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우리역사넷 - 동학농민운동 - 반침략 반봉건의 최대 민중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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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반침략 반봉건의 최대 민중 항쟁


1894년(고종 31)



정읍 황토현 전적 갑오동학혁명기념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1 역사적 배경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렸던 고종 집권 초기 조선은 각종 사회혼란과 정부권력자들의 무능 그리고 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고부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 이미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고종 31)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고종 31)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민씨 정권이 청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하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조선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났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고종 31)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2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1892년(고종 29)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올라가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조선정부는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한편 1893년(고종 30)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고종 30)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893년(고종 30) 12월부터 1894년(고종 31)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된 이래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는 반면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병학은 오히려 전창혁에게 심한 매질을 가해 버렸고 전창혁은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고종 30)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농민들은 전라북도 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역시 대답을 받지 못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 1894년(고종 31)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동학 남접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인 전봉준이 한때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식객이었던 점도 이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갑오농민전쟁에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 외에 양반 사대부와 지식인층이 가담하고, 불교 승려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타도할 계획을 수립한다. 정치 문제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북접을 제외한 남접과 서포는 모두 부패한 탐관오리와 척신을 싸고도는 왕비를 원수처럼 여겼으므로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 명성황후를 처단하고 이준용을 추대하기로 작심한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던 좁은 의미의 정치혁명이었다.

그해 가을의 제3차 봉기에 대해서는 전봉준 등이 대원군과 협의하여 일으킨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본격적 의병 운동이었다.3 동학농민운동의 봉기 및 전개


1893년(고종 30) 말부터 1894년(고종 31) 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사리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 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 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곧바로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 된다.'며 전봉준을 설득하였다. 농민 운동 거사 직전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김개남 등의 개남국왕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에 가담했다.

 제1차 봉기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고종 31)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첫 전투의 최고 지도자는 전봉준 외에도 남접에는 손화중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서포에는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였다. 무장 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손화중 등 각 접주들이 연합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전투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은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다. 농민군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이는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농민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 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 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한 전라 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 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문제 삼았다. 행동 강령 속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앤다.',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양반들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 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 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해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있었고, 또한 나주 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선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 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4천 년간 중국의 반 속국으로 존재했던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왕비 민씨는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한다. 또 1884년(고종 21)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파견시킨다.

이때 안경수, 민영준은 청일간의 외교 교섭을 통한 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 민씨 정권은 일본과 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한 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들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충청도의 노론 위정척사파 계열 양반들과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은 자체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동학군과 교전을 벌였다.

 제3차 봉기

1894년(고종 31)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이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 항쟁한다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농민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보운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4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핵심성격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교도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 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다.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농민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었다.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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