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공동체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북한 동포까지 아우르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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