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최근 수정 시각:
시기 | |||
장소 | |||
원인 |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패 및 수탈에 대한 반발 | ||
교전 세력 | 동학농민군 | ||
지휘관 | |||
병력 | 3,000명~50,000명 | 남: 15,000명~300,000명 북: 10,000~300,000명 | 500명~3,000명 |
피해 | 6,000명 | 불명 | 불명 |
결과 | 조일연합군의 농민군 진압 | ||
영향 |
1. 개요[편집]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1894년(고종 31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으로,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동학란(東學亂)', '동학민란'으로도 불린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엄청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이를 보기에는 사실상 반란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일본군과 청군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왕정 하에서 농민들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큰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나름대로 높게 평가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2023년 5월 18일, 동학 농민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엄청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이를 보기에는 사실상 반란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일본군과 청군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왕정 하에서 농민들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큰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나름대로 높게 평가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2023년 5월 18일, 동학 농민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2. 전개[편집]
19세기 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시달리던 농민들 사이에서 동학은 큰 호응을 얻으면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94년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하여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각지에 자치 기구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여 나갔다.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1차 봉기의 전개도. |
2차 봉기의 전개도. |
2.1. 배경부터 1차 봉기까지[편집]
동학의 근원은 1893년 충청북도 보은 집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3] 남접과 북접 모두가 참가하여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급기야는 보은 출신의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서 말려야 했던 집회였다. 물론 서장옥, 전봉준도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보은에서 집회가 끝나고도 정치적으로 좀 더 열성적이었던 이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집회를 또 벌였는데, 이는 전라도 지역의 백성들이 수탈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11일자에 나온 보은 집회의 1차 통유문은 교조 신원과 사회 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3월 16일에 2차로 나온 통유문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보은 집회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이하 링크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 #
옛부터 전라도는 곡창 지대였는데(특히 고부는 핵심 지대였다),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이점으로 인하여 전라도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다. 당시 전라 고부 군수(지금은 정읍시의 일부) 조병갑은 그 중에서도 악랄한 탐관오리였는데 그는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에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인근 태인 군수를 지냈던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양민들로부터 엄청난 조세와 잡세를 걷고 양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는 등 그야말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또한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떠밀어 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조병갑에 대한 전라도 백성들의 증오와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 고을의 백성들은 글 깨나 배웠다는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곤장뿐이었다. 이로 인해 전창혁은 반 죽은 상태로 돌아왔고, 보름이 채 안 되어 장독[4]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5] 주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장 접주[6] 손화중[7]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손화중은 거절하였다. 당시의 봉기군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 뿐만 아니라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상경한다' 까지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1968년 발견되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이전까지의 민란은 백성들이 아무리 분해도 수령은 왕의 대리인이라고 여겨 수령에게 모욕을 가해도 수령을 죽이지는 않는 분풀이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은 첫 봉기에서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간다' 고 하는 등 기존의 농민 봉기와 그 시작부터 크게 달랐다.
2.1.1. 고부 봉기[편집]
고부 관아터(지금의 고부 초등학교) |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받아 유야무야되었는데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어 고부로 돌아왔다. 결국 이틀 만인 1894년 음력 1월 10일 밤 12시 전봉준은 1천여명의 고부 군민들을 모아 말목장터에서 봉기를 일으켜 고부성과 고부 관아를 습격해 만석보를 파괴하고, 감옥을 부수어 그곳에 갇힌 죄수들과 동학교도들을 비롯한 농민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만석보 혁파 선정비 |
2.1.2. 봉기 수습[편집]
2.2. 승리, 그리고 확산[편집]
No=36
1894년 5월 31일, 동경/벤쿠버 경유
조선에서의 혁명
<동학혁명에 대한 보고문서>
존경하는 백작 각하,
조선에서 혁명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동학이라고 불리는 반란의 당파는 그 수와 영향력을 점점 늘려가고 있으며, 가장 우려되는 바이겠습니다만, 주민의 공감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거론되는 폭도들의 수는 4천에서 일만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이달 1일 봉기자들은 서울의 정부가 이들을 진압하려 파견한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수도의 관리들과 친정부파들 사이에는 아연실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왜냐하면 이 혁명의 목표가 현 정부의 전복이며 우선은 막강한 민씨 가문의 전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문은 왕을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관식과 고관직들을 그들의 권력 안에 쥐고 있지요. <중략> 그들은 백성들에게 잘해주고 있으며 여하한 폭력행위도 삼가 하는 대신 정부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철저히 약탈합니다. 동학의 강령에는 외국인 추방이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분히 협박을 위한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삼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맺습니다.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 하인리히 폰 쿠덴호베칼레르기 백작- 1894년 5월 31일,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관에서 본국 외무부에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하여 보낸 보고서.
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교도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겁탈을 일삼았으며 마을 주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뒤처리 수준[9]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0]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11]에 고부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인 태인 접주 김개남과 고부 민란 때 포섭에 실패했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1차 동학 농민 봉기이다.[12]
2.2.1. 백산에서의 봉기[편집]
부안 백산성 |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에 격분한 전봉준은 이듬해인 3월초에 태인의 김개남과 무장현의 손화중과 함께 무장현(茂長)에서 4천명의 농민들과 유랑민들을 규합,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으로 집결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13]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동학농민군 4대 강령
서기 1894년 음력 3월 21일, 백산에 집결한 연합부대는 전봉준을 동도 대장으로 추대하고, 비서에는 송희옥과 정백현, 영솔장에는 최경선, 총참모에는 김덕명과 오시영, 그리고 총관령에는 손화중과 김개남으로 추대했다. 이들의 목적은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국 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는데 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백산은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로 넘쳐났고,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그때 생겨났다. 이들의 봉기는 조정의 탐관오리들을 비롯한 양반들과 서양의 외국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 없었다.
고부와 태인, 무장현 등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합류하자 점차 봉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이용태는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바로 도주했다. 한편, 백산 집회에 모인 10,000여명의 동학군은 영관 이경호의 주력부대가 고부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부성 북쪽에 위치한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고부와 태인, 무장현 등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합류하자 점차 봉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이용태는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바로 도주했다. 한편, 백산 집회에 모인 10,000여명의 동학군은 영관 이경호의 주력부대가 고부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부성 북쪽에 위치한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2.2.2. 황토현 전투[편집]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용태를 파면하고 귀양 보낸 후 홍계훈[14]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8백명의 경군(京軍)[15]을 주어 전봉준의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그 당시 홍계훈의 경군은 해상로를 통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산에 상륙하여 전주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경군이 소유하던 무기들이 이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이었는데,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티센크루프식 야포와 미국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회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충분히 관군 수준에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는 말.
황토현 전적비 |
한편 전라 감사 김문현은 전라 감영군을 모아놓고 대기 중인 상태였다. 화력이 우수한 경군이 남하하고 있었으나, 김문현은 단독으로 공을 세울 욕심을 갖고 무리하게 출병한다. 특히 김문현은 수령으로써 잘못된 통치로 봉기를 허용한 죄가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서 지금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서기 1894년 음력 4월 6일 오후 2시, 황토현에 진을 친 동학군은 전라 감영군과 향병들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전봉준의 동학군은 관군과의 전투 끝에 기만적 후퇴로 황토현 인근 사시봉에서 진을 치고 훗날을 도모하자, 관군은 동학군이 기만을 위한 후퇴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4월 7일 새벽 4시, 동학군의 후퇴로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감영군과 친군무남영의[16] 병력이 기세등등한 동학군에게 기습을 당해 일거에 무너지자 관군들은 혼란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오전 6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창의군의 총공격으로 인해 영관 이경호가 전사하고 그가 지휘하던 전라 감영군은 전멸한다.
서기 1894년 음력 4월 6일 오후 2시, 황토현에 진을 친 동학군은 전라 감영군과 향병들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전봉준의 동학군은 관군과의 전투 끝에 기만적 후퇴로 황토현 인근 사시봉에서 진을 치고 훗날을 도모하자, 관군은 동학군이 기만을 위한 후퇴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4월 7일 새벽 4시, 동학군의 후퇴로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감영군과 친군무남영의[16] 병력이 기세등등한 동학군에게 기습을 당해 일거에 무너지자 관군들은 혼란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오전 6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창의군의 총공격으로 인해 영관 이경호가 전사하고 그가 지휘하던 전라 감영군은 전멸한다.
2.2.3. 장성 황룡촌 전투[편집]
장성 황룡 전적 |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퇴한 전봉준의 호남 창의군은 전주로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며 경군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는 화력이 강력한 경군과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하려는 전략이었다. 농민군은 꼬리에 경군을 달고 고창군, 영광군, 함평군 등 서해를 끼고 남하하다가 나주를 기점으로 급격히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경군 지휘관이었던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친군 심영[17] 병사 300여명을 주어 막게 하였으나, 장성에 위치한 황룡촌에서 관군은 대패하고 이 전투에서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으며 관군의 신식 무기가 장태를 이용한 동학군에게 넘어간다.
2.2.4. 전주성 함락[편집]
홍계훈의 경군 |
1894년 4월 27일 황토현과 황룡촌에서의 전투로 사기가 충천하여 기세가 오른 전봉준의 동학군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이때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미 도주하고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에서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의 주요관문이자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고부 이외에도 황해도의 황주와 해주, 경상도의 김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충청도의 옥천과 회덕에 이어 목천과 보은 등지에서도 동학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고을들도 많았다. 일례로 나주에선 나주목사 민종렬이 관군은 물론 민보군(民堡軍)[18]과 향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19], 전북에서는 남원도 반발하였지만 나주와는 달리 남원은 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
이때 도마 안중근 의사도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20]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황건적, 홍건적, 프랑스 초기 혁명군, 러시아 적군, 중공 홍군 등... 기존의 국가 체계가 건재한 상황에서, 혹은 붕괴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군사적 세력은 혁명 세력+그냥 배고픈 농민 세력+이 참에 한 몫 잡자는 도적들이 혼성된 군벌 집단일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보급 체계와 신상필벌 체계를 갖췄다면, 그건 봉기 세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국가다.[21]
참고로 백백교의 시조 백도교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 전봉준과 동학의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김창수)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22]
조선에서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의 주요관문이자 한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고부 이외에도 황해도의 황주와 해주, 경상도의 김해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충청도의 옥천과 회덕에 이어 목천과 보은 등지에서도 동학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고을들도 많았다. 일례로 나주에선 나주목사 민종렬이 관군은 물론 민보군(民堡軍)[18]과 향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19], 전북에서는 남원도 반발하였지만 나주와는 달리 남원은 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
이때 도마 안중근 의사도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20]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황건적, 홍건적, 프랑스 초기 혁명군, 러시아 적군, 중공 홍군 등... 기존의 국가 체계가 건재한 상황에서, 혹은 붕괴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군사적 세력은 혁명 세력+그냥 배고픈 농민 세력+이 참에 한 몫 잡자는 도적들이 혼성된 군벌 집단일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보급 체계와 신상필벌 체계를 갖췄다면, 그건 봉기 세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국가다.[21]
참고로 백백교의 시조 백도교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 전봉준과 동학의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김창수)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22]
2.3. 고종의 청군 파병 요청과 외세의 개입[편집]
전주성을 공격하는 경군 |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수습하고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공주로 대표되는 수비선을 지키고 병력을 재규합 시키느라 못하고, 나중에는 아산의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공주에 발이 묶여 있다가 5월 초에 전주성을 공격하여 8일만에 탈환하였다. 함락이 눈 앞에 놓이자 동학군 수뇌부는 미리 도망쳤고, 탈환 당시 전주성과 그 주변에 남은 것은 동학난을 진압하러 온 경군들과 경군들에게 패배하여 살기 위해 흩어진 동학군 잔당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초기 관군이 무너지고 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크게 동요하여 자국군의 역량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말려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이며,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관군의 반격을 당해 음력 5월 초부터는 오히려 전주성에서 쫓겨나고 있던 상황이었다.[23]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차병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병시가 톈진 조약[24]에 의거해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강력 반대하며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민씨 일족이자 실권자였던 민영준이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일본군들이 어떻게 감히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하고 상큼하게 무시해버렸다. 또한 파병을 적극 찬성하는 민영준은 파병을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청나라 군대가 오면 청나라 속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의 정권을 계속 우리들이 잡을 수 있다. 동학군에 의해 정권을 잃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더라도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파병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민영준은 원세개와 비밀리에 접촉까지 하여 청군의 파병을 직접 요청까지 하였다.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25]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었던 것이다.[26]
나중에 조선왕조실록에 지석영의 상소문을 보면 민영준(민영휘)이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원세개의 군대 파병에 민영준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동학란은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타국인 청나라나 일본이 명분 없이 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이다. 즉 명분 없이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불법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민영준의 경우에는 민씨 일족 중에서 다른 민씨들이 친청에서 친러로 전향할 때 유일하게 친청 성향을 유지해서 원세개하고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학란 당시에 고종과 함께 주도적으로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민영준은 당시에 병조판서로 군사 관련 업무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여튼 중국과 일본 측 기록까지 보면 파병이 성사된 주범은 고종, 민영준, 원세개 셋이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한다. 동학농민운동은 오늘날의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이므로 이를 진압하려면 남부 지방에 병력을 보내야 하고, 실제로 청군은 아산만에 병력을 보냈는데 일본군은 엉뚱한 제물포(인천)에다가 군을 상륙시킨다. 이는 농민군 진압 따위는 알 바 없고 한성 장악이 우선이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이며,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관군의 반격을 당해 음력 5월 초부터는 오히려 전주성에서 쫓겨나고 있던 상황이었다.[23]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차병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병시가 톈진 조약[24]에 의거해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강력 반대하며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민씨 일족이자 실권자였던 민영준이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일본군들이 어떻게 감히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하고 상큼하게 무시해버렸다. 또한 파병을 적극 찬성하는 민영준은 파병을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청나라 군대가 오면 청나라 속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의 정권을 계속 우리들이 잡을 수 있다. 동학군에 의해 정권을 잃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더라도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파병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민영준은 원세개와 비밀리에 접촉까지 하여 청군의 파병을 직접 요청까지 하였다.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25]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었던 것이다.[26]
나중에 조선왕조실록에 지석영의 상소문을 보면 민영준(민영휘)이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원세개의 군대 파병에 민영준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동학란은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타국인 청나라나 일본이 명분 없이 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이다. 즉 명분 없이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불법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민영준의 경우에는 민씨 일족 중에서 다른 민씨들이 친청에서 친러로 전향할 때 유일하게 친청 성향을 유지해서 원세개하고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학란 당시에 고종과 함께 주도적으로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민영준은 당시에 병조판서로 군사 관련 업무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여튼 중국과 일본 측 기록까지 보면 파병이 성사된 주범은 고종, 민영준, 원세개 셋이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한다. 동학농민운동은 오늘날의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이므로 이를 진압하려면 남부 지방에 병력을 보내야 하고, 실제로 청군은 아산만에 병력을 보냈는데 일본군은 엉뚱한 제물포(인천)에다가 군을 상륙시킨다. 이는 농민군 진압 따위는 알 바 없고 한성 장악이 우선이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2.3.1. 증거[편집]
고종이 청군차병을 자진했다는 증거는 조선 측 자료,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문서, 청의 문서 등 무려 세 국가에서 증거가 나오고 있다.
- 조선정부측 자료: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교차검증
보은집회 당시 1893년 3월에 고종은 청군출병 의사를 보였고 신하들이 거부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사표명을 하며 반복적으로 의견을 구했다.
여(고종): 요충지가 모두 몇개나 됩니까?
심순택: 수원과 용인이 직로입니다. 심영과 기영의 병정들을 먼저 수원과 용인 등지에 파견하여 주둔케 하고 경군은 상황을 보면서 조용함이 좋을 듯 합니다.
여(고종): 경군은 절대 절대 파견할 수 없습니다. 타국의 군사를 차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나라에 전례들이 있습니다만 군을 차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심순택: 그것은 아니됩니다. 만약 타국 군사를 차용하면 군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여(고종): 중국에서도 일찍이 영국군을 차용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범조: 어찌 중국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여(고종):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청병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범조: 청병을 차용하는 것은 비록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는 것과 다르지만 처음부터 차용하지 않음이 좋지 않겠습니까?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
이런 대화 내용은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이라는 세가지 자료에서 교차검증이 되고 있다.[김명섭,1994,7][구선희,1999,219][강문호,2004,109][엄찬호,2006,5][신영우,2009,19~20,26][유바다,2017,336]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요청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 하여) 청군차병을 요청하는 문건을 정부에 보냈고 그 사료가 남아있다.[김명섭,1994,5~6][강문호,2004,116][신영우,2009,26]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 인용된 일본 문서와 청의 문서에 고종 측근인 홍계훈이 청군파병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나와있다.
고종이 홍계훈의 요청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고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한 사실도 나와있다.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 인용된 일본 문서와 청의 문서에 고종 측근인 홍계훈이 청군파병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나와있다.
고종이 홍계훈의 요청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고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한 사실도 나와있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홍계훈이 조선정부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한 사실이 주한일본공사관 측에 확실히 남아있다. 음력 4월 19일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있다.[강문호,2004,120~121][유바다,2017,336]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조선 측 반응을 조사한 후 조선정부가 청병차병 방안을 채택할 것을 예상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2~223]
고종이 청군차병을 결정짓고 회의도 열지 않은 채 원세개 측에 비밀리에 파견을 하여 청병차병을 결정했다는 기록, 5월 1일 조선정부가 청국에게 공식적으로 청군차병을 요청한 상태라는 것. 조선정부가 원세개에게 출병 요청하자 다음날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고를 한 것. 청국이 조선의 차병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출병한다는 전보를 일본정부가 받았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는 사실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도 분명히 적혀있다.[김명섭,1994,12][구선희,1999,225][엄찬호,2006,13][신영우,2009,27][김경록,2018,37~39]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조선 측 반응을 조사한 후 조선정부가 청병차병 방안을 채택할 것을 예상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2~223]
고종이 청군차병을 결정짓고 회의도 열지 않은 채 원세개 측에 비밀리에 파견을 하여 청병차병을 결정했다는 기록, 5월 1일 조선정부가 청국에게 공식적으로 청군차병을 요청한 상태라는 것. 조선정부가 원세개에게 출병 요청하자 다음날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고를 한 것. 청국이 조선의 차병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출병한다는 전보를 일본정부가 받았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는 사실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도 분명히 적혀있다.[김명섭,1994,12][구선희,1999,225][엄찬호,2006,13][신영우,2009,27][김경록,2018,37~39]
- 청의 문서(이홍집 전집 포함)
1893년 보은집회 당시 고종의 청병차병안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고종이 “동학의 세가 창궐하여 충청병영의 병정으로는 진무할 힘이 없고, 경병 역시 파송할 수 없으므로 청병을 빌려서 뿌리 뽑고 자”하며 비밀리에 박제순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청 병력 파견을 의논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0~221][김보경,2004,95][엄찬호,2006,5]
1894년 4월 28일에 청병차병 공문이 완성됐음을 조선정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원세개에 알렸음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구선희,1999,226]
고종의 내명을 받은 민영준이 원세개와 교섭하여 4월 29일 출병동의를 얻은 것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엄찬호,2006,7]
고종이 청병차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도움으로 진압된 전례에 비추어 이번 사태도 청국 군대가 대신 소멸시켜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한 것 이 문서에 남아있다.[김명섭,1994,12~13][구선희,1999,227][강문호,2004,127~128][엄찬호,2006,7][신영우,2009,27][유바다,2017,337]
위와 같이 청의 문서에서도 고종이 청병차병을 요청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서 고종이 자발적으로 청군파병을 요청했다고 설명되는 부분. 이 논문에도 청군파병의 주체는 고종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자라는 분량으로 이홍장전집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 박사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유바다,2017,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 박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구선희,2017,33~35]
참고로 이홍장전집에서 일부 소수분량의 내용이 발췌돼서 문서집에 포함된 적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의 번역집은 http://www.e-donghak.or.kr/dirFrameSet.jsp?item=bdata 이 링크에서
실제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자료집을 구할 수 있고 친절하게 자료도 다 알려준다. 구선희란 인물이 전집 해설도 해주는데 검색해보니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시고 조선과 청 관계로 박사학위논문 받은 사람이다. 이 자료집의 내용을 읽어보자.
이게 4월 28일 고종의 파병 요청을 알리는 문서이다. 문서 번호는 G20-04-034
위안스카이는 문서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문서날짜는 4월 29일 문서 번호는 G20-04-036
다음 문서는 4월 30일, 문서번호는 G20-04-037
여기에 의하면 고종은 군이 패배하면 즉각 파병요청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여기에 의하면 조선정부에선 패배하면 즉각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그리고 아래가 G20-05-001 문서
사실 고종은 파병요청을 보낼 예정을 4월 29일에 미리 전하고 약속대로에 정식으로 전했었다.
문서번호는 G20-05-001 인데 고종이 청정부에게 이런 문서를 보냈다.
1894년 4월 28일에 청병차병 공문이 완성됐음을 조선정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원세개에 알렸음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구선희,1999,226]
고종의 내명을 받은 민영준이 원세개와 교섭하여 4월 29일 출병동의를 얻은 것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엄찬호,2006,7]
고종이 청병차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도움으로 진압된 전례에 비추어 이번 사태도 청국 군대가 대신 소멸시켜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한 것 이 문서에 남아있다.[김명섭,1994,12~13][구선희,1999,227][강문호,2004,127~128][엄찬호,2006,7][신영우,2009,27][유바다,2017,337]
위와 같이 청의 문서에서도 고종이 청병차병을 요청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강문호 교수의 논문에서 고종이 자발적으로 청군파병을 요청했다고 설명되는 부분. 이 논문에도 청군파병의 주체는 고종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자라는 분량으로 이홍장전집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 박사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유바다,2017,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 박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구선희,2017,33~35]
참고로 이홍장전집에서 일부 소수분량의 내용이 발췌돼서 문서집에 포함된 적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의 번역집은 http://www.e-donghak.or.kr/dirFrameSet.jsp?item=bdata 이 링크에서
[자료소개] [발간자료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자료 다운로드) 2017-12-26 427
을 클릭하면 다운로드 가능하다 .실제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자료집을 구할 수 있고 친절하게 자료도 다 알려준다. 구선희란 인물이 전집 해설도 해주는데 검색해보니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시고 조선과 청 관계로 박사학위논문 받은 사람이다. 이 자료집의 내용을 읽어보자.
이게 4월 28일 고종의 파병 요청을 알리는 문서이다. 문서 번호는 G20-04-034
위안스카이는 문서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문서날짜는 4월 29일 문서 번호는 G20-04-036
다음 문서는 4월 30일, 문서번호는 G20-04-037
여기에 의하면 고종은 군이 패배하면 즉각 파병요청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여기에 의하면 조선정부에선 패배하면 즉각 문서를 보낼 것 이라고 위안스카이에게 전했다.
그리고 아래가 G20-05-001 문서
사실 고종은 파병요청을 보낼 예정을 4월 29일에 미리 전하고 약속대로에 정식으로 전했었다.
문서번호는 G20-05-001 인데 고종이 청정부에게 이런 문서를 보냈다.
"‘폐국(弊國) 전라도 관할의 태인과 고부등의 현(縣)은 민풍(民風)이 사납고 성정이 음험하고 간사하여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몇 개월 사이에 동학에 붙은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현읍(縣邑) 10여 곳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지금은 다시 북으로 잠입하여 전주(全州)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전에 연군(練軍)을 파견하여 현지에 가서 토벌하고 위무토록 했지만 그 교비들은 끝내 감히 죽음을 불사하고 맞서 싸워 연군이 패배하여 잃어버린 총포 등 무기가 다수에 이르렀습니다. 이 흉악하고 완고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면 특히 우려할 만한데, 하물며 한성과의 거리가 겨우 400 하고도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만약 그들이 다시 북으로 잠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경기(京畿) 지역이 시끄럽게 요동을 칠 것이니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폐국의 새로 훈련시킨 각 부대는 현재의 인원이 겨우 도성을 지킬 만할 뿐이고 또한 아직 전투를 치른 경험도 없으니 특히 흉악한 구적(寇賊)을 섬멸시키는 데 쓰기 어렵습니다. 만약 오랫동안 만연하면 청에 많은 근심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조사해 보면, 임오년과 갑신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 이에 전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컨대 번거롭더라도 귀 총리(總理, 원세개)가 신속하게 즉각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보내면 참작하여 몇 개의 부대를 보내어 속히 와서 대신 토벌케 하고, 아울러 폐국의 각 병사들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따라 익히게 하여 앞으로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사나운 교비들이 섬멸되기를 기다려 즉각 철수를 청할 것이며 감히 계속 머물러 지켜 주기를 청하여 천조(天朝)의 병사들이 외지에서 오랫동안 피로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컨대 귀 총리가 조속히 적절하게 조력할 방안을 강구하여 급박한 형세를 구원하기를 절실하게 기다립니다"
고종이 청에게 보낸 문서 G20-05-001에 수록
실제로는 4월 29일에 고종이 미리 예고를 하고 예고에 따라 정식으로 파병요청을 했었다. 예고 문서도 미리 보내고 예고한 대로 그대로 문서를 보냈다.
해제한 구선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도 G20-05-001이 조선의 청 파병 요청 근거라고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이홍장 문서에 의하면 오히려 이홍장은 파병을 꺼리는 문서도 있다.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알아서 정리하게 두고 청군을 얼른 철수시키기를 원했다는 자료도 나왔다.
이홍장 전집같은 방대한 1차 사료를 연구한 유바다 박사의 논문은 의외로 유사역사학 커뮤니티에서 주목받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출처없는 게시글들이 더 신뢰있는 자료로 판단한다.
해제한 구선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도 G20-05-001이 조선의 청 파병 요청 근거라고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이홍장 문서에 의하면 오히려 이홍장은 파병을 꺼리는 문서도 있다.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알아서 정리하게 두고 청군을 얼른 철수시키기를 원했다는 자료도 나왔다.
이홍장 전집같은 방대한 1차 사료를 연구한 유바다 박사의 논문은 의외로 유사역사학 커뮤니티에서 주목받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출처없는 게시글들이 더 신뢰있는 자료로 판단한다.
- 갑오실기
5월 1일[五月初一日]
(…) 먼저 순변사(巡邊使)를 차송(差送)한 뒤에 원임대신이 입시하여 사사로이 뵐 때, 임금께서 청병(淸兵)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시길, “총리 원세개(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조회(照會)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였다. 임금께서는 일본인이 인연(夤緣)하여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판부사 김홍집(金弘集, 호는 道園)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적도를 소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처음부터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보국(輔國, 보국숭록대부) 민영준(閔泳駿)이 영돈[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 호는 용엄(蓉庵))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사람까지 보내어 몰래 질문하길,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이 충분한 논의가 있었는데, 합하(閤下)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어찌 어렵고 신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일본 군대도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병시가 찾아온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길, “대개 이 일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니 억측으로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匪徒, 동학의 무리)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관(淸館)의 조회(照會)가 지금 잠시 늦추어졌고 이미 우리 병사도 출발하였으니, 잠시 하회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민대감[閔泳駿]께서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임금께서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이 청관에 가서 총리 원세개에게 조회의 건을 전달하니, ≪청관에서는≫ 곧장 천진(天津)으로 전보를 보내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청병의 전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도독(都督) 섭지초(葉志超)가 2천여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니, 이중하(李重夏)가 영접하여 머물렀다.
갑오실기, 갑오년 5월 음력 1894년 5월 http://www.e-donghak.or.kr/
2.3.2. 학계의 정설[편집]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에게 출병했다는 건 명백한 학계의 정설이다. 무슨 학계가 적폐라서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조선측,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문서, 청의 문서(이홍집전집 발간이후 포함) 등 증거까지 명확한 상태다.
다음은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차병을 요청했다고 설명하는 논문, 학술서의 목록이다.
목록: [김창수,1981,42~50][김창수,1985,3~9][박종근,1995,8~17][구선희,1999,220~227][구선희,2006,94][김보경,2004,95~99][강문호,2004,109~110,116,117,127~128][차경애,2008,67][엄찬호,2006,7~13][육군본부육군군사연구소,2012,253~254][유바다,2017,336~337][학리리,2018,208~209][김경록,2018,37~39][장경호,2018,52~53][동북아역사재단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2018,473]
고종의 청군차병 자진 요청은 부정할 수 없이 학계정설이다.
다음은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차병을 요청했다고 설명하는 논문, 학술서의 목록이다.
목록: [김창수,1981,42~50][김창수,1985,3~9][박종근,1995,8~17][구선희,1999,220~227][구선희,2006,94][김보경,2004,95~99][강문호,2004,109~110,116,117,127~128][차경애,2008,67][엄찬호,2006,7~13][육군본부육군군사연구소,2012,253~254][유바다,2017,336~337][학리리,2018,208~209][김경록,2018,37~39][장경호,2018,52~53][동북아역사재단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2018,473]
고종의 청군차병 자진 요청은 부정할 수 없이 학계정설이다.
2.3.3. 고종의 자진청병설이 일본의 조작인가?[편집]
학계 가설로 고종의 청병이 일본의 조작이란 주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설을 제기한 이태진도 고종이 청군차병을 허용한 것은 과오라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아래에서 비판되는 2019년 무렵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포된 내용은 사실 이태진의 가설과도 다르다.
소수설 내지는 가설 조차 아닌 출처가 모호한 속설[⒜]에 의해 학계 동향이나 사료발굴에 대한 오류가 확산된다. 이런 류의 글들은 자료의 출처가 모호하거나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연구자들의 학설들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종종 자료조작도 확인된다고 한다.
서지 정보도 50년 이상 오류가 난다. 서지사항을 전문적으로 검토할 때 당연히 시기별 학계 동향이나 사료 발굴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해당 글들[⒜]은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자료가 2019년 최신 발굴됐다는 황당한 정보까지 유포된다. 이때문에 정말 새로이 발굴된 사료에 의한 최신 학설인 줄 알고 유포하기도 한다.
소수설 내지는 가설 조차 아닌 출처가 모호한 속설[⒜]에 의해 학계 동향이나 사료발굴에 대한 오류가 확산된다. 이런 류의 글들은 자료의 출처가 모호하거나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연구자들의 학설들과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종종 자료조작도 확인된다고 한다.
서지 정보도 50년 이상 오류가 난다. 서지사항을 전문적으로 검토할 때 당연히 시기별 학계 동향이나 사료 발굴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해당 글들[⒜]은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자료가 2019년 최신 발굴됐다는 황당한 정보까지 유포된다. 이때문에 정말 새로이 발굴된 사료에 의한 최신 학설인 줄 알고 유포하기도 한다.
- 자료조작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조작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서는 분명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한 것으로 나와있고 여러 연구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해당 사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에 퍼진 속설[⒜]에 의하면 ‘최신 발굴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하면 고종은 출병요청을 한 적이 없고 원세개가 단독으로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속설[⒜]에서는 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가 어디서 가져온 것이지 출처는 설명을 하지 못 하고 있다. 혹은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의 출처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라고만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비해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김경록 등의 연구자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의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77][78][79][80][81][82][83]
- 청의 문서와 이홍장전집 조작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84]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을만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85]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86]
그런데 청의 문서 역시 속설의 일환[⒜]으로 왜곡된 내용이 전파되고 있다. 일각에 의해 전파되는 내용은 출처불명의 자칭 이홍장 전집에 의한 자칭 최신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새로 발굴된 『이홍장전집』에 의하면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청군차병을 결정하였다가 4월 29일에 철회하였는데 원세개가 분노하여 철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종의 차병요청이라 왜곡해서 조선에 밀고 들어왔다. 이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2019)에야 발굴됐다.’는 것이 대략적인 논지이다.
다음 속설[⒜]의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유바다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85]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86]
그런데 청의 문서 역시 속설의 일환[⒜]으로 왜곡된 내용이 전파되고 있다. 일각에 의해 전파되는 내용은 출처불명의 자칭 이홍장 전집에 의한 자칭 최신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새로 발굴된 『이홍장전집』에 의하면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청군차병을 결정하였다가 4월 29일에 철회하였는데 원세개가 분노하여 철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종의 차병요청이라 왜곡해서 조선에 밀고 들어왔다. 이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2019)에야 발굴됐다.’는 것이 대략적인 논지이다.
다음 속설[⒜]의 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는 청군출병을 결정했으나 4월 29일에 철회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4월 29일의 철회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4월 29일의 철회결정을 '조선정부가 청군출병 요청을 했다'고 해석하여 밀고 들어왔다. 이 사실은 기존에 사료가 발굴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아 기존 교과서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최근에 사료가 발굴됐음으로 '고종이 청군을 불러서 백성을 학살했다'는 설에 카운터를 날릴 수 있다.
하지만 속설[⒜] 외에는 출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들은 이홍장 전집 문서의 출처를 "이홍장 전집"이라고만 적어놓고 무조건 출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밀문서의 출처가 어디냐고 질문하는데 "기밀문서"라 적으면 출처라고 주장하는 격. 하지만 이홍장전집이라면 달려있을 문서의 번호를 전혀 설명하지 못 하는데 분명 이홍장 전집에는 문서마다 번호가 존재한다.
왕왕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의 발췌본을 참고하고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했다고 유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전문가의 설명을 포함해서 일각의 설명이 없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를 출처로 한 것이면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한 것도 아니다. 『이홍장전집』은 총 39권에서 2,600여 만자라는 분량인데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에서 수록된 건 그중 극소수분량을 발췌한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극소수 분량을 발췌한 내용에 대한 번역을 『이홍장전집』을 본 것이라 하는건 자료의 성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용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거대한 분량인 『이홍장전집』 1권~39권을 참고한 연구자는 유바다 같은 연구자의 논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속설[⒜]에서는 선행연구 같은건 (논문 등이 무료로 공개되어있음에도) 읽지않으며 트위터, 블로그, 카페를 출처로 한 신뢰성 없는 내용을 학석 내지는 연구라 주장한다.
그리고 역시 속설[⒜]에서는 '이홍장이 작성한 문건'이라 주장하는 문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유포된 글들에선 문서의 출처는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 글들이 주장하는 문서 내용의 일부이다.
왕왕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의 발췌본을 참고하고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했다고 유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전문가의 설명을 포함해서 일각의 설명이 없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를 출처로 한 것이면 이홍장전집을 출처로 한 것도 아니다. 『이홍장전집』은 총 39권에서 2,600여 만자라는 분량인데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에서 수록된 건 그중 극소수분량을 발췌한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극소수 분량을 발췌한 내용에 대한 번역을 『이홍장전집』을 본 것이라 하는건 자료의 성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용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거대한 분량인 『이홍장전집』 1권~39권을 참고한 연구자는 유바다 같은 연구자의 논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속설[⒜]에서는 선행연구 같은건 (논문 등이 무료로 공개되어있음에도) 읽지않으며 트위터, 블로그, 카페를 출처로 한 신뢰성 없는 내용을 학석 내지는 연구라 주장한다.
그리고 역시 속설[⒜]에서는 '이홍장이 작성한 문건'이라 주장하는 문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유포된 글들에선 문서의 출처는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 글들이 주장하는 문서 내용의 일부이다.
조사해보면, 임오년과 갑십년에 폐국에서 두 차례 내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중국의 병사들이 대신 평정해 주었습니다.(중략)원세개가 보낸 글이라고 왜곡된 문서의 일부
그러나 이 문서의 정체는 G20-05-001은 실제로는 고종 측이 청에게 보낸 문서이며 실제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은 분명 논문에서 고종측이 보낸 문서라 설명한다'[92][93][94][95][96][97] 즉 해당 문서가 원세개가 보낸 문서라는 속설[⒜]들은 서지사항을 변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실제 번역된 문서에 의하면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음력 4월 28일에 고종은 신하들에게 동의받아야 할 공식적인 결정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청군출병 요청을 원세개에게 전달했으나 제대로 된 문서를 갖추지 않았다. (G20-04-034) 같은 28일에 다른 신하가 고종의 결정에 반대해서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 (G20-04-036) 4월 29일에 조선정부는 청군출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이미 완성했음을 원세개에게 전했다. (G20-04-037) 그리고 원세개는 4월 30일에 방금 문서를 받았다고 보고를 하였고 그 문서가 청군출병 요청서라는 걸 전달하고 고종이 보낸 문서를 그대로 전달했다. (G20-05-001)[99]
청의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파병을 결정하고 29일에 파병을 철회했는데 원세개가 29일의 철회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주장을 보내어 청군출병을 요청했다' 같은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서 내용이나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이 분명 고종이 보낸 문서라 설명하는 증거자료이다.
그리고 출처가 없는 자칭 ''이홍장전집"과 같이 제시되는 출처가 육군본부의 육군본부의 《한국군사사》인데 본 문서에서 직접 인용된 내용처럼 실제 서적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출처없는 자칭 전집과 조작된 출처 외에는 사실상 출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실제 번역된 문서에 의하면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음력 4월 28일에 고종은 신하들에게 동의받아야 할 공식적인 결정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청군출병 요청을 원세개에게 전달했으나 제대로 된 문서를 갖추지 않았다. (G20-04-034) 같은 28일에 다른 신하가 고종의 결정에 반대해서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 (G20-04-036) 4월 29일에 조선정부는 청군출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이미 완성했음을 원세개에게 전했다. (G20-04-037) 그리고 원세개는 4월 30일에 방금 문서를 받았다고 보고를 하였고 그 문서가 청군출병 요청서라는 걸 전달하고 고종이 보낸 문서를 그대로 전달했다. (G20-05-001)[99]
청의 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음력) 4월 28일에 조선정부가 파병을 결정하고 29일에 파병을 철회했는데 원세개가 29일의 철회결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주장을 보내어 청군출병을 요청했다' 같은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서 내용이나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의 연구자들이 분명 고종이 보낸 문서라 설명하는 증거자료이다.
그리고 출처가 없는 자칭 ''이홍장전집"과 같이 제시되는 출처가 육군본부의 육군본부의 《한국군사사》인데 본 문서에서 직접 인용된 내용처럼 실제 서적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출처없는 자칭 전집과 조작된 출처 외에는 사실상 출처가 없는 것이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최신 사료 발굴(2019년 기준)이란 허위정보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병 왜곡설'은 1999년에 나와 학계에 검토 받았으나 여전히 비주류설이며 다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속설[⒜]에 의하면 이것이 '최근' 발굴이나 학설이라는 허위정보가 존재한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서지사항 왜곡도 동반된다.
- 학계가 파악하지 못했던 《양호초토등록》이 최근 발굴?
실제로는 1957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 그대로 실려있다. 심지어는 단군기원을 사용하는 시기에 발행됐다.
단군기원을 사용한 1957년에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도서를 속설[⒜]에서는 2019년에 발굴한 최신 사료라고 주장한 것이다. 1957년 단군기원 사용시대에 정부기관 사료집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자료조차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이비 사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주한일본공사관 문서가 최근 발굴?
최근 발굴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서는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적 출병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왜곡이 19~20년 무렵에 확산되었으나 실은 1980년부터 인용된 바 있다. '주한일본공사관'문서는 박종근의 《청일전쟁과 조선》(1982)에서도 인용하며 일본외교문서와 청의 문서를 인용해 '고종의 청군자진출병'을 서술한다.
이미 발굴을 넘어 사료정리집이 나온 시기가 90년대다.
이미 발굴을 넘어 사료정리집이 나온 시기가 90년대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이홍장 문서가 최근 발굴?
같은 속설[⒜]의 다른 자료왜곡에서는 '최근 발굴된 이홍장 전집에선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의 독단으로 출병한 것이라는 사료가 발굴됐다'는 2019년 속설이 돌았으나 역시 출처는 그 속설이 전부. 해제에서 설명한 것 처럼 문서번호만 언급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술됐다는 문서번호를 언급하지 못한다. 위의 구선희의 이홍장 문서 해설에도 동학농민전쟁 당시 파병문제로 새로운 사료가 발견됐다는 내용이 일체 없다. 이홍장 전집에선 새로 발굴된 사료가 일부 포함될 뿐 문서집이 새로 발굴된 자료 모음집이 아니고 동학의 비중은 이 문서집에서 극소수다. 즉 이홍장 전집 ≠ 새로 발굴된 이홍장 문서 ≠ 동학에 대한 이홍장 전집 이다.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106] 으로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발행 도서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에서 포함된 자료는 극소수이다. 즉 출처라 서술할 것이면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라고 적어야 옳은 걸 속설에서는 방대한 문서집을 출처로 한 것이라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 그리고 국역총서의 구선희의 해제 중 그 어느 내용에도 동학과 관련된 사료 최신 발굴이란 내용이 없다. 즉 동학농민혁명 관련 청 측 문서가 최근(2019년) 발굴됐다는 내용의 출처는 속설들 뿐이다. [⒜]
그리고 위의 설명된 이홍장 전집 내의 청의 문서는 90년대 구선희의박사학위 논문(개화기 조선의 대청정책 연구)에서 개별로 인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홍장 전집의 존재 이전에도 학계에서 인용됐다. 그리고 실제 번역된 위의 이홍장 전집 내의 문서나 구선희 설명을 읽어보면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가 독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증거' 같은 이야기는 전무하고 오히려 '조선이 출병을 요청했다'고 서술된다.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출판된 방대한 분량의 『이홍장전집』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 만 자로 된 자료집[106] 으로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발행 도서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에서 포함된 자료는 극소수이다. 즉 출처라 서술할 것이면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9』라고 적어야 옳은 걸 속설에서는 방대한 문서집을 출처로 한 것이라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 그리고 국역총서의 구선희의 해제 중 그 어느 내용에도 동학과 관련된 사료 최신 발굴이란 내용이 없다. 즉 동학농민혁명 관련 청 측 문서가 최근(2019년) 발굴됐다는 내용의 출처는 속설들 뿐이다. [⒜]
그리고 위의 설명된 이홍장 전집 내의 청의 문서는 90년대 구선희의박사학위 논문(개화기 조선의 대청정책 연구)에서 개별로 인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홍장 전집의 존재 이전에도 학계에서 인용됐다. 그리고 실제 번역된 위의 이홍장 전집 내의 문서나 구선희 설명을 읽어보면 '고종이 요청한 게 아니라 원세개가 독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증거' 같은 이야기는 전무하고 오히려 '조선이 출병을 요청했다'고 서술된다.
- 청의 문서에 대한 뒷북과 과거학설 왜곡
참고로 고종이 절차에 의해 공식으로 요청서를 보내기 전에도 청군은 출병할 의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기존학계에서 발굴되지 않아 교과서에 실리지 않다가 최근(2019년)에 새로운 청의 사료가 발굴되었다.’는 뒷북이 근래의 속설을 중심으로 돌았다. 이 속설에 의하면 원세개가 능동적으로 출병준비를 하였다는 청의 문서를 제시하며 2019년 최신발굴이라거나 최신설이라는 주장하는데 그 출처마저 그 속설[⒜]뿐이다. 한단계 더 나아가 ‘고종이 출병요청하지 않았는데 사료발굴이 안 돼서 학계가 몰랐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출처없는 소문과 달리 원세개의 파병의지 사실은 학계에서 한참전에 파악한 내용이다. 조선이 파병요청을 할 경우 조선에 청군을 파병하여 조선내정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이 있었다, 같은 문서와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109][110]
물론 이 논문들에서도 청이 군대 출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이홍장이 파병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는 건 청 내부의 자료에서 확인된다.[111]
* 최근 학설이라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사료가 최신에 발굴돼 최신학설이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2019년)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이홍장 전집이 최근에 번역돼서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 설명은 명백한 말장난인데 국내에 극소수의 발췌된 동학관련 편집본이 번역으로 출간하는 것과 국내학자들이 중국어 문서를 연구에 인용하는 건 별개다. 중국어 사료도 못 읽는 사람이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 정도의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2018년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이 출간됐으나 여전히 고종이 원세개, 민영준과 더불어 청군 출병의 주체라 설명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가 서적을 발간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 논문들에서도 청이 군대 출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이홍장이 파병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는 건 청 내부의 자료에서 확인된다.[111]
* 최근 학설이라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사료가 최신에 발굴돼 최신학설이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2019년)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이홍장 전집이 최근에 번역돼서 교과서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 설명은 명백한 말장난인데 국내에 극소수의 발췌된 동학관련 편집본이 번역으로 출간하는 것과 국내학자들이 중국어 문서를 연구에 인용하는 건 별개다. 중국어 사료도 못 읽는 사람이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 정도의 연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2018년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이 출간됐으나 여전히 고종이 원세개, 민영준과 더불어 청군 출병의 주체라 설명된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가 서적을 발간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발간하는『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는 우리 역사에 나타난 사실과 행위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체계화함으로써 한국 국제정치학 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본서는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고대•고려•조선•근대 등 총 4편으로 나누어 편제하고, 각 시기 별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그에 조응한 국내정치의 변화•발전의 양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특히 본서의 집필에는 국제정치학 뿐 아니라 한국사•일본사•중국사 등 다양한 분야의 권위있는 연구자 50여명이 참여했다. 이와 같은 방대한 규모의 집필진을 동원한 한국 외교사 통사 서술 작업은 우리 학계 초유의 일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6-9쪽
본서는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며 학계 초유의 일이라 설명될 정도로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학술서다. 이 학술서엔 분명 고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청병차병 결정에 대한 편찬을 맡은 연구자 구선희 박사이다. 즉 위의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권 이홍장 전집 발췌 편집본을 해제한 박사와 동일인이다.
겨우 동학관련 발췌 본의편집본(원본 전집에서 극소수 분량)이 2017년에 번역됐으니 '최근 학설'이 그 이후 나왔다는 설명부터 말장난이다.
- 육군본부의 《한국군사사》가 출처?
고종의 자진출병요청설 허위설의 출처도 왜곡됐다. 이 속설[⒜]에서는 그 출처가 《한국군사사》라고 애매모호하게 주장하는데 이것도 서지사항이 엉터리로 되어있다. 발행연도, 발행자는 물론 몇권인지도 기재하지 않는 등 출처를 엉망인데 한국군사사 중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것은 '육군본부, 《한국군사사》9(2012)'이다. 그러나 실제 '한국군사사'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즉 《한국군사사》를 출처로 한 내용이 아니다. 이홍장전집, 한국군사사 둘다 실제 출처가 아니다.
-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외교 문서 위조
고종 옹호자들은 프랑스 정부의 문서가 있다고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28) [조선사변에 관한 청국내 외국인의 의향보고의 건]
기밀제8호
이번 조선 내란으로 인한 일·청 양국의 출병에 관한 건에 대하여 이곳에 있는 주요한 외국인들이 말하는 말투를 보면, 영국인은 청국이 한국 정부의 요구에 응하여 출병한 것은 정당한 일이고, 일본이 이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일·청 양국은 모두 폭동이 진정되면 조속히 따로따로 군대를 철수하면 그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인은 한층 더 상세하게 평을 하였는데, 원래 이가 파병하게 된 원인은 조선 국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원세개의 재량에서 나온 것이며, 또 이홍장이 출병 전 경성주재 외국공사와 영사가 모두 청병의 보호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이 말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독일인은 영국인과 별로 차이점이 없었으나, 일본이 공관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하여 출병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28) [朝鮮事變에 관한 淸國內 外國人의 意向報告의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4권, http://db.history.go.kr/id/jh_004r_0040_0280
실상은 청국 내 외국인 중 프랑스인의 반응을 전달했을 뿐이고 해당 외국인 여론과 반응이 일치한다는 프랑스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증도 하지 못 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명박 시절의 국민들이 광우뻥을 믿거나 천안함 음모론을 믿는 여론이 존재한다는 사례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행정 문서라고 조작하는 것과 동급이다.
- 과거 학계가 모르는 최신 학설?
그리고 청의 문서와 주한일본공사에 근거한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일제의 조작설'은 1999년에 나와 이미 학계에 검토를 받았다. '이태진(1999), "1894년 6월 淸軍 朝鮮 출병 결정 과정의 眞相: 조선정부 자진 요청설 비판"'이 그것이다. 이태진은 본인이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고 명시한다. 즉 이 논문은 저자가 직접 비주류설임을 명시했는데 논문에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의한 실증'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강조하는 논문이 1999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선 기존학자들이 문서를 오독했다 주장한다. 즉 '최근발굴'같은 설은 이태진도 하지 않았다.
이태진은 직접적으로 기존의 통설이 식민사관의 아류라 주장하고《고종시대의 재조명》(2000)의 서문에서 통설을 침략사관설(5쪽)이라 주장한다.[113] 그러나 본인도 인정한 것처럼 이태진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이태진은 직접적으로 기존의 통설이 식민사관의 아류라 주장하고《고종시대의 재조명》(2000)의 서문에서 통설을 침략사관설(5쪽)이라 주장한다.[113] 그러나 본인도 인정한 것처럼 이태진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이상에 의하면 6월 3일 국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 청병에 동의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일차적 대응은 위안스카이가 순무 초토사의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한다.
둘째,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출병하는 청군은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보고 하륙하여 움직인다.
셋째, 청군 출병이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조기 제압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청군이 한성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만국공법이 정하는 외국병이 수도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에 따르면 일본을 비롯한 어느 나라 병력도 한성에 들어올 수 있는 구실은 없다.
위의 두번째 조건은 기록상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것이 없다. 단지 위안스카이의 현장 지휘가 처음부터의 조건부였다면 출병 청군이 농민군 진압의 일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산만에 도착한 청군은 실제로 동학농민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위와 같은 정도의 조건에서 고종이 청병을 허용하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결코 잘한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서울 : 태학사, 2000, 221
이태진도 본인의 가설에 입증할 기록은 없으며 고종이 청병을 허용한 잘못된 처사를 한 것은 이태진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조작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태진은 이후 2010~2013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였다. 당시 교과서에 핵심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나 당시에도 교과서의 설명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태진의 '고종의 출병자진요청설 일제의 조작설'은 여전히 비주류설이었다. 이점은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가 기획한 '한국군사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한국군사사' 는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편찬위원장이었다. 즉 이태진은 국사편찬위원장+육군군사연구소 기획 학술서의 편찬위원장이었다. 고조선서 광복군까지… 軍制·전쟁기술 총망라
그러나 이태진의 주장은 여기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고종의 청군출병자진요청 조작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태진은 이후 2010~2013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였다. 당시 교과서에 핵심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나 당시에도 교과서의 설명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태진의 '고종의 출병자진요청설 일제의 조작설'은 여전히 비주류설이었다. 이점은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가 기획한 '한국군사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한국군사사' 는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편찬위원장이었다. 즉 이태진은 국사편찬위원장+육군군사연구소 기획 학술서의 편찬위원장이었다. 고조선서 광복군까지… 軍制·전쟁기술 총망라
그러나 이태진의 주장은 여기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이라 설명된다. 이태진의 주장은 주석으로만 따로 설명되고 본문에서 인용되지 못한다. 이태진은 영향력이 높은 학자임에도 일제 조작설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거론된 속설[⒜]의 공통점은 최소 50년대~80년부터 인용된 자료를 2019~2020년에 '최근 발굴'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학계를 반박하지 못하니 '사료가 최근에 발굴됐다.'(그러니 전문가들이 인용 못 했다.)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2019년에 퍼진 주장은 사실 이태진의 주장도 아니다.
- 정설과 논란에 대한 허위정보
- 아무튼 논란이다?
사실관계가 아니라 '논란이 있으므로 확신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물론 어떻게 논란이 있다는 건지 학계 논의나 사료발굴 시기에 대한 증거는 없다. 유일한 증거는 이 속설[⒜](...)
학계의 정설을 반박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은 '논란이다',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간다.', '전문가들도 무엇이 사실인지 심하게 갈린다'는 식으로 말장난을 남발하며, 그것도 모자라 자칭 '논란'이란 것을 정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칭 '논란'의 출처는 블로그, 트위터 썰 외에는 없다.
위에서 인용된 이태진의 논문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태진도 분명 본인이 기존 정설과 반대된다고 했지 '논란'이라는 주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속설[⒜]의 주장을 정리하면 '아무튼 정설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으면 무조건 논란이다. 논란이므로 사실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구조이다.
나무위키 문서에선 속설을 학계의 논문공세로 비판한 탓에 외부 역사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킹무갓키의 사례로 평가하기도 한다.#이정도면 전공자가 빡쳐서 레포트 던지고 간 수준이다
학계의 정설을 반박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은 '논란이다',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간다.', '전문가들도 무엇이 사실인지 심하게 갈린다'는 식으로 말장난을 남발하며, 그것도 모자라 자칭 '논란'이란 것을 정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칭 '논란'의 출처는 블로그, 트위터 썰 외에는 없다.
위에서 인용된 이태진의 논문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태진도 분명 본인이 기존 정설과 반대된다고 했지 '논란'이라는 주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속설[⒜]의 주장을 정리하면 '아무튼 정설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으면 무조건 논란이다. 논란이므로 사실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구조이다.
나무위키 문서에선 속설을 학계의 논문공세로 비판한 탓에 외부 역사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킹무갓키의 사례로 평가하기도 한다.#
2.4. 일시 해산[편집]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 되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할 것을 기도하였다. 청과 일본 양측의 군대 파병이 톈진 조약에 의거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조선의 변란이 진정됐을 경우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 또한 톈진 조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동학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아산만과 인천항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1. 지구전은 불리한 데다, 2. 모내기도 해야 되고, 3. 무엇보다 이대로면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홍계훈이 "조정에서 너네한테 나쁜 짓 한 군수하고 안핵사 등을 다 벌줬으니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만 둬라"라고 했다.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조선 조정은 교정청,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 동학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소설 동학사는 이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가 실시되었다고 기술한다.
한편 동학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아산만과 인천항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1. 지구전은 불리한 데다, 2. 모내기도 해야 되고, 3. 무엇보다 이대로면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홍계훈이 "조정에서 너네한테 나쁜 짓 한 군수하고 안핵사 등을 다 벌줬으니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만 둬라"라고 했다.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조선 조정은 교정청,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 동학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소설 동학사는 이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가 실시되었다고 기술한다.
2.5. 2차 봉기[편집]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 조정은 청군과 일본군에게 이제 됐으니 철군하라고 요구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118]를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철군 요구에 "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철군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 주둔을 천명했다.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119],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 청의 이홍장이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에 청은 "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 또한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와중에 김홍집 내각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 1차 갑오개혁을 진행했으며, 전장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 내정 간섭의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120]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119],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 청의 이홍장이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에 청은 "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 또한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와중에 김홍집 내각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 1차 갑오개혁을 진행했으며, 전장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 내정 간섭의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120]
2.6. 농민군의 산화[편집]
한편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핵심이라 할 만한 북접은 이때까지 남접의 전봉준을 부정했지만[121],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남접에 합세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122]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10만~20만 동학 농민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한다. 여러 매체에서 묘사하는 것과 달리 2차 동학 농민 혁명 당시에도 1차와 마찬가지로 진압군의 주력은 조선 관군이었다. 우금치 전투 당시 진압군 주력은 조선군 순무영(巡撫營)[123] 및 친군 경리청(親軍經理廳) 2개 대대(약 1,000명)와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일본군 지휘계통 아래 있던 최정예 교도중대(350여명)였다. 일본군은 제 19 후비(예비역)보병대대 2중대(200여명)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던 개틀링 건과 크루프제 야포들은 모두 조선 관군 장비였다.
이 당시 조선군은 보급난에 시달렸는데, 정사와 야사 모두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할 당시 조선군이 자신들의 군수 물자와 생산 시설을 죄다 파기해버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력 소총인 마우저와 레밍턴의 탄약은 물론 주요 지원 화기인 개틀링포와 크루프 야포들의 포탄도 제대로 보급이 안 돼 일선에서는 탄약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1선에서 물러난 암스트롱 야포까지 끌고 올 정도였다.[124] 이때문에 물자 보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이 당시 조선군의 보급은 일본군이 해주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일본군이 사실상 조선군에 통제권을 행사하는 실정이었다.
이후 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동학군이 박살나고,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이후 동학군은 각개격파를 당하고 사실상 와해된다. 농민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125] 더군다나 당시 청군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식 군사 교육을 받은 일본군의 전술 능력이 농민 출신 동학군 지도부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전략 전술 측면에서도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보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후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그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있다가 잡힌 후 전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바로 참수되었는데, 이는 전라 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었다. [126] 이도재의 독단적인 판단 때문에 조선 정부와 일본의 마찰이 생겼다. 일본 측에서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도재의 독단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을 같이 상의하자고 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그를 감싸면서 이도재는 결국 감봉 3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수 있었다.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동학군을 재건하려 했으나 1894년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당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최경선, 서장옥 등도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 공초를 보면 배후, 특히 대원군과의 관계를 캐묻는 심문관과 이에 대해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는 전봉준의 모습이 나타난다.[127] 일본군은 전봉준을 포섭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살려보려 하였으나 전봉준은 그럴 마음 따윈 없어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128] 봉기가 시작된지 1년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894년 ~ 1895년,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였기에 황해도 동학도도 봉기하였다. 여기서는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김구)다. 그리고 이때 황해도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한 유력자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고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친분을 맺게 된다.[129]
2.7. 마지막 항전[편집]
우금치 전투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나서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된 후 더 이상 기반을 잃은 동학 농민군의 잔당은 동학의 접주급 이상 지도자 25명이 마지막 항쟁을 결의하고 대둔산[130]으로 피신하여 산세가 험난한 정상부에 요새를 설치한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약 석 달여간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포로로 붙잡힌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장렬히 전사한 대둔산 전투가 있었다.
1894년 12월 경,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 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의 간부급 지도자와 가족들을 포함해서 30여 명이 되어 험난한 대둔산에 조그마한 진지를 짓고 끝까지 최후의 농성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력 2월 3일)에 충청도 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다. 지휘관인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131]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 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韓兵)(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서 쉽사리 동학 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강화 심영병(沁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132]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 전투의 기록을 담은 대둔산 부근 전투 상보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관군과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이들을 이끌던 동학의 접주인 김석순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1세 ~ 2세가 된 그의 갓난아기를 안고 투신하여 자결을 하였고, 험난한 산중의 뒤에서 기습을 할 줄 모르고 앞을 중심으로 방어하던 농민군들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1894년 12월 경,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 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의 간부급 지도자와 가족들을 포함해서 30여 명이 되어 험난한 대둔산에 조그마한 진지를 짓고 끝까지 최후의 농성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력 2월 3일)에 충청도 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다. 지휘관인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131]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 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韓兵)(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서 쉽사리 동학 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강화 심영병(沁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132]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 전투의 기록을 담은 대둔산 부근 전투 상보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관군과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이들을 이끌던 동학의 접주인 김석순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1세 ~ 2세가 된 그의 갓난아기를 안고 투신하여 자결을 하였고, 험난한 산중의 뒤에서 기습을 할 줄 모르고 앞을 중심으로 방어하던 농민군들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3. 평가 및 영향[편집]
폐정 개혁안과 갑오개혁에 반영된 내용. |
교과서 수준에서는 반봉건 반외세에 기초한 근대성을 지향한 운동이었다고 언급되지만 유교적 근왕주의에 기초한 민란으로도 평가된다. 동학 운동이 근대적 국가를 지향한 운동이었음의 증거로 제시되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오지영이 1940년대 쓴 《동학사》에만 등장하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 소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오지영의 '소설'이란 표현은 겸양의 표현일 뿐 픽션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 반박하였으나, 이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동학사에만 출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출처바람]
실제 전봉준이 작성한 무장 창의문을 보면 근왕주의적 색채가 매우 뚜렷하며, 심지어 김개남은 스스로 왕을 참칭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지금 시점에서의 근대성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는 것이 중론. 다만 모든 동학교도들이 근왕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상당수는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예언서인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서 "이제 곧 조선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134]
전주 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반외세를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써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만 향반 지주 계층과 농민군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농민군 진압 후에도 관련자 색출 및 학살은 이어졌다. 의병을 이끈 향반층은 곧 농민군에 대항한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의병 전쟁기까지 살아남은 농민군도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학 농민 운동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 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기존 조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중화주의 외교 질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북한의 교과서 《조선력사》는 80년대 당시 남한 학계와 달리 "농민 전쟁"으로 평가했다. 개화파가 지도층이고 농민이 이를 추동한다는 주장 하에 '부르죠아 개혁 사상'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김일성과 연관된 인물이 적었으므로 그의 아버지 김형직의 우상화를 위해 평양의 3.1운동이 강조된 것과 달리 '과거의 봉건통치배'가 얼마나 나쁜가를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지역주의를 대놓고 강조하는 것은 북한도 적화통일을 위해 꺼리고 '지방주의'라며 금기시 되므로 '우리나라'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곳의 모든 역사를 가르친다. 홍경래의 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이 내용은 아예 "1894년 농민전쟁"이라며 목차까지 잡아놓고 가르친다. # 2000년대에도 내용은 비슷하다. '노동계급의 당'이 영도하지 않으면 모두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없이 실패한다는 원칙을 여기서도 드러낸다. # 2002년 교과서에서도 홍경래의 난이 아예 별도 목차로 추가되었으나 동학 농민 혁명도 그 분량은 "갑오 농민 전쟁"이라며 한 절의 목차로 잡혀 있으며, 분량은 홍경래의 난은 물론 3.1운동보다도 많다. 단일 사건으로는 임진왜란 다음으로 많은 비중이다. # 신라 적고적, 고려 망이와 망소이의 난, 조선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농민항쟁보다도 높게 취급하며 태평천국 운동, 세포이 항쟁 급의 가장 급이 높은 사건으로 취급하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김일성 같은 인물이 지도하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소설가 박태원이 말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으며, 이는 박태원의 마지막 작품이다.
비교적 근세에 일어난 일이라 호남 지역에는 가까운 조상이 동학에 가담했던 케이스가 매우 많다. 특히 동학 참여 이후 생존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고향을 등지고 다른 호남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의 고향이 호남 지역이라면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일반 시민들 중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뿌리를 동학 혁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독재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형태의 국가들이 많은데,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화를 이룩한 건 국민들의 피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뿌리는 동학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동학 농민 운동의 대표자로 유명한 전봉준조차 전제군주정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음을 고려하면[135] 이는 좀 지나친 비약이다. 동학 농민 운동이 내세운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보면 고위층을 처벌하라는 내용은 있을지언정 고위층을 아예 폐지하라는 식으로 완전한 자유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이나, 고위층은 보존하되 의회 설치 등을 통한 입헌군주제식 민주국가를 요구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의 공통점은 단지 아래에서 중앙에 대항해서 일어난 저항 운동이라는 점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전제국가의 국민들이 현대 민주주의 이념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동학농민운동을 단순한 민란이라고 취급할 수는 없다. 왕에게 청원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의 민란들과는 달리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왕명을 받은 군수와 협상하거나 양반을 배제한 향촌자치를 실현하기도 하는 등 농민들이 정치적인 주체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민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1차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포고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지만, 농민군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君臣과 父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家國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賢良하고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堯舜의 德化와 漢나라 文帝와 景帝의 치세를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략) 虐政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고,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管子가 말하기를 “四維[
禮義廉恥]
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公卿으로부터 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었다.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草野의 遺民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危亡을 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億兆蒼生이 詢議하여 지금 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保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136]
<포고문>은 유교적 언어, 유교적 사유에 의한 현실 진단과 비판이 민본과 인정 이념에 입각하여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137]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
草野遺民]
에 불과하지만,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치자계층을 대신하여 임금의 땅에서 먹고 사는 왕민으로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보국안민”의 義旗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곧 민본이념이 붕괴되고 인정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경전의 자구나 내용 분석에서 찾는 경우도 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농민전쟁을 농민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민란에 비추어 볼 때도 하나의 도약 내지 비약으로 받아들이고, 둘째, 이러한 도약을 위해서는 의식면에서 혹은 사상면에서 도약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셋째, 동학이야말로 그 도약대 역할을 하였거나, 농민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근거였다는 이해이다.[138]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사상적 도약대가 필요할 만큼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하거나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동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동경대전』에는「 개벽」이라는 용례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용담유사』에는 5회 나오지만, ‘천지개벽’적 상황을 전제한 것은 아니었다.[139]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의 행동 역시 기본적으로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弊政改革案>에서 보이는 농민군의 요구조건 역시 “개벽”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동학교도나 농민군들이 내세운 핵심 목표는 계속 바뀌어 갔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규정하는 내용도 변해갔다. 그러나 동학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조차도 유교적 가치를 부정한 적은 없다. 척왜양운동 시기에는 화이론적 세계관과 충효사상이, 농민전쟁 시기에는 민본과 인정 등 유교 이념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140] 이 점은 다른 나라의 민중운동에서도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141]배항섭(2017),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과 유교」, 『역사학보』 236, 역사학회
이글은 교조신원운동 시기부터 제2차 농민전쟁 시기까지 동학교도 혹은 농민군의 격문이나 통문을 통해 농민군의 사상적 기반이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살핀 것이다. 교조신원운동 시기 동학교도돌의 목표는 교조의 신원이나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요구에서 척왜양으로 변화하였다. 이어 고부봉기 시기부터는 치자층의 탐학이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제2차 봉기에서는 다시 척왜양이 전면에 등장한다. 정체성 면에서 동학과 관련된 내용은 점차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 들어 다시 동학과 관련된 요소가 강화되고 있었다.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을 동학의 ‘개벽’ 사상에서 찾는 경우도 있었고, 동학사상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회피하면서도 동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혹은 이단적 해석이 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그러나 농민군들의 요구나 지향이 반드시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할 만큼 “개벽”적인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들은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배항섭, 같은 논문 초록
무엇보다도 농민군들 스스로가 내세운 말들에서도 매우 유교적이고 근왕적인 세계관이 엿보인다. 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임금의 교화"를 누리고자 하였으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무너졌음을 한탄했다. 교조신원운동에서조차 유교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서양의 시민혁명과 연결하거나 한국 민주정의 뿌리로 인식하는 것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한국사에 억지로 끼워맞춘 서구중심적, 근대중심적 역사인식에 가깝다.
또한 동학과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동일시할 순 없지만, 최시형의 사상도 신분해방과는 거리가 있다.그것은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도피 중이던 최시형은 제자들에게 당부한 다음과 같은 훈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天生萬民이로되 各其分數가 모두 있느니라. 儒生과 농민의 衣食品數가 모두 다르니라. 선비는 布木이라도 8-9승의 가늘게 입고, 食器가 조금 적게 조처하는 것이 분수요, 농민으로 일꾼은 옷도 5-6승에 불과하고 식기도 조금 高大하게 하는 것이 각기 직분이니 매사를 분수대로 대인접물도 하려니와 분수를 善守手할지어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지나치면 이 또한 違基命이니라고 교훈하시더라.-曺錫憲, 「昌山后人曺錫憲歷史」, 『총서』 10, p.202.
또한 최제우에 대한 미담(하녀 두 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음)도 신분제 철폐 주장을 동학이 하였다고 확증하는 것은 아니다. 만인을 존귀하게 대우하는 것과 사회적인 신분제 철폐 주장은 다른 것이니까.
물론 동학사상이 유학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학경전에는 유교를 상대화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등 기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적 요소가 없지 않다.[142]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동학경전에는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다 할 정도로 체제에 대한 비판이 매우 취약하다.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143] 상대적으로 과격한 표현도 있지만, 다른 데서는 오히려 유교와 "大同而小異"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144]
또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만은”이라는 구절도[145] 동학이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용담유사』에서 보이는 다음의 몇 가지 구절 역시 동학이 유학을 전혀 배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적 덕목이나 가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이는 역시 그러해도 수신제가 아니하고 도성입덕 무엇이며 삼강오륜 다버리고 현인군자 무엇이며[146]
강산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 살펴보니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있지마는 인심풍속 괴이하다.[147]
나도 또한 충렬손이 초야에 자라나서 군신유의 몰랐으니 득죄군왕 아닐런가.[148]
요순지세에도 도척이 있었거든 하물며 이세상에 악인음해 없단말가 공자지세에도 환퇴가 있었으니 우리역시 이세상에 악인지설 피할소냐 수심정기 하여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 군자말씀 본받아서 성경이자 지켜내어 선왕고례 잃잖으니 그 어찌 혐의되며 세간오륜 밝은법은 인성지강으로서 잃지말자 맹세하니 그 어찌 혐의될꼬.[149]
임금에게 공경하면 충신열사 아닐런가.[150]동학사상에는 이미 유교적 요소가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동학의 포교과정에서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유교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학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전봉준 역시 동학을 유교적 측면에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것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배항섭(2018), 「 동학에서 보이는 ‘전통’과 새로운 사유 」, 『민족문화논총 』 7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물론 모든 농민군 구성원을 하나의 사상으로 일반화시켜 설명하기는 어렵다. 1893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천주교 주교인 뮈텔 주교한테 보내진 이른바 '뮈텔 문서'에 의하면, 1892년 8월에 전라남도 무장의 사찰인 선운사를 습격하여 돌부처에 숨겨진 금과 은을 빼앗은 3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먼저 서양과 왜적을 멸한 후에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이씨와 민씨들을 전멸시키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서 이씨란 조선왕조의 왕족인 이씨들이고 민씨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들이니, 이 선운사 사건을 저지른 동학교도들은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을 모두 절멸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구한말의 동학교도들이 모두 전봉준처럼 근왕 사상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적지 않은 동학교도들은 예언서 정감록에 적힌 "이씨 조선 왕조는 곧 망하고 이제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는 예언을 믿었다.[김탁,2016]
실제로 구한말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행동들을 보면, 그들이 충실한 근왕 세력이라고 보기 힘들다. 당장 1871년 3월 10일 경상북도 영해(寧海)의 관아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아를 점령한 이른바 이필제의 난에 가담한 180여명의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동학교도였고, 심지어 이 반란에 자금을 지원한 인물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년)이었다. 비록 동학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격문에서 근왕을 외쳤어도, 당시 동학군을 관찰한 황현과 박봉양 같은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들 중 대부분은 동학군이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정씨 왕조의 등장을 예언한 정감록을 신봉했다고 언급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전봉준의 격문에 적힌 근왕 성향을 믿지 못하고, 동학교도들이 왕조의 전복을 노리는 반정부 세력이라고 규정하여 잔혹하게 진압했을 가능성도 있다.
3.1. 명칭 관련 논쟁[편집]
일본에서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戦争), 중국에서는 동학당기의(东学党起义)[152], 북한에서도 갑오농민전쟁[153]으로 부른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비롯되어 동학란[154], 동학 폭동[155](동학란이 사회가 한 쪽으로 이념이 치우지기 이전까지 잘 쓰이긴 했지만, 이때도 동학의 난 또는 동학난이라고 불렀지 동학 폭동은 잘 안 쓰였다.),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한 칭호로 불리기도 하나, 현재는 동학농민운동이라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동학 농민 봉기 혹은 동학란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전에 소규모로 빈발하던 농민봉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156] 동학혁명은 진보나 사회주의 세력 등 주로 극좌 쪽에서 농민이 주도적으로 국가 정치의 대변혁을 시도했음을 높이 사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활동이 혁명이라기에는 이념의 구심점이 약했다는 비판이나 혁명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서구와 별개로 발전되어온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서구 역사에 끼워맞춰서 이해하려 하는 서구중심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유하자면, 비빔국수는 비빔국수로 이해하여야지, 스파게티의 맹아이니 뭐니 하는게 도대체 어딜봐서 비빔국수를 존중하는 해석이란 말인가?[157] 반대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의장이 척왜(척양은 배제)와 근대화 측면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운 적도 있어서 조금은 복잡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는 16세기 독일의 농민전쟁에 영향을 받은 칭호이나, 둘간의 차이가 상당하고 동학군은 조선 왕조 자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이란 용어도 많이 쓴다. 이 경우는 운동이나 봉기 같은 축소 단어가 아니며 격렬한 전투를 나타내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은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사학계 주류에서는 이미 90년대부터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으로 명칭이 굳어진 상황이다.# 그 이유는 첫째, 동학의 역할이 이념적 구심점이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커뮤니티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으며 둘째, 근왕주의적인 성격이 있었다고는 하나, 군대를 조직하여 당시 고종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데다 셋째, 당시 농민군이 지향했던 지점이 조선왕조와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158]
다만 오늘날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동학농민운동도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는 지적도 꽤 된다. 비슷한 경우로 3.1 운동도 '운동'이라는 이름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쓰이는 실정. 사실 성격이 무력 전쟁의 성격이 강한 점에서는 동학은 3·1 운동과도 다르다. 영어로는 비슷한 사건에 규모와 큰 상관 없이 Rebellion(반란, 모반)나 Uprising(봉기)를 많이 붙이는 편이다. 예컨데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표제어를 보면 의화단의 난은 Boxer Rebellion, 태평천국은 Taiping Rebellion, 부활절 봉기는 Easter Rising으로 되어있으며, 본 문서가 설명하는 사건은 Tonghak Uprising으로 되어있다. 또한 홍경래의 난도 그 혁명적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동학농민란,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황건적의 난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황건기의'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명칭을 존중해 동학농민혁명이란 표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대표적이다(2009년 말일 활동 종료). 다만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아 출판되는 한국사 교과서와 각종 EBS 교재에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에서도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2010년대 중반 현재도 진행 중인데, 확정되어 국가 행사가 된다면 명칭이 확립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봉건 반침략'으로 규정하고, 이청원의 논리를 진전시켜 1945년 초등학생용 문고판으로 <갑오농민전쟁>을 펴냈다. 이후에도 농민전쟁이라는 기본 시각이 확립되었고, 그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 1981년에 출판된 <조선전사> 등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동학 농민 봉기 혹은 동학란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전에 소규모로 빈발하던 농민봉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156] 동학혁명은 진보나 사회주의 세력 등 주로 극좌 쪽에서 농민이 주도적으로 국가 정치의 대변혁을 시도했음을 높이 사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활동이 혁명이라기에는 이념의 구심점이 약했다는 비판이나 혁명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서구와 별개로 발전되어온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서구 역사에 끼워맞춰서 이해하려 하는 서구중심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유하자면, 비빔국수는 비빔국수로 이해하여야지, 스파게티의 맹아이니 뭐니 하는게 도대체 어딜봐서 비빔국수를 존중하는 해석이란 말인가?[157] 반대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의장이 척왜(척양은 배제)와 근대화 측면에서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운 적도 있어서 조금은 복잡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는 16세기 독일의 농민전쟁에 영향을 받은 칭호이나, 둘간의 차이가 상당하고 동학군은 조선 왕조 자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이란 용어도 많이 쓴다. 이 경우는 운동이나 봉기 같은 축소 단어가 아니며 격렬한 전투를 나타내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은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사학계 주류에서는 이미 90년대부터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으로 명칭이 굳어진 상황이다.# 그 이유는 첫째, 동학의 역할이 이념적 구심점이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커뮤니티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으며 둘째, 근왕주의적인 성격이 있었다고는 하나, 군대를 조직하여 당시 고종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데다 셋째, 당시 농민군이 지향했던 지점이 조선왕조와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158]
다만 오늘날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동학농민운동도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는 지적도 꽤 된다. 비슷한 경우로 3.1 운동도 '운동'이라는 이름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쓰이는 실정. 사실 성격이 무력 전쟁의 성격이 강한 점에서는 동학은 3·1 운동과도 다르다. 영어로는 비슷한 사건에 규모와 큰 상관 없이 Rebellion(반란, 모반)나 Uprising(봉기)를 많이 붙이는 편이다. 예컨데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표제어를 보면 의화단의 난은 Boxer Rebellion, 태평천국은 Taiping Rebellion, 부활절 봉기는 Easter Rising으로 되어있으며, 본 문서가 설명하는 사건은 Tonghak Uprising으로 되어있다. 또한 홍경래의 난도 그 혁명적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동학농민란,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황건적의 난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황건기의'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명칭을 존중해 동학농민혁명이란 표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대표적이다(2009년 말일 활동 종료). 다만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아 출판되는 한국사 교과서와 각종 EBS 교재에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에서도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2010년대 중반 현재도 진행 중인데, 확정되어 국가 행사가 된다면 명칭이 확립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봉건 반침략'으로 규정하고, 이청원의 논리를 진전시켜 1945년 초등학생용 문고판으로 <갑오농민전쟁>을 펴냈다. 이후에도 농민전쟁이라는 기본 시각이 확립되었고, 그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 1981년에 출판된 <조선전사> 등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4. 기타[편집]
4.1. 세계기록유산 등재[편집]
1894∼1895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정부와 동학농민군, 농민군의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일본공사관 등이 생산한 자료 총 185점이 2023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등재 신청 심사 당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조선 백성이 주체가 돼 자유·평등·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던 '기억의 저장소'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4.2.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보[편집]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조선 인물들 중 관군 측에서는 먼저 홍계훈은 훈련대장으로 승진했고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과 이에 가담한 조선인들을 저지하다 죽었고[159], 조병갑은 1898년 고등재판관으로서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렸으며, 이규태[160]는 항일 의병장이 되었으나, 이두황[161]과 이진호[162][163], 김학진과 이용태, 박제순은[164] 반민족적 친일파 인사로 전락한다. 그리고 동학 측 인물들 중 최시형은 1898년 송경희의 밀고로 인해 한성부로 압송되어 처형당했고,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한 뒤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그의 제자 이용구는 반민족적 친일파 인사로 전락하게 된다.
4.3. 기념 사업[편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읍 등 관련 지역민들의 주도로 전봉준에 대한 기념 사업을 조촐하게 이어 오다가, 1963년 10월 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한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탑 이름은 동학혁명 기념탑이다.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날에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의 도약에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 혁명으로서 정신은 길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5.16 혁명도 이념 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동학혁명은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봉건 잔재 타파에 커다란 이정표가 됐다",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 목표를 삼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백성은 용서하지 않을 것" 이라고 평가했다. # 이처럼 박정희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높이 평가한 데에는 아버지인 박성빈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경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치 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탑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고 썼다. #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165] 다만 거창한 사업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증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엉터리가 된 것들이 많다.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워지고 1994년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공연, 전시회 등 문화예술 행사들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후 국무총리 직속기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출범해 2009년 해산 때까지 유족 10,576명을 등록했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2015년 12월 31일 최종 공포되었다. #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도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되었다.
2018년 9월 초 문화체육관광부 주도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재출범하고, 유족 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 유족 등록과 기념관 설립 계획에 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9년에 5월 11일을 #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최초의 싸움인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또한 음력으로는 4월 7일이다.
전북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수당 지급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020년부터 유족에게 매월 10만원씩 수당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125년 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의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선 건국에 기여한 신진사대부 유족도 찾아서 보상하고 임진왜란 유족도 보상하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치 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탑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고 썼다. #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165] 다만 거창한 사업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증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엉터리가 된 것들이 많다.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워지고 1994년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공연, 전시회 등 문화예술 행사들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후 국무총리 직속기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출범해 2009년 해산 때까지 유족 10,576명을 등록했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2015년 12월 31일 최종 공포되었다. #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도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되었다.
2018년 9월 초 문화체육관광부 주도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재출범하고, 유족 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 유족 등록과 기념관 설립 계획에 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9년에 5월 11일을 #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최초의 싸움인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또한 음력으로는 4월 7일이다.
전북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수당 지급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2020년부터 유족에게 매월 10만원씩 수당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125년 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의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선 건국에 기여한 신진사대부 유족도 찾아서 보상하고 임진왜란 유족도 보상하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4.3.1. 관련 단체/기관[편집]
-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운영 담당.
- 고창 등 지역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들
4.4. 마지막 생존자[편집]
동학농민운동 관련자 중 1985년에 110세의 나이로 사망한 엄이경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운동의 발단인 만석보 축조 당시에 돌을 나른 것을 시작으로 20살 때인 1895년에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시기 각종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봉준 장군의 경호원 겸 연락 담당을 맡았다고 한다. 개항과 동년에 출생하여 동학농민운동부터 서울의 봄까지 모두 지켜봤던 셈. 비록 6월 민주 항쟁과 민주화 이후는 보지 못했으나 이 정도만 해도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나 다름없다.[166]
사람은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남아있던 산 증인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위치하고 있던 이른바 "말목장터"의 감나무였다. 예전부터 역참과 장터가 위치해 그 특성상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전봉준은 이곳을 찾아 감나무 위에 올라가 장터의 군중들에게 조병갑의 행패를 낱낱이 알리고 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촉구했고, 이에 호응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현재의 고부 초등학교 및 고부면사무소 자리)를 습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타 올랐다. 2001년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 당시 수령 180년 가량이었던 이 감나무는 항쟁의 진압과 일제강점기, 광복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노무현의 참여정부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주변[167]이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상가 주택으로 바뀌는 2000년대까지 남아 있다가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고사했다.[168]
사람은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남아있던 산 증인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에 위치하고 있던 이른바 "말목장터"의 감나무였다. 예전부터 역참과 장터가 위치해 그 특성상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전봉준은 이곳을 찾아 감나무 위에 올라가 장터의 군중들에게 조병갑의 행패를 낱낱이 알리고 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촉구했고, 이에 호응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현재의 고부 초등학교 및 고부면사무소 자리)를 습격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타 올랐다. 2001년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 당시 수령 180년 가량이었던 이 감나무는 항쟁의 진압과 일제강점기, 광복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노무현의 참여정부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주변[167]이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상가 주택으로 바뀌는 2000년대까지 남아 있다가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고사했다.[168]
4.5. 일본의 연구[편집]
5.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단한 사건으로 출판매체로는 종종 소재로 다루어진 편이지만, 아직 드라마나 영화로 영상화된 작품은 많지 않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붐에 영향을 받은 천재 감독 하길종이 이 사건을 영화로 내기 위해 각본도 쓰고 준비를 했었으나, 1979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2017년이 되어서야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전봉준(가제)'가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은 없는 상태. #
1984년작 KBS1 대하드라마 독립문이 있다, 전봉준역에 성우 양지운이 출연하며 드라마 1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을 다루었다.
1994년 5월 1일 ~ 22일까지 KBS1TV "다큐멘터리극장"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특집이 총4부작으로 방송 되었다 제1부 미명의 왕토, 제2부 일어서는 땅, 제3부 하늘이 열리다, 제4부 녹두꽃은 떨어지고 이상 4편으로 전문 연기자들의 심도있는 연기로 사실성을 더했다
MBC에서는 1994년 3월 7일부터 1994년 3월 29일까지 방영된 동학혁명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있다
1991년작 영화 개벽이 있다,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배경은 동학 제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부터 1898년까지 묘사되고 있다. 또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또한 다루었다. 감독에 임권택, 최시형 역에 이덕화, 전봉준역에 김명곤 등이 출연함.
2012년 5월 ebs의 역사채널e에서 방송되었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붐에 영향을 받은 천재 감독 하길종이 이 사건을 영화로 내기 위해 각본도 쓰고 준비를 했었으나, 1979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2017년이 되어서야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전봉준(가제)'가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은 없는 상태. #
1984년작 KBS1 대하드라마 독립문이 있다, 전봉준역에 성우 양지운이 출연하며 드라마 1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을 다루었다.
1994년 5월 1일 ~ 22일까지 KBS1TV "다큐멘터리극장"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특집이 총4부작으로 방송 되었다 제1부 미명의 왕토, 제2부 일어서는 땅, 제3부 하늘이 열리다, 제4부 녹두꽃은 떨어지고 이상 4편으로 전문 연기자들의 심도있는 연기로 사실성을 더했다
MBC에서는 1994년 3월 7일부터 1994년 3월 29일까지 방영된 동학혁명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있다
1991년작 영화 개벽이 있다,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배경은 동학 제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부터 1898년까지 묘사되고 있다. 또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또한 다루었다. 감독에 임권택, 최시형 역에 이덕화, 전봉준역에 김명곤 등이 출연함.
2012년 5월 ebs의 역사채널e에서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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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9년 SBS에서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 <녹두꽃>이 전파를 탔다. KBS <정도전>을 집필했던 정현민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시인 신동엽은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을 썼다. 이 시는 2부작으로 되어 있고 총 30장 4,800여 행의 크기를 자랑한다. 내용은 실존 인물인 전봉준과 가상 인물인 '김하늬'가 동학 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 특유의 성질인 백성의 세계관과 반외세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시의 묘사도 서정이 느껴지면서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은 북한에 있으면서 그의 말년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대하소설을 썼다. 그는 김일성의 숙청에서 겨우 살아난지라 그 후유증으로 전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내가 자신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소설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부작으로 소설이 간행되었다.
복거일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비명을 찾아서에서 일본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일본인 교수의 글에서 동학란이 언급되며, 일본과는 독자적인 역사를 가졌다는 해석에 이를 몰랐던 주인공은 혼란을 느낀다.
혼불문학상 5회 수상작인 이광재의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운동 중 실재사건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했다. 흥미롭게도 전봉준과 흥선대원군과의 연계설을 다루었다.
언론인 출신 소설가 전진우의 장편소설 《동백》은 전봉준 시점에서 서당 훈장 시절부터 그의 최후까지 다뤘으며, 이성수의 소설 《70일의 비밀》은 특이하게 동학 운동의 마지막 항전지인 대둔산을 무대로 다뤘다.
웹툰으로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과 진압군 간의 마지막 혈전을 다룬 <갑오>가 있다. 이 웹툰은 전자책 전문 기업 링거스 커뮤니케이션즈의 후원에 이뤄진 것으로서 그림 작가는 웹툰 칼부림을 그리고 있는 고일권이다. 이 웹툰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의 여성 접주 '이소사'와 10대 소년 접주 '최동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호성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저항가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제목은 <동학농민가>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봉기하였던 농민들의 분노와 한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인 신동엽은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을 썼다. 이 시는 2부작으로 되어 있고 총 30장 4,800여 행의 크기를 자랑한다. 내용은 실존 인물인 전봉준과 가상 인물인 '김하늬'가 동학 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 특유의 성질인 백성의 세계관과 반외세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시의 묘사도 서정이 느껴지면서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은 북한에 있으면서 그의 말년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대하소설을 썼다. 그는 김일성의 숙청에서 겨우 살아난지라 그 후유증으로 전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내가 자신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소설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부작으로 소설이 간행되었다.
복거일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비명을 찾아서에서 일본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일본인 교수의 글에서 동학란이 언급되며, 일본과는 독자적인 역사를 가졌다는 해석에 이를 몰랐던 주인공은 혼란을 느낀다.
혼불문학상 5회 수상작인 이광재의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운동 중 실재사건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했다. 흥미롭게도 전봉준과 흥선대원군과의 연계설을 다루었다.
언론인 출신 소설가 전진우의 장편소설 《동백》은 전봉준 시점에서 서당 훈장 시절부터 그의 최후까지 다뤘으며, 이성수의 소설 《70일의 비밀》은 특이하게 동학 운동의 마지막 항전지인 대둔산을 무대로 다뤘다.
웹툰으로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과 진압군 간의 마지막 혈전을 다룬 <갑오>가 있다. 이 웹툰은 전자책 전문 기업 링거스 커뮤니케이션즈의 후원에 이뤄진 것으로서 그림 작가는 웹툰 칼부림을 그리고 있는 고일권이다. 이 웹툰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의 여성 접주 '이소사'와 10대 소년 접주 '최동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호성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저항가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제목은 <동학농민가>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봉기하였던 농민들의 분노와 한을 잘 드러내고 있다.
1절 |
붉은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 보국안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한울북 울리며 흙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다했다 농민들의 흐느낌이다 |
2절 |
검은 강물 햇살에 잠겨 억눌림의 설움이 받쳐 척양척왜 기치가 높이 솟았다 개벽고 울리며 주린배를 움켜잡고서 죽창들고 일어선 그날 태평곡 격앙가를 볼 것이다 농민들의 아우성이다 |
3절 |
한울도 울고 땅도 울었다 가렴주구의 설움이 받쳐 제폭구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성주소리 드높이며 초근피죽 한사발에 울고 울었다 갈가마귀떼 울부짖던 그날 춘삼월 호시절을 볼 것이다 농민들의 불망기이다 |
후렴 |
저 흰 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 검은 해가 비로서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햇불이 탄다 하늘아래 들판의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는 무엇이었나 갑오년의 핏발어린 외침은 우리 동학 농민피다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
6. 관련 어록[편집]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169]
우리들은 비록 草野의 遺民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危亡을 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億兆蒼生이 詢議하여 지금 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무장포고문」
천하의 대세를 논해 보더라도 위대한 청나라는 100년 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묘사직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의리에 있어 어찌 밝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청나라 병사 10만 명이 현재 인천항에 포진하여 있고 또 소사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으니, 이것은 일대 쾌거입니다. 그런데 우리 임금께서 어찌 청나라를 도와 일본을 토벌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1894년 9월 28일 서상철의 안동 지역 동학농민군 격문#
압수문서 중에,“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위해 진력하고 있으니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협력하여 왜적을 쳐부수자”는 등의 글귀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백성입니다.-일본군이 공주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작성한 보고서.#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표제어[2] 참고로 4.19 혁명 기록물과 같이 등재되었다.[3] 이때 충청도 관찰사는 조병식이었다. 조병갑의 친척이자 역시 탐관오리로 방약무인하여 동학도들의 말을 무시하였다.[4] 태형으로 인한 체력 약화와 상처가 감염되어 생기는 병.[5] 전창혁의 사망 경위는 명확치 않다. 대체로 조병갑에 항의하다 장살(杖殺)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만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린 1893년 11월 경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생각된다.[6] 동학에서 쓰였던 한 지역의 지도자를 일컫는 단어로, 즉 지금의 고창군의 일부인 무장현의 지부장.[7] 인망이 있어 그를 따르는 동학도만 약 2천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8] 조병갑이 급하게 도망가는 바람에 조병갑을 처형하는 원래 계획은 실패한다. 조정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하여 조병갑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파면하고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강진군 고금도에서 잠시 근신을 하고 곧 복귀하여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 재판관(오늘날의 고등법원 판사)까지 승진하였다. 흥선대원군 시절 영의정까지 지냈던 조두순이 큰아버지라(조두순은 양주 조씨이다. 사족으로 조병갑은 서자였다고 한다.) 가능했던 일로, 이런 현실은 조선 왕조 탐관오리들의 영원한 레퍼토리기도 했다. 그는 1912년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 수괴급은 사형. 그 외 주동자급 및 중죄를 저지른 게 밝혀진 사람은 귀양. 나머지 단순 가담자들은 훈방 또는 무죄. 임술민란 때도 대부분 이 정도로 처리되었다.[10] 당장 임술민란 때도 유계춘 같은 주모자들이 여럿 참수되었지만, 그 때문에 사태가 대책 없이 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술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계속 이어진 건 정부에서 삼정의 문란을 고치겠다고 약속해 놓고 입 씻거나 실효성 없는 정책만 내놓았고, 수령들과 지방 사족들의 가렴주구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11] 이용태는 민란을 우려하여 만류하는 신임 군수 박원명까지 협박해 가면서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참여자를 색출해 냈고, 이렇게 그가 색출해내었던 농민은 모두 동학 교도라고 규정한 뒤, 동학 교도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집을 불태운 뒤 교도들과 연좌제를 적용하여 교도들의 처자식까지 잡아서 살육하였다. 교도들의 재산 또한 강제로 몰수했다. 아무리 연좌제가 용인되던 당시의 사회 풍조라도 이 정도면 고을 하나가 사라질 만한 일가족 몰살에 줄초상까지 벌어질 정도로 참담한 만행이었다. 거기에 동학 교도가 아니던 단순 가담자들을 역시 모두 동학 교도로 단정하여 그들 역시 죽였으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12] 이상이 자생적 고부 민란이 확대되었다는 견해에 입각한 서술이며 또한 정설이나,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바가 있어 서로가 안면이 있었고,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에 전주성 점령 및 한양으로의 진격이 명시된 데 비추어 보아 대원군이 발단에 개입한 계획적 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모병 과정에서 강조하였으며, 대원군 또한 난 발발 이전부터 동학의 지속적인 청원을 이용해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였던 손화중도 대원군과 그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3] 권세를 가진 귀족들을 일컷는 말.[14]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민씨를 구하고 을미사변 때 시위대로서 근무하여 민씨를 보호하다 살해당한 그 홍계훈 맞다.[15]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 병력과 친군심영(親軍沁營) 병력.[16] 전주에 주둔하던 친군영으로, 동학 혁명 발발 당시 불과 몇 달 전에 신설된 부대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정원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17]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영.[18] 동학군을 막기 위해 지역 양반들이 주도해서 만든 민병대.[19] 당시 나주는 대대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한 고을이었다. 나주목사 민종렬을 위시한 관군의 강한 저항과 나주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학군은 결국 나주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다.[20]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이때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 개화파이면서 근왕파 유생이었기 때문에 동학 조직이 주도하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취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그랬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이 시기는 아직 안태훈 일가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이었다. 또 안중근이 사형 직전에 쓴 《안응칠 자서전》을 보면, 안중근은 농민군과 일진회를 동족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동학 출신인 건 맞지만...[21] 농민이 시초도 아니고 봉기라고 할 수 없던, 양치기로 시작하여 농민도 일부 참여한 양치기 십자군도 도적질을 저질러 결국 프랑스군에게 무수히 참살당하며 진압되었다...[22] 김구의 고향에서는 "창수가 동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을 정도. 참고로 창수는 김구가 젊었을 적에 쓰던 이름이다.[23] 5월 8일에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반격해서 동학의 주력을 털어버리고 전주성 남문을 통해 전주성을 탈환하였고, 동학의 지도부들은 도주하였다. 남은 것은 도망치지 않고 버티다가 도망친 동학의 잔당 뿐이었다. 청일 양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늦어도 8월 안에는 완전히 끝나고 뒷정리까지 대강 끝났을 것이다.[24] 청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 마찬가지로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조약이었다.[25] 아마도 태평천국의 난을 말하는 듯 한데, 이는 고종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영국이 청을 지원한 것은 청을 짓밟고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한 1860년 이후이며, 이 때의 청은 외세의 군사력 지원도 없이 회군과 상군을 동원해 내분으로 약해진 태평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찰스 조지 고든을 비롯해 영국-프랑스 군인들이 용병 형식으로 청군을 지휘하거나 지원한 적이 있다.[26] 외국군을 끌어들였다가 그로 인해 외부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는 일은 세계 역사상 비일비재했다. 과거 유대 왕국은 자신들의 내분 과정에서 로마군을 끌여들였다가 유대 왕국 자체가 로마의 속국으로 떨어져 버렸고,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선비족을 끌어들이거나 당나라 후기에 위구르인들을 끌어들였다가 많은 낭패를 보았다. 한반도에서도 신라가 고구려군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한 대신 고구려의 속국으로 떨어졌으며, 가야 연맹 중 안라국이 백제의 지원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백제의 간섭을 받는 처지로 떨어졌다. 게다가 저런 사례들과 달리 이 일은 외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제3국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국내 반란 진압에 외국군을 데려오는 것이니 문제가 더 심각하다. 괜히 신하들이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한 것이 아니다.[김명섭,1994,7]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7[구선희,1999,219]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19[강문호,2004,109]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엄찬호,2006,5] 30.1 30.2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5 (KCI)[신영우,2009,19~20,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19~20, 26[유바다,2017,336] 32.1 32.2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김명섭,1994,5~6]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5~6[강문호,2004,116]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16[신영우,2009,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6[강문호,2004,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구선희,1999,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김명섭,1994,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구선희,1999,225]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5[엄찬호,2006,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신영우,2009,27] 42.1 42.2 42.3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김경록,2018,37~39] 43.1 43.2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구선희,1999,220~221]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0~221[김보경,2004,95] 김보경,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학위논문(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2004, page 95[구선희,1999,226]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6[엄찬호,2006,7] 48.1 48.2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김명섭,1994,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구선희,1999,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강문호,2004,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유바다,2017,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유바다,2017,411]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구선희,2017,33~35]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김창수,1981,42~50] 김창수, 동학농민혁명과 외병차입문제, 동국사학, Vol.16, 1981, page 42~50[김창수,1985,3~9] 淸日戰爭前後 日本의 韓半島 軍事侵略政策, 한국사연구회, 淸日戰爭과 韓日關係 : 日本의 對韓政策形成에 관한 硏究, 서울 : 一潮閣, 1985, page 3~9[박종근,1995,8~17] 박종근, 日淸戰爭と朝鮮, 東京 : 靑木書店, 1982. 번역: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외침과 저항, 서울 : 일조각, 1995, page 8~17[구선희,1999,220~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0~227[구선희,2006,94] 청일전쟁의 의미 : 조ㆍ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37, 2006, page 94[김보경,2004,95~99] 김보경,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학위논문(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200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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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역덕들에게 유명한 사건이다.[77] 김명섭, 1994, 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78] 구선희, 1999, 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79] 엄찬호, 2006, 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80] 강문호, 2004, 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81] 신영우, 2009, 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82] 유바다, 2017, 336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83] 김경록, 2018, 37~39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84]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85]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86]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92] 김명섭, 1994, 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93] 구선희, 1999, 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94] 강문호, 2004, 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95] 엄찬호, 2006, 7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96] 신영우, 2009, 27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97] 유바다, 2017, 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99]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105~110)[102] 유포된 내용이 무엇인지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기록된 게 있다.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 "과연 조선은 동학농민운동 때 청에 원병 지원을 요청했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대체적으로 고종이 직접 원병을 불렀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굴한 양호초토등록이나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프랑스 외교문서 등을 보면 또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기록들이 넘쳐납니다." 여기서 프랑스 문서는 1차 출처가 네이버 블로그이며 블로그 외에는 출처가 없다. 프랑스 외교 문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 외교 문서 위조' 참조. 실제로는 외국인 아무개의 반응을 외교 문서라고 조작한 것이다. 물론 2010년 기준에서도 옛날 문서다.[106] 國家淸史編纂委員會文獻叢刊, 『李鴻章全集』, 北京 : 安徽敎育出版社, 2008 중 總序와 凡例[109]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110]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224~225[111]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8~9 (KCI)[113] 다만 이 경우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설을 포괄한 것이다.[118]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말을 할 만했던 게, 당시 일본제국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상주안을 가결시켜버려 당시 총리였던 이토는 물론이고 내각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하늘이 일본 제국에게 준 기회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따지자면 자기에게 준 기회라는 뜻이 강하다(...)[119] 사실 당시 청 내부에서 조선을 전통적 조공속국 개념을 넘어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주류가 아니었다. 당장 청 조정의 수장인 이홍장부터 조선 식민지화는 되도 않은 소리라고 반대했다. 지금처럼 속국 관계나 유지시키자는 게 당시 청의 주류 의견이었으니, 무리하게 조약을 어기거나 할 이유가 없었던 셈. 게다가 청은 조선과 나쁜 감정도 없었고 조선이 오랫동안 청을 상국으로 잘 섬겨온 판국에 굳이 식민지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는 도저히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하다못해 조선과의 전쟁조차 감당할 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이유도 없이 조선을 무리하게 집어삼키려다가 조선이 청을 상대로 저항하거나 일본에 붙어버리면 낭패였다. 특히 한반도의 지형은 중국에서 위로 급히 꺾이는 지형이기 때문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만주를 완전히 장악 및 개척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이때문에 한반도 완전 병탄은 중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몽골조차도 고려를 속국/부마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지경. 당시 만국의 병신(...)(정말로 병 걸린 자, 그러니까 병신이라고 불렀다.) 소리를 듣던 청 입장에서는 도저히 무리였다.[120] 역시 이에 대해서도 대원군의 사주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구한 말 정변에는 모두 대원군 개입설이 있으며 상당히 유력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침공이 있었으므로 고종이 억류된 상황이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준에게 봉기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동학의 2차 봉기가 고종과 연결되어 있는지, 대원군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 을 수도 있었다. 뭐 결국 실패하면서 크게 영향력이 없어져 버렸지만. 한편 일본군 참모 가와키미 소로쿠와 히라오카 쇼타로가 '청국을 토벌한다'는 묵계 아래 우치다 료헤이 등 14명의 낭인들이 천후협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조선으로 가 전봉준을 만나 거사를 촉구하고 무기를 지원하였으며, 홍계훈이 농민군에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물론 동학군이 승리했다는 둥, 지명이나 인원이 훨씬 적고 쌩뚱맞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아니다, 동학 측 기록인 《천도교 창건사》에도 "일본인 다케다 한지(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2차 봉기 이후, 대원군 등에 의해 성격이 청과 (전략적으로) 손잡고 일본과 싸운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FAIL.[121] 처음에는 남접군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띠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교도들을 죽을걸 뻔히 아는 상황으로 내모는 것은 교주인 최시형 관점에서 못할짓이었으며 그렇기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접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남접이 생각 이상으로 잘 싸웠기에 호응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만약 남접이 패배했더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학교도 전체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122] 남접의 주요 인물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었으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123] 반란이나 국경에 소란이 생기면 편성되는 임시 군영.[124] 이유는 조선으로 파병온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기에는 매우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 가능했던 것도 운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경군이 남방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간 상태라 남은 전력으로는 궁궐 수비도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남은 병력들을 이리저리 재규합하고 왕실도 더 넓어서 방어는 힘들지만 지원 병력을 부르기 쉬운 창덕궁으로 이어했지만, 병력 수가 너무 적다보니 방어를 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 더 문제였던 것은 오-대-기-초-사-부-영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조선의 군 체제로는 서양식 군제를 도입한 일본군에겐 기동력과 반응 속도에서 현저한 열세였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조선군 체제에서 장수들은 병조 공문 없이는 병졸 한 명도 부릴 수 없었는데 이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그래서 경복궁은 함락되고 남은 병력은 도망치면서 남은 군수 물자와 생산 시설을 일본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스스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1차 동학난 때 동학군을 전주성에 몰아넣고 크루프 야포와 마우저 소총을 운용하는 정예 병력들을 통해 전주성을 탈환했던 조선군은 2차 때에 이르면 일본군이 주는 물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125] 관군은 미제 레밍턴 소총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였으며, 일본군 역시 스나이더 소총 혹은 자국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였었다.[126] 전근대 법률로 따져도 사형 권한이 국왕에게만 있기에 함부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중대한 왕권 침해였으며 더군다나 당시에는 갑오개혁 이후 참형이 폐지된 상태였다. 나중에 전봉준 등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음에도 교형 판결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황현은 김개남을 처형한 후 원한이 있던 자들이 그의 내장을 씹어먹고 인육을 제삿상에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127] 동학군의 목적은 이견이 많다. 가장 흔한 학설은 대원군과 연계되어서 대원군 복위와 국왕 교체(고종의 큰 형의 아들인 이준용을 등극하고 고종을 상왕 옹립)를 노렸다는 것이고 고종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이후에 등장한 주장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것. 이 시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고종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재봉기 시 고종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봉기가 미뤄졌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군에게 궐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목적은 당연히 자신의 재집권. 그 과정에서 이재면 즉위도 실제로 대원군이 수 차례 시행한 일이므로 자연스럽게 확률이 높아진다. 전봉준 - 대원군 - 고종을 묶는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대원군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고종과 동학을 모두 이용한 혐의가 된다.[128] 손화중을 포함한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체포된 농민군의 주요 인사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129]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이 먼저 김구 측에 접근하여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청하고 이후 동학이 몰락하자 김구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잘 대우했다고 한다.[130] 논산시, 금산군, 완주군의 경계에 있다.[131] 서양에서 들어온 총기를 이르는 말인데, 그 당시 사용한 총기는 일본군에게 지급받은 신무기인 영국제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였다.[132] 양측 합쳐서 50여 명. 이들은 새벽부터 등산용 사다리와 밧줄 등을 이용하여 험난한 산길을 줄에 의지하여 무려 4시간 반 동안 등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방어가 허술한 뒤쪽 평지에 도착하여 기습에 성공하였다. 당시 일본군 3개 분대는 본국에서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을 사용하고, 심영병들은 1차 공격시 사용한 스나이더를 사용하였다.[출처바람][134] 조선의 예언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135] 실제로 2차 봉기의 목적은 일제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고종을 인질로 잡으니까 고종을 구출하려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1차 봉기에선 정치에 간섭하기 싫어서 참여하지 않았던 북접이 2차 봉기에서는 '왕을 구하려고' 참여한 것이다. 즉 동학 농민 운동은 명백하게 민주주의가 아닌 전제군주제를 긍정하는 입장임을 보여준 것이다.[136] (논문 내 주석)「 隨錄」(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총서』 5, 157~159쪽「; 茂長布告文」『 東學亂記錄』 上(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7), 142~143쪽「; 東學文書」(茂長縣東學布告文)『 총서』 5, 136쪽「; 東匪討錄」(東學輩布告文『) 동학서』, 303~304쪽.[137] (논문 내 주석)동학농민전쟁이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 가운데 하나인 신용하는 <무장포고문>에 대한 분석을 외면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 <포고문>은 농민전쟁 초기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국왕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유교의 언어와 사상으로 粉飾되어 있다는 것이다
[
신용하「, 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 한국학보』 40(서울, 일지사, 1985), 126쪽]
.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농민전쟁 초기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승승장구하던 시기는 물론 농민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농민군이 제시한 글의 대부분은 그러한 “분식된 유교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농민군의 생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138] (논문 내 주석)정창렬「, 갑오농민전쟁연구」(서울,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38쪽; 조경달/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서울, 역사비평사, 2008), 27~28쪽.[139] (논문 내 주석)『 용담유사』에 나오는 ‘개벽’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용담가」(2회,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안심가」(2회, “개벽시 국초일을 만지장서 나리시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1회, “십이제국 괴질 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140] (논문 내 주석)농민전쟁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건 요구조건이나 격문, 통문류에는 동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특이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무장포고문>을 비롯한 농민군의 통문, 격문류는 유교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요구조건이나 통문, 격문에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언어로 점철된 특이한 현상은 지도부나 농민군 대중이 동학을 유교에 대한 재해석 내지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배항섭, 「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유교 이념과의 관련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77(서울, 조선시대사학회, 2016b) 참조).[141] (논문 내 주석)이에 대해서는 배항섭, 「19세기 지배질서의 변화와 정치문화의 변용 -仁政 願望의 향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39(서울, 고려사학회, 2010), 114쪽 참조.[142] (논문 내 주석)농민군의 언행에도 이단적 요소가 있었다. 黃玹에 따르면 동학교도들은 “장차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나는데 앞으로 큰 난이 일어나 동학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로 양민을 속였다고 한다(黃玹, 「梧下記聞」『총서』 1, pp.42-43). 이는 적어도 일부 교도들 가운데는 이단적 그룹이 존재했음을 잘 보여준다.[143] (논문 내 주석)「교훈가」, 『용담유사』[144] (논문 내 주석)“覺來夫子之道則一理之所定也論其惟我之道則大同而小異也”(「수덕문」, 『동경대전』)[145] (논문 내 주석)「안심가」, 『용담유사』[146] (논문 내 주석)「도수가」, 『용담유사』[147]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148]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149] (논문 내 주석)「도덕가」, 『용담유사』[150] (논문 내 주석)「권학가」, 『용담유사』[김탁,2016] 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하/ 김탁 지음/ 북코리아[152] 중국에서는 농민이나 백성의 봉기를 '기의(起義: 의로써 일어남)'라고 칭하는데, 일례로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라고 칭하거나, 왕조 교체기나 혼란기의 농민 봉기 세력을 '기의군(起義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153] 교과서 등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이다.[154] 당시 동학군의 멸칭으로 동비(東匪; 동학+비적)라는 단어도 있었다.[155] 북한에서도 갑오농민폭동이라고 부른다. 다만 북한에서 폭동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편이므로 유의. 일례로 임오군란도 임오군인폭동으로 부르며 '애국적 군인들과 도시 빈민들이 일본 침략자들과 봉건 통치배들을 반대하며 일으킨 대중적 폭동이라 평가한다.[156] 그러나 '봉기' 혹은 '난'이라는 표현이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한다고 볼 순 없다. 태평천국의 난 등의 표현은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하지 않는다.[157] 특히 마르크스주의 및 이에 영향 받은 사관에서 '스파게티맹아론'의 오류를 많이 저지르는데, 이들은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한식에서는 '당연히' 스파게티가 나와야 한다고 전제하고는 "비빔국수는 스파게티로 발전했으니(혹은 발전할 맹아가 있었으니) 자체적 발전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설명하려는 집착을 보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서 주인공은 스파게티이지 비빔국수가 아닌데, 도대체 어딜봐서 비빔국수를 올바르게 평가했다는 것인가?[158] 한국 현대사학계의 주류가 진보 내지 좌파라서 북한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부류도 있지만, 이미 1989년에 이이화 마저도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이라는 명칭을 쓴 사례가 존재한다. #[159] 이두황을 질책하다가 근처의 일본인이 그를 죽였다.[160]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소속이었다. 을미의병 시기 의병장이 되었으나, 홍주성이 함락되자 안면도로 도주한다.[161] 을미사변에 가담했고 아관파천 때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순종 즉위 후 귀국하여 전북관찰사로서 의병들을 살육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도지사가 되었다.[162] 이규태, 이두황, 이진호 모두 우금치 전투 때 관군 지휘관으로 있었는데, 특히 이진호는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교도중대를 이끌고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앞섰다.[163] 이진호는 이후 춘생문 사건 때 정동파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했으나, 이후 배신하였고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다.[164] 김학진과 이용태는 경술국치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박제순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경술국치 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165] 하지만 이 둘은 본관부터 다르다(...)[166] 원문 기사 말미의 정주(井州)시는 기사의 정읍군과 함께 오늘날의 정읍시를 이루는 과거 행정 구역 이름이었다. 1995년에 일제시기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손보면서 도농통합이 이루어지며 정읍시가 되었다.[167]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나무 옆에는 예비군 면대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168] 전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저 감나무에 김대중의 현수막이 걸려있던 것을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모습을 대변"하는 명장면으로 호평하기도 했다.[169]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이 산을 이루었고, 서면 흰 옷이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런 말이 생겼다. 죽산과 백산은 동학 운동이 활발했던 부안과 김제 지역의 면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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