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8

손민석 - 기무라 미쓰히코의 북조선 경제사

손민석 - 뉴라이트들은 기무라 미쓰히코의 북조선 경제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식민지 공업화론과 자유시장경제로의...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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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들은 기무라 미쓰히코의 북조선 경제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식민지 공업화론과 자유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정합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전체주의적 체제로부터 탈피한 남한과 소련국가사회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전체주의를 오히려 강화해간 북조선 계획경제 간의 차이가 오늘날의 차이를 가져왔다 주장하는 것이다.

식민지 공업화가 낳은 경제적 토대를 미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켜 나가며 발전을 이룬 남한과 그것으로부터 이탈하여 야만으로 회귀한 북조선의 차이를 기무라의 입론에 의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입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조선 또한 식민지 공업화의 유산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이탈하였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선 현실부터 살펴보자. 기무라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1948년 북조선의 생산수준은 1944년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전쟁이 만든 나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차문석 외 역, 미지북스, 2009, p.288)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의 토대는 절반 수준밖에 작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북조선의 중화학공업화를 강조하려면 그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여러 기계공업이 발전해 있어야 하는데 기업의 설비, 운영, 기술력 등의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일본과의 연계고리가 끊긴다면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한가? 일본과의 관계가 끊인 상황에서 북조선의 자립화는 요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조차도 1950년대 후반부터 회복되기 시작한 일본과의 연계관계에 기초하여 공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북조선은 그러한 기회를 얻지 못한채 자립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국, 소련 등의 간섭에 대항하는 북조선의 정치적 자립화는 경제적 자립화 혹은 고립화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연속성을 어디까지 산정할 수 있을까?"
"게다가 기무라가 계속해서 비판하듯이 전후 소련은 만주와 식민지 조선의 많은 공장 설비들을 약탈하지 않았던가? 기무라는 이 지점에서 심지어 산업시설의 파괴의 원인을 조선인들이 직장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이라며 조선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까지 하다.(기무라•아베, 2009 : 225) 그는 일본 군사당국이 시설, 설비 등의 파괴를 지시했음에도 현지의 일본인 직원들이 따르지 않았다며 조선인과 대비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파괴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 아니던가? 일본 제국주의는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 조선이 일본제국의 물적 토대를 활용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는가 한다. 이렇듯 물적 토대의 파괴 및 약탈, 기술 인력의 부족, 일본과의 연계고리 상실, 대규모 인력의 남하 등의 여러 요인들이 겹친 상황에서 연속성을 강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식민지 공업화의 유산을 경제적인 토대, 노동력의 질적 수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로당으로 귀결되었던 국내 혁명 주체들의 존재까지 포함해서 총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기무라의 입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공업화 유산 자체가 별다른 문제가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남북 간의 분업관계의 편향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북조선의 공업 지대는 일본과의, 혹은 만주국과의 관련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들과의 연계를 통해 성장했다. 이 연계가 끊어졌을 때 북조선이 자립할 기반이 있었는가? 소련은 북조선에게 그러한 배경을 제공해주었는가? 오히려 소련은 북조선에 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탈하고 파괴했다. 일본군도 적극적으로 그 유산들을 파괴하려 하였다.
이러한 물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혁명주체로서의 남로당의 몰락은 식민지 공업화의 유산이 전후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남로당의 몰락은 남북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과 이승만이 국내적 기반을 마련하며 권위주의화, 전체주의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그 둘 모두에게 식민지기를 거치며, 그리고 해방전후를 통해 지하당 활동을 하며 단련된 혁명가 조직인 남로당의 존재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전평 등의 수많은 남한의 노동자 조직의 자율성도 함께 파괴되었다. 남북 두 국가의 권위주의화 속에서 가운데 있던 남로당이 몰락하는 과정은 식민지 공업화의 유산과 결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한에서의 노동자 세력의 재형성과 조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노동자의 질적 측면을 보아도 단순노동 위주의 남로당 세력과 달리 1960년대 이후에는 숙련노동자의 형성에 기초한 노동자의 조직화가 이뤄지게 된다.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격을 중진자본주의로 규정할 것인지 후진자본주의로 규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적어도 1940년대 이후부터는 전체 생산에서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에 비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중진 자본주의 단계에는 접어들었다 보아야 할 것이다. 저개발에서 중진자본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식민지기에는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기초하여 단순노동력 중심의 조직화가 이뤄졌다면, 고도성장기에는 숙련노동자의 형성과 맞물려 가는 질적 향상을 전제로 한 조직화가 이뤄졌다. 이와 같은 차이는 전전의 경우 일본의 독점자본의 조선 진출과 전후의 일본의 산업이전에 따른 중진자본주의화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인을 강력하게 포섭하지 못하던, '고용없는 성장'의 식민지 공업화와 한국인을 대규모로 고용하던 고도성장기의 공업화의 질적 차이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지점들을 좀 말하고 싶었는데.. 남로당에 대한 공부가 아직 끝나지가 않아서 고민이 많다. 김남식의 연구를 좀 넘어서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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