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옛 선비 33인이 쓴 문학과 예술론
| 겨레고전문학선집 13
김시습,김려,김정희,박제가,박지원,서거정,성현,신흠,유몽인,이규보,이덕무,이익,이인로,이제현,임춘,정약용,최자,허균,홍대용,홍양호,김만중,신재효,홍석주,김창협,이수광,조수삼,최행귀 (지은이),류수,리철화 (옮긴이)보리200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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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479쪽
152*223mm (A5신)
862g
ISBN : 9788984282339
주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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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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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 가사집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시조집
타박타박 타박네야 -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노래
청산에 살어리랏다 - 겨레의 노래, 삶의 노래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 살맛나는 세상, 신명나는 노래
책소개
향가의 탁월함을 주장한 최행귀에서부터 판소리 광대의 미학 세계를 밝힌 신재효까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옛 작가 33인이 쓴 글 중에서 문학론, 음악론, 미술론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들을 가려 뽑아 엮었다. 옛 우리 고전들을 모아 출간하고 있는 '거례고전문학선집'의 열세번째 책으로, 시리즈의 시문집 분야를 마무리하는 책이기도 하다.
내용이 중요한가, 형식이 중요한가? 예술이 세상의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더 소중한가? 어떤 시가 훌륭한가, 시를 이해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등등 예술을 둘러싼 본질적인 질문들이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작품 비평, 메타 비평, 미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견해까지 아우르는 글들을 통해, 중화 문화권 안에서 민중 예술과 자국어 문학에 대한 자각으로 당대 조선의 개성 있는 문학과 예술을 실현시키고자 한 문인들의 의지 또한 읽어낼 수 있다.
목차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과 같아 눈이 있는 자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시를 짓기는 어렵지 않으나 시를 알기는 어렵다
시가 생활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궁하기 때문에 그의 시가 이러한 것이다
참다운 시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
새매의 눈으로 시대를 노래하라
부록
- 고전 작가들의 미학 사상에 대하여 /신구현
- 원문
- 찾아보기
책속에서
자기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본문 278쪽 '몇 백 번 싸워 승리한 글(박지원)' 중에서 접기
민간 예술의 떠오름
오직 입에서 부르는 대로 곡조를 이루었어도 사연은 마음 그대로 우러나온 것이고 꾸미지 않고도 진실한 내용이 흘러나왔다면 초동과 농부가 부르는 노래라도 자기 심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도리어 사대부들이 고루한 형식에 매달려서 글자만 옛것대로 꾸며 놓아 시가의 본뜻에서 어긋난 것보다는 낫다.
그러므로 노래를 진실로 잘 아는 자는 누가 부르는지에 매이지 않고 노래에 담긴 뜻을 잘 헤아리니, 풍요가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켜 백성을 고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뜻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다른 사물에 비유하거나 딴 말을 빌려 오는 뜻과, 그릇된 현실을 근심하고 진실한 옛것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혹시 어진 선비들의 입에서 불린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담길 것이다. ― 본문 221~222쪽 '<대동풍요>를 펴내며(홍대용)' 중에서 접기
말똥구리는 둥그런 제 말똥덩이를 대견히 여겨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용도 또한 자기의 구슬로 말똥구리의 말똥덩이를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255)
- 박지원, `낭환집에 부쳐`, 《연암집》 - 돌궐
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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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친가 외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다. 외가에서 자라면서 말을 배울 무렵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살 때 “난간 앞에 꽃 웃으나 소리 아니 들리고, 숲 아래 새 울지만 눈물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 구절을 듣고는 병풍의 꽃과 새를 가리켰다거나, 다섯 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許稠, 1369∼1439)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지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여럿 전해 온다. 소년의 천재성은 궁궐 안에까지 들려왔고, 세종은 그를 불러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내성적이며 부끄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과거엔 실패했고 집안은 빈한했다. 유년기의 충만감은 일순 공허감으로 뒤바뀌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곧 재취했다. 평생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18세 즈음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단종의 선위와 세조의 즉위(1455),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사육신 등의 죽음(1456), 단종의 죽음(1457) 등 정치적 격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여러 문헌에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8년, 24세의 김시습은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서른 살 무렵에 경주에 안착한다.
37세(1471)에 경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이듬해 수락산 동쪽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외부 활동과 교유를 자제하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주요 불교 저술을 지었다. 이 시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남효온(1454∼1492)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생육신으로 묶어 일컬었다. 47세에는 잠시 환속해 다시 결혼하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잠시 공부와 시작(詩作)의 방향이 유교로 급격하게 쏠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지 만 10년이 되는 1483년 봄,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남효온이 지은 시에 따르면, 김시습은 육경(六經)과 역사서 등을 싣고 관동의 산수를 돌아다니다가 농토를 얻어 생계를 꾸릴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이후 10년 그의 발걸음은 춘천, 홍천, 인제, 양양, 강릉 등지를 지났다. 오봉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에 머물렀다. 바닷가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 갔다.
1493년, 죽음을 직감한 코끼리가 깊은 동굴을 찾아들 듯이, 이승을 떠날 때가 된 김시습은 백제로 향했다. 무량사(無量寺), 지금은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절집에서 그는 평생 방랑에 지친 영혼을 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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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금오신화·화왕계(외)>,<금오신화>,<금오신화 - 하> … 총 136종 (모두보기)
김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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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담정(藫庭)이다. 1797년 겨울 강이천의 비어사건에 휘말려 함경북도 북동부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시 천주교도와 친분을 맺은 혐의로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당한 후 1801년 4월 우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동시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 선생(1758~1816)이 실학자적 관점에서 1814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면 담정은 감수성 넘치는 시인의 시각으로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최근작 : <담정총서 - 전6권>,<유배객, 세상을 알다>,<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총 8종 (모두보기)
김정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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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접기
최근작 : <김정희 외 4인의 한시 24수>,<완당 서법>,<추사 김정희 서첩> … 총 19종 (모두보기)
박제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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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로,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규장각을 세우자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이 되었다.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검서관으로 봉직하며 국왕의 저술과 언론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고, 세 번 더 북경을 여행하여 많은 중국 관료나 학자와 교유했다. 1800년 정조의 사망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고, 1801년 윤가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저서로 『북학의』와 『정유집』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북학의>,<궁핍한 날의 벗>,<무예도보통지 부 언해> … 총 27종 (모두보기)
박지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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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학자이며 호는 연암(燕巖), 자는 중미(仲美), 시호는 문도공이다. 16세에 처삼촌인 영목당 이양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으며, 30대에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박제가·이서구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홍대용·유득공 등과는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고 함께 서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1765년 과거에 낙방하자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팔촌 형인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가서 청나라 문물을 두루 살피고 왔다. 이연행(燕行)을계기로하여충(忠)·효(孝)·열(烈) 등과 같은 인륜적인 것이 지배적이던 전통적 조선 사회의 가치 체계로부터 실학, 즉 이용후생의 물질적인 면으로 가치 체계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다. 그때 보고 듣고 한것을 기행문체로 기술한 <열하일기> 26권을남겼는데, 여기에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주옥같은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그는 서학에도 관심을 가져 자연과학적 지식의 문집으로 <연암집>이 있고, 저서로는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이 전하며 연행 뒤 <열하일기>를 지어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86년 음사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늦게 관직에 들어서서 사복시주부 · 한성부판관 · 면천군수 등을 거쳐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문장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정아한 이현보의 문장과 웅혼한 그의 문장은 조선 시대 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희화(戱畵)·풍자(諷刺)의 수법과 수필체의 문장들은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호질>, <민옹전>, <광문자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과농소초>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접기
최근작 : <연암집 - 전6권>,<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허생전 / 양반전>,<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한국 고전 소설> … 총 209종 (모두보기)
서거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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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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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사가 서거정 시선>,<고금소총>,<필원잡기> … 총 21종 (모두보기)
성현 (成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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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齋)·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다.1462년(세조 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을 지냈다.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주고받아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허백당집≫, ≪풍아록≫, ≪부휴자 담론≫,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큰글씨책] 원서발췌 허백당집>,<원서발췌 허백당집>,<허백당시집> … 총 33종 (모두보기)
신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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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162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성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 비주류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만물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관점을 지녀 다양한 색깔의 글을 남긴바, 그의 글은 주제가 호한하면서도 자유롭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 준다. 호는 상촌이며,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최근작 : <교감 국역 청창연담>,<시조, 서정시로 새기다>,<우리고전 100선 1차분 세트 - 전10권> … 총 12종 (모두보기)
유몽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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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아들 '약' 과 함께 처형당했다가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 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 <어우집>이 있으며, 야담집 <어우야담>은 수필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최근작 : <한국 산문선 1~10 세트 - 전10권>,<어우야담 3>,<어우야담 2> … 총 26종 (모두보기)
이규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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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백운 이규보 시선>,<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 … 총 50종 (모두보기)
이덕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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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얼 출신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菴)·청장관(靑莊館)·아정(雅亭) 외 다수가 있다. 박지원·박제가 등과 교유했던, 연암 일파의 일원이다. 규장각 초대 검서관과 적성현감 등을 지냈다. 저서로 71권 32책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최근작 : <청장관 이덕무 시선>,<책에 미친 바보>,<세 살 적 배움, 평생을 이끈다> … 총 49종 (모두보기)
이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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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갑술환국 이후 유배된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26세이던 1706년 둘째 형 이잠(李潛)이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받는 도중 숨지자 안산(安山)의 성호장(星湖莊)에 은거하며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으나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진 근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였다. 주요 저서로 문집인 『성호전집』 외에 『성호사설』, 『곽우록』, 『사칠신편』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소학질서>,<성호집>,<성호 이익의 심경질서> … 총 20종 (모두보기)
이인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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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접기
최근작 : <역주 파한집>,<중학생이 보는 파한집>,<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총 9종 (모두보기)
이제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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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翁)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翁稗說)≫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접기
최근작 : <이제현 사집>,<역옹패설>,<역주 역옹패설> … 총 16종 (모두보기)
임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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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접기
최근작 : <서하집>,<우리 고전 소설>,<서하집> … 총 12종 (모두보기)
정약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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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목민심서>,<다산 정약용의 중용>,<간추린 목민심서> … 총 255종 (모두보기)
최자 (崔滋)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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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明宗) 18년(1188)에 태어나서 원종 1년(1260)에 세상을 떠난 학자이자 관료요 시인이다. 최자의 첫 이름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이고,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다. 본관은 해주(海州)로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의 후손이며,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최자는 대내적으로는 고려 왕조가 혼미를 거듭하고 무신 정권이 전횡을 부리던 시기,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7차 침입(1231∼1258)이 있었던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다. 명문 집안 출신으로 이규보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이런 인연으로 최자의 문학은 이규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특히 최자는 이규보의 ‘창출신의(創出新意)’의 창조적 문학론에 뜻을 같이했던바, ≪보한집≫에서 자주 이규보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렇듯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는 최자는 한국 문학사상 이인로와 함께 문학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별히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무엇보다 한시 비평에 해당하는 시화류 ≪보한집≫을 남긴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저명한 대학자인 최충의 후손으로서 관직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이 되기도 했다. 최자의 가문은 최충 이후로 세 명의 장원(壯元)과 세 명의 상국(相國), 네 명의 공신을 배출한 명문 귀족으로, 최자 또한 ≪보한집≫에 증조부 최약(崔?)이 유배를 가면서 남겨 놓은 시 <출수춘주화인증별(出守春州和人贈別)>을 실은 것으로 보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문인·학자들의 문집을 두루 섭렵하지 않고서는 ≪보한집≫에 나타나고 있는 그 시대의 사회 상황과 문학적 성격을 바르게 진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자는 독서량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풍부한 독서량과 깊이 있는 시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최자는 ≪보한집≫을 통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인들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며, 창조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가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 분석했다. 접기
최근작 : <보한집>,<역주 보한집>,<보한집> … 총 14종 (모두보기)
허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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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승지였던 허엽(許曄)의 3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에게 학문을 배우고, 둘째 형 허봉의 친구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1585년(17세) 봄에 한성부에서 치른 초시에 급제하고 1589년(21세)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1594년(26세) 2월 29일, 정시(庭試) 문과 을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서 벼슬하고, 중국어 시험에 연이어 1등을 차지해 5월 3일 요동을 다녀왔다. 1613년 일어난 ‘칠서의 난’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이첨에게 의탁했으며, 인목 대비의 폐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칠서의 난 이후로 허균이 꾸준히 역모를 꾀했다는 상소가 잇따라 올라오고, 마침내 1618년 8월 17일 하옥되어 24일 급히 처형되었다. 문집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藁)≫가 있으며 작품으로 ≪홍길동전(洪吉童傳)≫, ≪한정록(閑情錄)≫ 등을 남겼다. 누이 허난설헌과 작은형 허봉의 사후, 이들의 문집 ≪난설헌집≫과 ≪하곡집≫을 각각 엮었으며, 중국 사신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주어 중국에서 유통되게 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홍길동전·전우치전·임진록>,<[큰글자책] 허균 척독>,<허균 척독> … 총 108종 (모두보기)
홍대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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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주창한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를 보장받는 가문 출신이지만,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2세에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 아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의 일생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사건은 중국 연행이다. 1765년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불멸의 명저 『의산문답』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후 쓴 책이다. 40대에 들어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고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7개월 동안 세자익위사에서 근무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계방일기』라는 글을 남겼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홍대용은 1783년 10월 2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꼭 52년하고도 7개월 남짓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홍지弘之라 했고, 자는 덕보德保, 당호로는 담헌湛軒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문집은 『담헌서湛軒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접기
최근작 : <의산문답·계방일기>,<주해 을병연행록 2>,<주해 을병연행록 1> … 총 31종 (모두보기)
홍양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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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錥)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접기
최근작 : <이계집 14>,<이계집 13>,<이계집 7> … 총 22종 (모두보기)
김만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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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문학가이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65년(현종 6)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수찬을 역임하였고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민정을 살폈으며, 1675년(숙종 1) 관작이 삭탈되기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공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 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 14) 풀려났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구운몽》을 쓴 뒤 병사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고, 유복자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국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알려진 작품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뿐이다. 《구운몽》은 전문을 한글로 집필한 소설 문학의 선구로 꼽힌다. 특히 그 구성은 선계(仙界)와 현실계(現實界)의 이중 구성을 택하였고, 불교적인 인생관을 형상화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사씨남정기·서포만필>,<구운몽>,<구운몽> … 총 168종 (모두보기)
신재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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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가 동리(桐里)로, 순조 11년(1812) 11월 6일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73세 되던 고종 21년(1884) 태어난 날과 같은 11월 6일, 그 삶을 마감하기까지 격동적인 시대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치성을 드려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었으니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는데,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신재효는 고창현의 이방에 이어 호장까지 오른 뒤 오랜 공무에서 벗어났는데, 치산(治産)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을 기반으로 40대 전후에 이미 곡식 1000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은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졸부가 아니었다. 병자년(1876)의 대흉년에는 아끼면서 모은 재산을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또한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했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00냥을 헌납했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기도 했다.
신재효는 축적된 부와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애호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판소리와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해 우리에게 전했다는 점이다. 판소리 열두 작품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정리 개작했는데, <춘향가>의 경우는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의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또한 <오섬가>의 창작을 통해 판소리에 ‘옴니버스(omnibus)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그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엮어질 것 같지 않은 춘향의 이야기, 배 비장의 이야기, 그리고 강릉 매화의 이야기 등을 한 주제에 의해 통합함으로써 판소리의 한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허두가>, <호남가>, <광대가>, <치산가>와 같은 많은 가사도 지었다. 신재효가 지은 가사는 그의 기질과 사업, 그리고 지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에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 중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판소리 연창자에 대한 지원이 대단히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그는 판소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안목으로 지속적이고도 계획적인 판소리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이 나타남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신재효의 가사>,<[큰글씨책] 신재효의 가사>,<[큰글씨책] 한국 판소리 전집 > … 총 13종 (모두보기)
홍석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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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50년(1774)에 태어나 현종 8년(1842)에 숨졌다. 22세(정조 19)에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에 제수되면서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42세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58세에는 사은사의 정사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61세(순조 34)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63세(현종 2)때는 남응중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삭출되었다가 66세에 대왕대비의 특지로 방석되었다. 그후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 장단의 모사와 양주의 광진으로 은거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속사략익전>, <예기집설지의>, <학강산필>, <초계고식>, <대역상전>, <명사관견>, <속명사관견>, <독역잡기>, <휘사소찬>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홍석주의 노자> … 총 4종 (모두보기)
김창협 (金昌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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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은 물론이요, 문학, 서화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 비록 행공(行公)은 하지 않았지만 대제학에 뽑힌 인물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동음거사(洞陰居士)·한벽주인(寒碧主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부친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형 김창집, 동생 김창흡·김창업·김창집·김창립 모두가 서화에 능했던 것으로 전한다.
최근작 : <팔대가문십선>,<조선후기 한문비평 1>,<한국 산문선 5> … 총 11종 (모두보기)
이수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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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하룻밤에 읽는 소설 서동요>,<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 총 5종 (모두보기)
조수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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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삼의 호는 추재(秋齋)와 경원(經畹)이며,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趙重黙)이 화원(畵員)이었다는 사실과, 과거의 시험과목이었던 공령시(功令詩)에 뛰어나《추재집》권7에 공령시가 59편이나 전할 정도로 이름났던 그가 정작 자신은 83세나 되어서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실을 보아서, 아마도 그가 중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그는 1789년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중국에 다녀오기 시작하여, 여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는 여섯 차례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 많은 기행시를 짓기도 했거니와, 난설(蘭雪) 오숭량(吳崇梁)이나 유희해(劉喜海) 등의 많은 시인들과 사귀며 견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차례 국내를 여행하며 많은 기행시를 남겼는데,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다루어 장편시를 지었으며, 함경도에서는〈북행 백절(北行百絶)〉을 지었다. 강명관은 그의 석사논문〈추재 조수삼 문학연구〉에서《풍요삼선》에 실린 그의 시 23편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홍경래의 난 이후에 지어진 시가 21편이나 된다는 점을 들어서 후기의 시가 더욱 평가받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문에 그의 시가 변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평안도에서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1812년 4월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평정되었다. 그는 이즈음에 마침 평안도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1812년 7월에 정주 현감의 초청을 받고 정주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 방문길에 홍경래의 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서구도올(西寇檮杌)〉이라는 장편의 시를 쓰게 되었다. “도올”이란 원래 악(惡)을 기록하여 경계로 삼는 나무인데, 초나라에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역사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조수삼은 홍경래를 “서쪽의 도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죄악을 기록하려고 이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창작 동기는 이 시의 서(序)에 잘 나타나 있다.
<북행 백절>에는 이밖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은광을 찾아가거나 밀무역을 하는 민중들을 그리면서, 양반 위주의 여러 제도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처절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이(紀異)〉에서 발견되는 것도 서민적인 덕성이며, 조수삼 자신이 이러한 덕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 <추재 조수삼의 생애와 시>에서 접기
최근작 : <추재 조수삼 시선>,<추재기이>,<추재기이> … 총 6종 (모두보기)
최행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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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류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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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리철화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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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이인로(지은이)의 말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아서, 구름이 허공에서 흩어지거나 모이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으며,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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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인데, 드디어 손에 쥐었습니다. 생각보다는 얇네요^^
주머니쥐 2009-10-07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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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도가 아주 뛰어나다. 해설이 없어 아쉽지만 선록 자체가 이미 많은 말을 하네.
바람의전설 2011-08-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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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문학관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그 거창한 제목으로 이 책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선조들이 썼던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 그리고 문학관을 논한 곳을 따로 모아논 것이다.
보리 출판사에서 내놓는 책들은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다. 원문도 실려 있으며 주석까지 달려 있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족처럼 보이는 평론이 없어서 책의 두께만큼 더 많은 문장들을 공부할 수 있다.
한문을 전공하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다소 어려울만한 책이다. 우리 선조들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책을 집어든다면 읽어도 머리에 남는 건 없을 것이다. 한문학사에 대한 지식이 있고, 우리 문학에 대한 기본 이해가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할 것이다. 덩달아 한문 원문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한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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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7-05-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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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고전문학선집.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
겨레고전문학선집.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자들이 번역한 조선의 문학책을 남조선(대한민국)의 보리출판사에서 펴낸책
전 39 권중 18 권 소장.
책 표지 하나하나가 겨레고전문학선집 답다.
소장욕이 마구마구. 백프로 다 읽은 책은 한권도 없다.ㅠㅠ
아주 오래전 리브로에서 50프로 할인할때 사모았다
나머지 책도 사야되는데
제목이 끝내준다. 인문학 냄새가 풀풀
˝폭포는 돼지가 다 먹었지요˝
˝거문고에 귀신이 붙었다고 야단˝
폼내기 딱 좋은 책
책소개는 이 시리즈 머리말로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우리 겨레가 갈라진 지 반백년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산세월은 수천, 수만 년입니다. 겨레가 다시 함께 살 그날을 위해,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부터 우리 겨레가 즐겨 온 노래와 시, 일기, 문집 들은 지난 삶의 알맹이들이 잘 갈무리된 보물단지입니다.
그동안 남과 북 양쪽에서 고전 문학을 되살리려고 줄곧 애써 왔으나, 이제껏 북녘 성과들은 남녘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습니다. 북녘에서는 오래 전부터 우리 고전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왔고 연구와 출판도 활발히 해 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고전문학선집>은북녘이 이루어 놓은 학문 연구와 출판의 큰 성과입니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가요, 가사, 한시, 패설, 소설, 기행문, 민간극, 개인 문집 들을 100권으로 묶어 내어,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일반 대중 모두 보게 한 뜻깊은 책들입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현대문으로 옮기거나 옛글을 오늘의 것으로 바꾼 성과도 놀랍고 작품을 고른 눈도 참 좋습니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남녘에도 잘 알려진 홍기문, 리상호, 김하명, 김찬순, 오희복, 김상훈, 권택무 같은 뛰어난 학자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성과를1983년부터 펴내기 시작하여 지금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보리 출판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예 출판사가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이란 이름으로 다시 펴내면서, 북녘학자와 편집진의 뜻을 존중하여 크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남과 북의 표기법이 얼마쯤 차이가 있어 남녘 사람들이 읽기 쉽게 조금씩 손질했습니다.
이 선집이, 겨레가 하나 되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 후손들이 민족 문화유산의 알맹이인 고전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고 이어받는 징검다리가 되기 바랍니다. 아울러 남과 북의 학자들이 자유롭게오고 가면서 남북 학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기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 선집을 펴내 왔고지금도 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북녘의 학자와 출판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04년 11월 15일보리 출판사 대표 정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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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2021-09-28 공감 (33)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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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글쓰기 특강
자기 전에 읽는 책에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도 포함시켜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조금 전에 잠깐 박지원 글을 읽다가 빨려들듯이 그의 글들(228-291쪽)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고 내처 초록 작성까지 마쳤다.
박지원 선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핵심적인 조언을 들은 기분이다. 아래에 몇 줄 옮겨 본다.
글이란 것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놓고 붓을 잡은 다음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고전의 사연을 찾으려 뜻을 근엄하게 꾸미고 글자마다 장중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화가를 불러서 초상을 그릴 적에 용모를 고치고 나서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구르지 않고 옷은 주름살이 잡히지 않아서 보통 때의 모습과 달라지고 보니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진실한 모습을 그려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인들 또한 무엇이 다르랴?
말은 큰 것만 해서 맛이 아니다. 한 푼, 한 리釐, 한 호毫만 한 일도 다 말할 수 있다. 기왓장이나 조약돌이라고 해서 내버릴 것이 무엇이냐? 그렇기 때문에 초나라의 역사는 도올이란 모진 짐승의 이름을 빌려서 썼고, 사마천이나 반고와 같은 역사가도 사람을 죽이고 무덤을 파헤치는 흉악한 도적놈들의 사적을 서술하였다. 글을 짓는 데는 오직 진실해야 할 뿐이다. (243)
- 공작관문고 머리말, 《연암집》
비록 조금난 재주라도 모든 것을 잊고 덤벼야 성공할 수 있다. 더구나 도처럼 큰 것에서랴.
최흥효는 나라에서 이름난 명필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서 글을 쓰다가 그중 한 글자가 신묘함을 얻자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 글을 바치지 못하고 품에 품은 채 돌아왔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일쯤은 이롭고 해로움을 전연 마음속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징이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그를 찾아 사흘 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아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볼기를 쳤더니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지고 새를 그리고 있었다.
학산수는 나라에 이름난 명창이다. 산속에 들어가서 노래 공부를 할 적에 한 곡조를 부르고는 나막신 속에 모래 한 알씩을 던져서 그 나막신이 모래로 가득 찬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도적을 만나서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들도 모두 심회가 울적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죽음과 삶을 마음속에 두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264-265)
- 형언도필첩에 부쳐, 《연암집》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전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글자는 말하자면 군사요, 사상-감정[意]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요, 옛일이나 옛이야기는 전장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로 만들고 구를 합해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과 같으며, 성운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로 빛을 내는 것은 북, 종, 깃발 같은 것이다.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에 해당하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 부대에 해당하고, 억양 반복이라는 것은 백병전과 육박전에 해당하고, 제목을 끌어내고 결속을 짓는다는 것은 적진에 먼저 뛰어들어 적을 생포하는 데 해당하고, 함축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은 적의 늙고 쇠한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데 해당하고, 여운이 있게 한다는 것은 기세를 떨쳐 개선하는 데 해당한다.
대체 장평 땅의 군사가 날래고 비겁한 것이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아니요, 활이나 창도 날카롭고 무딘 것이 전날보다 변한 것이 아니건만, 염파가 거느리고 나서서는 승전하다가 조괄로 바뀌고서는 몰사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떼내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는 쓰지 못할 글자가 없다. 만약에 적당한 장수만 얻는다면 호미, 곰방메 따위 농기구 빈 자루만 가지고도 무서운 무기로 쓸 수 있고, 옷자락을 찢어서 작대기 끝에 달아도 훌륭한 깃발로 된다. 또 만약에 일정한 이치에만 들어맞는다면 식구끼리 나누는 이야기도 학교의 한 과정으로 넣을 수 있고, 아이들 노래와 속담도 고전 문헌과 대등하게 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 글자의 탓은 아니다.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용감치 못한 장수가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적의 굳은 성벽에 부닥친 것이나 마찬가지로 글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글 제목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산 위의 풀과 나무까지 적병으로 보이는 바람에 붓과 먹이 다 결딴난다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것조차 이렇게 상하고 저렇게 패해서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군대가 한번 제 길을 잃어버리는 때에는 최후의 운명을 면치 못하며, 아무리 물샐틈없이 포위한 때라도 적이 도망칠 틈은 없지 않은 것과 같다. 한마디 말을 가지고도 요점만 꽉 잡으면 마치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쳐들어가는 것이요, 반쪽의 말을 가지고도 요지를 능히 표시하면 그것은 마치 적의 힘이 다할 때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그 진지를 함락시키는 것이다. 글 짓는 묘리는 바로 이것이 최상이다. (275-277)
-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연암집》
<호질>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연암의 문장은 폐부를 찌르는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혜안과 비유가 곳곳에서 나온다. 게다가 어떤 글은 왜 이렇게 비실비실 웃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언젠가는 <연암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똥구리는 둥그런 제 말똥덩이를 대견히 여겨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용도 또한 자기의 구슬로 말똥구리의 말똥덩이를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255)
- 박지원, `낭환집에 부쳐`,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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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6-07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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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못된 詩 - 이규보
다음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시는 사상[意]이 기본이다. 때문에 구상이 어렵고 언어 묘사는 둘째로 된다. 구상은 또한 그 사람 기백이 높고 낮은 데 따라 깊고 얕은 것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기백이란 바탕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백이 낮은 자는 시구를 다듬어 맞추는 데만 힘쓰고 시상을 앞세우지 못한다. 이렇게 지은 작품은 조각한 듯한 문장과 그려 낸 듯한 시구가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깊고 함축된 시상이 없으면 처음 보기에는 잘된 듯하나 다시 음미하면 아무런 맛도 없어지고 만다. (28)
시에는 아홉 가지 좋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하여 깨달은 것이다.
시 한 편에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인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히 실은 체[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구상을 훔쳐쓰는데 도적질을 능숙하게 했다 해도 옳지 않거니와 그 도적질조차 서투르게 한 것은 서투른 도적이 쉽게 잡히는 체[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요,
어려운 운을 근거 없이 억지로 단 것은 큰 활을 잘 당기지도 못하는 체[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운을 달아 운이 고르지 못한 것은 술을 지나치게 취하도록 마신 체[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어려운 말을 즐겨 써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 놓고 소경을 인도하는 체[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남의 글을 인용하여 말이 순하지 못한데도 애써 인용하는 것은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체[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세련되지 못한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촌 늙은이들의 이야기 체[촌부회담체村父會談體]요,
꺼려야 할 문구를 함부로 쓰는 것은 존경할 사람을 업신여기는 체[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시구를 다듬지 않는 것은 밭에 가라지가 가득히 우거진 체[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런 좋지 않은 체들을 극복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누가 자기 시의 결함을 지적하거든 받아들일 만한가를 살펴야 한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내 주장대로 할 것이니, 구태여 듣기부터 싫어하여 마치 임금이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제 허물을 고치지 못하듯이 하겠는가.
시를 쓴 뒤에는 보고 다시 보되 자기가 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아야 하며, 남의 것처럼 보되 평생 매우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생각하고 결점을 찾기에 노력하여 결점을 찾을 수 없이 된 뒤에 발표해야 한다. 이것은 다만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산문도 그러하다. 古詩처럼 유려한 문장으로 구절을 조직하고 운을 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우선 시상이 넉넉하면 시어도 자유로워 거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거나 산문이거나 그 법은 한 가지인가 한다. (29-30)
- ‘시상의 미묘함을 논한다[論詩中微旨略言]’에서, 《동국이상국집》
가만히 보니 내가 쓰는 글은 대체로 (잡문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만노불승체, 음주과량체, 촌부회담체, 낭유만전체가 많은 것 같다.
'수레에 귀신이 가득찬' 재귀영거체는 내 견문과 학식이 부족하여 쓰고 싶어도 못 쓰는 문체이고, 졸도이금체와 설갱도맹체, 강인종기체는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쓰고 싶지 않은 문체이다.
아무튼 이규보 다른 글들을 읽어보니 비평 정신이 탁월했던 사람이더라. 기회가 되면 몇 권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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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6-16 공감 (1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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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 북을 주자
변지의 군이 천 리 길을 걸어서 나를 찾아왔기에 그 뜻을 물어보니 문장 공부를 해 보겠다고 하였다.
마침 이날 우리 집 아이가 나무를 심기에 나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사람에게 문장이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을 때 우선 뿌리에 북을 주고 줄거리를 바로 세워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면 거기에서 꽃이 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를 잘 가꾸지도 않고 꽃만 보려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나무뿌리를 북돋우듯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줄거리를 바로 세우듯 자기 몸을 수양하고, 진액이 통하듯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듯 학식을 넓히고 기교를 연마하여 마음속에 든든하게 쌓은 다음에 마음에 품은 것을 표현하면 곧 글이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보고 훌륭한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문장이다. 문장의 길만을 따로 떼어서 성급하게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 돌아가서 탐구해 보면 자신에게도 훌륭한 스승이 있을 것이다."
- '변지의에게 주는 말[爲陽德人邊知意贈言]'에서, 『여유당전서』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 330-331쪽에 나오는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다.
가만히 따져 보니 나는 아직 진액도 제대로 안 통하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뿌리에 북을 줘야' 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을 준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흙으로 뿌리를 덮어준다'는 뜻이었다.
과연, 뿌리가 흙 속에 있지 못하고 허공에 드러나 있으면 양분을 제대로 흡수할 수가 없겠지.
땅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진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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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5-2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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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겨레고전문학선집
도서출판 보리에서 나온 겨레고전문학선집. 30권 넘게 나왔다. 몇 권까지 나오려나. (찾아보니 북에선 60권 넘게 나왔다는군. 꽥!) 이 책들을 사려면 책장에 자리부터 만들어야겠다.
제목을 풀어 쓰니 전혀 다른 책 같다. 북한에서 번역한 책은 우리말을 잘 살려 쓰서 이해하기가 쉽다. 읽으면 바로바로 뜻이 들어온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 잘 없다. 내가 살 때까지는 절판되면 안 되는데. 책 높이가 같으면 다 사가지고 방에 깔고 침대 만들어 자도 되겠다. 하지만 높이가 달라.
보리 출판사 - 겨레고전문학선집 목록 보러 가기
김시습,김려,김정희,박제가,박지원,서거정,성현,신흠,유몽인,이규보,이덕무,이익,이인로,이제현,임춘,정약용,최자,허균,홍대용,홍양호,김만중,신재효,홍석주,김창협,이수광,조수삼,최행귀 (지은이),류수,리철화 (옮긴이)보리200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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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479쪽
152*223mm (A5신)
862g
ISBN : 978898428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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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겨레고전문학선집 (총 34권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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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 가사집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시조집
타박타박 타박네야 -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노래
청산에 살어리랏다 - 겨레의 노래, 삶의 노래
옹헤야 어절씨구 옹헤야 - 살맛나는 세상, 신명나는 노래
책소개
향가의 탁월함을 주장한 최행귀에서부터 판소리 광대의 미학 세계를 밝힌 신재효까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옛 작가 33인이 쓴 글 중에서 문학론, 음악론, 미술론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들을 가려 뽑아 엮었다. 옛 우리 고전들을 모아 출간하고 있는 '거례고전문학선집'의 열세번째 책으로, 시리즈의 시문집 분야를 마무리하는 책이기도 하다.
내용이 중요한가, 형식이 중요한가? 예술이 세상의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더 소중한가? 어떤 시가 훌륭한가, 시를 이해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등등 예술을 둘러싼 본질적인 질문들이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작품 비평, 메타 비평, 미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견해까지 아우르는 글들을 통해, 중화 문화권 안에서 민중 예술과 자국어 문학에 대한 자각으로 당대 조선의 개성 있는 문학과 예술을 실현시키고자 한 문인들의 의지 또한 읽어낼 수 있다.
목차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과 같아 눈이 있는 자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시를 짓기는 어렵지 않으나 시를 알기는 어렵다
시가 생활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궁하기 때문에 그의 시가 이러한 것이다
참다운 시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
새매의 눈으로 시대를 노래하라
부록
- 고전 작가들의 미학 사상에 대하여 /신구현
- 원문
- 찾아보기
책속에서
자기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본문 278쪽 '몇 백 번 싸워 승리한 글(박지원)' 중에서 접기
민간 예술의 떠오름
오직 입에서 부르는 대로 곡조를 이루었어도 사연은 마음 그대로 우러나온 것이고 꾸미지 않고도 진실한 내용이 흘러나왔다면 초동과 농부가 부르는 노래라도 자기 심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도리어 사대부들이 고루한 형식에 매달려서 글자만 옛것대로 꾸며 놓아 시가의 본뜻에서 어긋난 것보다는 낫다.
그러므로 노래를 진실로 잘 아는 자는 누가 부르는지에 매이지 않고 노래에 담긴 뜻을 잘 헤아리니, 풍요가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켜 백성을 고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뜻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다른 사물에 비유하거나 딴 말을 빌려 오는 뜻과, 그릇된 현실을 근심하고 진실한 옛것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혹시 어진 선비들의 입에서 불린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담길 것이다. ― 본문 221~222쪽 '<대동풍요>를 펴내며(홍대용)' 중에서 접기
말똥구리는 둥그런 제 말똥덩이를 대견히 여겨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용도 또한 자기의 구슬로 말똥구리의 말똥덩이를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255)
- 박지원, `낭환집에 부쳐`, 《연암집》 - 돌궐
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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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친가 외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다. 외가에서 자라면서 말을 배울 무렵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살 때 “난간 앞에 꽃 웃으나 소리 아니 들리고, 숲 아래 새 울지만 눈물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 구절을 듣고는 병풍의 꽃과 새를 가리켰다거나, 다섯 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許稠, 1369∼1439)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지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여럿 전해 온다. 소년의 천재성은 궁궐 안에까지 들려왔고, 세종은 그를 불러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내성적이며 부끄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과거엔 실패했고 집안은 빈한했다. 유년기의 충만감은 일순 공허감으로 뒤바뀌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곧 재취했다. 평생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18세 즈음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단종의 선위와 세조의 즉위(1455),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사육신 등의 죽음(1456), 단종의 죽음(1457) 등 정치적 격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여러 문헌에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8년, 24세의 김시습은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서른 살 무렵에 경주에 안착한다.
37세(1471)에 경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이듬해 수락산 동쪽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외부 활동과 교유를 자제하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주요 불교 저술을 지었다. 이 시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남효온(1454∼1492)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생육신으로 묶어 일컬었다. 47세에는 잠시 환속해 다시 결혼하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잠시 공부와 시작(詩作)의 방향이 유교로 급격하게 쏠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지 만 10년이 되는 1483년 봄,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남효온이 지은 시에 따르면, 김시습은 육경(六經)과 역사서 등을 싣고 관동의 산수를 돌아다니다가 농토를 얻어 생계를 꾸릴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이후 10년 그의 발걸음은 춘천, 홍천, 인제, 양양, 강릉 등지를 지났다. 오봉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에 머물렀다. 바닷가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 갔다.
1493년, 죽음을 직감한 코끼리가 깊은 동굴을 찾아들 듯이, 이승을 떠날 때가 된 김시습은 백제로 향했다. 무량사(無量寺), 지금은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절집에서 그는 평생 방랑에 지친 영혼을 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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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금오신화·화왕계(외)>,<금오신화>,<금오신화 - 하> … 총 136종 (모두보기)
김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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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담정(藫庭)이다. 1797년 겨울 강이천의 비어사건에 휘말려 함경북도 북동부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시 천주교도와 친분을 맺은 혐의로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당한 후 1801년 4월 우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동시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 선생(1758~1816)이 실학자적 관점에서 1814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면 담정은 감수성 넘치는 시인의 시각으로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최근작 : <담정총서 - 전6권>,<유배객, 세상을 알다>,<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총 8종 (모두보기)
김정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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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접기
최근작 : <김정희 외 4인의 한시 24수>,<완당 서법>,<추사 김정희 서첩> … 총 19종 (모두보기)
박제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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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로,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규장각을 세우자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이 되었다.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검서관으로 봉직하며 국왕의 저술과 언론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고, 세 번 더 북경을 여행하여 많은 중국 관료나 학자와 교유했다. 1800년 정조의 사망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고, 1801년 윤가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저서로 『북학의』와 『정유집』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북학의>,<궁핍한 날의 벗>,<무예도보통지 부 언해> … 총 27종 (모두보기)
박지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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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학자이며 호는 연암(燕巖), 자는 중미(仲美), 시호는 문도공이다. 16세에 처삼촌인 영목당 이양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으며, 30대에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박제가·이서구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홍대용·유득공 등과는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고 함께 서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1765년 과거에 낙방하자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팔촌 형인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가서 청나라 문물을 두루 살피고 왔다. 이연행(燕行)을계기로하여충(忠)·효(孝)·열(烈) 등과 같은 인륜적인 것이 지배적이던 전통적 조선 사회의 가치 체계로부터 실학, 즉 이용후생의 물질적인 면으로 가치 체계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다. 그때 보고 듣고 한것을 기행문체로 기술한 <열하일기> 26권을남겼는데, 여기에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주옥같은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그는 서학에도 관심을 가져 자연과학적 지식의 문집으로 <연암집>이 있고, 저서로는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이 전하며 연행 뒤 <열하일기>를 지어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86년 음사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늦게 관직에 들어서서 사복시주부 · 한성부판관 · 면천군수 등을 거쳐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문장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정아한 이현보의 문장과 웅혼한 그의 문장은 조선 시대 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희화(戱畵)·풍자(諷刺)의 수법과 수필체의 문장들은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호질>, <민옹전>, <광문자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과농소초>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접기
최근작 : <연암집 - 전6권>,<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허생전 / 양반전>,<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한국 고전 소설> … 총 209종 (모두보기)
서거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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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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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사가 서거정 시선>,<고금소총>,<필원잡기> … 총 21종 (모두보기)
성현 (成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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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齋)·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다.1462년(세조 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을 지냈다.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주고받아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허백당집≫, ≪풍아록≫, ≪부휴자 담론≫,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큰글씨책] 원서발췌 허백당집>,<원서발췌 허백당집>,<허백당시집> … 총 33종 (모두보기)
신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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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162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성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 비주류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만물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관점을 지녀 다양한 색깔의 글을 남긴바, 그의 글은 주제가 호한하면서도 자유롭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 준다. 호는 상촌이며,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최근작 : <교감 국역 청창연담>,<시조, 서정시로 새기다>,<우리고전 100선 1차분 세트 - 전10권> … 총 12종 (모두보기)
유몽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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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아들 '약' 과 함께 처형당했다가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 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 <어우집>이 있으며, 야담집 <어우야담>은 수필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최근작 : <한국 산문선 1~10 세트 - 전10권>,<어우야담 3>,<어우야담 2> … 총 26종 (모두보기)
이규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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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백운 이규보 시선>,<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 … 총 50종 (모두보기)
이덕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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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얼 출신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菴)·청장관(靑莊館)·아정(雅亭) 외 다수가 있다. 박지원·박제가 등과 교유했던, 연암 일파의 일원이다. 규장각 초대 검서관과 적성현감 등을 지냈다. 저서로 71권 32책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있다.
최근작 : <청장관 이덕무 시선>,<책에 미친 바보>,<세 살 적 배움, 평생을 이끈다> … 총 49종 (모두보기)
이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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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갑술환국 이후 유배된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26세이던 1706년 둘째 형 이잠(李潛)이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을 받는 도중 숨지자 안산(安山)의 성호장(星湖莊)에 은거하며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으나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진 근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였다. 주요 저서로 문집인 『성호전집』 외에 『성호사설』, 『곽우록』, 『사칠신편』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소학질서>,<성호집>,<성호 이익의 심경질서> … 총 20종 (모두보기)
이인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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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접기
최근작 : <역주 파한집>,<중학생이 보는 파한집>,<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총 9종 (모두보기)
이제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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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翁)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翁稗說)≫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접기
최근작 : <이제현 사집>,<역옹패설>,<역주 역옹패설> … 총 16종 (모두보기)
임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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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접기
최근작 : <서하집>,<우리 고전 소설>,<서하집> … 총 12종 (모두보기)
정약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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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목민심서>,<다산 정약용의 중용>,<간추린 목민심서> … 총 255종 (모두보기)
최자 (崔滋)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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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明宗) 18년(1188)에 태어나서 원종 1년(1260)에 세상을 떠난 학자이자 관료요 시인이다. 최자의 첫 이름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이고,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다. 본관은 해주(海州)로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의 후손이며,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최자는 대내적으로는 고려 왕조가 혼미를 거듭하고 무신 정권이 전횡을 부리던 시기,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7차 침입(1231∼1258)이 있었던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다. 명문 집안 출신으로 이규보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이런 인연으로 최자의 문학은 이규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특히 최자는 이규보의 ‘창출신의(創出新意)’의 창조적 문학론에 뜻을 같이했던바, ≪보한집≫에서 자주 이규보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렇듯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는 최자는 한국 문학사상 이인로와 함께 문학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별히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무엇보다 한시 비평에 해당하는 시화류 ≪보한집≫을 남긴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저명한 대학자인 최충의 후손으로서 관직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이 되기도 했다. 최자의 가문은 최충 이후로 세 명의 장원(壯元)과 세 명의 상국(相國), 네 명의 공신을 배출한 명문 귀족으로, 최자 또한 ≪보한집≫에 증조부 최약(崔?)이 유배를 가면서 남겨 놓은 시 <출수춘주화인증별(出守春州和人贈別)>을 실은 것으로 보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문인·학자들의 문집을 두루 섭렵하지 않고서는 ≪보한집≫에 나타나고 있는 그 시대의 사회 상황과 문학적 성격을 바르게 진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자는 독서량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풍부한 독서량과 깊이 있는 시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최자는 ≪보한집≫을 통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인들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며, 창조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가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 분석했다. 접기
최근작 : <보한집>,<역주 보한집>,<보한집> … 총 14종 (모두보기)
허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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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이고,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승지였던 허엽(許曄)의 3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에게 학문을 배우고, 둘째 형 허봉의 친구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1585년(17세) 봄에 한성부에서 치른 초시에 급제하고 1589년(21세)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1594년(26세) 2월 29일, 정시(庭試) 문과 을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서 벼슬하고, 중국어 시험에 연이어 1등을 차지해 5월 3일 요동을 다녀왔다. 1613년 일어난 ‘칠서의 난’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이첨에게 의탁했으며, 인목 대비의 폐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칠서의 난 이후로 허균이 꾸준히 역모를 꾀했다는 상소가 잇따라 올라오고, 마침내 1618년 8월 17일 하옥되어 24일 급히 처형되었다. 문집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藁)≫가 있으며 작품으로 ≪홍길동전(洪吉童傳)≫, ≪한정록(閑情錄)≫ 등을 남겼다. 누이 허난설헌과 작은형 허봉의 사후, 이들의 문집 ≪난설헌집≫과 ≪하곡집≫을 각각 엮었으며, 중국 사신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주어 중국에서 유통되게 하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홍길동전·전우치전·임진록>,<[큰글자책] 허균 척독>,<허균 척독> … 총 108종 (모두보기)
홍대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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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주창한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를 보장받는 가문 출신이지만,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2세에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 아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의 일생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사건은 중국 연행이다. 1765년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불멸의 명저 『의산문답』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후 쓴 책이다. 40대에 들어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고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7개월 동안 세자익위사에서 근무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계방일기』라는 글을 남겼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홍대용은 1783년 10월 2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꼭 52년하고도 7개월 남짓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홍지弘之라 했고, 자는 덕보德保, 당호로는 담헌湛軒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문집은 『담헌서湛軒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접기
최근작 : <의산문답·계방일기>,<주해 을병연행록 2>,<주해 을병연행록 1> … 총 31종 (모두보기)
홍양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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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錥)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접기
최근작 : <이계집 14>,<이계집 13>,<이계집 7> … 총 22종 (모두보기)
김만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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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문학가이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65년(현종 6)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수찬을 역임하였고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민정을 살폈으며, 1675년(숙종 1) 관작이 삭탈되기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공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 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 14) 풀려났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구운몽》을 쓴 뒤 병사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고, 유복자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국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알려진 작품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뿐이다. 《구운몽》은 전문을 한글로 집필한 소설 문학의 선구로 꼽힌다. 특히 그 구성은 선계(仙界)와 현실계(現實界)의 이중 구성을 택하였고, 불교적인 인생관을 형상화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사씨남정기·서포만필>,<구운몽>,<구운몽> … 총 168종 (모두보기)
신재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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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가 동리(桐里)로, 순조 11년(1812) 11월 6일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73세 되던 고종 21년(1884) 태어난 날과 같은 11월 6일, 그 삶을 마감하기까지 격동적인 시대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치성을 드려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었으니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는데,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신재효는 고창현의 이방에 이어 호장까지 오른 뒤 오랜 공무에서 벗어났는데, 치산(治産)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을 기반으로 40대 전후에 이미 곡식 1000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은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졸부가 아니었다. 병자년(1876)의 대흉년에는 아끼면서 모은 재산을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또한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했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00냥을 헌납했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기도 했다.
신재효는 축적된 부와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애호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판소리와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해 우리에게 전했다는 점이다. 판소리 열두 작품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정리 개작했는데, <춘향가>의 경우는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의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또한 <오섬가>의 창작을 통해 판소리에 ‘옴니버스(omnibus)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그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엮어질 것 같지 않은 춘향의 이야기, 배 비장의 이야기, 그리고 강릉 매화의 이야기 등을 한 주제에 의해 통합함으로써 판소리의 한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허두가>, <호남가>, <광대가>, <치산가>와 같은 많은 가사도 지었다. 신재효가 지은 가사는 그의 기질과 사업, 그리고 지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재효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에 관련한 신재효의 활동 중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판소리 연창자에 대한 지원이 대단히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그는 판소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안목으로 지속적이고도 계획적인 판소리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이 나타남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신재효의 가사>,<[큰글씨책] 신재효의 가사>,<[큰글씨책] 한국 판소리 전집 > … 총 13종 (모두보기)
홍석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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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50년(1774)에 태어나 현종 8년(1842)에 숨졌다. 22세(정조 19)에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에 제수되면서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42세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58세에는 사은사의 정사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61세(순조 34)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63세(현종 2)때는 남응중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삭출되었다가 66세에 대왕대비의 특지로 방석되었다. 그후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 장단의 모사와 양주의 광진으로 은거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속사략익전>, <예기집설지의>, <학강산필>, <초계고식>, <대역상전>, <명사관견>, <속명사관견>, <독역잡기>, <휘사소찬> 등 다수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홍석주의 노자> … 총 4종 (모두보기)
김창협 (金昌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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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은 물론이요, 문학, 서화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 비록 행공(行公)은 하지 않았지만 대제학에 뽑힌 인물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동음거사(洞陰居士)·한벽주인(寒碧主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부친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형 김창집, 동생 김창흡·김창업·김창집·김창립 모두가 서화에 능했던 것으로 전한다.
최근작 : <팔대가문십선>,<조선후기 한문비평 1>,<한국 산문선 5> … 총 11종 (모두보기)
이수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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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하룻밤에 읽는 소설 서동요>,<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 총 5종 (모두보기)
조수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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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삼의 호는 추재(秋齋)와 경원(經畹)이며,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趙重黙)이 화원(畵員)이었다는 사실과, 과거의 시험과목이었던 공령시(功令詩)에 뛰어나《추재집》권7에 공령시가 59편이나 전할 정도로 이름났던 그가 정작 자신은 83세나 되어서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실을 보아서, 아마도 그가 중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그는 1789년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중국에 다녀오기 시작하여, 여섯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는 여섯 차례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 많은 기행시를 짓기도 했거니와, 난설(蘭雪) 오숭량(吳崇梁)이나 유희해(劉喜海) 등의 많은 시인들과 사귀며 견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차례 국내를 여행하며 많은 기행시를 남겼는데,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다루어 장편시를 지었으며, 함경도에서는〈북행 백절(北行百絶)〉을 지었다. 강명관은 그의 석사논문〈추재 조수삼 문학연구〉에서《풍요삼선》에 실린 그의 시 23편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홍경래의 난 이후에 지어진 시가 21편이나 된다는 점을 들어서 후기의 시가 더욱 평가받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문에 그의 시가 변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평안도에서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1812년 4월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평정되었다. 그는 이즈음에 마침 평안도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1812년 7월에 정주 현감의 초청을 받고 정주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 방문길에 홍경래의 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서구도올(西寇檮杌)〉이라는 장편의 시를 쓰게 되었다. “도올”이란 원래 악(惡)을 기록하여 경계로 삼는 나무인데, 초나라에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역사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조수삼은 홍경래를 “서쪽의 도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죄악을 기록하려고 이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창작 동기는 이 시의 서(序)에 잘 나타나 있다.
<북행 백절>에는 이밖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은광을 찾아가거나 밀무역을 하는 민중들을 그리면서, 양반 위주의 여러 제도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처절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이(紀異)〉에서 발견되는 것도 서민적인 덕성이며, 조수삼 자신이 이러한 덕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 <추재 조수삼의 생애와 시>에서 접기
최근작 : <추재 조수삼 시선>,<추재기이>,<추재기이> … 총 6종 (모두보기)
최행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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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최근작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류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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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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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이인로(지은이)의 말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아서, 구름이 허공에서 흩어지거나 모이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으며,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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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인데, 드디어 손에 쥐었습니다. 생각보다는 얇네요^^
주머니쥐 2009-10-07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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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도가 아주 뛰어나다. 해설이 없어 아쉽지만 선록 자체가 이미 많은 말을 하네.
바람의전설 2011-08-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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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문학관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그 거창한 제목으로 이 책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선조들이 썼던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 그리고 문학관을 논한 곳을 따로 모아논 것이다.
보리 출판사에서 내놓는 책들은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다. 원문도 실려 있으며 주석까지 달려 있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족처럼 보이는 평론이 없어서 책의 두께만큼 더 많은 문장들을 공부할 수 있다.
한문을 전공하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다소 어려울만한 책이다. 우리 선조들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책을 집어든다면 읽어도 머리에 남는 건 없을 것이다. 한문학사에 대한 지식이 있고, 우리 문학에 대한 기본 이해가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할 것이다. 덩달아 한문 원문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한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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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7-05-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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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고전문학선집.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
겨레고전문학선집.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자들이 번역한 조선의 문학책을 남조선(대한민국)의 보리출판사에서 펴낸책
전 39 권중 18 권 소장.
책 표지 하나하나가 겨레고전문학선집 답다.
소장욕이 마구마구. 백프로 다 읽은 책은 한권도 없다.ㅠㅠ
아주 오래전 리브로에서 50프로 할인할때 사모았다
나머지 책도 사야되는데
제목이 끝내준다. 인문학 냄새가 풀풀
˝폭포는 돼지가 다 먹었지요˝
˝거문고에 귀신이 붙었다고 야단˝
폼내기 딱 좋은 책
책소개는 이 시리즈 머리말로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우리 겨레가 갈라진 지 반백년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산세월은 수천, 수만 년입니다. 겨레가 다시 함께 살 그날을 위해,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부터 우리 겨레가 즐겨 온 노래와 시, 일기, 문집 들은 지난 삶의 알맹이들이 잘 갈무리된 보물단지입니다.
그동안 남과 북 양쪽에서 고전 문학을 되살리려고 줄곧 애써 왔으나, 이제껏 북녘 성과들은 남녘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습니다. 북녘에서는 오래 전부터 우리 고전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왔고 연구와 출판도 활발히 해 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고전문학선집>은북녘이 이루어 놓은 학문 연구와 출판의 큰 성과입니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가요, 가사, 한시, 패설, 소설, 기행문, 민간극, 개인 문집 들을 100권으로 묶어 내어,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일반 대중 모두 보게 한 뜻깊은 책들입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현대문으로 옮기거나 옛글을 오늘의 것으로 바꾼 성과도 놀랍고 작품을 고른 눈도 참 좋습니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남녘에도 잘 알려진 홍기문, 리상호, 김하명, 김찬순, 오희복, 김상훈, 권택무 같은 뛰어난 학자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성과를1983년부터 펴내기 시작하여 지금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보리 출판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예 출판사가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이란 이름으로 다시 펴내면서, 북녘학자와 편집진의 뜻을 존중하여 크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남과 북의 표기법이 얼마쯤 차이가 있어 남녘 사람들이 읽기 쉽게 조금씩 손질했습니다.
이 선집이, 겨레가 하나 되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 후손들이 민족 문화유산의 알맹이인 고전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고 이어받는 징검다리가 되기 바랍니다. 아울러 남과 북의 학자들이 자유롭게오고 가면서 남북 학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기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 선집을 펴내 왔고지금도 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북녘의 학자와 출판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04년 11월 15일보리 출판사 대표 정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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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2021-09-28 공감 (33)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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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글쓰기 특강
자기 전에 읽는 책에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도 포함시켜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조금 전에 잠깐 박지원 글을 읽다가 빨려들듯이 그의 글들(228-291쪽)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고 내처 초록 작성까지 마쳤다.
박지원 선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핵심적인 조언을 들은 기분이다. 아래에 몇 줄 옮겨 본다.
글이란 것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놓고 붓을 잡은 다음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고전의 사연을 찾으려 뜻을 근엄하게 꾸미고 글자마다 장중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화가를 불러서 초상을 그릴 적에 용모를 고치고 나서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구르지 않고 옷은 주름살이 잡히지 않아서 보통 때의 모습과 달라지고 보니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진실한 모습을 그려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인들 또한 무엇이 다르랴?
말은 큰 것만 해서 맛이 아니다. 한 푼, 한 리釐, 한 호毫만 한 일도 다 말할 수 있다. 기왓장이나 조약돌이라고 해서 내버릴 것이 무엇이냐? 그렇기 때문에 초나라의 역사는 도올이란 모진 짐승의 이름을 빌려서 썼고, 사마천이나 반고와 같은 역사가도 사람을 죽이고 무덤을 파헤치는 흉악한 도적놈들의 사적을 서술하였다. 글을 짓는 데는 오직 진실해야 할 뿐이다. (243)
- 공작관문고 머리말, 《연암집》
비록 조금난 재주라도 모든 것을 잊고 덤벼야 성공할 수 있다. 더구나 도처럼 큰 것에서랴.
최흥효는 나라에서 이름난 명필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서 글을 쓰다가 그중 한 글자가 신묘함을 얻자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 글을 바치지 못하고 품에 품은 채 돌아왔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일쯤은 이롭고 해로움을 전연 마음속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징이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그를 찾아 사흘 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아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볼기를 쳤더니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지고 새를 그리고 있었다.
학산수는 나라에 이름난 명창이다. 산속에 들어가서 노래 공부를 할 적에 한 곡조를 부르고는 나막신 속에 모래 한 알씩을 던져서 그 나막신이 모래로 가득 찬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도적을 만나서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들도 모두 심회가 울적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죽음과 삶을 마음속에 두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264-265)
- 형언도필첩에 부쳐, 《연암집》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전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글자는 말하자면 군사요, 사상-감정[意]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요, 옛일이나 옛이야기는 전장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로 만들고 구를 합해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과 같으며, 성운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로 빛을 내는 것은 북, 종, 깃발 같은 것이다.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에 해당하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 부대에 해당하고, 억양 반복이라는 것은 백병전과 육박전에 해당하고, 제목을 끌어내고 결속을 짓는다는 것은 적진에 먼저 뛰어들어 적을 생포하는 데 해당하고, 함축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은 적의 늙고 쇠한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데 해당하고, 여운이 있게 한다는 것은 기세를 떨쳐 개선하는 데 해당한다.
대체 장평 땅의 군사가 날래고 비겁한 것이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아니요, 활이나 창도 날카롭고 무딘 것이 전날보다 변한 것이 아니건만, 염파가 거느리고 나서서는 승전하다가 조괄로 바뀌고서는 몰사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떼내 버릴 군사가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는 쓰지 못할 글자가 없다. 만약에 적당한 장수만 얻는다면 호미, 곰방메 따위 농기구 빈 자루만 가지고도 무서운 무기로 쓸 수 있고, 옷자락을 찢어서 작대기 끝에 달아도 훌륭한 깃발로 된다. 또 만약에 일정한 이치에만 들어맞는다면 식구끼리 나누는 이야기도 학교의 한 과정으로 넣을 수 있고, 아이들 노래와 속담도 고전 문헌과 대등하게 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 정교하지 못한 것이 글자의 탓은 아니다.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용감치 못한 장수가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적의 굳은 성벽에 부닥친 것이나 마찬가지로 글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속으로 아무런 요량도 없이 갑자기 글 제목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산 위의 풀과 나무까지 적병으로 보이는 바람에 붓과 먹이 다 결딴난다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것조차 이렇게 상하고 저렇게 패해서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군대가 한번 제 길을 잃어버리는 때에는 최후의 운명을 면치 못하며, 아무리 물샐틈없이 포위한 때라도 적이 도망칠 틈은 없지 않은 것과 같다. 한마디 말을 가지고도 요점만 꽉 잡으면 마치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쳐들어가는 것이요, 반쪽의 말을 가지고도 요지를 능히 표시하면 그것은 마치 적의 힘이 다할 때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그 진지를 함락시키는 것이다. 글 짓는 묘리는 바로 이것이 최상이다. (275-277)
-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연암집》
<호질>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연암의 문장은 폐부를 찌르는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혜안과 비유가 곳곳에서 나온다. 게다가 어떤 글은 왜 이렇게 비실비실 웃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언젠가는 <연암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똥구리는 둥그런 제 말똥덩이를 대견히 여겨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고 용도 또한 자기의 구슬로 말똥구리의 말똥덩이를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255)
- 박지원, `낭환집에 부쳐`,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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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6-07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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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못된 詩 - 이규보
다음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시는 사상[意]이 기본이다. 때문에 구상이 어렵고 언어 묘사는 둘째로 된다. 구상은 또한 그 사람 기백이 높고 낮은 데 따라 깊고 얕은 것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기백이란 바탕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백이 낮은 자는 시구를 다듬어 맞추는 데만 힘쓰고 시상을 앞세우지 못한다. 이렇게 지은 작품은 조각한 듯한 문장과 그려 낸 듯한 시구가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깊고 함축된 시상이 없으면 처음 보기에는 잘된 듯하나 다시 음미하면 아무런 맛도 없어지고 만다. (28)
시에는 아홉 가지 좋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하여 깨달은 것이다.
시 한 편에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인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히 실은 체[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구상을 훔쳐쓰는데 도적질을 능숙하게 했다 해도 옳지 않거니와 그 도적질조차 서투르게 한 것은 서투른 도적이 쉽게 잡히는 체[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요,
어려운 운을 근거 없이 억지로 단 것은 큰 활을 잘 당기지도 못하는 체[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운을 달아 운이 고르지 못한 것은 술을 지나치게 취하도록 마신 체[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어려운 말을 즐겨 써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 놓고 소경을 인도하는 체[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남의 글을 인용하여 말이 순하지 못한데도 애써 인용하는 것은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체[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세련되지 못한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촌 늙은이들의 이야기 체[촌부회담체村父會談體]요,
꺼려야 할 문구를 함부로 쓰는 것은 존경할 사람을 업신여기는 체[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시구를 다듬지 않는 것은 밭에 가라지가 가득히 우거진 체[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런 좋지 않은 체들을 극복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누가 자기 시의 결함을 지적하거든 받아들일 만한가를 살펴야 한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내 주장대로 할 것이니, 구태여 듣기부터 싫어하여 마치 임금이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제 허물을 고치지 못하듯이 하겠는가.
시를 쓴 뒤에는 보고 다시 보되 자기가 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아야 하며, 남의 것처럼 보되 평생 매우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생각하고 결점을 찾기에 노력하여 결점을 찾을 수 없이 된 뒤에 발표해야 한다. 이것은 다만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산문도 그러하다. 古詩처럼 유려한 문장으로 구절을 조직하고 운을 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우선 시상이 넉넉하면 시어도 자유로워 거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거나 산문이거나 그 법은 한 가지인가 한다. (29-30)
- ‘시상의 미묘함을 논한다[論詩中微旨略言]’에서, 《동국이상국집》
가만히 보니 내가 쓰는 글은 대체로 (잡문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만노불승체, 음주과량체, 촌부회담체, 낭유만전체가 많은 것 같다.
'수레에 귀신이 가득찬' 재귀영거체는 내 견문과 학식이 부족하여 쓰고 싶어도 못 쓰는 문체이고, 졸도이금체와 설갱도맹체, 강인종기체는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쓰고 싶지 않은 문체이다.
아무튼 이규보 다른 글들을 읽어보니 비평 정신이 탁월했던 사람이더라. 기회가 되면 몇 권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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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6-16 공감 (1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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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 북을 주자
변지의 군이 천 리 길을 걸어서 나를 찾아왔기에 그 뜻을 물어보니 문장 공부를 해 보겠다고 하였다.
마침 이날 우리 집 아이가 나무를 심기에 나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사람에게 문장이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을 때 우선 뿌리에 북을 주고 줄거리를 바로 세워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면 거기에서 꽃이 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를 잘 가꾸지도 않고 꽃만 보려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나무뿌리를 북돋우듯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줄거리를 바로 세우듯 자기 몸을 수양하고, 진액이 통하듯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듯 학식을 넓히고 기교를 연마하여 마음속에 든든하게 쌓은 다음에 마음에 품은 것을 표현하면 곧 글이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보고 훌륭한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문장이다. 문장의 길만을 따로 떼어서 성급하게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 돌아가서 탐구해 보면 자신에게도 훌륭한 스승이 있을 것이다."
- '변지의에게 주는 말[爲陽德人邊知意贈言]'에서, 『여유당전서』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 330-331쪽에 나오는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다.
가만히 따져 보니 나는 아직 진액도 제대로 안 통하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뿌리에 북을 줘야' 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을 준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흙으로 뿌리를 덮어준다'는 뜻이었다.
과연, 뿌리가 흙 속에 있지 못하고 허공에 드러나 있으면 양분을 제대로 흡수할 수가 없겠지.
땅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진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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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5-2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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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겨레고전문학선집
도서출판 보리에서 나온 겨레고전문학선집. 30권 넘게 나왔다. 몇 권까지 나오려나. (찾아보니 북에선 60권 넘게 나왔다는군. 꽥!) 이 책들을 사려면 책장에 자리부터 만들어야겠다.
제목을 풀어 쓰니 전혀 다른 책 같다. 북한에서 번역한 책은 우리말을 잘 살려 쓰서 이해하기가 쉽다. 읽으면 바로바로 뜻이 들어온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 잘 없다. 내가 살 때까지는 절판되면 안 되는데. 책 높이가 같으면 다 사가지고 방에 깔고 침대 만들어 자도 되겠다. 하지만 높이가 달라.
보리 출판사 - 겨레고전문학선집 목록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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