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6

[경제직필]삼성, 미국의 영업비밀 요구 거부해야 - 경향신문

[경제직필]삼성, 미국의 영업비밀 요구 거부해야 - 경향신문
삼성, 미국의 영업비밀 요구 거부해야
송기호 변호사
2021.10.06 03:00 입력
한국은 어떤 선진국인가? ‘한강의 기적’ 또는 ‘삼성전자’가 선진국 한국의 정체성은 아니다. 고도성장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며 삼성전자의 지향점이 곧 한국의 목표는 아니다. 한국의 선진국 정체성은 선진국 한국 사회를 통합해 주면서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세계 문명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가치(‘코리안 밸류’)이다.


미국이 삼성전자에 반도체 영업비밀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사건을 한국이 선진국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3일,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이 처한 위험성에 대한 공공 의견 제출 요청이라는 제목의 공고를 연방 관보에 실었다. 문제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타이완반도체(TSMC)에 매우 민감한 반도체 영업비밀 제출을 요구한 점이다. 반도체 생산시스템, 일일 반도체 재고량, 상위 3대 주요 고객사 및 고객사별 매출 비중, 지난 3년간 주요 반도체 수주 출하(BB) 비율, 과거 3년간 원료 설비 구입 지수, 향후 6개월간 증설 계획 등 13개 설문 사항에 대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요구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서 정하고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확인한 기업 영업비밀 보호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삼성전자는 영업비밀 제출을 거부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고객 정보를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미 상무부의 이번 관보 통지는 삼성의 고객정보 유출을 정당화해 줄 ‘법령상 공개’ 면책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위 무역협정의 당사국으로서 미국 정부에 조치 철회를 요구해야 한다. 한국의 정당한 입장을 미국에 전달하고 미국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아가 만일 미국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삼성전자에 끝내 불이익을 준다면 미국을 WTO 분쟁해결절차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미FTA가 무기력함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을 보호하지 못한다. 한·미FTA는 미국의 안보 일방주의를 뚜렷한 조항을 두어 승인해 주었다. 미국이 필수적 안보 사항이라고 선언만 하면 언제든지 한·미FTA의 의무를 위반할 수 있는 조항을 23장에 두었다. 2007년 당시 협정을 주도한 김현종 및 김종훈 전통상교섭본부장은 이 내용을 국민에게 성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문제는 미국 상무부의 요구가 일회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24일 ‘미국 공급망’이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반도체의 미국 공급을 보장할 것을 연방정부에 지시했다. 그 후속 조치로 ‘회복력 있는 공급망 구축과 미국 제조업의 부흥’이라는 백악관 보고서가 나왔다. 이번 미 상무부의 자료제출요구는 이 보고서에 포함된 일련의 계획된 조치이다.

미국의 장기 목표는 중국과 단절된 반도체 공급망이다. 한국의 반도체가 중국으로 공급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국제분업질서에 어긋난 미국의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반도체 핵심 원료의 한국 수출을 규제한 방식과는 달리 미국 중심 동맹국의 시장을 협력의 대가인 것처럼 제시할 것이다.

만일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공급 사슬에서 중국과의 단절을 요구받는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는 중국이 한국의 사드 미사일 배치에 맞서 여행 등의 일부 교역을 차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이 될 것이다. 무역협회의 자료에 의하면 작년 1~7월 한국이 수출한 반도체의 41.1%를 중국이 수입했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응은 삼성전자 영업비밀 제출 거부라는 일회적 조치에 그칠 수가 없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한국의 선진국 정체성이 미국과의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은 지금 한국에 어떤 선진국이 되려고 하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와 소통하는 아시아의 자유 선진국이고자 한다. 한국은 특정 나라, 체제 또는 종교의 틀에 묶인 선진국이 아니다. 한국은 유엔 회원국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적대시하지 않는 선진국이다. 동시에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의 자유를 빠짐없이 명시하였듯이 표현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하는 자유 선진국을 지향한다. 강한 나라이면서도, 다른 나라들이 본받기를 원하는 매력 있는 선진국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한반도 군사대치 상태를 해결함으로써 평화에 기여하려는 선진국이다.

미국에 아니라고 말할 때이다. 한국의 선진국 정체성으로 미국과 소통할 때가 되었다. 한국이 어쩌다 선진국이 된 나라가 아님을 알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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