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2
09 송두율 교수의 한반도 분단 읽기와 통일 미래 만들기*
송두율 교수의 한반도 분단 읽기와 통일 미래 만들기*
2009년 07월 9일
김귀옥/성공회대 연구교수, 사회학
1. 들어가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레이스 짜는 여직공의 비애’라는 경구를 통해 초기 산업화 단계의 자본주의적 모순을 통렬히 풍자하고 있다. 가난과 피로에 찌든 여직공이 아름다운 레이스를 짜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이름 모를 귀부인의 치장과 허영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제 멋을 알 만한 여직공은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는데도 우아한 귀부인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혹사당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박호성의 송두율 교수의 『21세기와의 대화』 서평 중에서, 1998)
위 인용문은 1998년 박호성 교수가 송두율 교수 신서에 대해 던진 서평의 한 구절이다.[1] 맑스의 소외론은 머리로 읽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여직공의 비애는 어쩐지 가슴으로 느낀다. 그런데 오늘 송두율의 글을 다시 읽는 나는 머리와 가슴을 모두어야 함을 느낀다. 그가 우리에게 던진 자유의 레이스로 우리는 너무 쉽게 치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짧은 공부의 역사에서 분단 문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직시하였던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었던 북한이 오랫동안 믿어왔듯이 절대악이지만도 않다거나 우리가 모르던 항일무투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어슴푸레하게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독재정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 수립의 정통성이 없었다는 어느 대학원 선배의 논문에 대한 소문을 충격적으로 접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1986년경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었을 때야 모든 소문이 소문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5년 해방 공간에서 빛났던 지식인, 사상가, 예술인, 과학자들이 사라진 곳이 바로 38(휴전)선 이북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은 온몸을 훓고 지나가는 서늘함, 소름 돋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은 다른 모양으로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부딪친 첫 번째 문제, 인식의 도구, 방법론이었다.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고 틀에서 벗어나 사실로서 한반도의 역사를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식론은 무엇일까? 당시만 해도 북한을 둘러싼 전체주의적 세계관은 방법론이었다기 보다는 진리로서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거나 본질에 대해서 질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그러한 진리에 기초해 있던 사회과학은 한반도 분단에 대해 무기력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이효재 교수는 “분단시대의 사회학”을 제창하면서 이전까지 사회학이 한국 사회의 분단 문제에 대해 직시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면서 분단시대 사회학이 이전까지의 “양적 조사방법에 계속 머물 것이 아니라 참여자로서의 객관적 이해방법, 사례연구방법, 역사적 접근방법 및 문학사회학적 방법 등의 다양한 접근을 모색하고 개발해나가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분단’이라는 문제는 사회학의 중심적인 문제로 가져오도록 주창한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지만, 그에 따른 보다 구체적인 연구방법론과 그에 입각한 연구성과물은 제시하지 못한 것은 한계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문제의식의 접근은 곧바로 새로운 인식론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후학으로는 큰 과제라 아니할 수 없었다.
1988년에야 그 대답을 구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언급하기조차 금기된 반체제 인사였던 송두율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세계적 탈냉전 시대 속에서 “내재적 방법론”과 함께 학문 대중에게 나타났다. 그때 이후 송두율은 2003년 9월 20일 이전까지 학문 대중에서 숱한 문제제기와 저술을 쏟아내었다. 그는 서구의 빛나는 지성의 편린과 화려한 언사로 한국을 치장시키기보다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국경 없는 세계를 향하여 세계 시민으로 나가기보다는 보편의 언어 속에 감춰진 민족의 진실을 파헤치고, 한국적 사건을 세계적 지평 위에서 견주어 보고 있었다. 그가 던진 수많은 쟁점들 중에는 보잘 것 없는 이 후학은 미처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내용이 적잖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내재적 방법론, 북한바로알기운동, 세계화와 민족, 남북 학문공동체 등과 같은 몇 가지 주제를 선택하되,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대가의 글을 오독하더라도 후학이라는 면피가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대가의 어깨 위에 서서 좀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란다.
2. 역사는 끝났는가와 그 이후
1988년 송두율이 『사회와 사상』 독자들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짧게 보아 15년 동안 수많은 크고 작은 저서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선사하였다. 수백 편의 글과 단행권만 해도 10여권이 된다. 단행권 속에는 그는 비록 독일 땅에 있었지만, 국내 독자들과 얼마나 가까이서 호흡하며 살아왔는가,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학문적으로 성실함을 견지하였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두율, 『소련과 중국』, 한길사, 1990.
송두율, 『現代와 思想 : 사회주의·(탈)현대·민족』, 한길사, 1990.
송두율,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 한길사, 1991.
송두율, 『역사는 끝났는가 : 송두율 사회사상집』. 당대. 1995.
송두율,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1995.
송두율, 『계몽과 해방』, 당대, 1996.
송두율, 『21세기와의 대화 : 발상의 전환을 위한 20가지 테마』, 한겨레신문사, 1998.
송두율,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사, 2000.
송두율, 『경계인의 사색』, 한겨레신문사, 2002.
수많은 화제작 가운데 백미를 꼽으라는 건, 그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루 밤에 읽어치우기에는 힘든 무겁고 깊은 사색을 요하는 주제를 각 권은 담고 있다. 그래서 그저 개인적 취향으로 골라보라고 하면 『역사는 끝났는가』를 가장 먼저 꼽는다. 그건 강준만 교수가 그것을 송두율 최고의 저서로 꼽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2] 글쓴이와 같이 1990년대 초중반 입학(立學)을 하였으되, 20대의 입지(立志)를 잃어버렸거나 혼동스러워 하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 독일 흡수통일과 소련의 붕괴, 세계화에 들떠서 이데올로기의 종식, 역사의 종식, 노동의 종식, 북한의 종식 등이 회자되며 20세기적 진리가 회색 빛으로 바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특히 1993년 전후 북한의 NPT탈퇴와 함께 빚어진 북핵 공방과 1994년 6월 전쟁 위기, 그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죽음과 10월의 ‘조미기본합의서’, 북한의 자연재해와 경제적 대재난으로 소위 ‘고난의 행군’기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퇴색이 완연하던 때였다. 북한의 붕괴를 임박해 두고 있고 체제를 흡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학문적으로 어리석은 자이거나 미련한 자가 되던 남한의 분위기는 참으로 숨막히고 폭력적인, 또다른 학문적 전체주의가 지배적이었다.[3] 그런 분위기에서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은 그의 ‘통일 철학’의 메시지와 함께 더 이상 한반도적 지평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하던 지적 혼동을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그런 무렵 그가 던진 다른 결의 세계화, 민족과 국가 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생태계, 페미니즘 문제를 고민하던 우리에게, 나에게 새로운 지적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그의 학문적 맥락은 해외 망명지식인, 그의 표현대로 ‘경계인’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인식은 송두율 자신의 언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떠나 있으나 한반도 문제에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드물지만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국을 ‘남부조국’ 북한을 ‘북부조국’이라고 부르면서 “One Korea”를 외치는 모습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지 않아 한없이 외경을 갖게 만든다. 그들이라고 냉전과 분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그들은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자들의 고통을 진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단의 자기검열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해는 책 너머에 있었고, 아마도 2003년 9월 20일 이후에야 가능했다고 할까?
아무튼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송두율의 쉼 없는 글쓰기로 길을 찾던 사람들에게, 특히 남북문제를 짚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 길잡이의 하나로서 내재적 방법론의 성과를 먼저 짚어보기로 한다.
3. 맥락적 지식과 내재적 방법론
맑스 베버는 ‘나는 네가 될 수 없지만,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고, 그의 사회학을 “이해의 사회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이해는 “동기”에 대한 접근으로 출발한다. 베버에게서 이해의 사회학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 훗설에 의해 현상학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현상학적 사회학, Ethnomethodology, Ethnography[4], 상징적 상호작용론 등과 같은 미시 행위의 사회학 방법론으로 발전을 해왔다.[5] 유럽과 미국을 잇는 레비스트로스(Levi Strauss) 등과 같은 ‘원시인’과 그의 문화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의 참여관찰 방법론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질적 연구방법론은 사물 현상의 결과와 사람들의 태도를 묻는 양적 방법론과 달리 행위의 동기와 의식으로 표출되지 않는 무의식을 드러내는데 보다 적절하였다. 결과를 보되, 전후 맥락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외부에서는 읽을 수 없거나 알려질 수 없는 사실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식 권력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양적 방법론에 비해 질적 방법론은 연구대상자 자신이 말하고 해석함으로써 지식 권력자의 연구적 독재를 일정 정도 막을 수 있어서 연구의 민주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베버의 이해의 사회학은 맑스주의적 방법론이 대세를 이루던 유럽에서도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 온 것으로 보이고 특히, 사회주의 사회 연구에도 접합되었다. 1950년대 지배적이던 전체주의로서의 사회주의 인식에 문제제기하며 나온 것이 ‘내재적 방법론’이었다. 동독을 연구했던 서독 학자들, 루쯔P.C.Ludz, 본 바이메K.V.Beyme는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과거 소련이나 동구를 연구하던 자세를 지양하고, 한 사회의 동기, 정책적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것이 정책 수행의 결과나 그 현실과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가를 살펴보자고 하였다. 특히 스탈린 사후 모든 사회주의 사회들을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볼 때 나라들이나 사회들 간의 차이와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왜 사회주의 이념과 목표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 차이와 변화가 존재하는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내재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1988년 송두율 교수가 “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사회와 사상』12월호)와 『소련과 중국』(1990년 국내 출간)[6]에서 내재적 방법론을 국내 독자들에게 선 보인 이래로 수많은 북한 및 남북문제 연구자들이 이 방법론에 의거하여 북한 분야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활용한 연구 분야는 북한정치학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 사회학, 인문학 분야 등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었다. 가히 내재적 방법론 신드롬이라고나 할까?
내재적 방법론이 몇 년 사이에 북한 및 남북문제 연구 분야를 휩쓸게 된 것을 당시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상황을 떼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우리라. 북한바로알기운동이 누구에 의해 언제 제창되었는가하는 연원의 문제를 아직 살펴보지는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부터 사회 일각에서 그러한 분위기는 존재했던 기미를 보이며, 그것이 1980년대 중반 학내 운동권으로 접목되어 온 것 같다. 또한 해외 통일운동 인사들의 북한 방문기, 예를 들어 양은식 편저, 『분단을 뛰어넘어: 북한방문기』(1984) 등이 국내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8)의 번역 출간은 어떤 불빛도 없는 한밤중을 걷는 사람에서 광명이 비친 듯한 격이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된 바탕에서 연구의 도구, 인식틀로서 내재적 방법론이 제시되었으니 상황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고, 마른 대지에 비가 온 격이었다고나 할까.
1990년대 초반 내재적 방법론은 안팎으로 비판에 부딪쳤다. 내재적 방법론 자체의 한계 때문에 나온 문제제기였다기 보다는 내재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 연구성과물들의 일차적인 한계와 오류에 기인하였고, 둘째 내재적 방법론을 사용하기에 한계가 뚜렷한 남북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이 생산한 문헌자료를 제외하고는 객관적 현실을 견주어 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의 연구 환경, 1990년대 중, 후반 새로운 연구 출처로서 등장한 ‘탈북자’들의 존재론적 한계 등은 내재적 방법론이 뿌리내리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환경이었다. 또한 국가보안법의 현존이나, 그러한 지배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의 자기검열기제의 내면화 역시 근본적으로 학문의 자유를 무색해 하는 조건이 되었다.[7]
그러한 환경에서 생산된 내재적 방법론은 마치 북한을 칭송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론으로 비쳐졌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몇몇 학자들에 의해 내재적 방법론의 한국적 적용으로서 ‘내재적·비판적 방법론’으로 탄생하게 되었다.[8] 그 용어 자체에 대해 송두율 자신도 큰 저항감이 없는 듯이 보였지만 몇 번의 기회를 통해 ‘내재적’ 접근과 ‘비판적’ 접근은 배치되는 것이기라기 보다는 학문의 사명의 하나로서 비판을 방기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 바 있다.[9]
4. 내재적 방법론에 비쳐진 북한, 북한 사회
송두율이 처한 유럽적 상황에서 한반도를 보는 눈은 그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다른 이를 경유하여 물을 필요도 없이 나는 우리 사회를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서 바라보는데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초기사회화시절부터 침윤되어온 서구식 또는 미국식 인식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데 너무도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100년, 아니 50년 전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데도 식민지적 인식에 의해 굴절되고 또한 미국식 인식만이 진리로 여겨온 시선으로 전통과 근대, 저발전과 발전을 바라보고 한반도의 과거와 현실, 미래를 상상해왔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을 인식하는데 수 십 년의 세월이 걸렸고, 나는 아직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종종 반성해본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아직 나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은 것 같지 않다.
하물며 다문화사회에서 설령 다문화 정체성을 수용하고 있고 문화적 실천 속에서 ‘문화제국주의’와의 오랜 투쟁을 해온 서구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제국주의적 태도와 세계 해석권을 장악의 정당성을 ‘보편성’으로 치장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해외생활을 반세기 가량 해온 송두율 교수의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은사인 하버마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하였다.
저는 독일에서 독일통일이 지니고있는, 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점을 봐왔는데, 지난번에 은사인 하버마스 교수가 서울을 방문해서 서울대에서 강의할 때 ‘민주’와 ‘종족’의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 독일 통일이 결국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지 못한 통일이기 때문에 반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주의나 종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를 한 것이죠. 이른바 ‘민주’가 ‘종족’보다 우선하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서울에서 했는데, 저는 여기에 대해서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물론 우리의 민족주의가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려 하는 그런 것이라고만 보기 힘듭니다. 이를테면 동남아시아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인종적인 편견 같은 것을 볼 때 반드시 우리의 민족주의가 독일의 민족주의보다 더 건강하고 문제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민족주의가 우리의 분단극복에서 강력한 동력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10]
하버마스의 위의 논의는 구미계통의 지식인, 특히 진보적 지식인에게서 종종 접하게 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1990년대 한국판 ‘세계화’ 논의의 부정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에 직면한 한국 지식인들로서도 쉽게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성’에 입각한 유럽 중심적 주장이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음을 송두율은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한된 한반도 현실에서 송두율의 내재적 방법론이 보여준 북한 사회는 어떤 모습이며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읽는데 내재적 방법론은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경계인의 사색』에서는 흥미로운 주제가 여러 꼭지 등장하고 있다.
첫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관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그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의 ‘통일관’과의 관련이다. 이 점을 ‘자주성’,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의 ‘공통성’, 균형 있는 민족경제의 발전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그는 살펴보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통치를 철저한 계승을 내세우는 김 국방위의 통일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김주석의 통일관을 살펴보았다. 자주성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자주성’ 문제는 남(체제-환경):북(주체-객체)이 차이를 보이지만 실천적으로 공감을 갖는 것이 세계중심이라는 합의점이고 남북 통일관의 타협지점에서 국가연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연방제를 명시한 점을 주목하였다. 또한 지속적인 남북관계를 상정하는 ‘균형 잡힌 민족경제’를 확약하였다고 보았다. 따라서 김주석의 통일관이 변화된 상황에 따라 6.15 남북공동선언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그 결과 김 국방위는 유훈 통치의 핵심을 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송두율은 유훈통치를 김 국방위의 통일관으로 자리잡아가기 위해서는 2000년 정상회담을 일관성 있게 유지 발전시킬 있는 관계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김 국방위 통일관의 실천적 아킬레스건이 ‘남북의 지속적 관계체계의 형성’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 “‘고난의 행군’ 내재적으로 읽기”에서는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에 대한 내재적 방법론에 입각한 설명의 단초를 보여준다. 우선 그는 2001년 ‘공동사설’ “‘고난의 행군’에서 승리한 기세로 새 세기의 진격로를 열어나가자”에서 고난의 행군시기를 읽어나갔다. 즉 그는 선전과 선동에 주목하지 않고 ‘감식적’ 또는 ‘평가적’ 언표에 주목하여 고난의 행군시절 공업이 걸려 있는 문제의 원천이 전력문제임으로 짚어나갔다. 전력의 문제는 경수로 등 미국과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기보다는 내부적 요인에서 우선 찾으려 했다. 전력이 없는 현실에서 두 손을 놓고 망할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우선 자체의 힘으로 기존 생산 기술을 최고의 수준으로 정비하고 개발하여 광명성1호와 같은 성과로서 믿음을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내부의 역량을 통하여 외부와의 관계를 재설정해나가려 했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가운데 실사구시, 중국식 개혁의 새로운 적용 등을 구사하고 있는 북한을 이해해 나갔다. 그 결과 남북정상회담이나 유럽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한 부분에 강한 충격을 주어 파급효과가 다른 부분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불균형 발전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접근으로 북한 문제를 볼지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서 그는 북한의 성공의 요체를 ‘관계체계’를 새로운 구축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 그것이 북한의 아킬레스의 건이기도 하다.
남한, 중국, 외국과의 관계에서 북한이 반드시 풀어야 하는 문제의 하나로서 그는 탈북자들에 대한 ‘대사면’ 조치를 제안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5. 통일: 남북 동시 배제 및 통합론
그의 저서 곳곳에서 그는 “남북 동시 배제 및 통합론”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 언급에서 그는 남북이 지켜야할 입장이나 자신이 취해야 할 입장을 비슷하고 보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통일에는 ‘베트남식’이거나 ‘독일식’밖에 없다는 ‘역사적 경험’에만 의존하려는 안이한 태도로서는 ‘남이냐 북이냐’는 양자택일의 논리로부터 해방되어 ‘남과 북’이라는 변증법적 이해의 세계 속으로 우리의 사고를 전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 화이트헤드는 ‘과정’의 철학을, 세르는 ‘흡수하고 배제하는 제3의 철학’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민족통일이 진정한 ‘마음의 통일’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긴장된 ‘과정’ 의미를 항상 되씹어 보아야 한다.[11]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100여년 전에도 비슷하게 직접 조선의 운명에 관여한 적이 있고, 이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이미 가르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이 지켜야 할 원칙적 입장은 남이냐 북이냐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항상 남과 북을 아우르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12]
송두율이 흡수하고 배제하는 제3의 철학을 얘기하는 것은 결국 아우르기 위한 인식적 결과로 비쳐진다. 또한 남북의 통일은 역사의 전범, 즉 다른 나라의 통일 방식들을 배제하고 흡수하는 가운데 제3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논의의 결론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지만 논리의 전개 과정에는 상징적이거나 악마적 논리를 넘어서려고 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그는 북한식 연방론자만도 남한의 국가연합론자만도 아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그는 남과 북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정’ 속에서 만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 과정 외에는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의도적이거나 전략적인 목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남북의 문화가 만나야 ‘마음의 통일’에 이르고 이성과 감성이 만나기 위해서는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그가 1995년 ‘남과 북의 학문공동체’ 운동을 전개하였던 철학적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 30년을 생활해 오면서 독일의 통일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독일의 통일 경험을 되돌아볼 때 우리 같은 분단국가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인 제가 남북을 아우르는 학문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학문적 형태의 통일 노력이 남북한 모두에게 일정한 계몽적·사회적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특히 저로서는 남북한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름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어 가능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학자들이 체험할 수 없는 경험도 했습니다. 1991년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대학에서 강의를 한 바 있으며, 김 주석을 방문해 상당히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경험도 있습니다. 또한 저는 남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 어느 학자도 수행할 수 없는 나름의 독특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작년(1995년)부터 남북한 학문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습니다.[13]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 송두율 교수가 간첩으로서의 결정적인 혐의로 간주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러한 얘기에서는 1990년대 이래로 그가 주장해온 진정성의 한 단면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어설픈 글을 맺으며
이 글이 본격적인 송두율론으로 발전하려면 아직도 많은 간난신고가 있어야 한다. 이 글은 오늘 송두율 후원회를 위한 행사를 위해 급조되었지만, 제출하기에는 너무도 미흡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평소에 송두율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남북 문제를 나름대로 ‘작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접근해 오면서 느끼는 점을 중심으로 그의 대작들을 작게나마 풀어보았다. 급하게 읽은 부분에서는 많은 오독이 있을 것으로 사려되어 훗날 본격적인 송두율론을 써보리라고 다짐한다.
아직 글로 못 담은 점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첫째, 송두율의 내재적 방법론은 아직도 그의 명성에 걸맞게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끝났는가 : 송두율 사회사상집』,『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경계인의 사색』 등에서 여전히 맛보기 북한 사회론을 열어 보이고 있지만, 『소련과 중국』에서 보이는 정치하면서도 일관성을 보이는 내재적 방법론의 진수를 아직 열어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후학의 미련한 독해 탓일까? 그의 경계인으로서 조건은 이 연구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여전히 든다.
둘째, 추상과 구체가 결합된 연구의 진수를 아직은 더 기대하게 만든다. 철학자 송두율이 보이는 통일 철학의 감동이 사회학자 송두율의 통일 사회론의 과학성으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물론 6·15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읽는 사람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철학적 언어가 주는 기쁨마저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이 과정이라면 통일철학에 기반한 통일론과 실천, 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분단 조국의 감옥의 사색은 그에게 보다 구체적인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셋째, 세계적 탈냉전과 함께 우리에게 등장한 송두율은 탈냉전, 세계화라는 중심어 속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치열한 사고 과정을 선보여왔다. 세계화에 대한 다른 해석법, 총체성 사고, 큰 것과 작은 것과의 대화 과정에서 배제하고 아우르는 방식으로 제3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궁금해 마지않는 ‘민족’은 당연한 무엇으로 그 자체가 더 이상 설명되어지거나 제3의 정체성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가 제시되지 않았다. 더 이상 민족자체를 묻지 않음으로써 그저 민족주의자 송두율이기에는 민족주의라는 말이 너무 좁은 그릇이지는 않을까 싶다.
어쩜 우리가 통일 과정에서 만나는 민족은 과거의 민족, 회귀하는 민족이 아니라 부단하게 세계에 대해 반응하며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민족일지도 모른다. 통일이 제3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응당 ‘한’민족이나 ‘조선’민족 만도 아닌 송두율의 어법으로 배제하면서도 통합하는 민족이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송두율 교수 학문세계 조망한 후원회 밤 열려
송교수 2차 공판 16일 서울지방법원 311호에서 개최
이민숙 기자 redaroha@voiceofpeopl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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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크나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앞으로의 기나긴 싸움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탰으면 합니다."'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ㆍ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송두율 교수 대책위)'는 9일 오후 5시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참여연대 느티나무 까페에서 '송두율 교수 석방을 위한 후원의 밤'을 개최했다."경계를 넘어서"란 부제로 열리는 이날 후원회에는 종교계와 학계, 시민단체 등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송 교수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지난 9월 22일 독일에서 귀국한 송두율 교수(59세, 독일 뮌스터대)는 '경계인'과 함께 '조선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굴레가 지어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1월 19일 구속기소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ㆍ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9일 주최한 \'송두율 교수 석방을 위한 후원의 밤\'행사가 지인과 대책위등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느티나무까페에서 진행됐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대책위의 신정완 공동운영위원장의 사회로 1부는 송두율 교수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세미나가 진행되고 2부는 김정인 운영위원의 사회로 후원의 밤이 개최됐다. 신정완 위원장은 "검찰측이 송교수의 저서를 전체적 맥락이 아닌 일부분만을 인용해 친북이적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며 송교수의 학문세계를 조망하는 의미에 대해 밝혔다. 이는 학자의 학문 세계를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로 처벌하려는 우리 사회의 몰상식을 지적하는 것.
'송두율 교수는 탈근대인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한 장시기 동국대 교수는 "송 교수는 그의 역정에 가득 찬 삶과 지식을 통해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탈근대적 삶과 문화, 그리고 사회제도를 형성하고 확립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며 "근대적 경계인을 자처하는 탈근대인인 송두율 교수는 대결과 폭력, 그리고 증오가 난무하고 있는 이 땅으로 들어오는 고난을 감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귀옥 성공회대 교수는 1993년을 전후해 학문적 전체주의가 지배적인 이남의 분위기에서 송교수의 『역사는 끝났는가』저서가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과 그의 통일철학의 메시지와 함께 '더 이상 한반도적 지평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라던 지적 혼돈을 극복하는 자양분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뿐만 아니라 자리에 함께 한 교수와 대책위는 한 목소리로 송두율 교수의 석방을 요구했다. 백기완 선생은 석달 그믐이 다가오면 낫을 갈아 빼앗긴 낱알을 찾아 온다는 '돌빔'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면서 "잡혀 있던 사람을 꺼내는 것을 돌빔이라고 부른다"고 부연설명하면서 대책위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정정희씨를 위로하는 아들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2부 '후원의 밤'에서 송교수의 부인인 정정회씨는 "남편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송두율'로 살아갈 것을 굳게 확신한다"며 송 교수가 "자유의 몸으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라고 호소했다. 정정희씨에 의하면 현재 송 교수는 각지에서 오는 격려편지로 인해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서 해방되고 있다"고 한다. 송교수는 이달 2일에 열린 1차 공판에서 "여론몰이와 여론재판에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절실히 경험했다"며 "새 것을 맞기 위해 그동안 관성적으로 달려온 속도를 우선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송교수는 "민주와 통일을 화두로 살아온 자신을 해방이후 최대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현실에서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며 "역사 속으로 이미 살아져야만 했을 것들이 아직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와야 할 것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기 위해서 쏟고 있는 엄청난 정열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송두율 교수의 2차 공판은 다음 주 16일 오후 2시경 서울지방병원 311호 법정에서 개최된다.
가수 이정열씨와 시인 신동호씨가 송교수를 위한 시와 노래를 낭송했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송두율 교수 사건 주요일지
9월 22일 귀국23일 국가정보원에 자진 출두30일 '한국 민주화운동의 쟁점과 전망' 심포지엄에서 폐막연설 10월 2일 기자회견,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 발표3일 검찰 소환 시작5일 송두율교수사건 교수-학술연구자 비상대책위원회(약칭 송두율 비대위) 결성7일 송두율 비대위 '송두율 교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 발표9일 종교인 기자회견, '민족적 대의로 포용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발표14일 사회원로 기자회견,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화해의 기회로' 발표송교수 노동당 탈당, 독일 국적포기 등의 내용을 담은 성명서 발표 (오후 1시 프레스센터)17일 교수 255명 기자회견, '학문적 실천은 오직 학문의 논리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발표22일 구속영장 발부, 서울구치소 입감23일 시민사회단체 인사 기자회견, '송두율교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일천인 성명' 발표 (오후 3시 기독교 회관)11월 5일 송두율 비대위, '전향과 인권 토론회' 개최 6일 독일 뮌스터대 크리스만스키 교수 기자회견 11일 대법원, 검찰의 송교수에 대한 변호인 입회 불허 처분이 부당하다는 하급심의 결정을 확정13일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ㆍ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발족 (오전 11시 변호사회관)17일 독일 사회 각계인사 600여명 '노무현 대통령과 한국국민께 드리는 호소문 발표'19일 검찰, 국가보안법 위반과 사기미수로 구속기소27일 김세균 외 744명, 박정삼 정형근 박만을 피의사실공표죄로 대검찰청에 고발12월 2일 송두율 교수 1차 공판 (오후 2시 서울지법 311호) 독일 사회각계인사들 920명이 서명한 '송두율교수사건 담당재판부에 드리는 탄원서' 재판부에 제출5일 송두율교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유럽 대책위 베르닝 박사 기자회견 9일 송두율 교수 석방을 위한 후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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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송두율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위한 대책위원회> 주최 2003년 12월 9일 송두율교수 석방을 위한 후원의밤 행사의 일부로 행한 학술토론회 "송두율교수의 학문세계"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1]) 박호성,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냉전적 볼모 송두율 교수의 21세기를 위한 고뇌"(『한겨레21』제225호, 1998. 9. 17).
[2]) 강준만,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가? - 송두율,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냉전적 불모'”(『인물과 사상』제33호, 2001).
[3]) 197, 80년대 대표적인 3세계 연구자 중 한 명이었던 에이단 카터(Aidan Foster-Carter)는 1991년에 하버마스 이론을 북한에 적용하여 빠르면 1995년, 최소한 2000년까지는 붕괴할 것으로 국내에서 발표하였고 1992년에는 The Economist에도 같은 논조로 발표하였다. 당시 미국이나 해외의 북한 및 한반도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유수한 남북문제 전문가들도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흡수통일의 구체적 방식과 절차를 담은 주장을 폈다. 1998년 8월말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강성대국의 선언,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는 북한 붕괴론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섬으로 남아 있는 북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식 개혁·개방, 즉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Ethnomethodology, Ethnography 모두 ‘ethno’라는 두음을 갖고 있음을 주목하면 이런 방법론이 다민족(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다른 민족, 다른 문화를 연구하는 방법론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5]) 이러한 방법론을 통틀어 ‘질적 연구방법론(Qualitative Research Methodology)’으로 부르며 그것은 계량과 사회조사분석기법을 결합한 ‘양적 연구방법론(Quantitative Research Methodology)’과 대척을 이루고 있다.
[6]) 이 책의 원제는 Sowjetunion und China: Egalsierung und Differenzierung im Sozialismus로서 1981년 뮌스터대학 사회학부 교수자격취득논문으로 제출되었고, 1984년 프랑크푸르트의 캠퍼스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7]) 2003년 이전까지만 해도 ‘특수자료취급인가증’을 소지하여야 북한 원자료를 읽거나 소장할 수 있었다. 설령 인가증 소지자라고 할지라도 소위 ‘간첩단’사건과 같은 시국사건이 발생하면 사건과 상관없이 원자료 처리문제로 부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8]) 이 방면의 초기 연구로서 이종석의 “북한연구방법론, 비판과 대안”(『역사비평』1990, 가을호)과 강정구의 “연구방법론: 우리의 반쪽인 북한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까?”(강정구 엮음, 『북한의 사회』, 을유문화사, 1990)가 있고, 그 뒤를 이어 강정인의 “북한연구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제언”(『역사비평』1994. 가을호), 김연철의 “북한식 체제의 성격 규정을 위한 연구방법론의 모색”(『통일문제연구』제7권1호, 1995)이나 “북한연구에서 위로부터의 시각과 아래로부터의 시각”(『통일문제연구』제8권2호, 1996) 등이 제기되었다.
[9]) 송두율 “북한연구에서의 '내재적 방법'재론”(『역사비평』 1995년 봄호). 특히 『경계인의 사색』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내재적 방법을 적용하여 북한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내재적 방법론을 둘러싼 오해의 폭을 좁히려 한 노력이 역력하다.
[10]) 송두율, “‘지구화’와 민족통일”(미국 버클리 시에서 열린 임창영 선생 3주기 기념강연 중에서,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사, 2000), 87쪽.
[11]) 『역사는 끝났는가 : 송두율 사회사상집』(당대, 1995), 82-3쪽.
[12]) 『경계인의 사색』(한겨레신문사, 2002), 182쪽.
[13]) 김창호, “재독철학자 송두율에게 듣는다: 남과 북의 '학문공동체'를 주창한다”(『역사비평』, 199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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