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4

[이종만의_친일의_문제]

[이종만의_친일의_문제]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종만을 그 명단에 넣은 근거로서 제시하는 ‘이종만의 친일 협력 행적 및 자료’를 넘어서는 주장을 펼 수 있는 근거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농업조선 권두언들 가운데 친일적인 발언이 꽤 포함되어 있어서 방기중 교수의 다음 시각이 수긍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전시(戰時)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동향은 대동광업의 경영수지를 악화시켜 1940년을 전후하여 부채액이 급증하였다. 독점자본, 국가자본에 대한 사업체의 종속화가 심화되었고, 이종만 등 일부 경영진이 친일화(親日化)하면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은 일제 정책과 체제에 완전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입과정에서도 이들은 반독점적 농민적 경제자립이념과 실천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전체주의 사상에 입각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통제경제논리와 적극 일체화시키면서 실천하고자 하였고, 그 연장에서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에 부응하였다. 여기에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사상적적 특질과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제 생각에, 곽병찬 기자의 다음의 시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간 불명예를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준열 선생이 독립군에 군자금을 댔다는 근거자료가 있으면 큰 반전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일제는 금 생산 장려 정책을 중단했다. 돈줄이 끊긴 대동사업체는 파산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종만과 총괄전무 이준열, 경리담당 임원 정현모 등이 임전보국단에 가입해, ‘친일’ 활동을 하게 된 건 그때였다.
그러나 그가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고, 조선 노동자 농민 민족교육에 헌납한 금액에 비하면 ‘팥고물’이었다.

* 아래에 참고할 자료들을 모아봤습니다.

1. 이종만의 친일 협력 행적 및 자료 - 민족문제연구소
2. 『농업조선』 권두언 - 1939~ 1941
3. 이종만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시각 - 방기중/주익종/곽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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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만의 친일 협력 행적 및 자료
- 민족문제연구소

1. 1937년 -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 1,000원 기부
2. 1939년 – 柷 戰捷新年 • 祈 武運長久(매일신보 시국광고 참여)
3. 1939년 - “선만국경의 신의의, 분리에서 접합으로 일전 : 동아건설의 새일군이 되라”
(<재만조선인통신> 제63호에 게재)
「(전략) 현하 대동양, 신국가를 건설하게 되는 이때에 부지중 그 땅위에 우리가 가서 살게 된 것은 이 실로 천재일우의 호기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비록 풍토가 다르고 산수가 생소하다 할지라도 이역이라 생각지 말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같이 생각하면서 만반이 시설과 개척하는데 신건설의 일꾼으로 생각하고 고토를 회복하는 각오로 의무와 생각을 다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더욱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교통상으로 동양의 중앙이 된 만주는 금후 우리 손으로 낙원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될 것(하략)」

4. 1939년 – 함경남도 삼포 공립심상소학교 건설비 2만 8960원 기부한 일로 1940년 4월 감수포장(감수포장)을 받음(내각총리대신 상훈국총재)

5. 1939년 –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 헌납
6. 1939년 – 조선총독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 역임

7. 1940년 – <삼천리> 7월호 칼럼 “지원 병사 제군에게”에 「지원병과 혈(血) 한(汗) 애(愛)의 인(人)」이라는 지원병 격려의 글 게재

“지원병사(志願兵士) 제군(諸君)에게” - 십만(十萬) 돌파의 보(報)를 듣고 전(全) 조선 청소년 제군을 격려하는 서(書)

「지원병과 혈(血), 한(汗), 애(愛)의 인(人)」 - 대동광업주식회사장 이종만

“지금 대(大)아세아의 신(新)질서 건설의 성업(聖業)에 조선 청소년도 대화족(大和族) 남아(男兒)와 일체되어 참가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아세아는 아세아인의 손으로 건설해야만 된다. 진실로 생각건대 아(我) 일본과 만주, 지나(支那) 모두 민족적 편견을 떠나서 여러 종족이 모두 손을 맞잡고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일하여야 할 때인 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이 거룩한 성업(聖業)에 우리 조선 청소년이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과 시국을 인식하는 이해 밑에서 10만이라는 많은 수가 일체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우에 바치고서 나아가려 하는 오늘의 모양에 어찌 감격의 염(念)을 금하랴.
이러한 용사가 되기 위해선 우리 조선 청소년 제군은 우선 피(血)와 땀(汗)과 사랑(愛)의 사람이 되라. 피와 땀은 생산제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신동아(新東亞)는 일하는 용사를 찾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피차 모든 편견을 떠나서 경제적으로는 공존공영(共存共榮), 사회적으로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기치 밑에서 결합하고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지인(內地人)이나 조선인이나 만주인이나 지나인이나, 아니 전 아세아 인류가 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 아세아 일체에의 완성에 박차 매진함으로써 신(新)아세아 평화 건설이 속히 이 지구 위에 이루어지기를 제군에 희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8. 1941년 - 재단법인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 이사 역임
*대화숙 : 일제말 사상통제와 전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41년 1월까지 경성 함흥 청진 평양 신의주 대구 광주 등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 지부가 독립된 재단법인 대화숙으로 재편성
“경성대화숙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산하 보호관찰소장 이하 소원들의 노력도 컸거니와 이 취지에 찬동한 대동광업사 사장 이종만 씨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매일신보. 1940. 12.)

9. 1941년 – 8월 25일. 삼천리사가 주최한 임전대책협의회 좌담회에 참석회 ‘전시체제하 자발적 황국신민화 운동의 실천 방책’ 논의
*임전대책협의회 : 1941년 8월 “자발적 황민화운동의 실천방책”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되었다가 곧바로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9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지도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정비

10. 1941년 – 9월 7일. 임전대책협회가 전시채권 판매를 위해 조직한 채권봉공대의 명치정대에 편성되어 애국 채권을 판매
11. 1941년 -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 및 이사
12. 1944년 – 결전하(決戰下) 전의앙양과 근로동원에 관한 주지(主旨)의 보급철저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동원총진회의 감사 역임.


2. 『농업조선』 권두언

● 상채(償債)의 생활 - 1939.7.
우리의 생활이 고도로 발달해갈수록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웃 동포들의 피와 땀으로 뭉쳐진 노력의 산물에 더욱더 의뢰하지 않고서는 우리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회에 대하여 지는 빚이 또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나라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빚을 더 어디 비할 것인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돌아볼 때에 나는 아직 빚을 갚기에 게으른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일생을 바치어 부모와 신(神)과 사회와 및 나라에 진 빚을 갚기에 있는 힘을 다하려 한다. 더욱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工作) 하의 조선사회에 있어서 빚갚을 마음이 더욱 급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 시대의 어려움 극복과 갱생(更生)의 길 - 1939. 10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의 성전(聖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일과 폴란드 간의 전단(戰端)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불란서의 참전한 수식을 듣고 보니 이야말로 동서(東西)대륙의 전화(戰火)의 피지 아니한 곳이 없이 우리가 일찍이 25년 전에 겪어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징조(徵兆)는 나날이 농후(濃厚)해가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삼남(三南)지방에 미증유(未曾有)의 가뭄이 들어 금년의 감수(減收)는 예측도 할 수 없다고 하니 비록 당국(當局)의 구제책(救濟策)을 신임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평온함 속에 큰 걱정 없이 지내온 우리로서는 방금 내외로 최대의 시대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 송년사 - 1939.12.
지나사변(支那事變) 3년인 이 해를 보내면서 지난 일 년을 회고하니 실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바가 있었다. 밖으로 구주(歐洲)

의 풍운이 미묘한 국제정세를 일으키고 안으로 사변(事變)처리의 대책에 부심하는 동안에 다행이 정통국민당의 재건운동과 함께 신(新)중앙정권이 태동하고 있어 대동아건설의 서광이 보이려 한다. 그러나 병참기지로서 또 식량공급지로서 중한 자리에 처한 조선은 불행하게도 일찍이 없었던 가뭄으로 말미암아 금년 미곡수확이 심대한 수자(數字)로 감수(減收)되리라 한다.

● 비상시국(非常時局) 하의 생활 요체(要諦) - 1940.4.
성전(聖戰) 이미 3년에 총후(銃後)국민의 생활은 긴장한 가운데 단련되어왔다. 이웃 나라의 신(新)정부도 3월 30일로써 정식 성립을 보게 되어 성전(聖戰)의 목적이 이제 바라는 성과를 나타내려함은 기쁜 일이나 동아신질서 건설의 위업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 공작이 시작될 것이니 총후(銃後)의 임무는 더욱 더 무겁고 크다 할 것이다. 생각하면 건설은 파괴보다 더욱 힘드는 일이매, 인재와 물자가 종래에 비하여 오히려 더 많이 요구될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생활은 앞으로 일층 더 긴장하니 아니하면 당면한 비상시국을 타개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세계신질서(世界新秩序)의 창건(創建) - 1940. 9.
지나(支那) 사변과 구주(歐洲) 대전, 이 양대 전란은 실로 유사이래 미증유(未曾有)한 세계질서의 일대 변혁을 맺으려 한다.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와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항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심각한 뿌리를 둔 사상적(思想的) 투쟁에까지 전개되어 있다. 개인의 번영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 사상은 오늘에 완전히 질식되려 하고, 그 대신 국가와 사회의 번영을 제1의(第一義)로 삼는 전체주의(全體主義) 사상이 지배적 권위를 발양(發陽)하게 되었다. 일(日), 독(獨), 이(伊)와 같은 ‘못 가진 나라’가 영(英), 미(美), 불(佛)과 같은 ‘가진 나라’에 대항하여 오늘의 이 압도적 우세를 누릴 줄이야 누가 일찍이 뜻하였을 것인가. 그러나 개인 본위의 자유주의 기초 위에 선 구질서의 위약성은 오히려 ‘가진’ 강점(强點)으로써 기울 수 없음은 물론. 이와 반대로 단결과 통제, 개인에 앞서 국가 사회에 중점을 둔 전체주의의 신질서는 비록 ‘못 가진’ 약점일지라도 극복할 뿐 아니라 더욱 그 기초를 공고(鞏固)히 할 것이다.
오늘에 있어 경제는 곧 정치이다. 지난날에 보던 모든 복잡한 개인주의 경제는 한 역사적 기록으로 돌아갈 뿐이오 생산, 분배, 소비에 어떤 부문에나 통제가 철저화 되는 날, 이런 경제적 문제는 정치 문제로 화하고 만다. 독일 경제상의 금본위(金本位)폐기설 같은 것도 정치문제로 볼 때에 능히 실현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전체주의 국가는 개인주의의 배제는 물론이려니와 민족주권(民族主權)의 분립(分立)도 용허하지 않는다. 이해공통 한 블록 경제권을 단위로 하여 민족주권을 양승한 정치형태를 나타내려고 한다. 서구의 정치체제도 그리 되려니와 우리의 실현하려는 동아협동체(東亞協同體)의 확립은 이미 이러한 근거에서 출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의 신질서는 창건되려 한다. 이 때에 있어 우리는 구(舊)질서에 대한 미련과 관성(慣性)을 완전 청산(淸算)하자. 개인을 버리고 전체를,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파악해서 나아가자. 영도적(領導的) 지위에 선 자나 피영도적(被領導的) 지위에 선 자나 다함께 구질서 속에 침염(浸染)된 잔재(殘在)를 도태(淘汰)하자. 전체주의의 이상 앞에는 오직 국가와 사회를 위한 창조적 노력이 있을 뿐이다.

● 신체제(新體制)의 신생활(新生活) - 1941. 1.
새해는 항상 새로운 희망과 계획으로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해를 맞을 때는 언제나 지난 일 년간을 회고하는 것이지만 사실 지난해를 돌아볼 때 우리는 먼저 ‘황국(皇國) 2600년 기념봉축’ 절차를 성대히 거행한 것을 비롯해서 신체제(新體制)에 의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탄생과 조선 안에서의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결성이라든지 밖으로 ‘3국 동맹’ 체결과 ‘일화(日華)기본조약’의 성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결코 한 개 한 개의 따로 떨어진 사실이 아니고 정히 국가적 체세(體勢)와 운명을 중심구축으로 한 모든 연관적인 사실이란 것을 특히 주의한다면 이로써 우리의 국가적 대방향, 대궤도는 확호부동하게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방향이 정해지고 궤도가 놓인 이상에는 다만 진군(進軍)이 있을
따름이다. 그 정해진 방향을 향해서 그 놓인 궤도 위로 용왕매진(勇往邁進)하는 실천적 생활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난 일년 간을 우리의 위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마지막 준비의 단계라고 한다면 새로 맞이하는 해는 또한 이 위대한 역사적 임무를 띄고 실천의 수도(首途)에 오르는 발족점(發足點)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희망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어서 결코 탁상의 공론이나 뇌리(腦裏)의 공상(空想)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지난번에 결정 발표된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실천요령은 우리 국민생활의 대강령(大綱領)에서부터 세목(細目)에 이르기까지 그 요목(要目)과 사항을 명시한 바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의 생활기준을 삼아야할 것은 물론이지마는 이러한 실천이 우리 개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서툴다거나 어울리지 않아서는 더욱 안 될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자진해서 한 개의 기본 의무로 실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체제(新體制)의 신생활(新生活)인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새로운 행복을 희구(希求)해 마지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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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종만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시각

1. 방기중 - 일제말기 대동사업체(大同事業體) 경제자립(經濟自立)운동과 이념(1996)
여기에 특히 금광업 자본에 종속된 그 운동 기반의 특수성이 사업체 운동을 일제 통제경제정책․자력갱생운동에 편입시키고 끊임없이 체제 타협적 성향을 취하게 하였으며, 끝내 사업체 운동을 해체시키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전시(戰時)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동향은 대동광업의 경영수지를 악화시켜 1940년을 전후하여 부채액이 급증하였다. 독점자본, 국가자본에 대한 사업체의 종속화가 심화되었고, 이종만 등 일부 경영진이 친일화(親日化)하면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은 일제 정책과 체제에 완전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입과정에서도 이들은 반독점적 농민적 경제자립이념과 실천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전체주의 사상에 입각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통제경제논리와 적극 일체화시키면서 실천하고자 하였고, 그 연장에서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에 부응하였다. 여기에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사상적적 특질과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2. 주익종 - 제멋대로 만든「親日인명사전」(월간조선.2008.6.)
『당시 親日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니 친일파를 斷罪(단죄)할 수 없다』고 물 타기 하려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 日帝末 한국인의 體制內化(체제내화) 경향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는 日帝의 지배체제가 상당히 안정되었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제국의 성공적 팽창, 그와 동반한 식민지 경제개발이 이를 뒷받침했다. 일본이 1937년 8월 中日(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고 1942년 3월 자바섬을 점령할 때까지 승승장구하자, 독립의 꿈은 갈수록 아득해졌다.
국내 한국인들은 일본이 장담한 大東亞共榮圈의 성립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徐廷柱의 말마따나 천년만년 일본의 지배 아래서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일본이 한국인에게 轉向(전향)을 강요했다. 또 內鮮一體(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이제부터 한국인을 동등하게 대해 주겠다고 유인했다. 그것이 실제로는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한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 약속을 믿고 싶어 했다.

3. 곽병찬 -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한겨레신문. 2016.8.)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금광왕 남호 이종만의 ‘친일’ 행적이 기록돼 있다. 그의 딸 이남순은 “28전29기의 역경 속에서 오로지 농민과 광부, 근로자의 복지와 대동평등사회 구현에 헌신한 분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종만이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다. 그가 노동자 농민 교육사업으로 환원한 금액은 80여만원(지금 화폐가치로는 800여억원)에 이르렀다. 자신의 땅 157만평도 내놓았다. 누가 ‘일하는 사람이 다 잘사는’ 이상에 모든 걸 바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내고,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금위문금 냈다. … 1939년 7월엔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 냈으며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을 격려하는 글을 게재했으며, 1941년 10월 출범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참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금광왕 남호 이종만의 ‘친일’ 행적이다.

이에 대해 이종만의 딸 이남순은 2010년 낸 회고록(<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에서 ‘피맺힌 한’을 토로한다. “28전29기의 역경 속에서 오로지 농민과 광부, 근로자의 복지와 대동평등사회 구현에 헌신한 분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서 방기중 전 연세대 교수가 1996년 발표한 연구논문 ‘일제말기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이념’의 결론을 소개했다. ‘이종만이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바쳐 세운 대동기업체의 이념과 경영철학은 식민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이 도달한 사상적 모색의 한 전형이자 실천이었다.’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북지위문금을 내기 두 달 전 이종만은 영평금광 매각 대금 155만원 중 50만원(지금 화폐가치로는 500억원)을 자작농 육성과 이상적 농촌 건설을 위한 대동농촌사 설립에 쾌척했다. 이밖에 10여만원은 영평금광 광부와 직원 1000여명에게 나눠주고, 인근 마을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을 희사했으며, 광부의 아이들이 다니는 영평학원에 2000원, 왕장공립보통학교에 1000원을 각각 전했다. 그가 인수인계식을 끝내고 떠날 때 왕장역에는 “1천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 인근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덕행을 찬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고향인 울산에도, 대현면 교육사업비로 10만원,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 등을 희사했으니 그가 노동자 농민 교육사업으로 환원한 금액은 80여만원에 이르렀다. 9월엔 자신의 땅 157만평도 내놓았다.

1000원의 황금위문금을 낸 1938년, 그는 조선의 전문 기능인을 양성하기 위한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고(6월),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출판사 등을 세웠다. 노동자-자본가, 지주-경작자의 협력에 의한 집단경영, 균등분배의 정신을 구현할 대동사업체의 뼈대였다. 그의 소유인 장진광산 280구, 초산 140구, 자성 300구 등 1천구가 넘는 광구를 기반으로 설립한 대동광업주식회사가 돈줄이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이 회사 현판 글씨를 써준 것은 이런 취지 때문이었다.
대동공전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의 위기에 몰린 민족교육의 산실 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려다 실패하자 대신 세운 것이었다. 설립자금만 120만원이 들었고, 사재 30만원까지 털어 넣은 이 학교는 지금 북한 김책공업대학교의 전신이다. 그가 당시 설립하거나 지원한 민족학교는 울산의 농업학교 등 11곳에 이르렀다. 그가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고, 조선 노동자 농민 민족교육에 헌납한 금액에 비하면 ‘팥고물’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일제는 금 생산 장려 정책을 중단했다. 돈줄이 끊긴 대동사업체는 파산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종만과 총괄전무 이준열, 경리담당 임원 정현모 등이 임전보국단에 가입해, ‘친일’ 활동을 하게 된 건 그때였다. 그러나 일제가 1943년 금광을 강제로 정리하면서 대동사업체는 사라졌다. 대동농촌사는 농민들에게 모든 토지를 넘기고 해체됐으며, 대동출판사는 대동공업전문학교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각됐다. 29번째 도전 역시 실패였다.

그는 일찍이 스무살(1905년) 부산에서 미역 중간상으로 뛰어들었다가 실패했고, 2년 뒤 대부망 사업도 파산했다. 고향인 울산 대현면에서 신식 대흥학교를 설립했지만, 노인들의 반발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사이 100석지기의 가산은 모두 사라졌다. 1차 세계대전 중 반짝 흥했던 중석광산도, 1919년 금강산에서 시작한 목재업도 망했다. 함남 영평과 북청에서의 개간사업도, 함남 동창, 명태동에서 벌인 광산도 실패했다. 1920년 이상적인 농촌 건설을 위해 시도한 조선농림회사도 일제의 방해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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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그는 훗날 그와 운명을 같이하게 될 이준열을 만난다. 이준열은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대 전신) 출신으로 경성고학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무산자 교육운동’의 중심이던 경성고학당에서 이준열은 교육을, 이종만은 후원업체인 제빵공장 책임자를 맡았다. 자금 부족으로 빵공장이 문을 닫게 되자 1928년 다시 명태동 광산으로 돌아가지만, 이번엔 동업자의 배신으로 끝났다.
인생 역전은 방치된 영평금광을 450원에 매입하면서 이뤄졌다. 1936년 영평금광은 연 생산액 40만원의 알짜 금광으로 자리잡았다. 규모가 더 큰 장진금광을 사들이면서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매각했다. 그즈음 고려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7년간 복역하고 막 출소한 이준열과 재회한다. 이준열의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37년 초 어스름이 밀려올 때, 얼어붙은 겨울의 한강 강변에서 남호와 송강, 허헌, 이성환, 이훈구, 정현모, 민정기, 이영조, 김용암, 박창식, 문원주, 한장경 등이 도원결의를 맺었다. 서로의 팔뚝을 맞대며 대동을 향한 새 출발을 약속한 것이다. 아름다운 동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김병로, 이인과 함께 3대 민족변호사였던 허헌은 대동사업체의 상임감사로 이종만의 의중을 대변했다. 그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복역했고, 해방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다. 대동농촌사의 기획을 맡았던 이훈구는 숭실전문학교 교수로서 농촌운동 지도자였다. 신간회 간부였던 정현모는 대동사업체의 경리를 담당했으며, 대동출판사의 주간을 맡았던 이관구 역시 신간회 정치부 간사를 맡았었다. 이성환은 약관의 나이에 농민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던 농업이론가였다. 대동사업체가 나아갈 길은 자명했다.
이종만에게 ‘대동’은 신념을 넘어서 하나의 신앙이었다. “모든 불평과 불행의 근원은 사심에서 시작된다.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의 활연한 심경에 이르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차이나 구분이 없이 다 같은 본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노동과 자본의 조화로운 협조 속에서 공존공영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것이 대동사상의 핵심이다.”(<대동일람> 서문) ‘대동’의 원전인 <예기> ‘예운편’은 그런 세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권력을 독점하는 자 없이 평등하며, 재화는 공유되고 생활이 보장되며, 각 개인이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 중국의 혁명가 캉유웨이나 쑨원이 꿈꾸던 이상사회였다. 이종만은 해방 후에도 대동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대동교학회(1948년)를 세운다.
1946년 5월 말 남한 최대의 탄광이었던 삼척탄광에서 노동쟁의가 벌어졌다. 노동자 자주관리제를 좌절시키려는 미군정청과 군정 대리인 하경용에 맞선 것이었다. 요구사항은 군정의 대리인 하경용을 철회할 것, 사장을 유임시킬 것, 임금이나 인사 등 결정사항을 승인할 것 등이었다. 당시 이 회사의 사장은 바로 이종만이었다. 그는 자주관리제를 통해 ‘대동’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도 실패했다. 결국 약삭빠른 자들의 모략으로 쫓겨난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다.
이종만은 1949년 월북한다. 당시 북한 정권은 새로운 대동 세상 건설을 호언하고 있었다. 그는 광업상 고문 등을 역임하며 새로운 도전을 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대동 세상과 거리가 멀다. 노동자나 농민의 이상향도 아니었다. 31번째 도전도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일하는 사람이 다 잘사는’ 이상에 모든 걸 바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이건 북이건 그의 아름다운 도전을 ‘헬조선’의 어둠을 밝힐 등불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이종만은 1977년 사망했다. 그는 기업가로는 유일하게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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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962.html#csidx65816bb14f33cd88d73e4db9e2991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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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
곽병찬의 향원익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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