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2

06 [통일신문] <포커스>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가 생애와 사상 재조명



[통일신문] <포커스>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가 생애와 사상 재조명

편집부
기사입력 20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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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중립통일협의회가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초석을 다진 통일운동가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영세중립통일협의회는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가의 생애와 사상 재조명’을 주제로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추계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중립화 통일운동을 기틀을 마련한 통일운동가의 사상을 통해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방안의 기원과 실현가능성을 진단하기 위해 열렸다.


‘친북’ 탄압 속 영세중립통일 토대 마련한 통일운동가


1. 김용중 선생은...
충남 금산에서 출생 상해와 미국을 거쳐 1945년 해방까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부터 1975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중립화 통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또 이승만,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고 4·19 공간에서 영세중립 통일방안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민주화운동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종일 영세중립통일협의회 회장
항일·민주·중립화 통일운동 전개한 선각자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김용중은 그것을 기반으로 미국에서 항일독립운동과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여운형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한 후 경제적 자립을 위해 김호, 김형순 등과 함께 사업에 성공함으로써 1930년대 북미국민회의를 부흥시켜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김용중은 또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북미국민회의 선전부장, 중앙집행위원, ‘신한민보’의 영문주필, 재미한족연합회의 선전과장 등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김용중이 항일독립운동과 중립화 통일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특징은 추진력이다.
그는 중도적 노선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관의 의사결정권자가 그의 의견에 반대되었을 때는 타협보다는 관철을 선호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초지일관 그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된다.
김용중은 항일독립운동과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첫째, 그는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비교적 중도적 온건노선을 유지했다. 이승만과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이승만과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김용중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했으나 그의 중도적 성향은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리들리 그룹과 이승만의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둘째, 김용중은 분단된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최초로 주장한 선구자였다. 그가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게 된 배경은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고, 한국전쟁을 경험했으며, 미·소 냉전기의 전초기지를 타파하는 대안적 방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김용중은 해방 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체재를 청산하기 위해 미국정부에 한국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중립화 통일사상은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고 장면 정부시절 한국의 통일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김용중은 남북한의 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중립화 통일제의는 북한 김일성 정권의 중립통일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인해 한국정부로부터 용공 친북인사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는 한반도 통일이 남북의 동등한 자격과 협상에 의한 평화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도 그의 주장에 관심을 보이고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동조를 보였으나, 이승만과 박정희는 그의 중립화 통일운동을 비판하고 그를 친북·용공분자로 매도하면서 귀국도 영원히 불허했다.


2. 김삼규 선생은...
전남 영암군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목도하고 좌익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그후 「프롤레타리아 예술」 잡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해방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설이 검열되자 붓을 놓고 일본에 정착한다. 일본에서 이승만의 독재를 비난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중립화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중립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강광식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냉전구도 해체위해 중립화 방안 주장

1960년대 초에 활발하게 제기되었던 중립화 통일논의는 4·19 직후의 정치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최대한 허용되었던 시민적 자유에 힘입어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이었던 통일논의가 여러 부문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적극적인 호응을 보인 것은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등의 혁신계 정당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에 의한 논의의 내용은 물론 그것의 구체적 적용단계나 절차, 적용 모형 등에서 다양한 편차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적 근거에 있어서는 대체로 재일교포 김삼규의 소론을 준용했다. 그가 제기한 중립화 통일론이 가장 체계적으로 이론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1953년 이후 제기한 중립화 통일론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가 양대 진영의 어느 한쪽으로 편입되면 이것은 타방에게 위협이 되고 끊임없이 음모와 위협의 원인이 되므로, 통일 한국은 국제적 동의에 의해 중립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남북한 정권은 대립적 강국의 지지에 의해 수립되었다. 그들의 이익 대변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양 정권은 자유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새로운 통일정부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남북한 정권은 그네들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여하한 행동도 배제하고 자유로운 총선거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국에 의한 선거위원회나 중공까지도 가맹시킨 UN 선거위원회를 구성해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규는 중립국을 세워서 군사상으로는 어느 나라와도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외교상으로는 인근 국가와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정해 우호관계를 촉진시키겠다는 우리의 의사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통일독립은 미·소 양대 진영의 세력권투쟁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고, 남북협상이 아니라 관계 각국의 협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중립화 통일이야말로 우리의 통일독립을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통일독립을 염원하는 우리로서는 항상 미·소의 대립과 긴장을 유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통일운동을 남북한 동포 사이에서 초당파적으로 국민운동으로 전개해야 통일의 주도권을 우리 민족이 쥘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삼규는 1988년 10월 19일 「무등일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고했다.
‘우리들로서는 영세중립국이 되어 처음으로 4대 강국에서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보전하는 의무를 지우고 동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어온 강대국에 의한 침략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4대 강국의 국민과도 우호와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고 했다.


3. 권두영 선생은...
1928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해 대구대학 영문과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 미국부대 통역관으로 최전방부대에서 종군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80년 민주노동당 창당작업 참여, 1986년 사회문주당 위원장 등 혁신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대에는 재야통일운동가로서 중도적 입장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한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김하영 인천대학교 교수
민주적 사회주의 주창… 남북협력 강조

한반도의 분단은 한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해방 직후 외세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권두영 선생 역시 이러한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권두영은 외세에 의한 분단 때문에 한반도에서 민주사회주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중립화 또한 실현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분단 상황 속에서 중도적 민주사회주의 세력은 남과 북에서 정치적으로 도태되고 힘을 잃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분단 이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극우 및 극좌 세력이 외국의 비호 하에 남과 북에 단독정부를 세웠는데 중도적 민족주의 세력은 남북 모두에서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지적한 것이다.
남과 북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세력이 미약하게 위축된 원인을 권두영은 몇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냉전체제 하에서 극좌·극우세력만이 득세하고 민족주의적 중도세력은 몰락했다.
둘째, 김일성의 무력남침으로 야기된 골육상잔의 사상전과 그 여파가 이 땅을 민주사회주의 불모지로 만들었다.
셋째, 북한에서 김일성 집단의 무자비한 숙청, 남한에서 역대정권의 메카시적 통치가 민주사회주의 세력의 발전가능성을 말살했다.
넷째, 산업화 단계가 아직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객관적·주체적 제 조건을 성숙시키지 못했다.
그는 통일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은 민족내부에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분단시대에 남한과 북한에는 분단체제의 영속화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극소수의 지배계층이 구조적으로 형성되었고, 이들에 의한 통일논의는 구호와 가식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처럼 남북의 기존 지배세력들의 통일논의를 가식적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권두영은 통일을 위한 정치적·경제적 조건으로서 남북한 각각에서의 민주주의 진전, 그리고 남북한의 이질화 극복 및 동질화 추구를 상정하고 있다.
남북한의 이질화에 대해 분단 이후 남북한의 역사에서 산업화가 상이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남북한은 후진국산업화의 자본주의적 유형과 공산주의적 유형이라는 2대 대칭적 유형을 전형적·대조적으로 세계사에 제시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도로 이질화된 남북한 산업화 체제의 동질화 과정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고 예견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남북한에 요구되는 통일의 조건은 우선적으로 민주화를 지적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경제적 사회회적 민주화로 진전될 때, 그리고 우리의 민주화에 영향 받아 북한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생할 때 평화통일의 대도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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