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와 비판[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256]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25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25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25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256]
미국의 시각[편집]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258])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258]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112],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106]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245]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245]
평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259]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260]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261][262]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263]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63]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263]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263]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63]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263]”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264]
비판[편집]
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265][266]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267]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268]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269]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270]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271] 한편 5·10 선거를 반대하던 4·3 항쟁에 침묵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2] 는 비판도 있다.
강준만은 '김구가 50대까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건 미담(美談)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으면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273]' 고 보았다.
테러리즘 논란[편집]
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263]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263]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263]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274]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다.[106] 또한 커밍스는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275] 고 평하기도 했다. 38선 이북 조선에서는 1946년 3·1절 기념식 때의 폭탄투척 사건 이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권위주의적인 행동[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273][276]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273][277]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273][277]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72]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272]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편집]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은 그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 백범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278]
“ |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279] | ” |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279]'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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