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 시카고의 88세 실향노인:통일신문
통일신문 ㅣ 기사입력 2016/01/29
1월15일 저녁 시카고에서 강연을 마치고 16일 파리로 떠나기 전이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서 날아오신 ‘6.15미국위원회’ 회장 및 미네소타에서 날아오신 ‘6.15미국중부위원회’ 회장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어르신이 찾아오셨습니다. 제 강연을 잘 듣고, 강연장에서 구입한 ‘이재봉의 법정증언’을 밤새 감동적으로 읽었다며, 저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30분이나 손수 운전해 오셨답니다.
황해도 안악 출신 개신교신자로 6.25전쟁에 참여했다 반공포로로 풀려난 뒤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하셨다는 88세 할아버지께서요. 제 얘기를 더 듣고 싶고 책에 서명을 받으러 오셨다는데, 그 분의 기막힌 가족사를 듣는 데도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당신의 아들보다 7-8세 아래인 제 손을 꼭 붙잡고 저의 ‘만수무강’을 기원해주며 떠나시는 뒷모습에 두 눈이 젖지 않을 수 없더군요.
9일 뉴욕에서 강연할 때는 1980년대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다녀온 뒤 돌아가신 남편 때문에 고국을 방문하기 두렵다는 70대 할머니와 아들이 제 가슴을 아프게 했었고요.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거부하며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이 저토록 한을 품고 기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17일 파리에 도착해 논문심사를 받을 학생과 잠시 얘기 나누고 바로 노르망디로 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로 유명하지만 관광명소로도 널리 알려진 지역이지요. 기차와 버스로 서너 시간 달려 ‘몽셍미쉘’을 바라볼 수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두세 번째 유명한 관광지라지만 한겨울 추위 탓인지 유배지 같은 한적한 바닷가에서 이틀 동안 푹 쉬며 논문심사를 준비했습니다.
40년 전 한두 달 배운 프랑스어 실력 밖에 없는 저를 심사위원으로 부르기 위해, 학생은 560쪽 안팎의 불어논문을 영어로 옮기느라 무지막지하게 수고하고, 학교는 왕복 항공료와 호텔비를 부담하느라 막대한 경비를 지출했으니, 도의적으로라도 논문심사를 소홀히 할 수 없었거든요.
남한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해 대학을 마친 뒤 미국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끝내는 40대 중반의 아줌마 연극학도가 북한과 연계되고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금강산 가극단’의 미학과 이념에 관해 쓴 논문입니다.
저는 20여년 전 남한의 문학예술을 통해 한미관계를 짚어보는 논문을 써서 박사가 되고, 지금은 주로 북한과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있는 덕분에 심사를 맡게 됐습니다. 하기야 20년 전 대학의 풍물패 지도교수를 맡아보고 10여 년 전까지 어디에서든 판소리 한 대목 질러대는 객기를 부려본 경력도 있으니…
아무튼 오늘 20일, 5명의 심사위원이 20여명의 교수와 학생 방청객 앞에서 그 학생을 무려 4시간 이상 ‘고문’하다시피 괴롭히는 가운데, 저는 북한 예술에 깃든 마르크스 예술론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그리고 주체사상과 집단주의 등에 관해 얘기하며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 등에 관해 지적해주었지요.
한국인이라 봐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후한 점수를 주기 꺼려하는데, 오히려 프랑스인 심사위원들이 저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하더군요. ‘매우 우수한 박사 논문’으로 통과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한편, 재정이 부족해 학교시설엔 별로 투자하지 못하면서도 유학생들에게까지 1년 50만 원정도의 학비를 받으며 해외에서 오는 심사위원에게 학교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프랑스의 교육제도에 ‘뿅’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상교육’은 말할 것 없고 ‘반값 등록금’만 주장해도 ‘빨갱이?’로 몰리기 쉬운 우리의 교육현실과 비교가 되더군요.
이재봉 원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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