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5

강항 - 위키백과, 姜沆, 간양록

강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항
출생 1567년(명종 22년) 7월 8일/음력 5월 17일
전라도 영광군
사망 1618년(광해군 10년) 6월 27일/음력 5월 6일
성별 남성
국적 조선
본관 진주
별칭 자는 태초, 호는 수은
학력 1593년 전주 별시문과 병과급제
직업 문인, 의병장
부모 강극검


강항(姜沆, 1567년 7월 8일(음력 5월 17일)~1618년 6월 27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다. 좌찬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강극검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1]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정유재란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성리학을 전하였고 귀국을 종용하여 1600년 탈출한다. 대구향교 교수, 순천향교 교수 등을 지낸 뒤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일본에서 보고 듣고 한것을 책으로 집필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간양록이다.
생애[편집]

강항은 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진사시에 합격, 27세 때인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었고, 1596년 공조좌랑(工曹佐郞)과 이어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는 남원에서 명의 장군 양원(楊元)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원균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육지로 연결되는 길이 뚫려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와 공격 개시 사흘 만에 남원이 함락되고, 고향 영광에서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영광마저 함락당하자 강항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순신에게로 가려다가 논잠(論岑) 포구(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포위되고, 강항은 죽을 각오로 일가족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지고 그 와중에 아들 용과 서녀(庶女) 애생을 잃었다.[2] 포로로 잡힌 강항 일가는 순천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3]

10여 일 만에 지금의 일본 에히메현 오쓰시 나가하마(長濱) 항구에 도착, 지금의 히지 강을 지나 이요(伊豫)의 오쓰(大洲) 성에 이른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과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으로 엮어 몰래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강항은 교토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를 만나 함께 탈출을 의논하고, 5월 25일 밤에 숲길을 따라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 지금의 야쿠시타니 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배편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노승과 함께 숲길을 걸어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들려 우와지마 성의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나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이후 교토(京都)후시미(伏見) 성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된다. 당시 세이카와의 만남에 대해 강항 자신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서 배를 마련하고자", 즉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비용을 벌기 위해 그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세이카와 강항이 필담으로 주고받았던 또는 강항이 세이카를 위해 암기하고 있던 주자학 이론들을 적은 글들은(총 21권) 현재 일본의 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그는 후시미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1600년에 두 제자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일본에 억류된지 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1602년 대구향교의 교수(敎授), 1608년 순천향교의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해,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내산서원(內山書院)에 강항을 모시고 있다. 내산서원 입구의 문은 강항의 부인 함평 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다. 4년에 걸치는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수록한 《간양록(看羊錄)》은 그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본의 내정이나 국토의 특징, 당시의 여러 다이묘(大名)의 정세 등을 세세하게 적은 것으로 왕조에 대한 의견 제출서로서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 관계[편집]증조부 : 강향수(姜享壽)
증조모 : 부안 한씨(扶安韓氏)조부 : 강오복(姜五福)
조모 : 제주 양씨(濟州梁氏)아버지 : 강극검(姜克儉)
어머니 : 영동김씨(永同金氏)부인 : 진주 김씨(晉州金氏)장남 : 강시만(姜時萬)
자부 : 임득지(林得智)의 딸손자 : 강익주(姜翊周)
손자 : 강숙주(姜䎘周)
손자 : 강휘주(姜彙周)
손녀 : 정이주(鄭以周)에게 출가
장녀 : 나종경(羅宗敬)에게 출가
차녀 : 김기(金夔)에게 출가외손자 : 김일태(金一台)
외손자 : 김일명(金一明)
외손자 : 김일규(金一奎)
외손녀 : 남전(南琠)에게 출가
외손녀 : 권도전(權道全)에게 출가
삼녀 : 이소(李昭)에게 출가
사녀 : 고두남(高斗南)에게 출가외손녀 : 박경종(朴慶宗)에게 출가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간양록》(MBC, 1980년, 배우:이정길)
임진왜란》(MBC, 1985년~1986년, 배우:임채무)
저서[편집]《간양록(看羊錄)》원래 제목은 '건거록'(巾車錄, 건차록)으로서 

강항이 저술한 포로 문학의 백미이다(제자 윤순거 편찬).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4년간 일본 포로 체험기이다. 그는 1597년부터 1600년까지 포로생활을 했으며, 제자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현재 간양록은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 단행본과 필사본(강항이 직접 적은것으로 추정)만 보존이 되어있다.간양록은 다섯부분으로 구성이 되어있다.적지에서 임금에게 보낸 상소 <적중봉소>, 일본의 지도, 관직, 장수의 특징 등이 적힌 글 <적중문견록>,일본에 남은 포로들에게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잃지 말기를 권한 글 <고부인격>,귀국 후 일본 사정을 문답형식으로 적은 글 <승정원계사>, 포로 상황부터 개인사를 일기형식으로 적은 글 <섭란사적> 이다.1658년 목판본에는 <섭란사적>으로 표기돼 있는데, 2020년 학술대회에서는 <섭란사적 시말>이라는 표기를 확인하기도 하였다.《운제록(雲堤錄)》
강감회요(綱鑑會要)》중국의 역사서인『자치통감』과『통감강목』을 보완, 정리하여 한 책이다. 인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1권 뿐이다. 강감회요 목판은 숙종 28년(1702)에 새긴 총 642매으로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좌씨정화(左氏精華)》
《문선찬주(文選纂註)》
《수은집(睡隱集)》
성재기(惺齋記)》
시상와기(是尙窩記)》
같이 보기[편집]조선 통신사신숙주해동제국기
신유한(申維翰)해유록(海遊錄)
성혼
조완벽
조헌
원균
김덕령
외부 링크[편집]내산서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각주[편집]
윤순거, 《동토집》 권6, 수은 강 공 행장; 송환기, 《성담집》 권20, 수은 강 공 묘갈명
강항, 《간양록》, [섭란사적], 1597년 9월 23일
강항, 《간양록》, [섭란사적], 1598년도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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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沆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姜沆
各種表記
ハングル: 강항
漢字: 姜沆
発音: カン・ハン
ローマ字: Gang Hang
テンプレートを表示


姜沆(きょうこう、강항(カン・ハン)、Gang Hang、1567年 - 1618年)は、朝鮮李氏王朝時代中期の官人。字は太初(テチョ、태초)。号は睡隠(スウン、수은)。本貫晋州[1]
生涯[編集]

1593年、朝鮮王朝における文科に合格したが、1597年慶長の役(丁酉再乱)では刑曹佐郎という要職に就いており、全羅道で明の将軍・楊元への食糧輸送任務に従事していた。しかし日本軍の進撃によって全羅道戦線が崩壊し、一族で避難中に鳴梁海戦後に黄海沿岸へ進出していた藤堂高虎水軍により捕虜とされ、海路日本へ移送された。

日本では伊予国大洲に拘留され、のち伏見に移され、この頃に藤原惺窩と交流した。約3年にわたる俘虜生活の見聞(日本制度や情勢)は看羊録』にまとめられた。

1600年(慶長5年)4月に伏見を立ち、対馬を経由して朝鮮に帰国したが、再び仕官はしなかった。

看羊録』は彼が日本で見聞したこと、日本の内情や国土の特徴、諸大名の情勢などを細かく記したもので、朝鮮王朝に対する提言集的な側面が強い。一方、『看羊録』は見聞の中での様々な情動を見事な漢詩にしている[2]。日本について、「日本はどんな才能、どんな物であっても必ず天下一を掲げる。壁塗り、屋根ふきなどにも天下一の肩書が付けば、多額の金銀が投じられるのは普通だ」と綴っている。

看羊録』では、百済王族臨政太子倭国周防に行き、大内氏の祖となった、と主張しているが、この主張に対して松田甲は「奇評を発している」と評している[3]

韓国百科事典斗山世界大百科事典』は、姜沆を「丁酉再乱の時に義兵を起こして戦い、倭軍捕虜として日本に捕まった。日本の学者に性理学を教える一方、倭軍の軍事情報などを故国に伝えたが、日本の性理学の元祖といわれる」と解説している[4]

脚注[編集]
^강항(姜沆)”.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2022年7月18日閲覧。
^ 姜沆 著、朴鐘鳴 訳『看羊録 朝鮮儒者の日本抑留記平凡社東洋文庫〉、1984年。
^ 松田甲『日鮮史話』朝鮮総督府〈第2編〉、1926年、10-11頁。
^ “강 姜”. 斗山世界大百科事典. オリジナルの2016年6月1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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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Hang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ang Hang
Hangul
강항
Hanja
姜沆
Revised Romanization Gang Hang
McCune–Reischauer Kang Hang

In this Korean name, the family name is Kang.

Kang Hang (1567–1618) was a Korean philosopher who was taken prisoner by the forces of Toyotomi Hideyoshi in 1597.[1] He was taken to Japan where he was influential in passing on neo-Confucianist ideas to the people of Japan.[2]
References[edit]
  1. ^ Ja-hyun Kim Haboush, Kenneth R. Robinson (2013), A Korean War Captive in Japan, 1597-1600: The Writings of Kang Hang,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535113
  2. ^ Kim Ha-tai (April 1961), "The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Japan by Kang Hang, a Prisoner of War",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37): 8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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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9
강항 (지은이),이을호 (옮긴이)서해문집200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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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쪽
책소개
강항이 정유재란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책. 책의 원래 제목은 죄인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건차록巾車錄'이었으나, 뒤에 그의 제자들이 <간양록看羊錄>으로 바꾸었다. '간양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로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이다.

피난 중에 아버지와 헤어지고, 자식들까지 읽은 사연,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적에게 구출되어 일본 땅까지 끌려간 일,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일, 일본에 억류된 여러 포로들의 삶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환란 중에 겪은 수난과 고독, 나라에 대한 염려, 임금에 대한 그리움 등을 읊은 수십 편의 자작시도 함께 실렸다.


목차


역자 서문
국역 간양록을 다시 펴내며
『간양록』에 붙이는 유계兪啓의 글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賊中奉疏]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人檄]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詣承政院啓辭]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간양록』에 붙이는 윤순거尹舜擧의 끝말


책속에서


맏형이 돌아가실 적에 말문이 어둔하여 종이를 빌려 기록하신 말이 있다. '네가 있으니 나는 잊고 간다. 형수를 부탁한다.' 하셨으니, 그 말씀 아직도 역력하건만 이 일이 웬일인가! 너무도 기막히고 너무도 원통한 이 사실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내 목숨마저 언제 어찌 될지 모르질 않나! 종놈들이라 해 봤자 나를 버리고 도망간 놈은 고스란히 살게 되고, 차마 떨어질 수 없다며 따라선 놈들은 도리어 죽게 되니 애달픈 일이었다. 기구한 운명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사실이 아닌가!

놈들은 뭇 배를 끌고 남으로 내리 뺐다. 영산창 우수영을 지나 순천에 배를 댔는데 놈들은 순천을 중심으로 갯가에다 둥그렇게 성을 쌓고 뱃전을 지어놓고 있었다. 성은 하늘에 솟구쳐 은하수를 가르듯 하고 뭇 배는 떼를 지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포로들을 실은 배 100여 척만이 큰 바다 물결에 출렁거릴 뿐이었다. 잡혀 온 날을 손꼽아 보니 오늘이 아흐레째로구나! 그래도 죽지 않은 게 용해. 물 한 모금 적시지 않았건만 그래도 멀뚱멀뚱 살아 있으니 말이야. 접기
정유년 침략 때의 일입니다. 수길이는 출정 장병들에게 이런 엄포를 놓았습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야!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 놈의 코를 베는 것이 옳다. 병졸 하나에 코 한 되씩이야! 모조리 소금으로 절여서 보내도록 하라."
이렇게 적장에게 명령을 내려서 적장들은 제 콧수를 채운 뒤에야 비로소 사로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니 이러한 민족적 참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적괴는 산더미같이 실어 오는 코를 일일이 검사한 다음에 북문 밖 10리만큼 되는데에 쌓아 산 하나를 만들었으니 동포의 참변을 호소할 곳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일년이 채 못되어 제 배때기 속에다 소금을 처박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62-63쪽 접기 - ann138
P. 31신성록보다 간양록 - 데스나이트
P. 31간짱뽕보다 간양록 - 데스나이트
P. 31간양록보다 간짜장 먹고 싶다 - 데스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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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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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 박사, 교서관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좌랑, 형조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영광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적에게 함락되고, 강항은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적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다가 1600년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 바로 <간양록>이다. 또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가를 만나 그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기도 하였다. 1600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국에 돌아온 뒤 1602년 대구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수은집> <운제록> <건거록> <강감회요>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간양록> … 총 2종 (모두보기)

이을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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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 출생, 중앙고보를 거쳐 서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고보 때, 東武 李濟馬의 제자 崔承達에게 사상한의학을 공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을 번역하여 최초로 사상한의학설을 체계화시켰다. 24세에 영광에서 한약국을 운영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양의학』 논문집에 의학 및 약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27세에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접하고 한국실학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사재를 들여 영광민립남녀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39세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다. 49세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하여 다산학을 체계화시켰다. 58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하고 호남의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 호남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한편 다산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실학정신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일으켰다. 다산학을 출발점으로 실학정신을 발굴하고 나아가 한국철학을 연구하여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적 독자성을 밝히고 한국 문화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여 현대 한국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저서로는 논문 등 수백 편을 모아서 펴낸 『이을호 전서』 24권 9책이 전한다.
접기

최근작 : <한글 논어>,<한글 중용.대학>,<개신유학 각론> … 총 67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8.2





이건 분명히 건거록으로 읽어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선 건차록으로 쓰여 있어 사고나서 약간 후회했다. 하지만 정말 훌륭한 기록이 일제시대 '분서의 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참 다행이다. 우리나라 후손들이 꼭 읽고 교훈을 얻어야 할 책이다.
hotsurf 2015-06-2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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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저는 수은 강항이 쓴 피왜 역정의 기록으로서, 현암 이을호 선생이 처음으로 발굴하여 번역,

소개한 것인 "간양록"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책을 번역하신 이을호 선생이 간양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선생의 특별한

애국심 때문이었다라고 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지만,


선생은 일찍이 일제 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고, 영광 만세 사건을 주도하여 2년여의 옥고

를 치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고, 선현들의 정신적 가르침을 통해 잔악한 일제의 침략

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입수하여 읽어 보고 그와 같은 정신을 배우고

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책은 이미 금서로서 모조리 불살라 버린 후였기 때문에 쉽게 구

할 수 없었음은 물론, 함부로 지니고 다닐 수조차 없었습니다. 선생은 이를 몰래 탐독하고 후학

들에게 가르치면서 왜국의 포로가 되어서도 나라를 걱정하였던 강항을 배워 일제의 탄압에서

신 음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를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광복이 되자 선생은 다시 찾은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국역 간행하게 되었으니 국역본 간양록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실로 이

와 같은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을호 선생의 말을 잠깐 보면, 본서를 간행함에 있어서 잊

을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점기에 있었던


소위 분서의 화인 것입니다. 당시에 "간양록" 은 일본 경찰에 의하여 모조리 불태워져 버렷기 때

문에 8-15해방과 더불어 "간양록" 은 씻은 듯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번역본의 저본이 된 원본은 그러한 환란을 어렵게 피해 낸 유일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

다. 그러한 뜻에서 번역, 간행과 동시에 역자가 간직하고 있던 원본을 영이나여 동호자들의 참

고 에 공함과 동시에 옛 기억을 되살리느 기회를 가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여기에 기록으로 남

겨두려고 한다.


이책을 읽기전에 제가 이글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소멸될뻔한 글을 읽고 리뷰를 통해 이책을 다

시 소개한다는게 너무 기뻤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책을 잘설명할수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지

게 되었다.



- 접기
낮잠자나루 2010-06-1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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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의 기록.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임진왜란 중 교섭이 결렬되는 바람에 두번째로 침입을 당한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그 긴 환란의 기간속에서 피폐해졌을 백성들의 삶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두번째 침략이니 저들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오라는 말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코를 잃어야 했고, 그 코가 산을 이루어 코무덤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대를 달리하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강항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일을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적은 것이 바로 '간양록'이다. 책의 원래 제목은 죄인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건차록巾車錄'이었다. '巾車錄'... 죄인이라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라고 하는데 효종때 이 책이 간행되면서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看羊錄'으로 바꾸었다. '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로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로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포로된 자신의 처지만을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그들의 군사적 상황까지 살펴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을지를 함께 적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잡혀가는 중에 가족들을 잃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다시 구출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중에도 두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일도 있다. 그래도 관직있는 자라하여 무지렁이 취급은 받지 않았던 듯 하다.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고, 일본승과 친하게 지내며 최초로 조선의 성리학을 전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게 왕을 향한 충정심으로 해석되어져 조금은 안타깝지만 말이다. '忠'에 무게를 두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까닭없이 억하심정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토록이나 멋진 인물이 많았는데도 조선의 시각은 어째서 열리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눈앞의 이익, 당장의 안일함만 좇으며 살고자 애를 썼던 것일까? 분연히 일어서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관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책을 읽을 때마다 의문점의 크기는 커지기만 한다.



목차를 크게 살펴보면 이렇다.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賊中奉疏] ,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俘人檄] ,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詣承政院啓辭] ,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과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부분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신이 엎드려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건대 평소에 인재를 기른 일도 없고, 백성을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긁어모아 싸움터로 몰아세우니, 그나마 권리나 있고 돈푼이나 있으면 뇌물을 먹이거나 권력을 떠세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다 내빼고,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만 싸움터로 내몰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군이랬자 제 직속군이 없고, 졸병들에게는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 고을 백성으로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하며, 한 졸병의 몸으로 아침에는 순찰사에게 붙었다가 저녁녘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졸이 자주 바뀌고 소나기처럼 내닫는 명령을 이루 다 받들기 어려운 판입니다. 이러니 누가 어른인지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워 적들의 목을 치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기관은 너무 많아서 정령이 한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아침에 남원 부사였다가 저녁에 나주 목사로 전출되고, 오늘 방어사였던 그가 내일 절도사가 된다는 것.... 이런 상황이라면 장량, 한신, 유비, 악비같은 명장들이 오늘에 다시 살아난다해도 삼십육계 동망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저 글을 쓰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싶다. 적군의 실생활을 여러모로 살펴본 후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충언중의 충언인 것이다. 적군의 실태와 비교하여 나온 생각이니 어찌보면 서글픈 일일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썩어버린 조선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이 드러나는 글이니 그가 환국한 후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았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아끼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짠해지기도 한다.



앞서 읽었던 <산성일기>를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살펴보면 조선이 선조대에 이르러 국력이 약해졌던 건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조짐을 보였다는 말이다. 4대 사화를 비롯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혼란은 이미 나라가 정상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버렸다. 비변사를 아무리 설치하면 뭐하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을. 남으로 왜의 침입을, 북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十萬養兵說'을 주장했던 이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가재정은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고, 사회기강은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 무대책이 대책이 되어버린 꼴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보니 느닷없이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작금의 상황이 바로 저 상황이 아닐까 싶어서. 지금의 상황이 딱 저 꼴이다. 당리당략에 빠져 백성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내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난무하니 이이의 '十萬養兵說'이 다시 돌아온다 한들 제대로 먹힐리가 없는 상황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그때와는 다르게 백성이 달라진 세상인데도 왜 저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역사는 알면 알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비생각





강항 姜沆 1567~1618 .. 본관은 晋州, 호는 睡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5년 교서관 박사, 다음해에 정6품 공조좌랑이 되고 형조좌랑이 되었다. 교서관은 태조때 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ㆍ印信(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597년 휴가를 얻어 고향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전라도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은 참판 이광정 밑에 배속되어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일본 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 교토 쇼코쿠지(相國寺) 妙壽院의 선승인 순수좌, 즉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과거 제도와 춘추 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해주었다. 후지와라는 강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經書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 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항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1600년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에 따라 한양으로 가서 편전 앞에서 술상을 받았다. 선조는 강항에게 일본 현지 상황에 관해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고향으로 내려 온 강항은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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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2013-03-0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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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간신히 되돌아온 어느 선비의 이야기. 바로 간양록이다. 그것도 임진왜란 거의 말기에 붙잡혀갔으니 보통은 돌아오기 힘들었을텐데 3년만에 귀국해서 얼마나 그 감회가 남달랐을까? 더하여 이렇게 좋은 기록까지 남기다니. 옛적의 기록과 분위기를 되살리는 측면에서도 이 기록은 읽어볼만 하다. 더구나 분량도 짧으니 가볍게 보기에 좋고.
히버드 2015-05-0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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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ann138 2006-01-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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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일본의 압제로부터 광복된지 65년 지금 우리는 일본과 새로운 국제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일본이 우리와 어떤 역사적 관계에 있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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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은이),김찬순 (옮긴이)보리2006-10-12



































Sales Point : 465

9.0 100자평(3)리뷰(3)

240쪽
책소개
1597년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강항은 고향 영광에서 군량미를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미 사방 천지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음을 알고 피난길에 오른다. 어린 자식과 일가붙이들이 왜적에게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으로 끌려간다.

지은이 강항은 일본에서 수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한편, 적국의 동태를 기록해 조선으로 가는 사람에게 주어 비밀리에 임금께 상소를 바친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포로들의 애끓는 심정과 굳은 결의를 볼 수 있으며, 치욕의 세월을 겪어 내면서 자신의 삶과 시대를 증언한 우리 선조들의 기록 정신을 읽을 수 있다.


목차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치욕의 세월 -내가 겪은 정유재란

적국에서 올린 상소

삼가 주상 전하께
왜국의 지리와 군제
방비를 위해 드리는 충언
왜국의 정세 변화와 동향
풍신수길의 죽음

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

왜국의 관직 제도
왜국 8도 66주
임진년과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
풍신수길은 어떤 자인가
풍신수길이 죽은 뒤의 왜국 정세
조선으로 돌아가다

고국에 돌아와 임금께 올린 글


<간양록>을 펴내는 뜻 -윤순거
강항 연보
간양록에 대하여 -문예출판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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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시고 변장 한 사람을 바꿀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쪽에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 오직 유능한 인재로서 기개와 지략이 있어서 일찍이 왜적과 용감하게 싸워 뚜렷한 공을 세운 자를 택하시어 호남과 영남의 장수로 삼으소서. - 본문 중에서 접기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시고 변장 한 사람을 바꿀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쪽에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 오직 유능한 인재로서 기개와 지략이 있어서 일찍이 왜적과 용감하게 싸워 뚜렷한 공을 세운 자를 택하시어 호남과 영남의 장수로 삼으소서. (37) 접기 - 不二



저자 및 역자소개
강항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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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 박사, 교서관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좌랑, 형조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영광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적에게 함락되고, 강항은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적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다가 1600년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 바로 <간양록>이다. 또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가를 만나 그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기도 하였다. 1600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국에 돌아온 뒤 1602년 대구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수은집> <운제록> <건거록> <강감회요>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간양록> … 총 2종 (모두보기)

김찬순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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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국문학자로, '조선고전문학선집' 가운데 <표해록> <간양록> <해유록>을 비롯한 기행문을 우리말로 옮겼다.



평점 분포

9.0





진짜 놀라운 기록입니다 적국에 가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소금연못 2008-12-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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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후의 일본정세 파악에 도움이 될것 같은 좋은 책이네요...
서향 2008-10-3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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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1. 정보력, 약한 나라도 힘쎈 나라가 될 수 있는 힘의 원천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 거란이 침략을 하였다. 거란은 국력을 갖추자 나라이름을 '요'로 고치고, 송 침략에 앞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침략을 하였는데, 첫 번째 침략에서는 '옛고구려땅을 내놓아라'고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펼친 것이다. 이에 고려는 창졸지간에 침략을 당한 터라 거란장수 소손녕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고, 이들의 요구에 전전긍긍하며 맞서 싸우거나 땅을 내어주거나 하자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서희는 거란의 침략이 '80만 대군'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군을 몰고 왔으면 속전속결을 할터인데, 그러지 않고 '협상' 따위나 하고 있으니, 필시 허풍이 틀림없을 것"이라며 담판을 한 연후에 결정을 하라며 임금께 주장을 올렸다. 이에 성종이 강화에 서희를 내려보내니, 거란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회담을 고려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이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거란 1차침략'에 대한 '서희의 외교협상'의 내용이다. 이처럼 외교와 전쟁 등과 같은 중요한 국가대사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정보력'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조에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그렇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임금과 신하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하고, '전쟁대비'도 적절히 하지 못하고, '전후처리'조차 공정하지 못했던 엉망진창이었던 '치욕의 역사'였다. 과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희의 외교협상'은 적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낸 덕분에 고려는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거란측의 허장성세에 맞서 주눅 들지 않는 자세로 당당하게 회담을 이어나간 결과, 고려는 '강동6주'라는 어마어마한 땅을 얻게 되었고, '거란군의 철군 약속'도 받아냈으며, 고려의 변방을 괴롭히던 '여진족 토벌'까지 보장받았다. 고려가 거란측에게 내어준 것은 '송과의 교류 단절'과 '거란과의 통교' 뿐이었으니, 외교협상으로 전쟁도 막고 이득도 챙기는 대단한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반면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직전에 '통신사'를 보내 일본측을 염탐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벌었는데도, 통신사가 가져온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전란을 거쳐 '고도의 정규군'을 보유했던 일본군에 비해 오랜 평화로 소홀해진 국방력과 실전 경험이 전무한 군사시스템으로 '계획적인 침략'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한 조선군이라는 '현실'을 고작 1년이라는 시간으로 어찌 해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외적을 정확히 간파했더라면 짧은 시간이었더라 하더라도 그처럼 속절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라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에 전쟁 이후에 쓰여진 책이 바로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이 책에는 '전쟁의 참상'이 이토록 무섭고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대가가 이처럼 비참하니, 비극적인 전쟁의 기록을 철저히 남겨 만일을 대비하고 후대에 경계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 간곡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징비록>은 제대로 읽히지도 못하고 또다시 '호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런 굴욕을 당한 뒤에도 오래도록 외면을 받고 있다가 침략국인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역수입된 뒤에야 유명세를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단다. 이런 <징비록>에 버금가는 책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극적생환을 한 강항선비가 쓴 <간양록>이다. 이 책의 내용도 '왜국의 정세'가 자세히 적혀 있고, '왜국의 지리, 문물, 풍습' 따위도 굉장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특히, 왜국의 유명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실려 있어 현지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본의 정보'가 낱낱이 보고되어 있는 소중한 '기록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책 역시 널리 읽히지 못한 신세였으며, 오늘날에는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진 <징비록>과는 반대로 <간양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해져 버리고 말았다. 실제 나도 이 책의 존재에 대해서 꽤나 최근에 알게 되었고,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정보력'에 대해서 둔감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다. 주변국들이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인 탓에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란 말이다. 이런 유리한 곳에 위치한 우리가 '강대국들의 정보'에 빠삭하고 민감하며 신속하게 대처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춘다면,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 서로 선물공세를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무던한 애를 경쟁적으로 쓸 수밖에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헌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미중 갈등이라는 첨예한 대립에 '실리외교'는커녕 '중립외교'도 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쁘고, 우리보다도 약해빠진 나라로 전락한 러시아와 일본에게조차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굽신대는 꼬락서니가 정말 우습지 않느냔 말이다.



멍청한 이들은 말한다. 이것은 '약소국의 현실'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려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강대국'이었나? 거대한 땅을 차지한 송에 비해서도, 신흥강국으로 영토를 넓히며 옛고구려땅과 발해까지 멸망시키며 송나라를 침략하던 거란에 비해서도 조막만한 고려는 그 힘을 크게 발휘하지도 못하고, 외교적 발언도 크게 내어보지 못한 '약소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서희는 외교협상만으로 '고려의 이익'을 최고를 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주변의 정세를 정확히 간파해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 덕분에 고려는 그 어떤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자존심은 물론이고, 국력도 크게 위명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양록> 같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정보의 힘'이 가져다줄 고마운 선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록 왜적의 포로로 끌려갔으나 일본의 전후사정을 비롯해서 일본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간파한 소중한 정보를 남겨 놓았으니, 그 소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이 취해야 할 자세'를 갖춰나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여기에 '정보의 업그레이드'도 대단히 중요하다. 항상 '최신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눈독을 들여서 '외적의 정세'를 새로 파악해야만 그에 알맞은 새로운 대응을 세우고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오늘날의 국제정세에 적용시키면 대한민국도 더는 '약소국' 신세에서 벗어나 '강대국의 자세'를 취하며 외적의 입맛과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적절하게 전략을 짜아낸 뒤에 국익을 최고수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 아니냔 말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다시 새겨야 할 때다. 우리 역사가 늘 자랑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수난과 고난' 뒤에 다시 일어나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보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적절하고, 신속하고, 적확하게 대처해나갈 때에만 자랑스런 역사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대국이 강대국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도 '정보력'이고, 약소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정보력'이다. 이 책의 내용이 비록 '과거의 정보'이고, 그나마 오랫동안 묻혀 있어 잘 알지 못했다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간양록>을 통해 얻을 '정보력'은 낡아서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이 책에 담긴 '정신'은 지금 현재에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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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之我_또다른나 2023-07-0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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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왜국의 포로가 되다




看 羊 錄
조선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그 동안 소중화라 자부해오던 조선 그리고 왜를 북방의 여진,거란보다 더 하찮은 오랑캐로 치부했던 왜국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때는 조선군주중에서 가장긴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세종대왕보다 더 많은 시호를 받은 선조대에 와서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하에 조선을 침범하게 된다. 바로 조선역사상 첫번째 시련인 7년전쟁의 시작인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그동안 조선은 세종조부터 왜국에 대한 견제와 회유등을 통해서 왜국과의 외교를 진행하여 왔으나 선조조에 결국 동서당의 분당으로 인한 견해 차이로 사전 전쟁의 기미를 알고 있으면서 아무 대책없이 전란을 맞이 하게 된다. 임진란 발발 초기 조선은 그야 말로 속수무책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군주가 피난하는 일생일대의 초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일방적인 침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너무나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서 깨닫게 되지만, 이후 명군의 원조와 해양에서 이순신의 활약, 그리고 민초을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으로 반기의 기회를 마련하게 되고 전쟁은 소강기의 상태로 접어 들게 된다.

선조 정유년(1597년) 형조 좌랑을 지내던 강항(자:태초, 호:수은)은 고향인 영광으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왜와 명은 조선을 배제한체로 강화협상을 진행하고 선조는 이에 격분하여 신하들과 최일선의 장군들을 독려하게 된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한양을 압송되고 직권삭탈당한채 구금되게 된다. 풍신수길의 마지막 결전으로 이해에 다시 전란이 발발하게 되니 이 사건을 임진왜란 별도로 정유재란이라고 사가들은 명명하고 있다. 정유재란시에 강항은 다시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휘하에서 투쟁활동을 하기 위해서 전 가족을 동반하여 이동하던중 불행하게도 왜전투함에 납포되어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들과 아버지등을 잃고 자신도 포로가 되는니 자결을 길을 선택할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왜국으로 송환되게 된다. 조선 부산포를 거쳐서 대마도를 경유하여 결국 왜본토로 압송되게 된다. 1600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3년간의 포로생활을 했다.

간양록은 당초 강항이 건차록(巾車錄)으로 발간하였다. 건차라는 것이 죄인을 태우는 수례를 가르키듯이 강항은 불가피하게 포로가 된 자신을 죄인으로 치부하여 귀국후에도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히어 후진양성에만 힘쓸정도로 강항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기록이나 후대에 그의 제자인 윤순거에 의해 건양록을 개칭되었다. 이 책은 왜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던 왜국의 실상을 포로신분이라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 내용과 왜국의 지리, 관직, 정치, 종교등의 전반적인 왜국사정을 정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실로 가치있는 책자이다. 그리고 귀국후 다시 종합적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종전과 그의 귀국으로 인하여 간양록의 가치를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오히려 종전이후 정확히 히데요시의 사망과 그 이후 정세에 대한 판단부분에서는 강항의 예측이 틀림없었다는 점이 후대역사가 말해주고 있을 만큼 시의 적절한 관찰과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으로 왜국에 체류하였지만 유학자이자 전직 관료였다는 점이 강항이 적국에서 적국의 상태를 파악하는데는 유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런 위치에서 왜국의 지리와 문화 나아가서 정치를 파악할수 있는 혜안이 있어기에 이 책의 가치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 자신으로 눈으로 많은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하찮은 오랑캐로만 치부했던 왜가 어찌보면 자신의 조국 조선보다 더 발달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기 싫어겠지만 현실은 현실인것이다. 그는 귀국후 조정에 올리는 상소에서 왜국의 현 주소를 사실 그대로 보고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방법을 몇가지 제시하기도 하였다. 타국과의 통상방법이나 당파를 초월한 우수한 장군들의 기용 및 군인들의 자립위한 토지경작문제등 제시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있을수 없지만 이 때 강항의 정책을 받아들였다면 양대 호란은 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아가 일제의 강점 같은 국치 또한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포로신분으로 적국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강항은 역시 조선의 선비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일본 성리학의 단초를 여는데 기여을 하였고 그 자신 역시 일본을 철저히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기록에서 보면 당신 일본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막부을 연 인물들의 세세한 평가나 일본의 직제 및 성의 축성방법 그리고 백성들의 사고등 마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강항은 기록하고 기록했다. 적지에서 목숨을 담보로 이러한 기록을 조선을 보내는등 비록 창, 칼을 직접손에 들고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현대식 전투로 표현하면 정보전의 대가다운 행동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록이란 대게의 경우 후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더욱이 시간이 흘러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을 경우에 그 빛을 발하게 되는것이다. 강항의 간양록은 당시 소중화라는 역시에 사로 잡혀있던 조선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군주나 정책입안자들에게 등한시 되었지만 불과 100년이내에 조선이 다시 전쟁의 한가운데 서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7년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알수 있는 자료를 징비록이나 난중일기등을 통해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도화선이 된 왜국의 실상에 대한 기록은 강항의 간양록이 유일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지금도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사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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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 2008-11-1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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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2015-04-2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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