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0

알라딘: 몽양 여운형 평전 -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평전 -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삼웅 (지은이) | 채륜 | 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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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추천, 3월의 역사책은?]
정가 19,000원
판매가 17,100원 (10%, 1,9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양장본 | 396쪽 | 220*150mm | 690g | ISBN : 979118609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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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 등 이 분야에 대해 40여 권을 집필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오늘날까지 온갖 루머와 억측에 둘러싸여 있는 몽양 여운형을 재조명하였다. 저자는 여운형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싸웠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이 책은 여운형의 삶을 아주 가까이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날 수 있다.





왜 나는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는가

1장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의 위치
2장 파란곡절의 어린 시절
3장 청년시대, 기독교 전도와 국민계몽운동
4장 중국유학 통해 역사의식 깨우치다
5장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터전을 닦다
6장 임시정부의 산모 그러나 외곽으로 밀리다
7장 일본열도에 일으킨 태풍
8장 고려공산당에 참여 활동하다
9장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10장 중국혁명에 참가해 북벌에 나서다
11장 국내로의 압송, 3년의 옥고
12장 언론계 투신,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
13장 일제 말기의 시련과 건국동맹 조직
14장 해방정국을 주도하고 고립 당하다
15장 창당과 좌우합작 그리고 김일성과 만남
16장 좌우합작 시도 끝에 암살 당하다
17장 민족의 지도자, 여운형을 돌이켜 보다

저자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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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5년 8월 6일자 '잠깐독서'





저자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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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헛되이 백 년 사는 사람 되지 않으리>,<신영복 평전>,<박정희 평전> … 총 141종 (모두보기)
소개 :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 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해왔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 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





진보적인 민족의 지도자, 여운형을 다시 보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 등 이 분야에 대해 40여 권을 집필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오늘날까지 온갖 루머와 억측에 둘러싸여 있는 몽양 여운형을 재조명하였다.
저자는 여운형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싸웠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필요에 따라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넘나들며, 적도에서도 거침없이 조선 독립을 요구하고 싸웠다. 광복 이후엔 좌우합작을 위해 누구보다 힘쓴 인물이었다. 하지만 목표 지향적인 여운형의 대담한 행보가 훗날 그를 기회주의자, 친일파라는 오명을 갖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여운형의 삶을 아주 가까이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냉전 시대는 종결을 선포했지만 휴전국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이념 대립이 심각하다. 서로 간의 이해 없이 갈등과 비난만으로 얼룩져 있다. 사실 이념 간의 갈등은 언제든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대립각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던 과거의 시절, 이를 넘나들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바로 여운형이다.
그는 시대에 한발 앞서 민족의 미래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척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 곁에는 늘 시기가 뒤따르는 법. 그의 앞길에는 걸림돌이 많았고 폄훼와 모함도 적지 않았다. 우파는 그를 좌파라고, 좌파는 우파라고 했으며 때로는 중도파 또는 기회주의자라며 따돌림 되었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다 보니 친일파로 오해받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였기에 의도에 따라 그를 좌경 이념으로 색칠하고 일제 말기 반민족행위자로 낙인하려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여운형을 특정한 이념의 따옴표로 분류하기에는 활동 영역과 무대가 너무 넓고 그 그릇이 커서 쉽게 묶이지 않는다.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일제에 짓밟힌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통일정부 수립. 여운형에게 타협은 있어도 원칙을 깨는 일은 없었다. 여러 집단을 넘나들었지만 그는 친일파도 중화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친소주의자도 아니었다. 오직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이런 그를 저자는 단호하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는 이렇게 이념과 사상보다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험난한 길을 걸었던 여운형을 만날 수 있다. 격동의 시대, 다양한 이념과 인물들을 편견 없이 만났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나보자.

시대를 앞서 나간 진보적 독립운동가
손기정의 일장기를 처음 말소하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일장기 말소 사건.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이를 『동아일보』보다 먼저 시행한 것이 바로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을 당시였다. 사건이 터진 뒤 그는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신문사를 폐간시키는 길을 택한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참으로 담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그는 늘 비굴함이 없이 당당했다. 오직 자신의 굳은 신념과 목표 아래 정진해 갔기에 그의 행보에는 항상 ‘첫 번째’라는 표현이 붙었다. 가장 먼저 근대적인 정당을 창당하고 가장 먼저 3·1혁명 추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복 직후엔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첫째로 꼽혀, 미군정의 극비 보고서에는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그는 늘 한발 앞서 독립운동을 개척해 나아갔다. 국내외를 막론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여 러시아 혁명 대표들을 만났고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의 권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의 초청에 응해 고위 정객들을 만나, 총독부 고위층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모든 집단이 각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그와 만났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상대가 어떻든 여운형은 절대 위축되지 않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조선 독립을 외칠 뿐이었다.
뛰어난 지식과 웅변실력을 갖고 있던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세력도 많았지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조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했다. 당시 상황과 연관 시켜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과감한 행보였다. 훗날 셀 수 없는 테러와 암살 위협에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민족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수맥에 흐르는 정신은 진보적 민족주의였다. 정관매진正觀邁進. 즉 ‘바르게 보고 힘써 전진하라’는 뜻이 담긴 휘호를 그가 즐겨 썼던 데서도 읽을 수 있듯 그의 사상은 늘 곧았으며 강직했다. 이런 생각을 기저에 두었기에 조선 독립, 좌우합작이라는 목표를 두고 담대하게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여운형은 살아있는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운형의 행보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우리는 전쟁 후유증과 이념 대립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민족을 향한 애정이다. 여운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그것이었다.
그가 우무학당에 재학하던 시절 가정의 불행이 잇따라 찾아왔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해 아내가 사망했다. 몇 년 뒤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마저 사망하게 된다. 그에게 닥친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해 을사늑약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곧이어 홍화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을 가르치던 민영환마저 자결하게 되어 그가 채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가족과 조국을 잃은 슬픔에 아버지가 먼저 생을 마치게 되었다. 가족과 조국을 모두 잃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조국은 가족과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혈농어수血濃於水’ 그러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뜻이 담긴 항일독립투쟁 이래 그가 지켜왔던 휘호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피를 나눈 가족 같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 말고는 모든 것이 곁가지에 불과했다.
우리 시대에 과연 그와 같은 인물이 있을까?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가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말하듯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이웃나라의 역사 왜곡과 외교정책에 휘둘려 갈피를 못 잡고 있고 해방 후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의 대한민국도 결코 국민이 행복할 수만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 사람들이 폄훼하는 그의 이념을 넘나드는 행보, 그중에 특히나 일본의 초청으로 적도인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와 언론, 학계 인사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열변을 토하며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던 그를 보면 현시대에도 여운형과 같은 굳은 신념과 담대함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그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워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졌으면 한다. 여운형이 그랬던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극에 치달은 이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의 ‘민족주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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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선생님께서 쓰신 몽양 여운형 평전이다. 몽양 여운형 그는 위대하고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지만 친미친일세력에 의해 잊혀지고 폄하되어 왔다. 앞으로 이 책을 통하여 몽양 선생님이 재조명 되기를 바란다
NamGiKim ㅣ 2016-08-22 l 공감(4) ㅣ 댓글(0)








총 : 8편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NamGiKim ㅣ 2018-02-10 ㅣ 공감(2) ㅣ 댓글 (0)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평전 서평

내가 몽양 여운형이란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2015년 1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고나서 부터 였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몽양 여운형은 정말 멋있고 포스가 넘쳤다. 드라마를 통해서 "몽양은 살아생전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내가 지금까지 몽양 여운형을 존경하게 되는데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 1945를 다 보고 난 후 난 몽양 여운형의 매력에 빠져 서울 1945에서 그가 나오는 파트를 자주 돌려 봤고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난 몽양 여운형 평전은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2015년 김삼웅 선생께서 쓰신 몽양 여운형 평전을 읽게 됐다.

난 이 평전을 3번 이상 읽었다. 2015년 8월달에 처음 읽었고 2016년 3월에 한번 더 읽었으며 2017년 7월에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저자가 워낙 한국 현대사쪽 인물 평전을 주로 쓰는 사람이고 책도 워낙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쓰는 사람이라 책을 읽을때마다 책 내용이 눈에 쉽게 잘 들어왔었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해방 이후의 여운형 뿐만 아니라 그 전의 여운형에 대해도 심층적으로 알게 되었다.

몽양 여운형이란 인물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여운형은 20대가 되던 시절 집에있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여운형은 중국으로 가서 남경금룽대학에서 유학 한 뒤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함으로써 2.8 독립 선언과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국될 당시 임시정부에 들어가 활동했고 일본고위층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도쿄에가 그들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함으로써 일본에서 유학하는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20년대에는 독립군 창설을 위해 노병회를 만드는데도 기여했고 조선독립을 역설하기 위해 모스크바로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몽양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했다. 중국혁명에도 관여했던 여운형은 손문, 장개석, 모택동과도 교우했고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과 만나 협력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동남아시아와 필리핀에서도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1920년대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몽양 여운형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연결망이 되기도 했다. 1929년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됐고 3년간 감옥생활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양 여운형은 쾌활함을 버리지 않고 주변 죄수들과 간수들까지 감동시키게 만들기도 했다. 1933년 석방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 했고 스포츠 관련쪽으로도 많은 투자와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게된 손기정 선수도 가지전 몽양을 만나 조언을 들었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몽양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는 가장 먼저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 그 결과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다. 1940년 일본정부과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여운형에게 부탁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1942년에 있던 미국의 두리틀 공습을 목격한 여운형은 일제 패망을 확신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했다. "허위사실 유포죄"로 일본 형무소에서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된 여운형은 1944년 국내에서 건국동맹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에도 가담하고자 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엔도 총감과 만나 회담한 뒤 일본의 항복 한 이후 자신의 만들어 놓은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 시켜 국내치안을 담당했다. 미국과 소련이 들어온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놓였음에도 여운형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 싸움이 심해질 시기 여운형은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숱한 괴한들의 노골적인 테러와 위협에도 여운형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지만 좌우합작은 극좌 극우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결국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한다.

이처럼 몽양 여운형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훌륭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몽양은 우리역사에서 많이 잊혀졌다. 무엇보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여운형의 업적을 감추려 했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운형의 존재를 너무나도 모른다.

이 책은 2015년 박근혜 정권이 국정교과서를 추진할 당시 김삼웅 선생께서 쓰신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에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고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교수 권희영은 여운형에 대해 "여운형과 같은 좌파가 주목 받아선 안된다."라고 하며 여운형을 역사속에서 감추려 했다.

여운형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느꼈던게 있다. 여운형이라는 인물과 그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지만 여운형이라는 인물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운형을 주제로한 영화가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대하지만 업적에 비해 잊혀진 몽양 여운형 이제는 역사속에서 재조명 받을 때가 왔다. 이 책은 여운형을 이해하는데 있어 읽어야할 필수서적이다. 여운형 관련 책들이 국내에 많이 있지만 대개는 너무학술적이거나 대개는 절판된 책들인 경우도 있다. 여운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고 다른 여운형 서적을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 여운형 선생이 일반인들에게 좀 더 알려지길 기대하고 한국 역사속에서 재조명 받길 기대한다.

몽양 여운형 평전 깐도리 ㅣ 2016-05-21 ㅣ 공감(2) ㅣ 댓글 (0)


우리의 역사는 역사가들의 생각과 사료들의 가치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그리고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따라 그 의미도 달라지고 왜곡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이처럼 왜곡이 진행되었던 대표적인 경우가 교학사에 의해서 합법화하려 하였던 한국사 교과서였다. 그 교과서 안에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진행하였으며 왜곡과 찬양을 병행하였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역사 이야기가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진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역사 안에는 사실만 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역사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정권에 따라서 어떤 사관이냐에 따라 역사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몽양 여운형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1947년에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 당하게 된다.그리고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건 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이렇게 김구 선생의 암살에는 슬퍼하면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왜일까.




그것은 여운형 선생을 암살하였던 주체가 바로 그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주체이었으며 지금 현재까지 권력의 핵심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20년 전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는 노덕술 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아직 여운형 선생의 암살에 대해서 물증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소식과 그의 일장기를 모 언론사에서 지웠다는 것은 기억을 하고 있다..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그 신문사는 폐간 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그렇지만 그 언론사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언론사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우리 역사 안에서 여운형 선생은 진보주의자,공산주의자라는 주홍글씨를 씌워서 역사속에서 지우려 한 것이었다..




책을 통해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여운형 선생과 김구 선생 두 사람이 죽은 것은 어쩌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독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으며 여운형 선생이 역사속에서 사라진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 주도의 우리 근현대사 다시 쓰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몽양 여운형 평전 불새 ㅣ 2015-09-06 ㅣ 공감(0) ㅣ 댓글 (0)


몽양 여운형 평전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광복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한 애국지사 분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데 이런 애국지사 분들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적은 것 같아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바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책을 접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보면서 무척이나 안타까운 면이 많았다. 우리는 해방 이후 위대한 지도자와 애국지사들을 많이 잃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이 김구 선생님과 여운형 선생님일 것이다. 김구 선생님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것과 달리 여운형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

여운형 선생님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가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당시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이다.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일로 인해 무척이나 많은 고초를 당하신다.

참으로 나라를 위한 분이신데 그런 사실이 권력을 움켜진 자들에 의해 묻혀버렸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재창조되는데 적잖이 각색되는 부분이 있다. 각색에 의해 친일파가 독립운동가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친일파와 보수단체에 의해 각색되어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책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받아 왔기에 몽양 여운형 선생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 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사셨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공산권과 접촉하고 활동했다. 그로 인해 좌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제대로 된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해외에서도 활동을 하셨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관련된 일들을 하셨다. 그로 인해 수많은 시련을 당하지만 꿋꿋하게 버티셨다. 해방 이후 김일성과의 만남을 통해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시도를 했다. 그렇지만 첨예하게 대립한 미국과 소련의 입김으로 인해 안타까워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바로 해방 직후의 이야기다. 해방 이후 국내 정치판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려준다. 성숙하지 못 한 자들의 권력 야욕은 뜨거운 애국심을 가진 국내 지도자들에 대한 음해로 이어진다. 읽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왜곡된 시각이 아닌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몽양 여운형 평전 공포똥배 ㅣ 2015-09-03 ㅣ 공감(4) ㅣ 댓글 (0)


1,200만명이 넘는 국민이 영화 <암살>을 보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던 분들의 이야기인 이 영화는 광복 70년을 맞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과 독립된 이 나라에서 그분들의 후손들이 받고 있는 처절한 대우를 생각하게 하며, 이분들과는 반대로 목숨 바쳐 일제에 충성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친일매국노들과 광복 이후 그 권력을 그대로 누리면서 살아오고 있는 그들의 후손들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조상들의 잘못을 후손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자신들의 조상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교묘하게 독립운동으로 치장하기 보다는 후손으로써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행동이 진정한 잘못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드는 상당수의 인물들 ? 대통령부터 여당대표, 다수의 국회의원들과 관료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타 여러 재벌기업들과 사법부의 인물들까지 - 의 조상들이 친일 매국노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추악한 조상들의 과거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미고 치장한다 하더라도 이미 기록된 역사까지는 바꾸지 못하였기에 그나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런 역사까지 바꾸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려하고,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는 여러 관변단체들을 통해 자꾸 왜곡된 역사를 사실인양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교수가 방송에 나와서 당당하게 종군위안부가 스스로 원해서 그 일을 했다고 말하는 정도의 시절이니 참 안타까울 뿐이고, 분노만 쌓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인물들은 사실은 반쪽짜리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남한은 북한의, 북한은 남한의 독립운동사와 운동가들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것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덮으려는 의도에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에 대한 우리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다만 이름만 역사책에서 보았을 뿐이다.



몽양 여운형도, 이정 박헌영도, 죽산 조봉암도 잘 모른다. 배우지 못했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역사이다.













<몽양 여운형 평전>은 이념과 지역에 상관없이 민족의 통일만을 생각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이자 잊혀졌던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 선생의 사상과 독립운동사,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상세히 보여주는 책으로, 저자는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다.



이 책은 이승만과 한민당,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 왜곡되어지고 잊혀져갔던, 오직 민족의 통일만을 염원했던 여운형 선생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다시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근현대사와 정치사의 장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 마디로 그의 가치와 행동의 다양성 속에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의 수맥은, 정맥은, 진보적 민족주의였고, 그는 이 소임을 위해 불온했던 시대를 불우하게 살다 갔다.” - P. 7.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진취적인 독립운동가와 줏대없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로 갈리고, 투철한 민족주의자와 진보적 사회주의자라는 평판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는 방법과 수단을 달리했을망정 조국해방과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큰 목표에서는 한번도 이탈하지 않았다.” - P. 17.







광복 70년.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광복 이후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이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처단을 실행함으로써 현재의 강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의 통제 아래에 있었던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다르지만 같을 길을 걸었다.



친일매국노들이 그대로 권력의 주구로 자리잡음으로써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제대로 된 과거의 청산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경제적 발전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역사와 민족정기는 왜곡될 대로 왜곡되고 말았고, 필리핀은 경제까지 망가져 후진국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은 상황은 전적으로 패망한 일본의 관료들과 친일파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미군정을 탓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정확히 기억되어야 하고, 이를 가르쳐야만 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지고 폄하된 채로 가르쳐지고 있다.



물론 소수의 학자들이 민족의 정기와 역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권력의 최상층부에 70년전 친일매국을 일삼았던 이들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록 언론과 방송, 정치계와 학계, 관료들까지 친일의 잘못을 감추려할지라도 국민들이 깨어있다면 머지 않아 바른 역사가 가르쳐지고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명 한명의 국민들이 영화 <암살>을 보면서 가졌던 마음들을 선거때에 표로 표시한다면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올바르게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몽양 여운형 평전 soon ㅣ 2015-08-31 ㅣ 공감(4) ㅣ 댓글 (0)


몽양 여운형. 대충 강의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훌륭한 인물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평전을 읽는 내내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여운형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의 힘을 키우며 독립을 준비했고 좌우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양자를 아우르며 민족의 진로를 제시한 지도자이다. 그럼에도 여운형이 활동하던 당시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의 정계에서는 몽양과 같이 미·소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주적인 정치인은 설 땅이 없었으며, 결국 우파 좌파 모두에게 적대시 되고 만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한국 정치사에 6.25보다 더한 비극일지 도 모른다. 그 이데올로기 속에 수 많은 위인이 비명횡사하셨고 우리는 많은 민족의 지도자를 잃었다. 몽양도 그 그늘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몽양에 대한 평가가 현재에 와서 갈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좌익 사상에 대한 불신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몽양이 극단적 편가르기를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몽양은 좌우를 넘어 하나의 국가를 건설코자 했고, 이는 좌익, 우익 진영 모두의 반발로 말미암아 암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여운형은 일제 패망 후 가장 먼저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하는 등 결코 백범 김구나 이승만 등에 비해 정치적 무게가 못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의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우리에게는 일명 “빨갱이”라고 알려졌으며 그 인지도 또한 김구 등에 비해 낮다. 따라서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으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몽양에 대해 우리는 이번 발표를 통하여 교과서적으로만 알았던 그에 대한 평가를 당시 상황에서의 몽양의 정치노선과 활동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 되어있다. 많은 지도자 유형이 있지만, 이 분과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것이 사실이다. 싫고 좋음에 관해서는 매우 분명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의 몫을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이 그 첫째이다. 둘째로는 환경이나 상황에 의해 자신의 의지나 목표를 변경하거나 굴하지 않고 소신껏 진행해나간다는 점이다. 셋째는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동화시켜버리는 인품과 웅변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운형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그의 활동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킨 결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를 지지하는 측면에서는 좌우합작 운동만을 강조하고, 그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를 좌익 혹은 기회주의자로 비난하고 있다. 여운형의 정치적노선이나 사상적 노선은 명확히 규정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앞서 밝혔듯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여운형의 입장은 (반)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지식인 혹은 정치가가 선택하게 되는 이념적 모호성을 대표했고 특정한 사상 이념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여운형은 자신을 손문과 같은 (진보적)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곧, 여운형의 사상적 모호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가 특정 이념을 고수하기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때문에 여운형을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의 사상적 지향이나 이념적 경향성이라기보다 앞서 살펴보았던 그의 실천활동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이 분야에 대해 40여 권을 집필한 이력이 있다. 평전이라는 것 자체가 작가의 주관적 의견이 많이 들어가는 글이기에, 여운형 평전 역시 저자인 김삼웅선생님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만 여운형 평전은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운형 선생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려 준다. 평전을 읽다보면 인생을 어쩜 그렇게 거침없이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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